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55
“그러면 떡과 청주는 매 기도마다 먹습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날짜에 먹거나, 오늘처럼 귀빈분께서 찾아오신 날에, 사찰과 종단 전체에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을 때 먹습니다.
떡은 노동자의 노동하는 육체와 과학적 사회주의의 실체성을 상징합니다. 청주는 노동자의 열정과 더불어 증발하고, 섞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의 변증법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아마 신도에 대한 규제와 조직적 통합만을 위하여 갖은 의례들을 가져온 결과가 바로 이 기묘한 문화일 테다. 게다가 전란으로 이런저런 백성들이 굶주리는 차에 떡과 술을 주니 얼마나 고마울까?
나는 기묘하고 엄숙하고 복잡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역사가 극히 짧고, 다양한 근원의 문화와 의식을 모자이크처럼 조합해 붉은 덧칠을 한 놀라운 문화적 산물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그를 설계한 마극종 지도부의 목적과 기원을 추측해 보고 싶었다.
헌데 나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회합을 주관하던 젊은 선사가 내게 다가왔다.
“이 모든 것이 이상해 보일 줄을 압니다. 특히 원산에서 오신 분들께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지극히 흥미로웠습니다. 익숙한 문화적 요소들이 완전히 낯선 곳들에 배치되어 낯선 기능을 하니 놀랍더군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일상을 뜯어보게 됩니다.”
나는 순전한 경이감으로 그에게 말했다. 문득 나의 인류학자와 종교학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이제 30만 명에 도달해 가는 원산의 인구에서 이런저런 분야의 학자들을 모두 모아도 그 수는 수백에서 수천이 채 안 되었기에 학문 공동체는 작고 조밀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인식에 대해 승려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정말 송구합니다만, 우리의 제례는 미약하디 미약합니다. 분석되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신도들이 나간 뒤라 그의 말투는 보다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약합니다. 홀로 있으면 탄압을 이길 수 없습니다. 허나 공동체는 강하고, 공동체는 승리합니다. 교종 렌뇨 동지께서 우릴 이끄시니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허나 공동체는 파헤쳐지고, 분석되고, 엄밀해지면 그 힘을 잃습니다. 저희로서는 아직 학문이라는 예리한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커다란 고름을 짜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쯤 되자 나는 마극종이 철학적인 사상이자 이념을 위한 조직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극종은 놀랍게도 렌뇨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 그 성격이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었다. 아니, 이 종교는 스스로 꿈틀거리며 변화하고 발전했다!
나는 이들이 다스리게 된 일본의 모습이 어떨지 그 앞날이 너무도 궁금했다.
아무튼 의례를 마치자 우리는 이런저런 환대와 환영을 받은 채 선내에 꾸려진 사원을 나섰다.
“…호오? 불교도 아니고, 성서의 백성도 아니고….”
이쯤 되자 툰 페락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기기묘묘한 것을 보게 되었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마극종에서 제공한 이런저런 향응을 받고 나서 우리는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향내가 나는 조용한 공간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노곤해진 우리는 잠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나는 나의 객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것은 놀랍게도 나를 향하여 이미 드막으로 보내져 있던 바빌로프 선생님의 편지였다! 선생께서는 그 특유의 현철함으로 내가 해적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리하여 드막에 엥겔스 호가 입항할 가능성 역시 아주 높다는 것을 예측하고 계셨던 것이다!
―“친애하는 위니(Winny, 윈스턴의 애칭)에게.”
부드러운 필치로 쓰인 나의 이름을 바라보자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은사님께서 재빠른 연락선이 엥겔스 호보다 드막에 먼저 닿으리라는 사실을 예측하시고, 나의 답신이 미처 오기도 전에 이동하는 내게 먼저 보내신 편지라니.
겉봉을 편지 칼로 뜯고 나자 툭, 하고 마치 광장 바닥에 내려앉는 비둘기처럼 하얀 편지지가 나의 책상에 떨어졌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승님과 나의 사사롭고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의 내용들은 대부분 생략하여 기재했으니 독자 제현들께서는 타인의 비밀을 들춰 보는 것이 아니냐는 부도덕함에 대한 가책이나 죄악감을 느낄 필요 없이 내용을 살펴보실 수 있으리라.
