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35
물론 완전한 진수까지 몇십 시간은 더 걸리고, 아직 제대로 된 내부 공사는 끝나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기념행사들을 참석하며, 아메리카로 뻗어 나갈 소련의 위대한 미래에 대해 트로츠키는 한참이나 주절거려야 했다. 물론 화려하게 입 놀리는 건 트로츠키의 주특기니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솟았다.
그렇게 연회의 분위기와 도수 높은 리큐르에 얼큰하게 취한 어느 80대 우크라이나인 노인은, 나른해진 몸을 부축받으며 드라이 독이 내다보이는 부둣가의 벤치에 주저앉는다.
밤이다.
“트로츠키 동지, 지금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네, 르네.”
에티앙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트로츠키를 내다보자 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비서를 안심시키려 한다. 물론 그런 동작조차도 에티앙블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취객의 뭉툭한 몸짓에 불과했지만.
“저길 보기나 하게.”
트로츠키는 멀리 내다보이는 선박을, 그리고 그 너머의 다른 선박들까지 주욱 손가락으로 훑듯이 가리킨다. 아마 내일쯤이면 진수가 끝날 것이고, 배 위에 뜬 채 실내 공사가 마무리되면 곧 태평양을 건넌다.
인부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선박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층 침대와 사다리를 설치한다. 배 위에 탈 승객들이 하루의 3분의 1을 보낼 공간이다.
난간이 덜컹거리는지 확인한다. 만일 나사가 느슨하다면 꼼꼼히 조이고 닦는다.
상수도를 확인하고, 통신 장비를 정비하고, 화재를 대비한 모래주머니를 비치하며, 사고시 대피할 구명 보트를 넉넉히 적재한다.
배라는 물건은, 결국 사람이 바다 위에 있는 동안 의지할 오롯한 공간이고 세상의 전부다. 그런 만큼 그 작은 세상들을 조립하고 꼼꼼히 기름칠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 모습을 보며 트로츠키는 슬슬 입을 열었다.
“르네.”
“네, 료바.”
“조선의 상황이 개선될 것 같나?”
취한 상태에서도, 눈은 마치 퇴고하는 시인처럼 선박들을 꼼꼼하게 훑고 있다. 트로츠키의 말뜻은 이런 것이리라.
‘저 선박들이, 이 개척 사업이 소농 중심의 조선 체제를 개선할 것 같나?’
에티앙블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트로츠키 동지. 전문가들은 모두 낙관적입니다. 조선의 소농들을 빠르게 아메리카로 이식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지만 발전이 몇 년 늦어질 뿐입니다.”
“그래, 대계에는 흔들림이 없도록 하게. 고용 증진, 소농의 신대륙으로의 배출. 일단은 이 두 가지에 집중하고.”
트로츠키가 몸을 일으키자 에티앙블은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부축한다. 혹시나 소련의 지도자가 휘청여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그러나 노인의 몸짓은 언제 취했었냐는 듯 각이 맞아떨어진다.
“돌아가지. 내일은 일찍부터 마이어에게 샌프란시스코 건설 현황을 보고받아야 하니.”
“알겠습니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명확한 지도가 있다.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아메리카에 ‘문명’을 퍼뜨린다.
* * *
문명.
그것은 유럽 세계를 의미했다.
역사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유럽이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통하여 전 세계로 이식되었으니, 그들이 무수히 죽인 살과 피 속에서 근대성의 씨앗이 심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야만이다.
정치에서는 차르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려는 이는 탄압받는다.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심지어 입헌 군주정 지지자든 마찬가지다.
경제면에서 보아도 여전히 수백 년 전과 다름없이 흙 속에 파묻힌 농노들이 가득하다.
마르크스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프로이센 출신이었고, 프랑스와 영국을 떠돌았다. 그는 러시아의 야만을 경멸하였다.
영국의 자본가들이 차르의 제국을 확고하게 무너뜨리고, 그곳을 경제적 식민지로 삼기를 차라리 바랐다.
그랬던 그에게 어느 날 편지가 날아든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싶다는.
자본주의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땅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자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릴까 봐 안달복달하는 차르를 경멸했다. 또 오늘은 어디를 침략해 자신의 전리품 삼을지에만 골몰하는 전제 군주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 전제 군주들이 영토의 방어와 정복을 위해 만든 근대식 군대를 혐오했고, 그를 위해 진행되던 자본주의화에도 분개하였다. 결국 러시아 자본주의란 농민들의 피를 판 돈으로 공장 설비와 총알을 사들이는 것이었으니.
자본주의란, 러시아 농민들을 좀먹는 사악한 기생충이다.
고로 자본주의는 물리쳐져야 한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그리고 그 논리가 양심적인 인텔리겐챠(Интеллигенция, 지식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회혁명당의 사상적 기초인 인민주의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원산 사회혁명당은 그걸 버렸고.
회의장을 나서며, 얼굴이 굳은 스피리도노바를 향하여 블레어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 조직에는 다른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특유의 첩보 조직들이나 열성적인 당원들이….”
