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1
또한 반대로,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난 고향조차도 버렸네.
민족주의는 열병과도 같네. 결코 용인되어선 안 될 것이야. 민족주의를 선동한 우두머리들은 죽이고, 나머지는 자치권을 박탈하게.’
‘그래도 그들을 모두 죽일 순 없어.’
‘어째서지, 트로츠키 동지?’
‘저들은 하나하나가 소중한 인력일세. 그것도 15,000명밖에 되지 않는.
그 안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간, 죽는 것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겠지. 그러면? 중세 조선 땅에 20세기의 총기를 지닌 무질서한 잉글랜드인 도적떼가 창궐할 걸세.’
‘그거 문제로군···. 아,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스탈린이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이번엔 매우 괜찮은 제안이 나왔다.
상상 속 스탈린의 조언을 차근차근 곱씹던 트로츠키는 곧 결정을 내렸다.
트로츠키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하자, 서기는 그에게 말할 시간을 허락했다.
마침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을 그냥 프랑스어권의 지도 하에 놓자는 기상천외한 결정이 이뤄질 뻔하던 참이었다. 회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도 손쓸 방도를 못 찾던 이들은 트로츠키에게 뾰족한 수라도 있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대부분의 동의를 얻고, 트로츠키의 제안은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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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SS 게르마닉 호 3층 갑판의 휴게실.
트로츠키는 아주 오랜만에 쏟아지는 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근대문물이 흥청망청 쏟아지는 파리에 머물다 보니, 인공광에 방해받지 않고 명멸하는 별들을 본 지가 아주 오랜만이었다.
별빛을 빼앗아 지상을 밝힐 조명이 없는 이곳. 근대의 숨결이 아직 닿지 않은 중세의 땅.
아주 오래 전, 시린 겨울바람을 폐에 밀어넣고 쏘다니던 러시아의 황량한 벌판이 떠오르게 만드는 하늘이다. 그 광활한 미개지···탁 트인 채로 멍청히 지상의 벌레들을 내다보는 무심한 하늘···.
곧 감상적인 기분을 깨뜨리는 걸음걸이가 다가오자, 트로츠키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밥 에드워즈는 멀뚱멀뚱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그런···.”
밥 에드워즈가 퉁명스럽게 말을 꺼내다가 입을 닫았다. 트로츠키는 뒤의 말을 충분히 짐작했다.
‘그런 모욕을 주고서?’
우스운 일이다. 고작 모욕 정도로 봐주었는데 자비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일단 앉게나.”
그러나 트로츠키는 내색 없이 찻잔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도 러시아인이었고, 홍차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었다. 이제 쟁여 놓은 찻잎도 거의 떨어져가기에 이게 마지막 잔일 수도 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 지도부 회의 결과는 아직 공표되지 않았지. 아마 모레쯤 지나서야 이뤄질 것일세. 다들 새로운 조직개편에 바빠서 말이지.”
“또···조직개편입니까?”
초반에 약간 반항적으로 굴던 에드워즈는 어느새 유순해진 말투로 트로츠키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공표되려면 한참 남은 회의 결과를 자신에게만 따로 전해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에드워즈는 트로츠키의 속내를 추측하느라 골똘한 표정이었다.
“확실하게 말하겠네. 나는 자네들을 버렸네. 독립노동당, 사회주의노동자당, 그 외 잔챙이 모두.”
역시나 잔인한 통보. 그러나 트로츠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자네들에게 특혜를 줄 생각이 전혀 없네. 나의 위세를 빌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패권을 쥔다는 가당찮은 생각은 버리게. 다만
자네들이 아니라 ‘자네’에겐 다른 기회를 주겠네.”
트로츠키의 눈빛이 바뀌었고, 밥 에드워즈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늘 회의에서도 별 쓸데없는 사항들을 다양하게 논의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만 추려서 얘기해주지. 일단, 언어권 별로 나눠진 조직체계를 다시 세분화했네.
프랑스어권 소비에트 제1분과, 프랑스어권 소비에트 2분과··· 뭐 이런 식으로. 분류 기준은 무작위로 정하기로 했네. 그것 때문에 공표에 시간이 들게 되었지.”
