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55
지금의 군세를 쥐고 반란을 일으킨다?
앞과 같은 이유로 기각. 충분히 제국의 군대가 자신을 제압할 수 있을뿐더러, 휘하의 군세가 마르코르기스의 말에 순순히 따라 주리라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그래 봤자 전(前) 황자의 반란으로 카간의 패배가 묻혀 버린다는 결과는 같다. 분열될 뻔하던 제국은 반란에 맞서 단결하고 진압 과정에서 카간은 권위를 되찾으리라. 아마 에센은 그런 가능성까지 내다봤음에 분명하다.
그냥 전달받지 못한 척 무시하는 방법도 있다. 메흐메트 2세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버리는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이런 계책을 아락투무르나 다른 측근들에게 전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가 패배를 망설인다면 에센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파멸시키리라.
게다가 일단 메흐메트 2세에게 승리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상대가 명장인 것도 그렇지만 지원이 충분할 가능성도 만무하니.
선택지들이 하나둘씩 가로막힌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랍어, 헝가리어, 한어, 만주어, 페르시아어로 된 상소들을 부재 중인 카간 대신 처리하는 에센의 냉혹한 눈매가 그려진다.
태상황은 머릿속으로 이미 대계를 그렸다. 그 끝에는 마르코르기스의 철저한 파멸이 끼어 있다. 누구도 그를 바꿀 수는 없다.
“지, 지필묵을 가져오라…. 카라코룸으로 보낼 답신이 있다….”
그래도… 자신이 대계에 따른다면 에센이 자비는 베풀어 주리라.
마르코르기스는 죽거나, 사라져야 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 * *
오스만과 백양 왕조를 향한 확전이 결정되자 다른 지역들, 캅카스와 유럽에서도 몽골군이 점차 경계를 취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력군이 대부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 묶여 있고 무엇보다도 카간이 이 전선에서 패배를 겪은 만큼 주된 전장은 이곳이 되어야 했다. 다른 접경지대들에서 몽골은 일단 수세적인 입장을 취할 뿐이다.
머잖아 티무르 제국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마지막 술탄과 아미르가 무릎 꿇고 자비를 구걸하며 자치권을 약속받았다. 이제 이곳도 몽골이었다.
제국의 군세는 오스만의 침공에 곤란을 겪는 백양 왕조의 각 세력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들 역시 대부분은 이미 몰락하거나 세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메흐메트 2세의 정벌이 생각보다 훨씬 단기간만에 이뤄진 것이다.
“카간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 선조들의 영토를 되찾도록 힘을 보태어 주신다면, 카간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니 눈앞의 술탄들 역시 결국 영토와 군사를 대거 상실한 쭉정이들일 뿐이다. 몽골이 승리하면 그 아래서 자치권 같은 부스러기라도 얻으려는 한심한 작자들.
“그대들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다.그대들은 이제 예케 몽골 울루스의 일원이다. 감히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온 메흐메트 2세를 징치한 뒤 그대들의 처분과 보상 역시 결정하겠다.”
허나 이 정도 한심함 정도는 감내해 주어야 제국의 카간이 아니겠나.
저런 꼭두각시들이라도 세워 두는 게 현지 지배에는 훨씬 편리하기도 하고.
이미 에센과 호루크다슨이 세운 계획은 훨씬 압축적으로, 훨씬 거대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티무르 제국을 일단 정리하고, 여유가 생기면 백양 왕조를 친 뒤, 언젠가 오스만국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정도로 진행되던 전쟁 계획은 이제 ‘반드시 백양 왕조를 넘어 오스만국까지 거꾸러뜨려야 한다.’라는 강경한 기조로 전환되었다.
카라코룸에서 에센은 제국의 자원을 아낌없이 이번 전쟁에 쏟아붓고 있었다. 처음에 넉넉히 30만 정도로 잡고 있던 토벌군에는 이제 5만, 10만씩의 머릿수가 더해진다.
물론 오스만 측의 군대 역시 적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전화 속에 휩싸여 있던 유럽에 대한 경계가 줄어든 만큼 25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백양 왕조의 영토를 쓸어버렸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전투 인력들로만 나라를 세워도 모자라지 않으리라.
“마르코르기스.”
“예, 폐하.”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쳤는데 그 시선 교환은 카간이 잠시 눈빛을 흐리면서 중단되었다.
카간도 알고 있다.
“그대는 아제르바이잔으로 진군하라. 10만의 병사를 줄 테니 파디샤가 이끄는 본대와 맞서라.”
