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54
1천을 쫓는 2만.
부상당하고 지친, 수적 열세에 끊임없이 견제와 방어를 수행하고 혹시나 아직 숨어 있을지 모를 암살자를 감시해야 하는 1천.
적의 수뇌를 눈앞에 두었다는 흥분에 차서, 작은 쥐새끼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서 달려들어 오는 기세등등한 2만.
누가 보아도 불균형한 싸움이었다.
“폐하! 전방을 소규모의 오스만군이 막아서고 있습니다!”
“수는 얼마나 되는가?”
“약 1천 정도 됩니다!”
카간의 부상으로 속도가 늦춰진 틈을 타 그들을 우회한 오스만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뒤로 적을 면하자니 절망뿐이다.
그러나 몽골의 중기병 5백은 오히려 박차를 가한다. 서로 신호를 보낼 것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움직인다.
점차 선두로 향한 그들은 저마다 철퇴와 도끼, 칼과 창을 꺼내 든다.
카간은 그들이 무얼 하려는지 알았다.
“돌파하라!”
“예케 몽골 울루스를 위하여!!!”
가지런히 정련된 날붙이들이, 적들에게 충격량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도열되었다. 외침 소리와 함께 말들의 뜀박질이 더욱 빠르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그건 적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군세가 충돌한다.
―우지끈.
뼈가 골절되는 소리이기도, 창날이 부러지는 소리이기도 한 것들이 울려 퍼진다.
사람과 말이 서로 부딪혀 육편이 된다.
육신과 강철로 된 적의 성벽이 허물어지자, 카간은 그들의 포위망 속에서 내달려 나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난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무사와 그 뒤에 올라탄 카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선 병사 하나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고, 다시 철퇴를 휘두르며 오는 기사는 카간이 친히 활로 눈을 꿰뚫어 버렸다.
“저, 저쪽으로 간다!”
“폐하를 호위해!”
“이단자 카간이 도망친다!”
“어서 붙잡아!”
고함들이 뒤섞이는 혼란과 피 안개 속에서 병사들은 저마다 적을 찾아 죽였다. 뒤에서는 여전히 2만쯤 되는 기병대가 가까워 온다.
“폐하, 저를 꽉 붙잡으십….”
그리고 카간은 자신을 뒤에 태우던 금군의 몸에서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모가지에는 화살이 흉하게 박혀 있었다.
―핑.
급히 고개를 숙여 화살을 피하자 어느 재수 없는 튀르크인이 허벅다리에 대신 맞는다. 주위를 둘러본 뒤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호루크다슨은 직접 고삐를 쥐고 등자에 발을 올린다. 낙마했을 때의 틀어진 다리에 통증이 올라온다.
“이랴!!!”
구령 소리와 함께 말을 가볍게 발로 차자, 흥분한 놈이 달리기 시작한다.
비명 소리, 울음소리, 고함 소리, 악쓰는 소리, 피가 목울대 너머로 솟구쳐 꼴꼴거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카간은 달렸다. 몇 안 되는 호위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카간은 정신을 놓고 달렸다. 마치 달리는 것 외에는 삶의 다른 쓰임새가 없는 것처럼 달렸다.
그리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폐하.”
아락투무르의 목소리, 서글픈 표정.
호루크다슨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 * *
“카간은… 죽였나? 생포했나?”
“송구하오나 폐하… 놓쳐 버린 듯하옵니다.”
“추적하라. 반드시.”
메흐메트 2세 역시 이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멀지 않은 곳에 몽골의 본대가 있을 터이니 빠르게 물러나야 했다.
파디샤는 문득 피 맛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안의 살을 꽉 깨물었던 모양이다.
“카간을… 잡지 못한다면 모조리 목을 베어 버리겠다.
네놈이, 네놈들이 찾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리하겠다. 알겠나?”
분노로 흔들리는 파디샤의 눈을 본 이들이 겁에 질려 물러난다.
메흐메트는 다리가 잘린 몽골 병사 하나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말에서 내린 뒤 직접 그 두개골을 칼로 내리찍었다. 퍽, 퍽, 소리가 나는 것이 벤다기보다는 칼날로 패는 것에 가까웠다.
마침내 비명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주위의 장군들은 파디샤가 표출하는 순수한 본노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수색대 소수 외의 오스만군이 쿠찬으로 입성하니 시민들은 자신들의 구원자를 칭송했다.
누구라도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바지만, 무리하게 백양 왕조의 영토 깊은 속까지 파고들어 티무르의 강역에 닿았으니 오스만 2만 군세의 보급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쿠찬의 시민들은 제 손으로 문을 열어 환영한 ‘구원자’들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다.