“그러면 기존의 지도부들이 반발했을 텐데요?”
트로츠키가 어깨를 으쓱한다.
“폴란드어권보다 프랑스어권의 인구 수가 몇 배이네.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고려라는 식으로 밀고 나갔더니, 인구가 적은 언어권들은 조직재편의 영향이 적으니 찬성했네.
인구가 많은 언어권들도 자신들의 발언권을 늘릴 기회라 여겼는지 찬성했고.
이것도 미봉책일세. 자네들 덕에 민족적 구분 방식은 장기적으로 아주 해체해버려야 한다는 계획이 나왔지. 이번 개편도 그 과정일 뿐이고.
다만 이 과도기적 편성 과정에서도 민족 구성을 뿔뿔이 흩어 놓기로 했네. 특히 영어권은,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을 사방팔방으로 분산시키는 데 모두 합의했네.”
마지막 문장에 에드워즈는 신음성을 흘렸다.
이것이 결론이라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조직적 역량이 조각조각 쪼개져버리는 최악의 사태. 물론 트로츠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대신, 자네는 영어권 1분과의 지휘관을 맡게 될 걸세. 내가 힘써 보지.”
결국 결론이란 이것이다. 에드워즈는 서서히 고민이 머릿속에 차오르는 듯, 입술을 지긋이 다물고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분쇄할 것이다. 대신, 에드워즈 혼자만 챙겨줄 테니 그들을 제어하라.
거래인가? 아니다. 이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분쇄는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에드워즈의 선택지는 하나.
“···알겠습니다.”
지난 사태에서도 총대를 메고 트로츠키에게 들이받은 에드워즈였다. 그런 그가 트로츠키에게 붙어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한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도 흔들릴 것이고.
이제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끔 잘 관리하는 것이 그의 남은 일이었다.
다소 안도한, 그러나 씁쓸한 차 맛을 머금은 표정으로 에드워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그래도 같이 담배 하나 정도는 태우고 가지 않겠나?”
“됐습니다. 맡기신 일도··· 이미 막중하니.”
터덜터덜 걸어 돌아가는 에드워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트로츠키는 다시 이 낯설고도 친숙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백 년을 뛰어넘었는데도, 이 얼마나 변함없이 무정한 하늘인가.
///
“어찌 이리도 흉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장계를 읽은 어린 왕 이홍위는 아직 작고 어린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색목인 기백 명이 원산현에 들어와 호장 김밀을 죽이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다는 소식에 덕원부사 조희선에게 팔백의 병졸을 주어 평정하라 일렀으나, 팔백이 모조리 죽거나 다쳐 적들에 수중에 떨어지거나 겨우 도망쳐 꾀죄죄한 꼴로 감영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니 (···) 신의 부덕함과 무지함에서 나온 소치이옵니다. 부디 신을 백번 고쳐 죽여주시옵고···
그 너머로는 마음이 어지러워져 쉬이 읽을 수 없었다.
장계에 따르면 색목인들은 거의 죽이지 못하고 아국의 병사들만 거의 죽었다는 소식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이후에 척후를 통해 둘러본 결과, 수백이 아니라 수천은 족히 넘을 수의 색목인들이 상륙해 촌락을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의 강역을 잠시 약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붙박고 있으려는 속셈인가? 그렇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경들은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아직 친정을 하기에 어린 왕의 앞에는 삼정승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모여 주상에게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이미 파천(播遷)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으나, 막 즉위한 연소한 군왕에 대군들의 세가 강성한 상태. 그 권위 훼손을 걱정하여 다들 신중론을 펼쳤다. 우선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강도(江都, 강화도)로 향하게 하였을 뿐. 본격적인 피난은 우선 채비만 해두고 사세를 지켜보기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제는 토벌을 논할 차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들이 만일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니라 이 땅에 몸을 붙이고 정착을 하기를 꾀하는 것이라면 복속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지금에 와서 목민관을 죽이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려 국법을 범하고 있사오니 마땅히 무(武)로서 제압하여 지방을 평안케 함이 옳은 방책으로 보입니다.”
영의정 황보인이 먼저 아뢰자, 다른 대신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저들에게 화약무기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소.