“폐하의… 하명하신 바에 따르겠습니다.”
10만, 결코 적은 수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대군이라 할 수 있는 숫자다. 40만이 넘는 전 병력에 비하면 적어 보이지만 작은 나라 하나는 휩쓸 수 있는 규모다.
허나 파디샤의 본대를 압도할 수는 없으리라.
메흐메트 역시 사력을 다했을 테니.
군사를 받자마자 마르코르기스는 곧바로 진군한다. 그리고 의외로 손쉽게 해당 지역들을 통과해 낸다. 저항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불탄 밭과 텅 빈 민가들을 본 그는 곧바로 깨닫고 만다.
아부 사이드를 죽인 그 전술을 반복하려는 것이다.
티무르를 재통합하던 아부 사이드는 우준 하산을 물리치기 위하여 출정하였고, 병력적 열세이던 우준 하산은 결국 청야 전술을 펼쳐 그를 아제르바이잔 인근의 고원 지대 깊숙이 끌어들인 끝에 죽여 버렸다. 대군을 상대로 한 지연전은 우준 하산의 주특기였다.
그리고 이제 백양 왕조와 우준 하산의 자리에는 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가, 티무르 제국의 아부 사이드 대신 마르코르기스 자신이 놓여 있다.
그 구도를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반복하는데, 이 지역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면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빤한 수를 쓰는가?
생각해 보자.
지난 카간의 패배 경위를 들어 보면 메흐메트 2세는 몽골의 상황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 전장의 혼란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기는 하나 암살자와 세작까지 카간의 곁에 성공적으로 심어 놓았다.
그렇다면 그가 작금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을까? 에센과 몽골 조정의 반응에 대하여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얄팍한 인간이 생사를 걸고 적진 한가운데를 직접 뚫고 들어와 적의 수뇌를 노리는 대범한 계획을 짤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자신을 쫓아오는 게 카간 본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버림패라는 사실을.
만일 카간이라면 작전을 눈치챘다 해도 쉬이 후퇴할 수 없다. 한번은 기습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두 번째에도 도망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위신의 추락이 기다릴 테니.
그게 아니라 버림패라면,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언제 후퇴해야 하지?’
지금의 마르코르기스처럼.
그는 이기기 위해 출정한 게 아니다. 대군을 내주었지만, 그는 ‘짜고 찐 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10만을 모조리 말아먹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 정도나 되는 대군을 끌고 갔어도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는 장면 연출을 위함이란 말이다. 저 10만은 극적인 순간을 위한 소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사이엔 마르코르기스가 이상 행동을 보일 시 즉시 죽일 준비가 된 카간의 첩자들도 있을 테니 이 대군을 데리고 메흐메트 2세에게 낼름 무릎 꿇을 수도 없다. 그 정도 안전장치는 갖춰진 게 당연했다.
지금쯤 ‘진짜 전투’는 이곳이 아닌 백양 왕조와 오스만 외곽 영토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일단 노려야 할 머리가 꼭꼭 숨어서 마르코르기스의 추적 아래 놓인 한, 몽골로서도 일단은 남은 군대와의 야전과 점령전 외에는 별수가 없을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1481년의 겨울이 찾아오자, 마르코르기스는 본격적으로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일단 그를 쫓아 아제르바이잔의 고산 지대 남쪽 끝까지 왔지만, 슬슬 군량이 떨어져 간다.
아부 사이드가 그랬듯이.
말이 10만이지 도시 몇 개가 움직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도시의 시민들조차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지는데 적진을 오가는 10만은 뭐가 크게 다를까?
조선으로 치자면 부산에서 의주까지 갔을 거리를 통과하자, 병사들도 슬슬 지쳐 갔다. 군마에게 먹일 건초도 점차 줄어 간다. 후방의 물자 보급로를 차근차근 끊어 놓는 것은 분명 메흐메트 2세의 솜씨였다.
아부 사이드는 인마(人馬)를 먹일 것이 없어 자기 군마까지 굶겨 죽이며 퇴각하다가 대패하였다.
물론 그 정도 참패를 당하진 않겠지만 마르코르기스 역시 퇴각 시점을 잘 잡아야 했다. 적당한 손실, 적당한 패배를 당할지언정 자기 자신과 최대한 많은 병사를 살리는 길을 택해야 했다.
일종의 줄타기다. 최소한의 손실과 최대한 효과적인 패배 사이에서의 저울질.
패퇴의 오명을 얼마나 쓰느냐, 자신의 명예를 얼마나 무너뜨리느냐, 그 무게를 달아 보는 일.
