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03
점차 쌓여가는 이야기는 쌓여간다. 여기서부터는 가끔 고삐를 틀어쥘 뿐 구태여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과한 통제는 역효과를 낳거나 밟힐 꼬리를 늘리기 때문이다.
물론, 뒷골목과 시장통, 그리고 술집과 밀회에서 오가는 소문은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장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모스크바를 지배해온 바실리 2세가 이 싸움에서 쉽게 밀릴 리가 없다.
…평소대로라면.
10여년 동안, 눈이 보이지 않는 대공을 보필하는 하인들에게는 이런저런 요령과 경험이 쌓였다.
큰 소리를 내어 대공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든가, 항상 올바른 자리까지 대공을 안내하고 눈앞의 풍경을 묘사해준다든가.
그들은 바실리의 신체 일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맹인공의 하인들은 잘 바뀌지 않았고, 바실리는 하인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목소리를 모조리 외울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화요일과 수요일마다 그를 시중드는 늙고 신실한 노인의 이름은 바짐(Вади́м)이었다.
“바짐? 세숫대야를 가져다주게.”
“전하, 삼촌은 감기로 몸이 좋지 않아 제가 대신 왔습니다.”
“바짐의 조카라면… 다닐인가?”
“맞습니다. 당분간 제가 대공 전하의 수발을 들려 합니다.”
바실리 2세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짐은 충직하나 늙은 종복이었고, 몸이 좋지 않아 가족들이 대신하는 일 또한 흔했기 때문이다. 조카가 온 것은 처음이지만.
“다닐? 일리야를 불러다 주고 좀 나가 있게나.”
“예, 주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일리야? 오늘은 크렘린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별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최근에 동방에서 넘어온 후추 시세가 화제가 되어….”
바실리는 가신의 보고에 그럭저럭 만족한 채 그를 방에서 내보냈다. 맹인공은 그의 약간 떨리는 목소리에 의아하였으나, 일리야의 목에 다닐의 단도가 겨눠져 있었음은 알지 못했다.
며칠 뒤부터 바실리는 일리야 또한 영영 만나지 못했으니 더 이상 중요한 바는 아니었지만.
바실리의 수족 노릇을 하던 이들이 차례차례 사라져 간다.
“…울리야?”
“울리야는 없습니다. 저는…”
“…빌어먹을.”
그리고 그 의미를 짐작하는 데 바실리 또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 셰먀킨이 그를 고립시키는 데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 들었을 뿐.
바짐은 살해당했는가?
울리야는 매수당한 것인가?
옐레나는 추방당하였나?
바실리는 그들의 운명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거동하려면, 정보들을 받아들이려면, 바로 사라진 그들의 수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잠시 외유를 나가려 한다.”
“지금 삭풍이 심하니 전하께서 돌아다니시면 건강에 좋지 않을 듯합니다.”
“네놈은 나의 종복일 뿐이다!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 의지에 따르는 게 네 의무다! 바짐이 그건 안 가르쳐주던가?”
그렇게 소리를 쳐도 누구 하나 눈앞의 무례한 시종을 제지하거나 징벌하러 달려오지 않을 때 바실리는 온전히 깨달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이 방에 갇혔다.
“오늘은 누워 계십시오. 이반 대공 전하께서도 전하의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다닐이 마침내 그의 앞에서 조롱하듯 이반 셰먀킨의 이름을 공공연히 언급하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뒤로 수일 동안 바실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정당한 대공은 유폐되었다. 자신의 도시, 자신의 성관,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둘러싸여서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익숙한 방, 익숙한 침대, 익숙한 바람 소리.
그러나 저 문밖에 서 있는 자는 낯설기 짝이 없는 사내들이다. 오랫동안 그의 몸 일부처럼 움직여 그의 잠을 깨우고 이부자리와 책상을 정리하던 시종들은 사라졌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수년간 바꾼 적 없는 이곳의 가구 배치를 이반 놈이 회담을 위해서라며 마음대로 움직여 놓았다는 사실.
그 사소한 침범이, 시종들의 죽음이나 목숨에 대한 위협보다도 더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더듬거리며 바실리 2세는 의자에 앉았다. 그를 안내하는 손길들은 거칠었다. 분명, 며칠간 제대로 씻거나 단장하지 못했으니 초라한 꼴일 터.
낯선 곳에 배치된 탁자 너머에서 비웃음이 들려오더니, 그 개자식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간 안락하셨소?”
“손이 주인을 대접하게 만들다니 예의가 아니군. 사죄하겠소.”
“당연하지만, 나는 모스크바의 대공이오. 불쾌하게도 그대와 그 지위를 나누고 있지만은. 나는 이 성의 주인이기도 하오.
…그리고 그대는 동료 대공에 대한 살해 미수 혐의로 이곳에 갇힌 것이오. 말을 조심하시오.”
“살해 미수라!”
“혐의는 이미 확정되었으니 더 이상의 변론은 필요 없소. 그대의 시종들 중 자백자가 있었고, 이미 형은 집행되었소.”
“공정하고 효율적인 심판이군. 그래, 나는 그대를 죽이려 하였소.”