어쨌건 회군할 자원을 얻었으니 파디샤의 군세는 다시 백양 왕조 내의 우호 세력들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전장을 몇 차례 휩쓸다 보니 약속되어 있던 서신이 배송되어 왔다.
―“…파디샤시여! 폐하의 가장 위대한 위업에 율법학자들과 모든 선량한 신앙인들은 기쁨에 차 폐하의 존호를 연호합니다. 파디샤시여! 폐하의 적들을 향한 단호한 처사에서 모든 사악한 자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모든 선한 자들은 안전히 보호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파디샤의 위명이 떨치지 않는 곳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동안 신실함으로써 율법과 도덕과 정의를 수호하고 강직함으로써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셨으니, 이제 진정 칼리프의 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제가 아니라 폐하인 듯합니다.
저, 아바스 가문의 알 무타와킬 2세는 이제 어떠한 미련도 없이 저의 가문에 귀속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지위를 페하께 바칩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파디샤로서뿐만 아니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서 지상의 신앙하는 자들을 다스리고 이끌게 되실 겁니다.
폐하와 폐하의 가문에 영광 있기를.”
기나긴 서신의 종장을 읽어 내린 메흐메트 2세는 천막 안에 모인 장군들에게 그를 펼쳐 보여 주었다.
옛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 후계자가 보내온 것이다.
이집트와 오리엔트 땅 모두가 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무릎 꿇었다는 징표.
드디어 온전히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계에서의 패권을 쥐게 된 것이 아닌가?
“율법학자들에게 이미 파트와(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슬람 법에 대해 내리는 해석)를 내리라 말했다.
몽골은 이단자다. 그들의 황제는 겉으로만 주님을 공경하며, 속으로는 저들의 사악한 토착 악마들을 숭배하는 위선자다. 그런 그가 몽골 제국 내 무슬림의 보호자를 자칭하니 마땅히 응징되어야 한다.”
메흐메트 2세도, 그를 듣는 장군들도 율법 해석에 대해 대단한 감흥을 느끼지는 않았다. 심지어 저러한 해석을 내린 율법학자들 스스로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내적 논리보다는 정치적 필요성인 법이다.
“파디샤께서 성전을 이끄신다!”
“파디샤께서 이단자를 징벌하셨다!”
그러니 어느 장군이 외치자, 다른 이들 역시 눈꼽 만한 신앙심을 끌어내어 따라 외친 것이 아니겠는가?
메흐메트 2세는 주위 장군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칭송하는 광경을 내다본다. 그중에는 카간의 군세에 섞여 들어가 있던 첩자들도 합류해 있었다. 그들이 이번 승리의 일등 공신인 만큼 그의 곁에 설 영광을 얻은 것이다.
뒤가 막혀 죽을 수도 있을 도박 수를 던졌다.
아직 백양 왕조의 숨통이 제대로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적대 세력들을 뒤에 두고 빠르게 전진하여 그들의 영토를 돌파했다.
몇몇 우호 세력들이 지원을 해 오기는 하였으나, 이런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서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일은 웬만하면 자살에 가깝다. 그러니 저들 역시 안심했던 것이고.
오직 카간을 죽이기 위해서 감행한 작전이었다. 적의 허를 찌를 유일한 수단이었다.
허나 실패로 돌아갔다.
파디샤가 군막을 나서자 장군들 역시 그의 뒤를 따른다. 재상들, 튀르크인 귀족들, 기독교도 출신 개종자들이다.
“저 백양 왕조를 보라. 우준 하산이라는 지도자가 죽자 마치 비를 맞은 불길처럼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저들의 휘황한 제국 역시 카간의 위엄이 깎이자마자 무너져 내리리라!”
메흐메트 2세의 연설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신실한 몇몇은 눈을 감고 쿠란의 구절을 암송하며 주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정작 메흐메트 2세의 표정에는 어둠이 스며 있다.
어떻게든 이번의 전공을 부풀려야 한다. 수십만의 몽골군 중 고작해야 3천 정도를 도륙한 작은 전투다. 결국, 그 정치적 상징성을 키우고 키워 성스러운 승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스만과 티무르를 매섭게 위협하던 백양 왕조는 머리를 잃자마자 순식간에 바스라졌다. 형제들끼리 제국을 갈라 먹고서 몰락을 자초했다.
마찬가지로 형제와 자식이 서로의 피를 보고서야 제위에 오르던 것이 오스만 왕조의 역사였다. 지금까지는 괜찮았겠지만, 몽골의 카간이라는 적수를 앞에 두고서도 분열된 제국이 존속할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해 파디샤는 비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파디샤 자신이 후계자를 직접 지정하고, 나머지를 쓸어버려야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장자 바예지드에게 권위를 몰아준 뒤 삼남 젬은 죽여야 한다. 그런 결단을 내리고도 왕조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메흐메트 자신의 권위가 충만해야 한다. 압도적인 업적으로 모두의 칭송을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몽골을 거꾸러뜨린다든가.