“그렇지. 우리는 우리의 주특기를 살렸네.
우리는 유럽에 암살자와 첩보 요원들을 보내었고,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탈리아 분쟁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참이지.”
1478년, 로밀리가 피렌체로 파견되고 꽤 지난 상태다. 파치 작전이 성황리에 진행되었으니, 후에 이러한 업적들을 대중들에게 풀게 된다면 사회혁명당의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다음엔? 어떡할 건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첩보 사업을 통해 어떤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것인가? 그걸 통해 우리의 조직적 역량을 어떻게 키워 갈 건가? 계획이 있는가? 블레어 동지, 말해 보게.”
“그, 그래도 이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여 앞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무의미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공허한 언사들일세. ‘대중’은 누구고, ‘여론’을 환기해서 뭘 할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회주의를 향한 지향과 신념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는 ‘노력’으로 하는 게 아닐세. 지금 이탈리아의 상황을 들었나? 사보나롤라라는 정치인이 피렌체에서 뭘 하는지 보게.”
죽은 귀족들의 농토를 소농들에게 몰아주고, 재산이 있는 시민들에게 무장할 권리와 참정권을 제공한다.
“중세 말기 도시의 소부르주아지들을 끌어들이고, 또 새로 만들어 내는 방식이지. 그들이 새 정부의 충성파가 되고 군대를 이끌어 도시를 수비할 걸세.
심지어 중세인조차 할 줄 아는 것을 우리 당이 못 하고 있군.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정책, 방향성, 그리고 효과. 우리에게 부족한 게 그걸세.”
스피리도노바는 고민한다.
“우리가 왜 러시아 제국에서 숱한 암살과 테러를 벌였나? 그게 차르정을 흔들고 혁명을 이어 간다는 목적에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목표는 뭔가? 그걸 이루는 방법은 뭔가?”
해외에서 화려한 암살 작전을 벌여 대중들의 눈과 귀를 잠시 사로잡을 수는 있다.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해 어떻게든 조직의 세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왜 호주를 개척하나?”
“소농의 해소를 위해서입니다.”
“아닐세. 우리의 모든 정치적 행동은 당과 당의 지향을 위해서일세.
목표를 보게. 목표물을 겨냥하는 수단에 집중하지 말고, 목표물 자체를.”
―마치 총이 아니라 과녁에 집중하듯이.
스피리도노바는 일순간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오랜 동지들의 목소리로.
* * *
“캘리포니아에 새로 심을 감귤류 나무는 모두 캘리포니아 감귤 협회에서 관리될 겁니다.”
바빌로프 연구소의 소장,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캘리포니아의 농장 경영인들로 선발된 이들에게 직접 강연을 수행하고 있다.
“감귤류 나무에는 다양한 해충들과 병균들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심한 관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혹시 모를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열매를 옮길 때는 잎과 줄기를 자르고 꼼꼼히 세척하십시오.”
강연은 연구소 곳곳의 견학과 함께 진행된다. 숙련된 연구원과 농부들이 직접 감귤류 나무를 접붙이는 법, 그리고 훈련된 개들을 이용해 병에 감염된 감귤을 찾아내는 법 등을 시연하고 있다.
연구소 한편에서는 포도나무의 품종 개량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일단 유럽 지역에서 공수해 온 포도나무와 조선산 포도나무의 접붙이기와 교잡이 진행 중인데, 이는 포도가 캘리포니아의 사막처럼 건조한 토지들에서도 잘 자라날 몇 안 되는 과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다른 식물 품종들을 피렌체 대사관을 통하여 이것저것 들여오고 있으니, 이들이 보여 줄 성과에 따라 캘리포니아 농업의 발전 역시 좌지우지되리라.
그러나 바빌로프 연구소 및 그 산하 연구소들의 일은 단순한 품종 개량에서 그치지 않는다.
“포도의 경우 무르기 쉬운 과일이니 건포도의 형태로 유통할 계획입니다.”
“또한, 그와 관련한 산업 시설들을 샌프란시스코 개발단에 요청해 놓았습니다!”
“트로츠키 동지? 여기, 산하 연구소에서 개발한 건포도 요리법들입니다.”
“흠, 과실류 소비 촉진을 위한 대중 선전 기획… 이건 안은 폐기하게. 쓸모없어 보이는군.”
각 정당의 정책 연구소와 협업하여 작물들의 생산, 보관, 유통,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의 전략들이 짜인다.
머지않아, 한양의 요식업계에서 건포도가 들어간 음식들이 유행하게 되니. 이는 그 거대한 계획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세부적인 품목의 생산 과정 하나하나가 거대한 경제적 순환 속에서 일부를 이룬다.
공산당과 사회혁명당의 기획 속에서 꿈틀거리며, 조선 경제의 체질을 바꿔 낼 준비를 한다.
* * *
결국 인민주의자들의 목표를 두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러시아를 구원하자.
러시아를 위한 특별한 방법으로.
러시아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두리이자, 후진적인 농본 국가에, 그 농민들은 해외 자본의 입김 속에서 착취당하는 상황이었으니.