“나의 편지가 자네보다 드막에 먼저 닿았기를 바라네. 그러지 않으면 내가 한 줄 한 줄 써낸 이 아이가 ‘계류’라고 큼지막히 쓰인 양철통에 담겨 쓸쓸히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버려질 테니 말이야.
물론 그러한 위험성을 고려하여 나는 이미 이와 비슷한 편지의 내용을 드막, 디에고 가르시아, 레위니옹에 보내 놓았네. 그러면 자네는 마치 내가 자네보다 앞서 모리셔스로의 항해를 떠났고, 자네 스스로가 스승의 발자취를 쫓는 듯한 향취를 느끼게 되겠지.
하하, 혹시나 싶어 말해 두자면 나는 여전히 원산의 안락한 사무실에 앉아 이 글귀를 쓰고 있다네. 나는 늙어서 그런 원양 항해에 두려움이 크다네. 모험은 젊은이의 몫으로 남겨 두고 대신 나는 조선의 토착 보리종들을 분류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야 하겠지.
사설을 줄이겠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오직 하나일세. 자네의 임무가 너무도 막중하여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겠더군. 편지와 함께 보낸 사료와 그물을 보았나? 자네에게 급히 맡기게 된 소임은 바로 적도 부근의 제도에서 말라리아를 방지하는 건에 관한 것일세.”
말라리아! 조선인들은 학질(瘧疾)이라 부르고, 로마인들 역시 ‘나쁜 공기’라는 뜻의 말라리아라고 부르며 두려워한 인류의 큰 적이다. 멀쩡하던 장정들이 몸서리치게 만들고, 고열과 혼수상태 속에서 고통받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원산의 일간지에서도 ‘의장의 가장 큰 숙적’이라는 제목의 만평으로 모기와 레슬링하는 트로츠키의 그림을 실었을 만큼 소련의 해외 진출 계획에 막대한 장애물로서 작동하고 있는, 그야말로 사회주의의 가장 큰 적대자라 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물웅덩이들을 메우고 습지를 개간하더라도 한계란 것이 있을 수밖에 없네. 그러니 생태계에 크나큰 충격을 줄지라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네. 단순히 현지인들에게 모기장과 살충제를 나눠 주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네.
그물 안에 든 것은 조선 내에서 잡아 모은 잠자리들일세.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 사료 역시 든든히 준비해 놓았다네. 대부분의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번성하는 것들이라 염려스럽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겠나?
자네가 도착하는 섬들마다 그것들을 방생하고 그들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들을 보고하여 주게나. 자네의 실력을 믿고, 자네가 인류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으로써 이 일을 기꺼이 맡아 주리라 믿네.
그럼 안녕히.”
스승의 편지를 받은 나의 마음속에서는 숭고한 정의감이 불타올랐다. 전 세계 6억 인구를 고통받게 하는 이 악독한 질병을 퇴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서라면 내 일생을 바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러면서도 이제 드막에서 나와 스승님의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의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곧 믈라카가 가까워 왔다는 사실 역시 실감하게 된다. 나는 디에고 가르시아, 또는 그 너머의 남도(南島)들을 향해 가더라도 툰 페락의 항해는 곧 종막을 맞는다.
잠시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도래했다. 그렇다. 이제 곧 내일의 동이 트면 엥겔스 호는 믈라카 해협에 정박하여 친애하는 툰 페락과의 여정이 마무리되고, 아마 그와 오래도록 작별하게 될 것이다. 소중한 벗을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왔다.
툰 페락 역시 그러한 마음이 컸는지 송별 연회장으로 가는 그의 눈가에는 쾌활함과 동시에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문을 열자, 아르 데코(Art Déco) 양식으로 장식된 홀에 소련의 국기와 조선의 국기, 그리고 급조된 믈라카 술탄국의 국기가 함께 게양되어 있었다.
