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38
새로운 왕자는 위대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에 붉은 왕정을, 아니면 더 나아가 공화정을 정착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3세 이후의 전제주의자 빌헬름 2세가 될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을 새 왕이, 점차 치고 올라오는 인민의 주권과 신료들의 움직임에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는 뻔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제 조선의 섭정 각하가 아니니….
결국에 트로츠키는 이홍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을, 그리고 이홍위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밖에 이야기해 줄 수 없었다.
“조선의 상황은 전하의 손에 달렸군요.”
“그러하오. 나의 손에 달렸소.”
이홍위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몫이오.”
* * *
조선의 체제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이홍위 그 자신의 몫이다.
주요 3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 소비에트 대회의 준비, 신문사와 출판사 설립의 자유화 등 다양한 조치들만 해도 그렇다.
표면상 국왕이 주도하는 바는 아니다.
각 정당들과 기층의 노동자·농민 조직들이 알아서들 자치적인 정치 조직들을 만들어 가고 있고, 이들이 기존의 조정이 맡던 기능을 점차 분담해 가고 있다. 조선의 정치적 개혁은 실제로도 기층으로부터의 요구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 주상이 막으려거든 언제든 막을 수 있는 바다.
대신들? 숙청하면 그만이다. 소비에트와 협동조합? 해산하면 끝이고. 그 뒤로 물론 거대한 저항들이 부딪혀 오겠지만 하나하나 깨어 버릴 수 있다.
만일 이홍위가 작정한다면 아직도 국토 대부분이 미개지인 만주와 인구 40만에 불과한 원산이 어떻게 그 행보를 막겠느냐는 말인가?
그럼에도 조선에 공산주의적 정치가 차츰 자라나는 바는 모두 이홍위의 묵인과 지원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이홍위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홍위는 안평과 수양 두 왕자의 난을 진압했고, 조선에 새로운 사상을 직접 들여왔으며, 산업을 중흥시키며 그 강역을 세계로 넓혔다.
작금의 조선을 건국한 것이 태조대왕(太朝大王)이신가? 아니면 작금의 성상이신가?
그리 묻는다면 일반 인민들은 가감 없이, 사대부들은 어떻게 조종에 대한 예를 지키며 말할지 고민하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금상(今上) 전하를 꼽으리라.
이런 이홍위의 적장자에게 그 누가 거역할 수 있으랴.
그가 거대한 피보라와 반동을 불러온다면, 그를 막아 내든 막아 내지 못하든 조선이라는 체제는 영구히 그 속에 상처를 남긴 채 지속되게 되리라.
그러니 이홍위로서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
아들이 혹여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 될지라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체제를.
그리고 웬만하면, 묵묵히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함께 걸어 줄 아들을.
머뭇거리며 서성이던 이홍위는, 밤이 늦자 다시 윤순비가 있는 흠명전으로 들어간다.
둘은 속삭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작게.
그러면서, 이홍위는 살짝살짝 고개를 돌려 조용한 숨소리를 내는 어리고 반질반질한 핏덩이를 보았다.
아이는 어리다.
태조대왕, 그의 차남 공정왕(恭靖王, 명에서 받은 정종의 시호. 정종이라는 묘호는 숙종대에 이르러서 붙게 됨), 그의 장남 태종대왕, 삼남 세종대왕….
그리고 그 적장자로 이어지는 3대의 핏줄.
1392년부터 1479년까지, 87년 동안 피흘리지 않은 적 없는 이 왕조의 후계자다.
이홍위는 손을 씻고서는, 지켜보는 의원이 없나 슬쩍 보고는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중전.”
“예, 전하.”
“…이 아이의 손에 피가 묻지 않게 해 주고 싶소.”
태조대왕께서 왕씨를 죽이고, 태종대왕이 형제를 치며, 삼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고작 6명의 왕밖에 거치지 않았음에도 복잡하게 얽힌 이 왕사(王史)와 계보를 떠올리며 이홍위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준다.
이 왕실에 피로써 얼기설기 엮인 모순을 물려주지 않겠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조선과 소련을 위해서.
* * *
/ 작가의 말
소제목은 용비어천가 2장 첫 구절 ‘불·휘기·픈남·ᄀᆞᆫᄇᆞᄅᆞ·매아·니:뮐·ᄊᆡ。곶:됴·코여·름·하ᄂᆞ·니(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에서 따왔습니다.
곶 됴코 여름 하나니 (2)
언제나와 같이 잠에서 일어난 이홍위는, 주위를 조용히 둘러본다.
저 멀리 열린 창 너머로는 복잡하게 얽힌 인경궁의 윤곽이 내다보인다.