그도 사람인지라 피해는 최소화하고 싶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될 때의 이야기다.
그는 낙오병의 수가 하루에 세 자릿수 초입이 될 때쯤 결단을 내렸다.
“돌아간다.”
무지한 이들은 안도하였고, 사태를 아는 이들은 표정을 굳혔다.
지금부터가 진짜임을 누구든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친 채로 돌아가는 10만, 적지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10만.
어딘가에는 분명 복병이 있으리라. 그들을 죽이려 준비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적어도 5천에서 1만.’
마르코르기스는 그 정도의 희생이면 적당하리라 생각했다.
학살이라 부를 만한 숫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전투’에서의 죽음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들이 그들을 향해 쇄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마르코르기스는 안도했다.
이제 끝낼 수 있다.
위대한 제국이 멸망하리라 (5)
마르코르기스는 주위를 둘러본다.
적은 얼마나 될까? 10만? 아니면 20만?
깃발의 수로, 함성이 들려오는 범위와 언뜻언뜻 드러나는 적병의 머릿수로 힘겹게 가늠해 보았다.
아마 15만은 넘기고, 해 봐야 20만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리라.
함성 소리는 좌우 전부에서 들려왔고, 그들은 당연히 그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으리라.
마르코르기스 역시 손쉽게 놓쳐질 생각이 없었으니 잘 맞는 조합일까.
그에게는 무려 패배의 의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어떻게 자신의 명예에 먹칠해야 할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해왔다.
꽤나 음울한 고민이었다. 마치 자살 방법을 고민하는 망국의 군주와 같은 꼴이 아닌가.
그에 비하여 선택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마르코르기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적들의 공세에 후위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구원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1백의 구원대를 꾸려 뒤로 향하겠다.
너희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어 우호 지대까지 후퇴하라. 후에 합류하겠다.”
“…네?”
“1만의 후위보다 나머지 9만의 목숨이 더 중하다.”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의 군대가 조금 굶었을지언정 상황이 군량이 다 떨어진 것도 아니고 끼니를 조금 줄였을 뿐이다. 보급이 끊겼다지만 아부 사이드의 티무르 제국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대규모 탈영이 나올 적진 만큼 깊숙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살아 나가고자 한다면 충분히 살아 나갈 수 있다. 하다못해 5천만 동원하더라도 1만을 포위한 병력을 흔들 수는 있다. 그런데 1백 명?
자살이다.
장수 몇몇은 그 뜻을 알지 못해 항의했으나 또 다른 몇몇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말에 수긍하였다.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마르코르기스와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들었던 이들도 많았다.
침묵하는 그들이 카간의 세작이었다.
“그대들은 하나같이 유능한 장수들이다. 병사들의 생목숨을 살리고 우리 점령지로 돌아가 예케 몽골 울루스의 또다른 전투를 위하여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에센과 호루크다슨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마르코르기스가 살인멸구되는 편이 생환하는 편보다야 한결 마음이 편할 테니,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니 말리지 않는다.
합리적이면서도 비정한 결론이었다. 허나 이 손으로 죽인 사람이 얼만데 어찌 자비를 구할까.
약간의 실랑이 끝에 마르코르기스는 결국 9만을 앞서 보낸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어째서 주군이 자신들을 남겨 두고서 사지를 향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르코르기스는 정말 기병대 1백 명만 모아 뒤에 처진 채 공격받는다는 후위를 향하여 달려 나갔다. 1백 명의 표정 또한 결코 좋지 않았다. 모두가 사실상 마르코르기스와 함께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위에 근접해 가자, 서로 다른 깃발이 뒤엉켜 다투고 있었다. 아군의 말과 사람이 자신보다 두세 배는 더 많아 보이는 병력에 둘러싸여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아군들의 얼굴은 처음에는 원병의 등장에 희망을, 다음에는 그 하찮은 규모의 분노를 띠었으나, 이제 마르코르기스의 얼굴과 깃발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서히 그 속의 감정이 당혹감으로 바뀌어 간다.
지휘관이 직접 왔다. 한 줌의 기병과 함께.
“저기 대장기다!”
“잡아라!!!”
튀르크인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즉시 수백 기의 기마병이 방향을 틀어 마르코르기스에게로 진격해 온다.
자살을 향해 가는 1백 명의 기병들은 칼을 뽑았다. 그 네다섯 배로 보이는 이들 역시 각자 철퇴와 곡도를 휘두르며 내달려 온다.
