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유엽의 계책을 토대로 승태는 군량을 대대적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는 한편, 조정에는 이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순심의 일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이는 마치 맹수에게 먹잇감을 던져서 정신을 빼앗은 후 길을 건너는 방법과 같았다. 게다가 조정의 고관대작들은 체면과 예의에 관련된 일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아주 적절한 처사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순욱 일파라 여겨지는 영천의 세력 내에서도 순심의 무례한 행동은 문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이니 말이다.
순욱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승태가 올린 조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 후, 자신의 앞에서 대역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순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흠, 어찌하여 조연께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순심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답답하다는 듯 바라본 순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물었다.
“지금 양주와 서주에서 많은 양의 양초가 바다를 건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혹여 조연께서 넌지시 언질을 준 것은 아니겠지요?”
그제야 순심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그저 승상의 명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왠지 수춘후가 임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아 수를 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 수춘후에게 어떠한 조언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저는 이제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순욱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심을 향하여 따끔하게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춘후를 회군시키면 아니 된다며 반대하던 순심인데, 명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직접 유주를 다녀오더니 원하는 바를 얻고 만 것이다.
아울러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노래를 불러 대던 것마저 이루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뛰어난 지략이 아닐 수 없었다.
“휴, 이런 일로 참형을 내릴 수는 없으니, 그저 관직을 내려놓고 잠시 쉬는 것으로 하지요. 아마 조정의 신료들도 그 정도면 만족할 것입니다.”
“거참, 다행입니다. 혹여나 곤장이나 맞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솔직히 승상께서 직접 등용한 인물들까지 이 일을 구실로 공세를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순심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어 보이자, 순욱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말로는 걱정했다 하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부럽기까지 한 그 모습에 순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과거, 패왕의 눈이 될 것이라는 어른들의 평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관직을 내려놓고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혹 장안에서 일을 돕는 건…….”
그러나 순욱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순심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 왔으니 당분간 일은 좀 내려 둘 생각입니다. 영천에 내려가 순가를 정비도 할 겸 아이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순욱은 순심이 먼저 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을 꺼내자, 딱히 나쁜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짐을 덜어 주겠다는 의도였으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직접 폐하와 백관들 앞에서 죄를 청하고 물러난다면, 성토하는 말은 잦아들 것입니다. 문제는 직접 모욕을 당한 수춘후인데… 비록 그 아이가 나서지는 않더라도 따르는 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것을 내주어야겠지요.”
순욱은 승태를 떠올리며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과거에는 자신이 나서서 보호를 자처했는데, 어느새 세력을 키워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순심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사과를 받지 아니하면 내 직접 수춘후를 찾아가 고개라도 숙이지요. 설마 그 아이가 그런 저를 내치기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천하태평 같은 순심의 모습에 순욱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님이 떠나시면 저는 언제 또 이렇게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승상께서 일을 너무 많이 하시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인재들도 많은데, 모든 것을 다 짊어질 필요는 없지요.”
“아직 사방에 역적들이 버티고 있는데, 어찌 편히 몸을 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형님도 잠시 몸을 회복하고 돌아오시지요. 제가…….”
그 순간, 순욱이 입을 다물고 가슴팍을 꾸욱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놀란 순심이 벌떡 일어나 다가가려 하자, 순욱은 손을 내밀어 만류했다. 그러고는 몇 번 숨을 들이켜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까지 걱정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순심에게 순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별일 아닙니다. 요사이에 잠을 많이 자지 못하여 이러는 것 같습니다.”
“흠, 정말 수춘에 한번 가 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수춘후 휘하에 유명한 의원들이 많다고 하니, 그들의 손을 빌리면 분명 좋은 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허도에 있는 의원들 또한 천하에서 손꼽히는 이들입니다.”
“그래도 양주에서 발생한 돌림병이나 여러 문제들을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고 하니, 확인이라도 할 겸 둘러보겠습니다. 그리하면 향후 형주를 토벌할 때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병을 다스리다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역병이라 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까지 보고가 아니 되었을 테지요.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분명 역병의 징후가 맞습니다.”