우리가 입장하자 선장은 즉시 숟가락으로 자신의 잔을 두드려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여러분! 인류는 모두 형제이며, 앞으로 진정 그렇게 될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저 멀리 떠나는 켈틱 2호를 바라보며 저 바다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까 궁금해하던 지난날이 제게는 바로 어제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먼 바다 건너의 친교하는 우방을 얻으니, 바로 오늘로부터 다시 눈 한 번 깜짝이기만 하면 우리는 툰 페락과 전화 통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 출신인 박정남 동지가 전화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기에, 나는 그가 이전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써 놓은 대본을 읽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나의 감상이 어떻든 간에 그는 쾌활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홀의 공기를 울리며 말을 이었다.
“툰 페락 각하께서는 저의 배에 승선하신 뒤로도 변함없는 품위와 지성으로써 우리의 부족한 대접을 양해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구의 모든 나라와 아울러 교분하고 우정을 쌓는다면 세상에 전쟁과 침략이 언젠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와아아아아!”
나는 선장의 태도에서 역시, 지난번 올리비에가 나에게 내비쳤던 숭고한 낙관주의를 읽어 내었다. 그의 당당함은, 그에게 비약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게 만든 원동력은 역시 조선의 급진적인 도약과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어서 툰 페락 역시 소매에서 구깃구깃한 쪽지를 꺼낸다. 곧바로 외치는 그의 음성에서 나는 기묘한 울림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환대에 진심으로 저는 술탄의 신하이자 알라의 종으로서 운명의 손길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성실하게 삶을 인내하는 이에게 신과 왕과 운명은 복을 내려 준다는 그 말이 참으로 옳은 것이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저는 조선에서 학문에 밝고 자신의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현명한 군주를 뵈었고, 그 밑에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채 세상을 개조하려는 신료들을 보았습니다. 원산의 배를 빌려 타고 이리 고국으로 돌아오면서는 온갖 진귀한 풍경과 보화들, 그리고 소중한 벗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나를 돌아보더니 목례하였다. 그 순간부터 나는 감동에 휩쓸려 그의 연설을 다 듣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토록 고결한 이방인을, 예절과 존중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의인화한 듯 기품 있는 사람을 어디서 다시 내가 만날 수 있겠는가!
내가 눈과 귀가 먹은 채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을 때,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툰 페락은 그들에게 정중하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심장에 왼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순간 세상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오직 앞으로 펼쳐질 진보와 번영과 평화만이 그려졌다. 내가 말라리아를 퇴치하고, 툰 페락과의 우정을 쌓아 가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목표, 위대한 진보라는 필연적인 미래를 향하여 밟아 올라가는 계단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올리비에와 선장이 보여 준 그 낙관주의의 편린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토록 숭고한 고양감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연설을 마치고 사람들은 식사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조선식의 잔치와 소련식의 사교 파티가 절충된 형식으로, 사람들은 홀의 가장자리에 놓인 협탁에서 자기 몫의 식사를 챙겨 먹고, 여남은 안주와 술은 중앙에 놓인 큼직한 공동 테이블에서 받아 갈 수 있었다.
툰 페락을 위한 메뉴는 그의 종교를 고려하여 특별히 따로 마련되었는데, 돼지고기 등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잘 발달한 사찰 요리를 기반으로 조리되었다.
거기에 소고기와 양고기, 오신채를 추가해 북방(조선과 원산)의 상대적으로 삼삼한 요리에 익숙지 않을 그의 입맛을 배려했다. 그 또한 배려에 만족한 듯, 냅킨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어진 입을 닦았다.
저 한편에서 지난 해적 소동으로 일약 엥겔스 호의 스타가 된 올리비에 역시 귀빈용 레스토랑에서 평소 맛보지 못하던 고급스러운 요리를 맛보며 크게 즐거워했다.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렇습니다.”
툰 페락의 말에서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동요감을 느꼈다. 아마 그 역시 나의 목소리에서 똑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확신했다.
“자네, 결혼은 아직 하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연애하는 상대도 아직은 없는걸요.”
“…나에게 딸이 있다네.”
“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진심이라네.”
그의 눈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는, 저는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보아 왔던 그 어떤 젊은이보다 자격 있는 이가 겸손을 떠니 섭섭하군.”
“….”
“외교적으로도 좋은 일일 걸세. 조선과 소련, 그리고 우리 믈라카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일세. 물론 자네가 불신자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형식상으로나마 개종한다면 괜찮을 거라네.”