사회혁명당의 이념과 실천은 후진 국가 러시아를 위한 것이지, 다른 나라에는 적용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조선과, 원산과, 만주는 어떠한가?
이들이 자본주의적 진보의 변방인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진보의 중심지다.
이들의 산업 발전이 해외에 비해 부진한가?
그럴 리가. 지금 소련 바깥의 세계에는 성숙한 산업자본주의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들 나라의 농민들이 자본주의화에 의해 고통받는가?
이제 굶주림은 사라졌고, 오히려 공장이 부족해 일자리가 없어서 문제일 뿐이다.
사회혁명당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빠르게 자신들의 방법론이 이곳에서 그 시효가 다했음을 인정하고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며 조직을 재건해 냈다.
하지만 그렇게 인민주의를 버리면, 사회혁명당이라는 조직에는 무엇이 남는가?
“블레어 동지, 우리는 인민주의를 버리면서 경제학적인 이론과 전망 역시 잃어버렸네.
순수히 집권에만 집중하였지. 세력 불리기에만 치중하였고, 또 순간순간의 화젯거리마다 끼어들기에 급급했어.”
“….”
“그렇다고 인민주의로 다시 돌아가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선택지를 펼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이제 공산당과 어떠한 변별점도 갖지 못하네. 더 근시안적이고, 무능하리란 것만 빼면.”
스피리도노바는 한숨을 쉰다.
“목표에 집중하게끔 만들 거대한 비전이 필요하네.”
블레어가 스피리도노바의 말을 들으며 별생각 없이 따라와 보니 결국 당사 내부의 서고였다. 조선과 원산 두 세계 모두에서 끌어모은 많은 서적이 먼지로 된 베일을 살짝 덧쓴 채 잠자고 있다.
스피리도노바는 그중 하나를 망설임 없이 뽑아 들었다.
마르크스.
다시,
엥겔스.
다시,
카우츠키.
다시,
보론초프.
또다시.
숱한 경제학 서적들이 스피리도노바와 블레어의 앞에 쌓여 가고. 스피리도노바는 한동안 그것들을 탐독한다.
“저, 스피리도노바 동지…?”
“뭔가?”
“그래서 이제 뭘 진행할 겁니까?”
“기존의 계획은 속행한다.”
“그렇다면 뭐가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당연하지.”
스피리도노바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저 멀리 부둣가를 바라본다. 저 중 일부는 아메리카로, 일부는 호주로 간다.
“기존의 계획을 배치할 대전략이 달라지니까.”
이제 공산당과 사회혁명당의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상치도 못하게 두 정당의 개발 계획이 유사하게 진행되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공산당은 예전의 그 공산당일 수 있어도,
사회혁명당은 10월 혁명 시기의 그 정당과 완전히 다른 정당이 되어야 한다.
이곳은 러시아가 아니니까.
머지않아 사회혁명당에 청년 당원들을 위한 경제학 교육 프로그램이 개설되었다. 어떤 당원들은 개발 사업이 바쁜데 역량을 낭비한다고 볼멘소리를 냈지만 스피리도노바는 당수의 직권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사회혁명당 또한 멀리, 높이 봐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호주 개발이 아니다.
기업농들을 보내고, 원산의 숙련공들을 진출시키는 작업에는 단순히 호주의 땅따먹기라는 일차원적인 근거 너머의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근본에 있을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사회혁명당을 위해서라도.
두 가지 길 (4)
배 몇 척이 시원하게 물살을 갈라 빠르게 나아가니, 여유롭게 날아다니던 갈매기들 또한 조금씩 뒤처진다.
하얀 포말이 선두에서 마구 일어나다가, 배 양편을 향해 두 줄기로 넓게 퍼져 바다에 활꼴의 형상을 그린다.
그리고 그 물살을 잠시 지켜보던 승객들이 고개를 들자,
아메리카다.
“도착이다! 도착이다!”
“일단 항만과 교신해!”
“현지 개발부들에서 숙소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일단 챙겨 온 군막을 깔고, 승무원들은 배 위에서 숙박한다!”
MRS(Manchu Republic Ship) 완안아골타는 그렇게 천천히,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에 닿아 가고 있었다.
승객들은 흥분에 차서 조선어로, 만주어로 이리저리 지껄여 대고, 몇몇은 역사책에서 읽었던 콜럼버스나 메이플라워호의 이야기를 운운하며 기뻐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지는 메이플라워호의 개척민들이 도착했던 제임스타운과는 견줄 수도 없이 건실히 세워진 항만 도시 샌프란시스코였지만.
그래도 마치 전인미답의 땅을 밟는 양 이리저리 서성이는 승객들이 술판을 벌이는 건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흥분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지난번 항해 때 이미 이곳에 닿아 본 적 있는 소수의 승무원뿐이었으니.
샌프란시스코.
이곳은 트로츠키가 메시카와 아메리카 개척에 관련한 협약을 진행하기 이전부터 이미 건설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계획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