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09
멀리서 보면 그 모든, 피차 무관심해 뵈던 사람들이 저리 응집력 있게 모여 있었다. 서로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노동하고 생활하였다. 나름의 규칙과 질서 속에서 모두를 위하고 있었다.
그 거대하고 통일된 움직임 안에 속해 있다는 기분.
문득,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에 옆을 돌아보니 다른 조선인 대표들의 눈빛 또한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모두 한마음이었다.
거대한 공동체가, 서로를 알지 못함에도 서로를 위해 일하고 뭉칠 수 있는 공동체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
* * *
아무튼 그런 감상을 미뤄 두더라도, 시민으로서, 그것도 법 제정자로서 원산을 바라보자니 영 복잡하고 어지러운 동리였다.
10만 명이 살아가는 동네인데, 그 생활을 규율하는 법규만 곧 10만 개가 넘을 것만 같이 어려웠다.
“여러분들께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게는 입법권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민위원평의회의 업무를 보조함과 동시에 법률을 만드는 사람들이죠.”
“법도 무슨 공장처럼 뚝딱 여럿이서 만드는 거 아니오?
갖신을 만들면 정부에서 발주량 맞춰 제대로 나왔나, 아니면 품질이 떨어지지는 않나 확인하러 와서 도장 몇 개 찍고 가야만 신발이 팔리지 않소?”
“아, 최금옥 동지? 재밌는 비유로군요. 그리고 얼추 들어맞습니다. 방금 최금옥 동지가 제시한 예시에서 여러분이 그 감사원이라 생각하십시오. 사방에서 올라오는 요구들을 알맞게 가공하고, 또 가공이 제대로 되었는지 서로 확인해야 합니다.”
법학자인가 뭔가 하는 양반은 새 의원들을 위한 설명회에서 그리 말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연, 모든 직종이 중하다던 소련답게 고작 율관(律官)도 나랏일 도맡은 의원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며 감탄할 뿐이던 유자광은 어머니와 함께 밀려드는 업무량을 쳐 내면서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거 율관이 대접받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다!
말도 안 되게 복잡한 법률들, 세세한 조목들, 그리고 그를 적용하는 까다로운 조건들, 세칙들, 인민위원평의회의 시행령들.
그 복잡다난한 과정들을 살피고 공부하다 보면 알기 싫어도 원산이라는 공화국이 굴러가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고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것도 특히 어머니와 자신처럼 각계각층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피어난 샛별 정치인들이라면 더더욱, 그 업무량으로 쓸모를 증명해야 하기에.
그리고 실제로 ‘쓸모’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만큼 더욱 굴러다녀야 했다.
“어,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는….”
“어찌 말이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오? 그러니까 그 고성의 신발 공장은 우리가 빈 땅에다 대강 터 잡고 건물 지어 올렸을 뿐이오.
그 땅은 마땅히 나라님의 땅이니 원산 공화국 정부에 판 것은 단지 기자재뿐이오.”
“…아.”
지난 농업공장 건설을 위해 진행했던 토지 소유권 조사 이후 거의 10년,
그때 어느 정도 조선의 토지 제도에 대해 이해가 생겼다 싶던 구미인들은 다시금 세계관이 와장창 무너졌다.
“…어어? 최금옥 동지와 유자광 동지가 근대적 자본가가 아니고? 근대적 소유권 개념이란 게 등장조차 안 했… 나?”
“생각들 해 보십시오! 우리가 조선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연착륙시키려고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조선에서 지주라는 낱말은 원산에서 수입된 외국의 개념입니다!”
그때처럼 조선 땅에서 조선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최금옥과 유자광이라는 인재를 위시로 하여 소련과 조선의 재산권 문제를 정리하려던 이들은 크나큰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두 모자가 마주하게 된 사람이,
“…여기가 노동영웅 박금옥 동지의 저택이 맞소?”
“아…? 아! 예, 마, 맞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의원 도, 동지!”
“그대들을 만나 몹시 반가이 여기오. 우리의 만남이 상호 즐거움과 이익으로 돌아오길 바라겠소.”
스피리도노바였다.