나는 잠시 상상했다. 낯선 향신료의 냄새,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마늘과 달래와 대파 향내 나는 조선이 아니라 대신 육두구와 후추의 강렬한 내음을 맡으며 살아가는 삶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장인어른을 모시며 정착하는 삶을.
그 모든 게 나쁘지 않았으나, 단 한 가지 때문에 마음이 걸렸다.
“저는 아직 정착할 수 없습니다. 아직 수집해야 할 표본이 너무도 많고, 삶에서 제게 주어진 열정을 아직 모두 쏟아 내지 못했습니다.”
나에게는 아직 많은 모험이 남아 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있게. 이 멋진 배에서, 멋진 일들을 하면서 말일세.”
“안녕히 가십시오. 언젠가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도 나의 제안이 유효할지 모르겠군. 내 딸들의 혼기가 지나가기 전에 찾아와 주게나.”
그가 잔을 집어 드니 나 또한 내 잔을 들어 올렸다. 그가 건배를 위해 부딪혀 오자 나 역시 그리하였다. 그가 웃으니 웃었고, 그가 이야기하니 나도 이야기하였다. 가슴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슬픔과 차갑게 가라앉는 우울감을 떨쳐 내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떠났다. 모든 것을 쏟아 냈다는 듯 미련없이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를 환송하기 위하여 색종이를 잘게 자른 조각이 비처럼 바다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무지갯빛 장막 너머에서 그를 보냈다.
나의 벗이여, 안녕히!
야릇하지만 숭고한 운명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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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남양항로 1만 리 (5)
듀공(Dugong dugon)이라는 종에 대해 아는가?
포유강 해우목(海牛目)에 속한 바다 동물로, 근연종으로는 매너티(Manatee), 스텔러바다소(Steller’s sea cow) 등이 있다. 스텔러바다소는 본래 18세기에 멸종을 겪게 되지만 지금은 아직 15세기밖에 되지 않았으니 듀공의 친척 역시 조금 더 많이 살아남아 있는 셈이다.
듀공은 해우목에 속한 동물들 중 가장 서식지가 넓으며, 그 광대함을 따져 보자면 동아프리카부터, 페르시아만 인근, 그리고 남중국해에서 호주의 북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해상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왕국은 평화롭고, 또한 이 왕과 백성들은 온순한 이들인지라 바다풀만을 먹고 사는 초식 동물로서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사실 왕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무리 생활을 할 줄 아는 동물임에도 막대한 해초를 뜯어 먹는 이들의 식생활을 감당할 해안이 많지 않기에 너덧 마리씩 흩어져 살기 때문이다.
굳이 사회에 빙하자면 그들의 안온한 영역은 왕국이라기보다는 부족, 또는 코뮌에 가까우리라.
해초가 무성하게 자란 해안가에 주로 살며 크기에 걸맞은 위압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동그랗게 생긴 몸을 뒤뚱뒤뚱 움직이며 바다 밑바닥을 거닌다. 작달막한 눈구멍과 귓구멍으로 사방을 바삐 훑으며 해초를 씹는 그들의 모습은 바닥에 떨어진 간식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귀여운 어린아이와도 같다.
사람을 봐도 해치지 않으며, 큰 몸에 온순한 성정 때문에 포획 역시 쉽다.
그리고 이 마지막 줄이 나의 고뇌를 더하는 원인이었다.
* * *
디에고 가르시아는 듣던 대로 아름다운 섬이었다. 이아구 동지가 원산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얄따란 띠처럼 생긴 섬의 안팎으로 색깔이 다른 바다가 부드럽게 물결치며 해안을 두드렸다. 이 드넓은 환상산호초(環狀珊瑚礁)는 특유의 평평한 지형으로 인하여 숲이 아닌 모든 곳이 인간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인근에서 옮겨다 심은 코코넛 숲이 어느덧 울창해져 달콤하고 시큼한 음료를 선원들에게 제공했고, 그 외에도 철목 소나무, 바다독나무, 용화수(龍華樹), 제브라 나무 등이 다양하게 자라났다.