바실리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이야기하다 뚝,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갑작스레 얼굴을 굳힌다.
“…네가 아장아장 더러운 바닥을 기어 다니며 네 아비를 닮은 역겨운 얼굴로 옹알거릴 때부터 그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네 아비가 독을 마시고 꺽꺽거리며 비참하게 죽어 갈 때 네놈 또한 죽였어야 했는데.”
“방금 이야기했듯, 혐의는 확정되었으니 증언은 고맙지만 불필요하오.”
“이제 나를 참수형에 처할 것이오? 나에 대한 그대의 증오심이 깊으니 사지를 찢어 죽일 수도 있겠소만.”
“그대가 방금 이야기하였듯, 나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심판자요. 나는 죄인에게 저지른 죄과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 않소.”
바실리의 위협 담긴 발언들에도 이반은 그저 담담히 발언을 이어 갈 뿐이다.
“나, 모스크바의 대공이자 릴스크와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의 공작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셰먀킨이 살해미수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소.
타루사(Тару́са), 칼루가(Калу́га) 등 서부 지역에서의 나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인정하시오. 공동 대공을 향한 살해 음모를 꾀했음을 시인하고 그 배상금으로써 은 1,500그리브나를 지불하시오.”
…뭐?
“…생각보다 관대하군. 그것도 자신을 살해하려 한 죄인에게 말이오.”
“나는 기독교인다운 관대함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오. 나는 아버지가 못 다하신 일을 여기서 끝마칠 수도 있었소. 오직 주님만이 죄인을 심판할 수 있다는 복음의 가르침을 되새겼을 뿐”
“총관부가 두려워서는 아니었소? 카간이 임명한 공동 대공을 살해한 반역자가 될까 봐?”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신실한 자의 두려움을 살 뿐도 오직 그분뿐이니….”
갑자기 수도승 흉내를 내는 꼴이 가증스럽고도 우습도다. 저 가슴속에 독사처럼 우글거릴 권력욕이 훤히 들여다 보이거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바실리는 의구심이 가시질 않는다.
분명, 총관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조치라 하더라도 여전히 ‘관대한’ 조약임에는 틀림없다. 이반 셰먀킨은 분명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다.
그가 얻지 못할 것은 바실리 자신의 목숨뿐, 이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여기서 물러난다니?
게다가 이반 셰먀킨 자신이 모스크바를 장악하고 바실리를 변방으로 내쫓는 게 아니라, 도리어 변방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해 달라 말한다.
그것도 제 아버지 대의 본거지인 우글리치와 갈리치가 있는 북동부가 아니라 서부에.
너무도 많은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앞으로 뭔가 커다란 사건의 포석이 되리라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등떠민다. 그에게 펜을 쥐여 주고, 서명을 하게 한다.
“…좋소. 주님의 이름 아래 두 영주가 명예를 걸고 조약을 체결하였소. 우리는 이를 죽음의 그날까지 존중하리라.”
이런저런 아름다운 말을 주워섬기며 이반 셰먀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하인 중 한 사람이 가로채듯 조약문을 가져갔고, 곧 방에는 바실리 혼자만이 남았다.
한참이 지났다.
“…옐레나? 파벨?”
대답이 없다. 대공은 이름 몇 개를 더 불러 본다.
“안톤! 바짐!”
“대공 전하, 옐레나나 바짐은 없습니다.”
“…나데즈다? 너 혼자만 남았나?”
“…그렇사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데즈다는 손을 떨며, 대공이 자신을 배신자라고, 이반 대공에게서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고 고래고래 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실리는 이렇게만 말했다.
“물 좀… 떠다 주게.”
나데즈다는 바실리를 위해 물을 떠 왔다.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그는 기나긴 한숨만을 쉴 뿐이었다. 마치 평생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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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죽은 듯 지내던 바실리는 하나둘 살아남은 시종들이 돌아오자 곧 아무 일도 없던 듯 집무를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반 셰먀킨의 살인적인 징세.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대공은 모스크바 인근에서 갑작스레 세율을 올린 뒤에 그를 거둬서 쟁여 두고 있습니다.
해당 영지들의 세율이 낮다 하여 몰려들었던 농민들과 상인들의 원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모인 재화를 당장 어딘가에 사용하는 기미는?”
“없습니다.”
이반 셰먀킨은 바실리를 구금한 동안 모스크바와 그 일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영역이든, 바실리의 영역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그 존재 자체가 재앙과 같은 메뚜기 떼처럼.
그때까지 모스크바의 소식이 레닌그라드에 닿았겠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루스뿐 아니라 유럽 어디서든 있을 법한 영주 간의 갈등이었으니까. 개입할 명분은 없다.
유달리 악의적으로 바실리의 세력을 무력화했다는 사실만 빼면.
“…몽골군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당장의 움직임은 없으나 모스크바로부터의 상납금이 늦어지고 있는 데 큰 불만을 가진 듯합니다. 서서히 모스크바 인근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은 분명합니다.”
“…저항할 수 있는 병력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현재는 자금도, 기사들도 충분치가 않사오니….”