* * *
“내가 바로 향민청 제조 김종직이라 하지 않았소? 내 앞에서 한번 말해 보시오. 대체 무어가 그대가 궁구해 낸 나라 위하는 옳은 방도이며 인군에 충성하는 바른 마음가짐인지?”
김종직이 몰아세우자 호기롭게 뛰쳐나왔던 무리의 지도자는 잠시 주춤하여 말을 잃는다.
김종직이 뒤늦게야 마주하고 만 저 의문스러운 군중들.
방금까지 완장을 차고 횃불을 든 채 이런저런 노랫가락을 부르며 행진하던 모습은, 언뜻 보면 무슨 운구 행렬이나 어느 총각 장가가는 것 같은 성대한 맛이 있었다. 촌부들 홀리기엔 제격이다.
아버지께서는 진즉 눈치를 채셨었다. 지난 수년간 경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거물이 되어 버린 아들자식 대신, 직접 이 선산에서 협동조합을 이끌며 느끼는 바가 있으셨던 것이다.
지방에서 움직이는 새로운 움직임, 그저 소란이나 발악이라고만 생각했던 대신파의 준동이 일으킨 거대한 효과.
‘…생각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대단한 사상적인 구심점이 없다 여겨 무시했거늘 큰코다치고야 말았다.
단단한 이론적 기초는 아직 없으나, 보수주의적 태도에, 적당히 사회주의에 온정적이고 유화적인 자세, 거기에 민족주의 감성을 더하니 꽤나 강력한 효과를 낳은 듯했다.
―“몇몇 협동조합에서는 향민계보다도 대신파에 정치적 후원을 넣는 경우가 있는 듯하더구나.”
‘이거, 조직의 뿌리부터 갉아먹히고 있었구만.’
아버지의 말씀을 뒤늦게 되새기고 나니 헛웃음이 나온다.
안 되지, 절대 안 된다.
이 얼마나 피땀으로 건설해 놓은 조직들인가? 궁벽한 농촌 살림을 그나마 봐줄 만큼은 번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유력자 모두가 사대부, 아니면 고려조의 호족이라 자부심에 가득한 토호들이던 마을들.
그 한 곳 한 곳마다 힘겹게 설립한 조합들이란 말이다. 그것도 약간 모자라지만 성실한 블레어 동지와 함께 발로 뛰면서!
“이걸 그대로 넘겨줄 성싶습니까? 천만의 말씀! 소생을 정치적으로 키워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도둑질은 아니되지요?”
마치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가 눈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김종직은 읊조린다.
무리의 지도자는 어느새 김종직의 혼잣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물러나서는, 옹색한 꼴이 되어 제 무리의 사람들과 속닥거리고만 있다. 기선 제압에는 성공한 듯하다.
여기에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곧 아버지 또한 몸소 왕림하여 크게 호통치신다.
“웬 소란이냐! 이곳은 마르크스 동지와 엥겔스 동지, 그리고 레닌 동지의 초상을 모신 거룩한 곳이다! 웬 잡배들이 와서 소란을 부릴 저잣거리가 아니란 말이다!”
“…자배(子培, 김숙자의 자) 선생 아니십니까?”
“그리고 너는 면상을 보아하니 개령의 조병태라는 자렷다?”
아마 저들도 이리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김숙자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부족한 머리들을 모아 무언가 궁리하던 그들은 결국 별수 없이 다시금 저 조병태라는 작자를 우두머리를 앞세워 김숙자에게 내보낸다.
“자네가 앞장서는 것을 보아하니, 이 무리가 요사이 소문도 지독한 개령 쪽 잡배들이 아닌가그려?”
“잡배들이라니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저희는 그저 올바른 학문을 권면하러 다니는 유생들일 뿐입니다.”
‘올바른 학문’을 권면한다라?
“남의 학당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농군들의 노동을 방해하니 이 어찌 잡배가 아닌가? 이미 그대들의 횡포가 이곳 선산을 물론이고 저 상주에 이르기까지 사방으로 소식이 뻗치었네!
선비가 되어 수신에 힘쓰지 아니하고 타향을 헐뜯으며 함께 인군을 섬기는 이들을 널리 모욕 주니 그 어찌 유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시정의 속된 소인 무리가 아닌가?”