이들은 목재로 가공되거나 열매 등이 채집되어 이 해군 기지의 소소한 수익성을 보태 주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이 섬에 도착하자마자 코코넛 열매를 따서 배가 터질 정도로 마셨으나, 내 입에는 영 생소한 맛이라 그만두었다.
그 다양한 수목군이 그려 낸 다양한 빛깔의 초록색, 그리고 하늘과 바다의 시시각각으로 얼룩지며 바뀌는 청록색이 마치 다양한 색유리를 섞어 만든 투명한 유리구슬 속에 들어온 듯한 청명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짭짤한 소금기를 품고 튀어 오르는 바다 거품이 뜨거운 태양과 만나 대기를 반짝이게 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내다보며 가까워지는 항만을 바라보는데, 단상에 눈에 띄는 조합의 두 남성이 서 있었다. 다소 가느다란 체형의 청년 남성과 커다랗고 다부진 체격으로 사방을 압도하는 마치 깎아지지 않은 대리석 같은 강고한 노인.
”저들이 그 유명한 ‘쿠플 엉페랼리스트(Couple impérialiste, 제국주의자 커플)’로군요.”
올리비에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트로츠키의 정권을 깨부술 뻔한 유쾌한 사람들이지.”
선원들이 곧 하선할 시간이라고 외치자 우리는 준비할 채비를 마쳤다. 선장에게 특별히 올리비에를 내 조수로 삼게 해 달라고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한동안 올리비에는 내 것이다. 이곳에서 이런저런 식물과 곤충의 표본을 수집하는 데 도움을 받을 작정이다.
승강용 계단이 선체 옆으로 가까이 접근해 오자, 저 아래의 갑판에서부터 줄을 서 있던 우리는 가교를 건너 천천히 육지로 걸어갔다. 마침내 상륙의 순간이었다.
수 주 만에 밟는 육지는 어쩐지 견고하게 나를 품어 주는 듯했다. 어차피 엥겔스 호라는 배의 크기가 거대했으므로 항해 도중에도 흔들림은 겨우 느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뭍에 올랐을 때만 받을 수 있는 모종의 안도감에 나는 젖어 들었다.
“환영하오!”
그리고 그런 감상에 젖어 있던 나를 갑작스레 들려오는 외침이 일깨웠다. 확성기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의 성량이었으나 단상을 올려다보니 어떤 제대로 된 음향 장비도 없었다.
오로지 기백 하나만으로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어느 위대한 해군 제독. 그리고 그와 함께 인도양을 누비는 만주국 건국의 주역 이아구.
“나는 디에고 가르시아의 통치를 소련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이 섬의 관리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징옥이라 하오! WRS 프리드리히 엥겔스 호의 방문을 환영하오!”
간결하게 용건만 전달한 뒤 그는 입을 닫았다. 과연 그 눈매가 부리부리한 것이 당장 저 열대의 태양과도 겨뤄 볼 만해 보였으니 역시 태평양과 인도양을 누비는 해적들의 대적(大敵)이자 공포라 불릴 만하였다.
“저는 공조관 이아구입니다! 모두들 섬의 북쪽에 관사에 나아가 짐을 놓고 여독을 풀기를 바랍니다! 선장을 비롯한 고급 선원들과 승객들을 위한 조촐한 환영 행사가 있을 예정이오니 모두들 오후 7시에는 관사와 이곳 사이의 인도양 해군 사령부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선박을 위하여, 그리고 나와 같이 이 섬에 용무가 있어 들른 승객들을 위하여 섬의 두 지도자가 나란히 서서 안내를 맡은 것이다. 각자 바삐 움직이던 선원과 승객들은 잠시 멈춰 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올리비에와 함께 관사로 향했다. 어차피 거리도 약 1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처럼 궤도 마차를 타는 대신 우리 두 사람은 시간을 들여 산책 겸 도보로 이동했다. 중간에 항만 근처의 우체국을 들러 은사님께서 남기셨다는 편지를 받아 펼쳐 보기도 했다.
편지 내용 중 드막에서 받은 것과 겹치는 부분은 빼놓고 기재하였다.