모스크바의 상인들, 특히 유대인은 붙잡아서 금니까지 뽑혀 철저히 착취당했다.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하는 농민들에게는 그렇게 이빨이 빠져 피를 철철 흘리는 상인의 시체를 거리에 걸어 놓고 보여 주었다 한다.
이반이 풀어 낸 폴란드인 세금 징수인들에 의해 세간살이들이 수없이 부서지고 불태워졌다.
모스크바에서는 쥐새끼 한 마리라도 숨을 수 없다는 듯, 맘몬(Мамона, 물욕의 악마)이 모스크바를 다스리는 듯, 가혹한 갈취가 이어졌다.
이미 이전에 카간과의 전투에서 황폐화된 바, 이리 꼼꼼하고 빈틈없는 약탈까지 겪었으니….
“…이제 모스크바는 끝장이네.”
곧 상납금을 받지 못한 몽골군의 약탈까지 이어진다면 바실리는 영지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모스크바 대공이라는 권위는 그 이름만이 아름답게 남을 뿐, 한낱 농노조차도 비웃을 만큼 추락하리라.
대체 뭐 때문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셰먀킨, 그가 바란 것은 아버지 대에 그토록 바랐던 모스크바의 대공 위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스스로 모스크바의 숨줄을 끊어 놓고, 심지어 아버지의 영지와도 먼 서부로 떠나는 것은….
리투아니아와의 접경지로 떠나는 것은….
아.
바실리는 깨달았다. 이반 셰먀킨에게 반쪽짜리 대공 위와 조각난 모스크바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일지.
단 하나뿐이다. 온전한 대공 위와 더 거대한 모스크바.
에센과 그 대리자 총관이 지배하는 작금의 루스에서, 에센이 직접 반으로 나눈 대공 위를 합치고 총관부가 잘게 조갠 모스크바의 영역을 확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간단하다.
에센과 총관을 몰아내면 된다.
“…리투아니아와 힘을 합치고, 최대한 자금을 끌어모은 뒤 단번에 몰아치려면 모스크바의 힘을 죽여 놓아야 하고….”
“전하,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어차피 이반 셰먀킨의 의도를 벗어나는 행동은 할 수 없는 상황.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완전히 무력화된 지금의 상태에 안주한 채 이반 셰먀킨의 뜻대로 움직여 목숨과 지위를 유지할 것인가? 약탈이 끝나고 전쟁이 오기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이 ‘관대한 처분’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걸 잃을 각오를 무릅쓰고 총관에게 이 사실을….
“전하?”
바실리의 앞에서 가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반이 살려 놓고 간 가신. 즉, 이반이 포섭했을 자.
그에게 선택권은 없다.
“전하, 그렇다면 인근 농민에 대한 세율은….”
“낮추게. …다만 공동 대공의 의견을 물어봐 주게.”
…일단은 엎드린다. 총관부가 들고일어날 만큼 소란이 나고 전쟁으로 이어지면 불리한 것은 당장 세가 무력화된 바실리다.
바실리는 침묵을 택했다. 전쟁은 다가오리라.
…그리고 모든 권력이 거세된 대공이 다스리는 모스크바에는 저주가 내렸다.
타타르인들의 방화와 약탈이, 이미 재산이라고는 거적대기만 남은 영민들을 덮쳤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살아 숨쉴 수조차 없게 된 이들은 이 땅을 떠났다.
모스크바의 외곽으로. 타타르인들에게 영주가 죽어 이제는 총관의 직할령이 된 땅들로.
그곳에서 기다리던 김시습이 그들을 맞았다.
* * *
중년의 남자들이 말을 달린다. 그 뒤로 십수 명의 몽골인들이 마찬가지로 말등에 올라 뒤를 따른다.
전방에 선 6개의 눈이 다급히, 그리고 고통에 겨운 눈으로 무언가를 추적한다.
곧 세 명 중 가장 눈이 밝은 고르바초프가 외친다.
“텐드(тэнд, 저쪽이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에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른다. 수십 개의 말발굽이 방향을 바꿔 달음박질친다.
곧 익숙한 깃발들과 모피를 두른 말 위의 전사들이 눈에 띈다. 바토르스키가 그 깃발의 의미를 읽어 낸다.
“젠장, 주치인 울루스 쪽 병사들일세! 우리 말을 잘 들을지 모르겠구만….”
“조그스(Зогс, 중지)! 총관부에서 약탈 기한은 3일이다!”
아카토프가 외치니, 전사들이 고개를 돌린다. 곧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눈에 띄고 그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좁혀진다.
”노브쉬 게즈(Новш гэж, 젠장), 들켰다!”
“명을 어기는 자는 카간 폐하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무기를 버려라!”
아카토프는 구(舊)소련제 칼을 뽑아 든다. 조선에 온 지도 벌서 십수 년이 되어 가건만, 매일 신경 써서 관리한 덕에 칼날은 여전히 빛이 난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십수 명의 타타르 기사들이 함께 칼날을 드러내자, 약탈자들도 전투 태세를 갖춘다.
불탄 집들, 저들의 말등에 올라간 꾸러미들. 화재의 규모에 비해 전리품은 초라하다.
분풀이로 불을 지른 것은, 그저 분풀이였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