“흠, 그랬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분명 나중에 요긴한 도움이 될 테니 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순심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순욱은 그저 고운 손으로 차를 직접 따라 마시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 * *
유주 여양현은 승태의 원정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갑작스러운 선우보의 실각을 반대한다면서 이민족 부대들이 뭉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에 욕심이 있는 이들이 함께 가담하였다.
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 전예는 한낱 장수일 뿐이고, 선우은 또한 기병대장 정도로 여겨졌으니. 이는 다 선우보로 인해 그들의 능력이 가려진 탓이 컸다.
“도당(盜黨, 도적 무리)의 대장인 선우은과 전예를 죽이자!”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많은 수의 병사들이 현청을 향하여 우르르 움직였다. 그 모습에 여양현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들은 감히 막아설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자칫 잘못 나섰다가는 괜한 눈먼 칼에 찔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병사들을 이끄는 이 중 하나가 현청 앞에 멈춰 서서 큰 목소리로 외쳐 댔다.
“도당의 무리들은 어서 나와 죄를 청하여라!”
그자의 호령에 뒤따르던 병사들 역시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도당의 무리야, 어서 나와 죄를 청하여라!”
“직접 문을 열고 도당 대장의 목을 가져온 이는 죽이지 않으마!”
결국, 열기가 고조되자, 병사들은 이제 문을 부수기 위해 한 걸음씩 현청으로 다가갔고, 일부 인원은 담을 타 넘기 위해 사다리마저 준비했다.
그런 가운데 병사들을 이끄는 인물 중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만약 우리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모조리 역당이라 여겨 처단하겠다!”
한편, 갑주를 챙겨 입은 전예와 선우은, 그리고 염행이 바깥의 소란을 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우은은 이런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전예에게 물었다.
“분명 우리는 조정의 명을 받아서 자리에 오른 것 아닌가. 한데 누가 누구더러 역적이라 부르는지 모르겠군. 내 말이 틀렸는가?”
그러자 염행도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가 보면 진짜 우리가 역당들이라도 된 것 같겠습니다.”
“어차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댈 뿐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저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게 된다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테니 말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죄를 만든단 말입니까? 우리가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
“그야 하기 나름이지요. 가장 간단한 것은 북적과 내통했다 말을 꾸미는 것인데, 이미 죽은 우리가 무슨 항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요목조목 사리에 맞는 전예의 말에 선우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죽은 뒤에 죄를 뒤집어씌워 버리면 어찌 반박하겠는가.
조정에서는 멀리 떨어진 이곳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할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을 테니, 결국 조용히 덮이고 말 것이었다.
“그야 우리가 모두 죽었을 때 이야기이지. 사실 이런 난리가 나도록 불을 지핀 것이 자네인데, 저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경거망동해 나섰으니…….”
마치 불쌍하다는 듯 탄식하는 선우은의 말에 염행은 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너무 시간을 끌었다가 장 장군과 조 장군이 도착하면,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나쁜 것은 아니지요. 괜한 원망을 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에 염행은 고개를 돌려 사납게 전예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냥 문 닫고 기다리고만 있자는 말이오? 애써 준비한 궁병과 기마들은 쓰지 않고?”
“사실 지금 그들을 써 봐야 크게 효용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는지, 염행은 대꾸 없이 말에 올랐다. 전예는 그런 염행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조 장군께서 제 명에 따르라 명을 내리셨다는데, 아닙니까?”
순간, 정곡을 찔린 염행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조운이 모두가 듣는 앞에서 신신당부하며 그런 지시를 내렸으니,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저 빨리 나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뿐이네.”
“그러셨군요. 하지만 현청 안까지 들어오면 그때 북을 칠 테니, 너무 급하게 여기지 마시지요. 금방 현청의 외문(外門)이 열릴 테니 말입니다.”
염행은 전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좋아.”
“궁병들이 두어 차례 화살을 쏘아 낸 후에 들이치시면 됩니다. 그리하면 현청 안팎의 병사들 모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현청 문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우아아아아!”
그러자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함성은 이내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에 염행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창을 붙잡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본 선우은은 약간 걱정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저리 혼자 가게 두어도 되겠는가?”
전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이 말하길, 염행의 무예가 자신과 비견될 정도라고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긴 것이다.
“충분할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적에게는 지옥이 펼쳐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