또한 800여 명의 병졸들로도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적도들의 수효가 수 천에 달한다니 평정코자 하려면 족히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어야 겨우 당해낼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참으로 옳사옵니다. 그러나 함길도의 익속군(조선 초기 함길도에 배치된 병력)이 4000여 명에 불과하니, 믿음직한 장수에게 따로 군사를 주어 출병케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우상(右相)의 말이 맞사옵니다. 마땅한 이를 골라 출병토록 하여 적도에 맞서게 하소서.”
우의정 김종서의 말에 정분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국왕 이홍위가 답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진정 그리하다면, 내 아직 나이 어리고 국정에 어두워 경들의 천거에 맡기고자 하오.”
열두 살의 머리통. 익선관의 무게중심이 잘 맞지 않아 조금씩 흘러내리는 작은 머리통.
그 머리통 속에 조선의 복잡한 관제와 인력 동향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하여 ‘내가 어려서 모든 큰 일은 정부와 의논하겠다’라고 교서를 내린 것이 바로 며칠 전. 설령 자신에게 염두에 두는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지금도 저렇게,
“그렇다면 저희가 미리 더불어 논하여 점찍은 이가 있사오니···.”
이미 결정되어 있던 바를 통보하여 오지 않는가?
“그가 누구인가?
“우찬성 겸 판병조사 이양입니다.”
하령군 이양.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의 손자이자 왕자의 난에서 태종대왕을 도운 완천군의 장남.
그런 누대에 걸친 혁혁한 공로 덕에 호군에 제수되어 김종서와 함께 이런저런 공을 세운 노장.
의주목사, 경상좌도절제사 등등 이런저런 관직을 맡아 실무경험도 출중하고, 막 예순에 접어든 중량감 있는 인사다. 자기 사람을 먼저 챙기면서도 적당한 사람을 골라 올리려던, 대신들의 깔끔한 일처리였다.
또한 종친 중에서도 이름 높고 영향력 있는 이양을 천거함은, 역시 야심가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한 수. 종친들이 감히 그들의 세력에 가담하기 어렵도록 훼방을 놓는 수단이었다.
물론 이러한 복잡한 계산들이 ‘이양’이라는 두 글자 속에 꾹꾹 눌러 담겨 있음을 당연히 주상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문장,
“경들의 뜻대로 하시오.”
이 한 문장을 대신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 사실만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
이튿날 함길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의 4도 병마도통사로 임명된 이양이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빠져나갔다. 우참찬 허후가 부사(副使)로 함께 파견되었다.
목적지는 철령.
“적도들은 다른 곳을 벗어나지 않고 덕원 인근에 머무르며 눌러 앉았다. 우선 우리가 철령으로 향하여 적도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견제할 것이나, 본격적인 공세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동원된 군세가 모였을 때 단숨에 몰아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월 말, 양력으로는 6월 중순을 지나가는 바람이 군막의 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선선한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다가오면서 습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양이 서두를 떼자 본격적으로 의견이 쏟아졌다.
그렇게 회의가 이어지고, 군관 중 하나가 쓸모 있는 말을 꺼냈다.
“적도들에게 총통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사온데 이에 대해선 방패를 세 겹씩 두르고 조심스레 전진하며 총통을 쏘는 것이 옳은 방책일 듯합니다.”
“그러하네. 지금 휘하의 3000명은 어디까지나 선발대로서 적도들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급파한 것이네.
다들 800여명의 함길도 병졸들이 순식간에 사멸되었음을 염두에 두게. 결코 병사를 헛되이 나누어 진격해서는 아니 되네. 적들은 총통을 지녔으며, 그 수효가 수천이고, 한 곳에 방비하여 눌러 앉아 있으니 마땅히 대군과 우월한 병기로서 압도하여야 할 것이야.”
우월한 병기.
그렇다, 우월한 병기. 조선은 건국 이래 화약 무기에서 관심을 놓은 적이 없었다. 태조대왕께서 창업하실 적에 여진족의 도움을 받았던 만큼, 조선은 북방민족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야인들의 기병을 파할 때는 반드시 화력이 받쳐주어야 하는 법.