―“날세. 그곳의 날씨는 충분히 따뜻한가? 바다는 내가 상상하는 만큼 투명하고 푸르른가? 바닷새들은 날개를 우아하게 펼친 채 활강하는가? 드막에서의 편지를 받았을지 모르겠으니 많은 말들을 되풀이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받았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겠네.
자네는 매일 훈련을 받고 집단으로 생활하면서 멀리 고향과 외따로 떨어진 데서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의 기분을 상상한 적이 있나? 처음에는 이국적인 풍광에 놀라워하고, 또 집으로부터 아마 평상시에 상상했을 것보다 아득히 더 멀어졌으니 어떤 독립심에 절로 행동이 빠릿해지겠지.
하지만 그 생활이 1개월, 2개월씩 지난다 생각해 보게. 디에고 가르시아의 순환 근무 기간이 2년이라 그를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확히 3개월이 지나고 파견지에서의 생활이 완벽하게 무료해진 이들은 문득 깨닫는다네.
아직 자신들이 여기서 보낼 시간이 1년 9개월이나 남았다는 걸 말일세.
이들이 맞서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은 해적도 아니고, 무더위도 아니고, 보급도 아닐세. 해적은 쉬이 물리칠 수 있으며, 무더위는 결국 익숙해지게 마련이고, 조선과 소련은 부유하니 그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이런저런 물자를 챙겨 줄 수 있으니.
결국, 그들 최대의 적은 무료함이 될 걸세. 그리고 상상해 보게나? 매일 군사 훈련을 받은 데다가 각자 총 한 정씩은 매일 쥐어 보게 된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그 무료함을 어떻게 풀겠나? 무엇에 취미를 붙이려 하겠나?
사냥일세.
마침 그 근방에는 듀공들이 살겠지. 커다랗고 굼뜨고 평화로운 생물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고기가 소고기만큼 맛이 뛰어난 불행한 생물들 말일세.
자네에게 소소한, 어쩌면 중대한 임무를 맡겨 보겠네. 그 일대에서의 듀공 사냥을 제지해 보게나.
부탁하겠네.”
그 뒤로는 드막에서 받았던 내용들의 반복이었다. 마찬가지로 잠자리들과 그 사료가 놓여 있었는데, 다른 짐들과 함께 근처를 지나가는 궤도 마차 편으로 부쳐 버렸다.
바빌로프 선생님께서 내게 맡기신 업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다 올리비에와 함께하는 산책 시간에는 머리를 비우고 싶어 일단 망각의 방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지금 바로 보기에 아름다운 섬이 있고, 걷기에 기분 좋은 길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 이 섬이 내보이는 산호초 특유의 평탄한 지형은 곧 특별히 가꾸거나 길을 포장하지 않더라도 가볍게 걸을 만한 산책로가 사방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저기 있는 녀석이 바로 골리앗 크랩이란 녀석인데, 당연히 다른 게들과 같이 갑각류 십각목(十脚目)에 속해 있지. 육지에서 기어 다니며 사는 녀석들이야.”
“게가 육지에서 살기도 하나요?”
“물론이지. 육지 게들은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런 먼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찾아볼 수 있어.”
햇볕에 달궈진 모래알들 사이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품종의 갑각류들이 여기저기 기어 다녔고 나는 올리비에에게 그에 대한 소소한 설명을 덧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한가로이 걷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관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2시간의 산책 동안 정오의 해는 어느 정도 기울어 가며 짤막한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관사는 하얀색으로 외벽이 칠해진, 네모 반듯한 형태 위에 열대성 스콜(Squall)을 견디기 위해 뾰족한 지붕을 올린 모습이었다. 처마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오히려 순백색의 벽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지붕만 뺀다면 어릴 적 원산이 아직 궁벽한 어촌 이상도 이하도 아닐 적의 가설 주택들 같았다. 물론 이 벽체는 튼튼한 콘크리트라 하얀색 모르타르를 발랐다는 점만 빼면 건물의 질은 완전히 달랐지만 어릴 적의 이런저런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궤도 마차를 통해 따로 실어 날랐던 짐들을 풀고, 이런저런 표본들과 유리병, 보존액들을 꺼내 정리하였다. 채집할 예정인 종들의 이름을 적어 유리병과 액자마다 붙여 놓으니 어느 정도 앞으로 할 일의 가닥이 잡힌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제야 교수님께 어울리는 방의 모습이 되었군요.”