김숙자가 조목조목 그들의 행적을 비난하니 더 이상 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우두머리 역 맡은 조병태가 목에 힘을 주고 받아친다.
“자배 선생, 그 말씀만은 말없이 듣고만 넘길 수가 없사옵니다! 감히 사과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과할 수 없네! 이곳은 아까도 이야기했듯 성현들을 흠숭하고 그 뜻을 이어 가는 곳일세! 그런 향민소의 앞에서 난동을 부리니 곧 성현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아니, 야은(冶隱, 길재의 호) 선생께 사사하신 분께서 저 서융(洋賊)의 한 필부를 성현이라 칭하시는 겁니까? 어찌….”
“네가 지금 마르크스 동지를 더러 서융의 필부라 하였느냐!”
김숙자 또한 눈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노기를 뿜어내며 외쳤다.
“성인께서도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 될 이가 있다.)이라 하였으니 어찌 유럽에는 스승 삼을 선비가 없으며, 개중 사물에 통달한 이론이 없겠는가!”
“‘스승 삼을 선비’에, ‘사물에 통달한 이론’이라 하셨습니까? 그런 자가 감히 무부무군(無父無君)한 공산 사회 따위를 입에 올리겠습니까?”
“자구 하나하나에 집착하여 다른 이를 깎아내리는 것이야말로 편벽된 선비의 습성이 아니더냐!”
김숙자는 마르크스를 폄하하는 말에 발빠르게 반론을 준비한다.
“마르크스 동지께서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Die Arbeiter haben kein Vaterland.)’ 하셨으며, ‘맹자’에서는 천하를 ‘하늘이 주고 백성이 준다(天與之人與之)’ 하였으니, 19세기 유럽에는 천하를 받을 이가 없던 것이 아니더냐?
19세기 유럽에 걸주(桀紂)와 같은 이는 있더라도 임금은 없었으니, 없는 임금을 없다 말한 마르크스 동지가 어찌 무부무군하다 할 수 있겠는가!
반면 금상께서는 작금에 원산과의 우호를 두터이 하여 사방 수천 리를 평안케 하시고, 역적 유(瑈)를 베어 사직을 바로잡으셨다!
전하께옵서 몸소 향민계의 현판을 쓰시고, 농업공장에는 소비에트들을 건설하라 이르시니 해동 땅에 요순이 돌아올 듯, 공산 사회가 도래할 듯하지 않더냐?
감히 전하를 1848년 혁명을 짓밟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1795~1861), 프로이센 왕국의 6대 국왕)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Николай I(1796~1855), 러시아 제국의 11대 황제)에 비하느냐!”
이 말을 듣고는 갑자기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양, 조병태는 잠시 멍청하니 서서 말을 버벅댄다.
“…푸로센? 푸리… 니콜… 뭐라 하시는지….”
“하하하! 무식한 촌부는 1848년의 혁명 또한 모르는 모양이군!”
“김숙자 동지의 말이 백번은 옳소!”
“진정 무부무군한 자가 누구고, 진정 불충한 자가 누구더냐!“
김숙자가 기관총처럼 쏘아 올린 유럽의 역사에 혀가 꼬이고 정신이 혼미해진 조병태가 머뭇거리자, 곧바로 그와 ‘민련’의 연맹원들을 둘러싼 이들의 조소와 야유가 이어진다.
당연하지만 선비라 자칭하는 자가 1848년 혁명도 모른다면 수모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
“아버지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면 그대는 알지도 못하는 바에 대해 무부무군이니 삿된 소리니 떠들었다는 말인가?
군자는 알지 못하는 바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다만 궁리할 뿐이거늘, 네가 어찌 제대로 된 유자라 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김종직의 일갈이 이어지고 주위의 조롱 섞인 반응들이 쏟아지니 곧 자신만만하게 깃발 휘날리던 무리는 민망함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나둘씩 군중 속에서 빠져나가 선산 바깥으로 멀리 도망할 뿐이었다.
마침내 삿된 무리의 뒤통수 하나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왁자하게 모였던 동리 사람들 또한 차츰 각자의 집으로 저녁밥을 먹으러 흩어진다.