“전하, 세안수를 가져왔습니다.“
“내려놓고 나가 있게.”
문이 닫히고, 사방이 조용하게 변한다.
창호문 바깥으로 일렁이는 움직임들이 조금씩 아침의 고요를 흔들어 놓는다.
나인들도, 내관들도 천천히 속삭이면서 얕은 잠에 들었다 깨었다 하는 왕을 위하여 주의를 기울인다. 오랜만에 불면증에 시달리시던 주상께서 깊이 주무신 날이다.
위성처럼 이홍위의 주위를 오가면서 그들은 세안수를 가져가고, 이홍위의 얼굴에 남은 물기를 훔쳐 내며, 그가 입을 옷가지와 목욕물을 건넨다.
이홍위는 자기 손으로 옷을 입고, 곧 1층의 욕조에 들어갔다 나온 뒤, 용포를 걸치고서 섬돌에 올라앉아 있던 신발을 꿰어 신는다.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
“우선 한림원으로.”
인경궁이 자리한 한양의 서편에서 경복궁까지는, 인마(人馬)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두 주요 궁궐 사이의 이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건설된 구름다리가 있다.
물론 구름다리가 1킬로미터도 넘는 인경궁과 경복궁 사이의 거리를 전부 연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의 주요한 전각들과 도로, 청사들을 이어 내니 도합 300미터 정도 되는 구름다리가 두 궁궐을 잇는 가교였다.
그 복도와, 도로와, 구름다리를 오가다 보니 이홍위는 어렵잖게 한림원 건물에 닿았다. 학자들 역시 마주칠 때마다 주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문안 인사를 올렸다.
좁은 한림원 실내에서 절 올리기는 금지되었기에, 인사를 나누며 이홍위는 그들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경외감과 조심스러움, 긴장한 눈빛들.
“전하, 한림원 건물이 이관한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허면 그동안 서적들의 정리는….”
“인경궁에 더 견실하고 기능적인 회관이 생길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원자의 탄생과 함께 한양 일대에 둘째가는 화제가 된 그 주제에 대해, 역시나 학자들도 이홍위에게 말을 붙여 온다.
―‘한양 재건축.’
―“신 이종준(李宗準)이 청컨대, 원자 저하께서 세상에 나신 이러한 경사에 때맞추어 전하께옵서 경복궁과 인경궁 두 궁궐을 옮겨 다니시며 집무를 보시는 불편을 제거하고 원자 저하께서 보다 안락하고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인근을 크게 보수하는 바가 옳을 듯하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 이명민의 조카라는 이종준은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대부들은 모두 그에게 약간의 기대감을 싣고 있으되, 오직 이명민 홀로 불편해 보이던 상황이었다.
이홍위가 그 주제에 흥미를 느껴 이것저것 캐물어 보니, 실질의 계획은 훨씬 거대했다.
―“전하께옵서 거처하시고 또 집무하시는 바를 인경궁으로 모으고, 경복궁은 문종대왕 시절의 모습으로 환원함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된다. 한림원 건물을 옮기라는 것인가?”
물론 단칼에 잘려 나갔지만.
헌데 그러니 대소 신료들이 다 같이 작당하고들 달려드는 게 아니던가?
지금의 경복궁은 난리 직후에 지었던 가설 건물에다, 원산이 지어 준 못생긴 콘크리트 건물들까지 어지럽게 얽혀 있으니 보기에 심히 좋지 않다. 심지어 지금은 잘 사용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인경궁이라는 대안이 생겼으니 경복궁은 의례적 용도로만 사용하고 1452년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시키자. 그 망할 한림원 건물은 인경궁 내부에 신축해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다들 한림원 건물을 기피하는 티들이 나니, 그 김에 경복궁뿐만 아니라 난개발되어 가는 한양 전체를 재건축하자는 명분까지 더해진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홍위는 해당 사업안을 재가하였고, 그 결과 한림원 건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며 한림원 소속의 학자들끼리 이런저런 풍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러한 논란들을 불식시켜 주고 있으니 주상께서 직접 행차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한림원 건물의 관리자들이 직접 나와 이홍위를 맞이하러 나온다.
“오늘은 어느 곳으로 가십니까?”
“사학(史學) 서고로 가네.”
어차피 몸속을 들여다보듯 구석구석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건물이니만큼, 이홍위는 어렵잖게 7층 근방에서 ‘아조사학(我朝史學)’이라고 적힌 팻말을 찾아낸다. 그 아래로 수많은 서책이 손때 묻은 채 자리 잡아 있다.
실록을 직접 보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인군(人君)이 실록을 열람한다니 가당찮은 일이기에 이런 2차 자료들이라도 접하는 것이 차상책이었다.