벽에 내걸린 액자들(표본이 이미 채워진 것과 비어 있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을 바라보며 올리비에는 웃었다. 한참 걷기 운동을 하고 일 처리도 했으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벌써 손목시계는 오후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선과 이곳의 시차를 생각한다면 아마 지금을 6시 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궤도 마차에 올라야 했다. 올리비에를 깨워 승강장으로 달려가니 막 승객들이 가득 찬 마차가 떠나기 직전이었다. 가까스로 올라탄 우리는 느릿느릿 흔들리며 붉은 광휘에 잠겨 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바다는 밝은 와인색이었다. 사령부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짙은 건포도 빛으로 변해 있었고.
어둑해져 가는 사방을 밝히기 위해 해군 군복을 입은 남녀들이 돌아다니며 기름등을 켜고 있었다. 그렇게 주황색 등불로 밝혀진 연회장은 의외로 조선식의 좌식 연회가 아니라 소련식의 사교 파티처럼 꾸며져 있었다.
우리와 함께 4인용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각각 인류학자 최 동지와 안드레예바 동지였다. 세 사람이 이 근방의 문화와 자연 풍광, 기후와 생물 종의 상관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토론을 나누면 올리비에가 그 이야기들을 즐거이 주워섬기는 방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내가 해안 어종의 멸종과 어장 파괴, 그리고 농경 민족의 확산에 대한 내 나름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다. 최와 안드레예바의 열렬한 반박으로 토론이 이어지게 되어 잠시 숨을 돌리려 파티장을 둘러보니….
마침 인근에 ‘제국주의자 커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선장과 함께 연회장 주위를 산보하며 이런저런 담소를 즐기는 듯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들릴 만큼 가깝지는 않았으나,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듀공에 관해 선생님께서 맡기셨던 사무가 막 생각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며(마침 시점상 내가 토론에서의 패배를 인정하는 듯했기에 두 사람은 승자의 아량을 베풀었다.) 내 몫의 와인 잔을 들고 일어났다.
당연히 올리비에 역시 허겁지겁 내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의 걸음걸이가 하도 빨랐기에 나 역시 최대한 다리를 놀려 그들을 쫓았다. 이제야 “그래서 그때….”나, “결국 소총의 성능이라는 건….” 같은 말들이 토막토막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그들과 거리를 좁혔을 때, 나는 그들의 사이에 끼어드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앞쪽으로 빙 돌아 셋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세 사람은 갑자기 멈춰 선 나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저기, 대화를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저 무슨 용무가 있을지 몰라 궁금할 뿐입니다.”
이아구가 서두를 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서 손을 쥐니 놀랄 만큼 힘차게 팔을 흔들었다.
“저는 박물학자를 업으로 삼고 있는 로밀리, 윈스턴 로밀리라고 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공조관 이아구입니다! 이 섬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을 직무로 맡고 있죠.”
그렇게 말하며 환히 웃는 이아구의 모습에 긴장이 조금 녹아내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징옥이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전에는 단상 아래에서 보아 그 몸집이 유독 크게 느껴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까이 마주 서니 더욱 거대한 체구였다.
“이징옥이라 하오. 소인이 소련 인도양 함대 사령관이라는 과분한 직분을 맡고 있으니 이는 모두 이아구 동지의 도움 덕택이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문 기사에서 자주 뵈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칫솔 수염을 달아 놓은 만평에서 본 것이지만.
사람들의 상상력과 비유력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인물이 나오면 히틀러의 외관을 섞어 놓을 만큼 빈약했으나, 그는 내가 역사책에서 읽은 비리비리한 오스트리아 상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곧은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표정, 목소리, 말투, 행동거지 등 모든 것에서 위선과 가식이라는 것을 쭉 빼고 나면 마치 건어물처럼 그 사람 본연의 진한 맛과 향만 남으리라.
이징옥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단 한마디씩만 말을 섞었는데도 이 사람만의 분명한 색깔이 뇌리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