상황이 정리됨을 확인하고, 격론에 기력을 깨나 쏟았던 모양인지 김숙자는 비틀거리다 향민소 마루에 걸터앉는다. 김종직은 아버지가 넘어지기라도 할세라 옆에서 부축한다.
“…종직아, 우리가 이야기 나눌 거리가 많을 듯하다.”
“…예, 아버지.”
두 사람은, 이제 텅 빈 향민소 앞마당을 내다본다.
수십 수백의 발자국만이 방금의 난리가 꿈이 아니었다 증명하는 듯 지면에 남아 꿈틀대고 있었다.
* * *
“의원 동지께서 어찌 이리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오시고….”
“부디 긴장을 푸시길. 최금옥 동지께서도 나와 같은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 의원이 아니오?
…그리고 ‘누추한 곳’치고는 꽤나, 화려해 보이오.”
현란한 색깔로 칠해진 단청, 비단에 금가루로 그린 불화 액자를 잠시 올려다보던 스피리도노바는 그렇게 말하며 섬돌을 밟고 신을 벗는다.
세심하게도, 모자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구두를 신고 왔다.
“어,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고맙소, 유자광 동지. 그대의 환대에 감사하오.”
그리 얼떨떨한 응대를 마치고 손님을 응접실로 들인 뒤, 곧 두 사람은 스피리도노바와 마주 앉는다.
“이는 내 소소한 성의 표시라 여기고 받아 주시오.”
스피리도노바가 들고 온 보자기에서 꺼낸 것은 코발트빛의 기하학적 패턴이 그려져 있고, 뚜껑부터 받침까지 곳곳이 도금된 티 세트다.
“러시아 제국산이오. 로모노소프(Ломоносов) 제품이지.”
다시 어안이 벙벙해진 모자가 그 선물을 받아 들지도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있자, 스피리도노바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도자기를 탁자 한쪽으로 치운다.
스피리도노바.
듣기로는 소련의 집권자가 될 뻔한 인물이라 한다. 최금옥과 유자광이 원산에 자리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으로 떠받드는 이들이 많아 이름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가 며칠 전 갑작스레 방문을 요청했으니 그 뒤로 대청소를 하니 뭐니 수선을 떤 것이고.
소문 듣기로는 장정 여럿 쏴 죽인 무시무시한 용사라 들었건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은 그저 눈빛이 조금 형형할 뿐 평범하게 깡마른 노년의 여성이다.
“여러분의 혁혁한 공로에 대해서는 들어온 바가 많소. 원산과 인근의 엉망진창으로 엉킨 토지 소유권을 아주 완벽하게, 정리해 놓았다고.”
“과찬이십니다. 짧은 말재주로 혹여나 이런저런 중요한 문제를 망쳐 놓고 소련 정부에 누를 끼치지 않았을지 걱정될 뿐입니다.”
“겸손해하실 필요 없소. 겸손을 교만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업적들을 세우셨으니. 그대들 덕에 농업공장 재정비에 들어갈 예산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소.”
이건 또 무슨 뜻이냐?
1. 땅 안 팔고 버티는 지주 놈들, 피곤하게 구네….
2. 최금옥 동지가 조선 땅은 전부 왕 소유라는데요?
3. “즈어어언하아아아, 저어기 역적 패당들이 감히 최우방국에 땅을 팔지 않아서어어어어!”
4. ???
5. 해결!
그렇다. 왕토 사상이란 절세의 명검을 소련 정부에 쥐여 준 바, 마이어가 한양으로 몸소 나아가 동족 토목 광인 김명민과 함께 칼춤으로 왈츠를 출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덜 버텼어도 시세의 몇 배에 달하는 은괴를 손에 쥐었을 조선의 토호들은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역적 대신 호구가 되는 편을 택했다. 역시 전제 군주 이홍위, 성능이 확실하다.
“어찌 되었건 또다시 소련 정부는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유자광 동지는 이해가 어려운 모양이군. 혹시 이번에 내가 맡게 될 직책이 무엇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소?”
“이래 봬도 의원 보좌관이니 미리 숙지해 두었습니다. 제2 외무인민위원 아닙니까?”