승리를 향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좌절되었다.
사력을 다해 다음 싸움을 걸어올 몽골인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어떻게든 저들의 제국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까?
메흐메트는 표정을 굳혔다.
언젠가 다시 두 황제의 자웅을 건 싸움이 이뤄지리라.
그때면 두 제국 중 하나는 반드시 거꾸러지리라.
* * *
한편, 몽골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말 위에서 천하를 정복하고, 무(武)로써 위엄을 떨침은 옛 칭기즈 칸 시절부터 칸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이 아니던가?”
“폐하께서 굴욕적인 패전을 당하셨다니. 과연 아시테무르 황자께서 더 카간에 적임자였던 게 아닌가?”
이내 카라코룸까지 전달된 카간의 패배에 대해, 숱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자신이 직접 군공을 세우지 못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리어 참패를 당하여 겨우 목숨만 살아 돌아왔다니.
“결국 자질 부족이군.”
은밀하게 속삭여진 이 한마디가 새로운 카간에 대한 평가를 요약했다.
정복자가 세운 제국에, 군재가 없는 후계자가 나왔으니 어떻게 이 제국이 백 년을 넘기고 세월을 견디겠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연히 에센의 다른 황자들이 퍼뜨린 이야기다.
그들 모두가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고 한때 선황의 수족들이 아니었던가?
오이라트 출신으로 취약한 카간위에 올라 믿을 이가 많지 않았던 에센에게, 데리고 있는 아들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길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만큼 다른 황자들 역시 그 권위와 업적이 남달라 숙청과 배제가 어려웠다.
에센이 생전 퇴위를 결행한 뒤 직접 그들의 세력을 억누르는 게 답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언제 아들들에게 암살당해도 모를 일이니 장남이자 카간을 전장으로 떠나보낸 에센은 식음료의 섭취까지 모조리 신중을 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간의 참패 소식이라니?
―“상황은 나날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카간 폐하의 패주 이후로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꺾였습니다. 기존에 점령되었던 티무르 제국의 도시들도 다시 저항을 이어 가니 일단 헤라트에 대한 참수 작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전선의 상황에 끼치는 영향도 좋을 리가 없다. 다름 아니라 자신들의 군주가 생각지도 못한 패배를 당했으니 일선 병사와 지휘관들의 심정이 흔들리지는 않겠는가?
빠르게 빈틈을 파고들어 와 카간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장의 실력이 대단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을 전장으로 만들었고, 끝내 몽골의 심장을 물어뜯을 뻔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오스만 황제의 친정이었던 듯합니다.”
아락투무르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적장이 곧 메흐메트 2세 본인이었고.
그 사실 때문에 호루크다슨의 실책이 더 두드러지기도 했다. 두 황제가 맞붙어 한쪽이 수치스럽게 패주하는 극적인 장면이 어떻게 모두의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겠는가?
온갖 뜬소문들이 돌아다닌다. 카간이 목숨을 구걸했다느니, 스스로 제국의 강역을 떼어 주겠다 약속하고 겨우 풀려났다느니 하는.
에센은 그 소문들의 배후를 꾸준히 캐고 들어갔다. 어느 대신이, 귀족이, 상인이 어느 황자의 끄나풀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런 작업의 와중에, 에센은 자신의 조카, 선대 카간의 아들 보르지긴 마르코르기스에게 밀서를 보낸다.
운 좋게도 그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티무르 제국의 동부를 치고 있으니 서찰이 닿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마르코르기스가 조심스럽게 선황의 밀서를 풀어 보니.
…거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패배하라.”
위대한 제국이 멸망하리라 (4)
아버지가 죽을 때 자신이 살았던 건 운이 좋아서였다.
에센이 아버지 토크토부카 칸을 살해하러 찾아왔을 때, 다른 모든 이들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사지가 잘려 나갈 때, 그는 5살쯤 되던 작고 어린 몸으로 수레 밑에 기어들어 가 숨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저 악마들이 어서 시야에서 사라지기만을 빌었다. 이 무섭고 잔인한 순간이 어서 끝나 주기만을 바랐다. 한참이 지나 모든 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그와 마찬가지로 숨어 있던 궁녀 한 사람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데려가 주었다.
곧 보르지긴 마르코르기스는 몽골의 황자가 아니게 되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에센 칸이 카간위에 스스로 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을 지나서야 알았다.
그날의 그를 살린 행운은 수레 밑에 잘 숨어들어 들키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철두철미한 에센의 병사들이 카간의 황자라는 요인을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놓칠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에센의 여동생이었던 것이 진짜 행운이었던 것이다.