그리하여 누대에 걸친 노력의 결과, 지금에 와서 조선 당국은 중국만큼이나 우월한 화약무기들을 갖추고 있다 자신하고 있었다.
적도들에게 총통이 쥐어져 있다 한들 병졸들의 수효에는 한계가 있고 어디선가 양질의 염초와 유황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아닐 터. 오랜 기간 쌓여온 조선의 화력을 결코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급할 것 없다. 신중히 둘러싸고 죽여 나가면 어느샌가 적괴는 토멸되거나 항복할 것이니···.
토벌이 끝나면, 다음 정승 자리가 이양의 것이 되는 것도 가능하겠다.
그런 생각에도 이양의 마음은 크게 들뜨지 않았다. 직책과 품계는 때가 되면 오르고 내리는 법.
오로지 지금의 할 일에 집중할 뿐이다.
“그럼 슬슬 다시 출발할 채비를 하지.”
그렇게 천막들이 걷히고 다시 병졸들이 움직였다.
원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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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깨우는 폭탄 굉음 (2)
“만약에 말이오.”
트로츠키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여러분이 동양 어느 왕조의 지배자들이라면 이 갑작스러운 외침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갑작스러운 외침’. 이 말은 트로츠키와 의용군의 도래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본 표현이다.
“아마··· 도적떼 정도 아니겠습니까?”
이전의 김밀의 저택에서 여러 행정서류들을 뒤져봤을 때를 기억하고 메리먼이 말했다.
‘도적떼’. 김밀은 그렇게 썼다.
이 말은 트로츠키와 의용군의 도래를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표현이다.
“정확하오.” 트로츠키가 메리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한 번의 ‘토벌’이 실패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뭐겠소?”
“음··· 다시 돌아오겠죠?”
“그것도 아마 전력을 다해서 올 것이오. 그 ‘도적떼’에게 영토 일부를 완전히 빼앗기게 된 상황에서는.”
그 말을 듣고 지도자 회의의 참석자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전근대 왕조라도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아마 수만에 달할 것이다. 그것도 시기에 따라서는 저들에게 화약무기까지 있을지 모른다.
지난번처럼 간단하게 이겨낼 수 있을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탄약공장도 무엇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은 매우 늘어난 상황이죠.”
프랑스어권 3분과 지휘관을 맡은 조지프 푸츠가 말했다. 아니, 말이라기엔 한숨에 가까울 정도로 걱정에 찬 어조였다.
아마 정황상 지방관으로 보이는 이를 생포한 뒤로 곧 트로츠키를 비롯한 지도부는 자신들이 근방에서 조선왕국의 군사적, 행정적 기반을 말소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원산을 빙 둘러싼 지역의 지방관들이 죽거나 사로잡혀버리니 주위는 완전한 공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15,000명에 달하는 거대한 인원을 좁은 어촌에만 수용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레 세력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통제하는 지역의 면적은 이미 두 배 정도로, 보살피는 인구도 수 천으로 늘어나 버렸다.
그러나 이들의 탄창은 무한대가 아니고, 총알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수만의 병사들이 몰려온다면, 그들에게 수만 발의 총알을 먹여주게 될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근대의 총알 한 발 한 발이 너무나 귀중했다.
이미 훈련에서 실탄을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사치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물론 근대와 전근대의 군사력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이들 중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희생이 없는 승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하지 못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요충지마다 경계를 세우고 기관총 포좌를 설치하는 게 다겠군요.”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더 이상의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정말로, 저것 이상으로는 군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
어디까지나, 군사적으로는.
트로츠키는 석연치 않은 듯 시선을 좌우로 움직여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 그게 전부겠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있을 터인데?”
다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얇은 책자 하나를 빼들어 탁자 위로 던졌다. 모두가 표지의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공산당 선언.
“신념. 총알보다 강한 무기.”
트로츠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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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프 동지?”
“아, 에릭!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이거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뇨아뇨. 회의가 끝나서 막 도착한 참입니다. 미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사실 회의가 끝난 지는 꽤 되었고 에릭 블레어 자신이 바빌로프의 임시 연구소에 도착한 지도 꽤 되었지만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