대강 소련의 세계 전략이 그 윤곽을 드러내니, 임시 기구나 소규모 부처 따위가 감당할 만한 규모가 도저히 아니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지역의 외교 정책은 기존의 제1 외무인민위원회가 담당하며, 이번에 스피리도노바가 부임하게 될 신설 제2 외무인민위원회가 그 사업을 도맡게 된 것이다.
헌데 대관절 토지 소유권 정리와 세계 전략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앞으로 우리가 가게 될 곳들을 생각해 보면, 유럽을 제하고는… 아니, 유럽조차도 토지 등의 소유 제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이할 수밖에 없소.”
그러나 세계 곳곳에 증기선을 위한 저탄소를 짓든, 범선을 통하더라도 중간 기착지를 건설하든, 결국 어딘가는 땅을 얻어서 항만과 기반 시설을 건설해야 하리라.
“적어도… 의용군 출신들과는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생각했소. 근대의 유럽인들만 모여 배를 타고 바보처럼 떠돌다 세계 곳곳에 항구를 건설한다?
그렇게 시작된 재앙은 이미 수 세기 동안 보았소.”
“…그렇군요.”
“우리가 갈 곳들은 20세기 유럽과도, 15세기 조선과도 다를 세계이겠으나 적어도 둘 이상의 시선으로 본다면 오차 또한 줄어들 것이라 생각하오.
그러니, 혹시 여력이 있다면 힘을 보태 줄 수 있겠소?”
스피리도노바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두 사람은 순간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본다. 유자광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머리로 굴려 보다, 눈짓으로 어머니께 결정권을 위임하리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분명, 데려갈 수 있는 조선인은 많다. 물론 한 번 고문으로 두 사람이 활약했으니 기왕이면 경력직 뽑는다는 심정으로 최금옥 모자를 찾아왔을 수도 있겠다만은….
나름 잔뼈 굵은 거물 정치인이 그것만을 위해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저 호화로운 도자기를 선물로 바리바리 싸 들고서 직접 왕림한다?
자신과 어머니라는 정치적 샛별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으리라.
“…저로서는 힘들겠습니다. 누군가는 공장을 꾸준히 관리해야 하고, 저는 제 사업을 관리해야 하니 함부로 원산을 떠나기는 어렵습니다.”
“아….”
그러니 스피리도노바 동지가 어머니의 대답에 저리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고.
역시 어머니는 정치 욕심이 없이 사업에만 집중하실 분이기는….
“다만 제 아들은 가능할 듯합니다. 마침 제 고향 벗들도 원산으로 와서 제 일을 거들고 싶다고들 하니 이 미욱한 아들아이 견문도 넓혀 줄 겸하여….”
…어라?
“아! 훌륭한 판단이오! 조국을 위해 이리 헌신하다니 진정 애국자요! 게다가 아들의 미래까지 신경 쓰다니 아름다운 모성이구려!”
어… 어어?
급히 유자광이 어머니를 돌아 보니, 어머니… 아니, 제1 제화공 소비에트 대표 최금옥 동지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빛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애초에 정치적 욕심이 없다면 트로츠키 동지의 권유를 정중히 물리치면 그만이었으며, 토지 소유권 정리니 뭐니 할 때 고문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할 수 있었으리라.
그때마다 묘하게 정력적이던 어머니를 보곤 ‘역시 조국에 헌신적이시다!’ 하고 말았던 멍청한 유자광은,
‘아들아, 나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희생되거라.’
지금 어머니의 정치적 미래와 예쁜 도자기 세트에 돼지처럼 팔아 넘겨지고 있다.
“저, 저기 원산에서의 일이….”
“허나 유자광 동지의 의사도 물어야 하지 않겠소?”
“제 말이….”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고난한 세월이 몇 해나 됩니다. 이 하나뿐인 아들자식과는 눈만 서로 마주 보아도 뜻이 통합니다.
한 번도 이 못난 어미 가슴에 못 박아 본 적 없고, 말 한 번 거스른 적 없는 순한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니, 자광아?
유자광의 입을 막는 최금옥과 스피리도노바는, 마치 서로 수십 년 사귀어 온 연인들마냥 죽이 잘 맞았다.
유자광은 이제 자유의 몸이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