―‘삼봉 정도전의 토지 정책과 이념 체계, 신숙주 저.’
―‘조선 공산주의와 유교적 윤리 의식의 단절, 이명민 저.’
―‘조선 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레닌의 시장 이론, 박팽년 저.’
―‘인민주의를 변호하다―향민계와 러시아 인민주의의 유사성과 단절성―, 김종직 저.’
“이것들, 모두 대출해 가겠네.”
“그렇다면 대출증을 준비하여 놓겠사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언가 새로 연구라도 진행하시려나, 하고 사서가 방대한 자료의 대출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물론 연구 목적은 아니다. 더더욱이 심심풀이를 위해서도 아니다.
곧 나인들과 내관들에게 한 보따리씩의 서책을 맡긴 뒤, 이홍위는 한림원 건물을 나선다.
처음부터 완전히 재조립되는 듯한 경복궁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한림원의 정문을 밀치고 나서자마자 공사음이 귀를 맹렬히 찔러 온다.
“전하!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이런 소음이 그에게는 품위 있는 음악이라도 되는 마냥, 이종준과 이명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맞는다.
벌써부터 경복궁의 여러 곳들이 휑하게 비어 있다.
“꽤나 빠르게 진행되는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20년도 넘은 가설 목재 건물들부터 부수니 장쾌하옵니다만,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다려야만이 성과가 나는 공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근정전이 그러합니다.”
“…근정전이? 허나 저곳은 태조 시절부터 크게 달라진 바가 없을 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지부진하옵니다.”
이명민은 약간 불만기를 띈 표정으로 조카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본래 경복궁에서 미처 챙기기 어려웠던 조명이나 냉난방 등의 요소를 개선하면서도, 근정전의 전각 전체를 살리고자 하니 시간과 비용이 배로 들어가옵니다. 차라리 철거하고 콘크리트로 다시 세우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이래서 뚱한 거였다. 모더니스트 이명민의 조카가 경복궁 복원을 외친다니 크게 고까웠으리라.
허나 이명민이 더 이상의 딴지를 걸지는 않으니, 곧 세 사람의 경복궁 탐방이 시작되었다.
“태조대왕께옵서 한성에 자리를 잡으시고, 공정대왕께서 개경으로 환도하신 뒤에 불길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에 태종대왕께서 다시 한성을 서울 삼으시고 경복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온갖 상서로운 징조들이 일어나니 곧 해동의 억조창생들이 살아갈 왕도(王都)의 기틀이 잡힌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윽고 창덕궁에 머무르시던 태종대왕과 달리 세종대왕께옵서 경복궁에 자리를 잡으시어 이렇듯 왕조의 정궁으로 서지 않았습니까?”
이종준이 줄줄이 읊어 내자 이홍위로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공정대왕께서 구태여 환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피를 이곳에 뿌렸는데, 이곳에 머무르고 싶으셨겠는가?
태종대왕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쳐죽인 김사행과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에 거처하고 싶으셨겠는가?
아주 잔혹한 땅이다. 많은 피를 마셨을 곳이다.
나의 피를 마셨을 뻔한 곳이기도 하고.
아무튼 잡념을 떨친 채 이홍위는 이종준이 말하는 바를 따라서 꾸준히 걸어간다.
광화문을 나와 육조 거리로 나아가면서 이종준은 다시 입을 연다.
“이번 재건축에 가장 커다란 논제가 되었던 바가 바로 육조 거리의 처분입니다.”
“그는 어째서인가?”
“신료들은 문무와 대소를 막론하고 오늘날 육조 거리의 구성으로는 불어나는 관아를 다 수용할 수 없으리라 예상하였습니다. 벌써 저기 저… 공조 관헌은 4층까지 증축되지 않았습니까?”
관료제 자체가 크게 확대되면서 그 기능을 건축물이 감당할 수 없게 된 건 궁궐만이 아니다.
게다가 각 관서들의 역할이나 비중 역시 크게 변하였는데, 그에 따라 건물이 알아서 늘거나 주는 게 아니니 그만큼 비효율과 불편이 쌓여 온 차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신료들이 칼을 간 것이다.
“헌데 육조 거리를 개편하는 데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위선 저와 다른 관료들은 육조 거리 역시 문종대왕 치세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추가 관헌은 성 바깥에 새로 두자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미친 짓이지.”
“공판 대감! 전하께서 앞에 계십니다!”
“전하께서 보시기에도 분명하겠으나, 저 아이가 말하는 바는 사치와 비효율의 극치이옵니다.