성인이 된 마르코르기스는 아버지의 원수이자 외삼촌인 위대한 카간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고, 정권의 안정성을 과시하고자 에센은 그를 중용하였다.
그렇게, 29년.
예케 몽골 울루스의 강역이 한 뼘씩 늘어날 때마다, 에센의 명성이 치솟을 때마다 그는 마음속 한편에 여전히 끼어 있던 욕심과 희망을 버렸다.
에센은 점차 칭기즈 칸의 진정한 계승자, 아니면 그 환생, 현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 누가 칭기즈 칸의 현신에게 칼을 들이대고 그에게서 카간위를 찬탈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제국이 점차 공고해지니만큼 그 역시 ‘옛 황금씨족’인 보르지긴의 후예로서, 황자로서 가진 허영을 버려야 했다. 대신 새로운 카간 폐하의 신하이자 그의 장수로서 살아가는 나날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기에, 카간의 참패를 들었을 때 보르지긴 마르코르기스는 한 줄기 희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카라코룸에도 전달되었다면 즉시 다른 황자들이 움직일 게 뻔하다. 물론 태상황께서 살아 계시기에 어느 정도 선에서 행동이 제약되겠지만 제국의 혼란은 어쩔 수 없으리라.
만일 이 혼란과 분열이 이어지다 보면, 그리하여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이 무너지다 보면… 그들 이외에 가장 정통성이 높은 자신에게 카간위가 주어지는 상황도 기대해 봄 직하지 않을까?
그의 가장 가까운 부관들은 이미 마르코르기스가 카간의 패배 소식에 띈 은근한 들뜸 상태를 감지하고 몸을 사렸다.
지금 몽골군의 사기가 크게 꺾인 상황이다.
급히 아락투무르는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급히 말 머리를 돌려 헤라트를 함락시키고 술탄을 죽였지만, 고작해야 다 무너져 가던 티무르의 숨통을 끊은 데 불과하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그들을 지배할지 모를 카간의 지도력이 의심받은 데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혹시 모른다. 내게도 기회가….
―“패배하라.”
…라고 생각할 때 태상황으로부터 전달된 밀서는 단꿈을 깨었다.
그는 다시, 카간이 보내온 서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구절을 훑었다.
―“이제 계획이 앞당겨질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장악이 끝나자마자 백양 왕조와 오스만국을 친다. 그리고 너는 파디샤와의 전투에 앞장서서 나아간 뒤 패배하라.”
에센은 마르코르기스에게 정치적 자살을 명령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나머지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려간다.
의도는 분명하다.
카간의 패배를 묻어 버릴, 다른 패배를 요구하고 있다.
카간위의 안정을 위한 제물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헤라트에서 파르스 지역의 잔당 토벌이 끝났는지를 물어 옵니다. 본대는 백양 왕조의 영토로 서진할 준비를 마쳤으니 합류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그래… 머지않아 합류한다고 전하라.”
불쑥 들어온 부관의 말에 놀라 밀서를 접으며 말한다. 젠장, 시간이 없다. 곧 있으면 백양 왕조, 그리고 오스만과의 결전이 벌어지게 생겼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왜 하필 이반도, 아락투무르도 아니고 마르코르기스 본인에게 명령을 했을까?
뻔하다. 상징성 때문이다.
옛 카간의 자식이자 보르지긴의 자손인 마르코르기스 역시 메흐메트 2세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으니, 고작해 봐야 작은 호위대 수준의 손실을 겪은 카간의 ‘사소한 실책’은 별 것 아닌 것으로 묻어 버릴 수 있다. 거기에 겸사겸사 옛 황실 혈통에 대한 견제까지 가능하고.
그는 오늘만큼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보르지긴’이라는 네 음절 단어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내게 무슨 선택지가 남아 있나?’
한 가지 떠오른 탈출구는 ‘변절’이다. 명령에 따라 적당히 메흐메트 2세와 싸우러 가는 척 항복하고 마는 것이다. 분명 오스만의 파디샤는 몽골 제국의 황실 일원이자 카간을 견제할 좋은 카드인 자신을 후히 대접하여 줄 것이다.
이 방책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뿐인데.
예케 몽골 울루스는 강하다.
뭣하러 저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카간의 군대를 습격하러 갔겠는가? 대등한 대결에서의 승산이 크지 않으니 참수 작전을 통하여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시체 위에서 승리를 거두겠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기껏 에센의 제안을 배반하고 오스만국에 가담했는데 몽골의 침공에 오스만이 멸망해 버린다면 천당 이외에 더는 갈 곳이 없다. 유럽 역시 얼마 전에 몽골과의 전쟁을 끝냈으니 더 갈등의 여지를 두고 싶지 않아 그의 망명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오만가지 선택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