경복궁은 아조의 중심이며 태조대왕께서 터 닦은 곳이니 그럴 만하나, 경복궁과 위엄을 맞추자고 육조를 가만 놔두고 공간이 부족하다며 성 바깥으로 건물들을 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인경궁과 육조 각각에서 업무를 볼 때마다 도성을 넘어야 하지 않습니까?”
“허면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명민은 고개를 가만히 숙인 뒤 말한다.
“머지않아 한양으로 전차가 들어선다 하니 관료들의 거주지가 한양 도성 내로 한정될 필요가 없사옵니다. 전차나 궤도 마차의 노선으로 한양 도성 바깥의 무악(毋岳)에 도시를 건설하고 한양에서 신료들을 몰아낸 뒤에 그곳에 관서들을 짓는 것이 백배는 더 낫습니다.”
“허면 기껏 복원한 경복궁만이 층고가 낮은 건물이 되니 궁의 위엄이 죽지 않습니까?”
“군자는 그런 허울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도성을 안팎으로 오가며 숱한 관원들이 근무 시간 대부분을 이동으로 쓰는 것보다야 낫겠구나!”
그러다 대화 주제는 곧 기능도, 상징성도 애매한 창덕궁의 개축에 관한 논의로 옮겨 간다. 이번에도 조카와 중부(仲父) 사이에는 다툼이 일고 이홍위는 그 모습을 자못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것을 지켜보다 보니, 곧 경복궁으로 돌아온다.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한성은 조선의 도읍이고, 이곳 경복궁은 한성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은….
“여기, 이 자리에서 한림원이 이관된다면 집현전이 재건될 예정이옵니다. 이제 저 북쪽의 교태전으로 가 보면….”
몹시 살기에 불편하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바이지만, 오랜만에 경복궁을 오가면서 새삼 다시금 느낀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동선이라든가, 생활 공간의 구분 등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이 지어진 건물이다. 인경궁의 편안함에 젖어 있다 다시 옮겨 오니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다.
왜, 어째서 이리 무성의하고 무배려하게 일국의 궁성을 지어 놓았다는 말인가?
“개경에서 공정대왕 전하께서 지내셨다는 수창궁(壽昌宮) 역시 이리도 불편하였던가?”
“그런 이야기는 들은 바 없습니다. 허나, 창덕궁에서 또한 태종대왕 전하께서 불편을 겪으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말씀하신 바대로 경복궁이 특히나 불편한 궁성이 아니었을까 하옵니다.”
왕궁에는 법도가 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이르기를 삼문삼조(三門三朝)라 하였으니 안쪽에서부터 지존이 거하는 연조(燕朝)와 정치가 이뤄지는 치조(治朝), 그리고 관료들이 집무를 보는 외조(外朝)로 궁궐 공간을 나누라 하였다.
또한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에는 장차 지존의 자리를 이어받을 세자의 거처로 동궁(東宮)을 세우라 하였다.
이러한 원칙과 법도가 궁궐에 질서를 잡아 주며 그 정통성을 확고히 만든다.
결국에 반천 년 동안 도읍으로 작동하던 개경을 굳이 버림은 곧 새로 개창된 조선조가 그 땅에서 무언가 도모할 수 없게 막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실상 한양으로의 천도란 기반이 없는 전조(前朝)의 도읍에서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통성도, 기능성도 한참이나 떨어지는 이 땅에 다다랐을 때 무엇보다 개국의 주역들에게 중요했던 바는 곧 정통성이었을 터.
경복궁은 다소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공간이 구성되더라도 그 엄격한 법도에 맞추어 건설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나라 자체가 그랬다.
건조하고 냉정히 묘사하자면, 싸움에 아주 능하던 아주 장수가, 별다른 명분 없이 주군들을 참살하고 세운 국체다.
조선은 고려의 악폐습들을 무너뜨린다는 명분, 그리고 목적 위에 세워졌다.
고려가 불법(佛法)으로 쇠했으니 불교를 억누른다.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았으니 세금을 줄인다.
지방 호족들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세금을 거두고 가렴주구하였으니 지방 권력을 없앤다.
형제끼리의 왕권 투쟁으로 언제나 혼란하였으니 왕통의 종법(宗法)을 바로 세운다.
그 모든 명분이, 신생 체제인 조선의 척추를 구성하였다.
불교가 억압되면서 저세율로, 중앙 중심의 정치를 펼치는 관료들, 그리고 왕통의 종법을 확정이 하는 이유들.
그러한 명분들을 엮어 제도로서 가다듬고 그 위에서 정통성을 쌓아 올려 가야만 한다.
그러한 명분이 사라진다면 곧 왕조 또한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리니. 그 주요한 이데올로그였던 자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