“속도를 줄이지 말라!!!”
마르코르기스의 떨림 가득한 목소리. 그러나 그 자신의 말을 솔선수범하여 지키듯 상대방의 돌격에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간다.
거기에 주춤하는 튀르크인들을 향하여, 오른손으로 창을 던졌다. 적의 투구에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가해짐과 동시에 쓰러지고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듯 뛰쳐 오는 기사를 다시 왼손의 철퇴로 가슴을 올려쳐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나는 토크토부카 칸의 아들 마르코르기스다!”
오른손에는 장검 하나를 빼 든 채, 왼손으로는 피 묻은 철퇴를 빙빙 돌리며, 그는 주위를 둘러싼 튀르크인들에게 말했다.
“몽골 제국의 황금씨족이며, 내 피에는 옛 칭기즈 칸의 피가 흐른다! 나를 죽일 자는 죽이러 와라!!!”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신체 일부라기보다는 광물질처럼 빛났다. 마치 분노라는 감정을 순수하게 정제하여 압축한 것만 같이 검붉은 빛을 띠었다.
새로 다가온 적병 두셋의 머리를 철퇴로 찍고, 목 부근에 칼을 찌른다. 갑옷들 속에서 우그러지고 베어진 시체들이 하나씩 낙마한다. 화살 하나가 어깨에 와 부딪히기에 휘청이다 이를 악물고 충격량을 버틴다.
다시 달려들어 오는 적병들을 보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에센이 아버지를 죽이고, 다시 나를 죽이려 한다.
마침내 내가 죽음으로써 그의 제국이 완성되리라. 내가 마지막 단추다. 내가….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기울었다. 이번엔 운 나쁘게도 마갑 사이를 비집고 말의 어깨에 화살이 박힌 모양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르코르기스는 말을 버렸다.
두 발로, 보다 낮은 곳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자 수많은 이들이 서로를 죽이려 말 위아래서 아등바등 다투는 꼴이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듯했다.
“사령관! 위험합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큭, 꺼륵….”
자신을 걱정하여 달려온 병사 하나가 등에 칼을 맞았다. 다른 이들 역시 한 사람이 두셋을, 서넛을 상대하다 죽었다. 어느새 전장의 한가운데에 마르코르기스는 서 있었다.
몽골인들이 죽고 있었다.
에센이 바라던 패배의 장면이었다.
“너를 죽일 자는 오라고 했느냐?”
웬 바람 소리에, 날아오는 창을 피하며 시선을 돌린다.
“내가 너를 쓰러뜨리겠다.”
높이 들린 화려한 깃발들이 그에게 가까이 온다.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온다. 그와 마찬가지로 피 칠갑을 한 채, 흰 말에 오른 채 다가온다. 그가 창을 던진 남자다.
파디샤.
그가 손짓을 하자 주위의 몽골군들이 하나씩 정리되어 간다. 마치 마르코르기스와 메흐메트 2세 주변 공간을 ‘청소’하는 듯하다. 저 몽골 병사들 역시 약한 이들이 아닐진대, 파디샤가 부리는 이들 역시 최정예가 분명했다.
“유능한 장수들을 두었더군. 10만을 몰살시킬 줄 알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7만 이상은 살려 보내게 되겠어.
일부러 지친 병사들만 후미에 두고 음식을 적게 준 건가? 나머지를 배불리 먹이고 말일세. 애초부터 죽이려고….”
“그렇다면 어쩌려 하십니까.”
“어쩔 게 뭐가 있겠나? 자네의 의지도 아니었을 텐데.”
메흐메트 2세는 코웃음을 친다.
역시나 에센의 계획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주위에는 둘과 소수의 호위 병력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과의 대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예의 청소가 끝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자네, 죽을 생각이로군. 자포자기인가?”
한가로운 듯 말하지만 그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언제 마르코르기스가 돌진해 찔러 들어오더라도 대응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과연 스물한 살에 코스탄티니예를 제 것으로 만든 정복자 황제답다.
그는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물건인 양 자신의 칼날을 즐거이 내다보면서 묻는다.
“항복할 생각은 없나?”
“폐하, 저는 이길 가망이 있는 쪽에만 가담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 정당한 카간위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의 태상황 폐하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르기스는 칼을 고쳐 쥐었다.
“이 자리에서 죽이시지요.”
“다 틀렸군.”
메흐메트 2세는 활짝 웃더니 갑자기 말에서 내렸다. 다른 호위병 몇몇도 따라서 하마하여 그를 따랐고 나머지는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파디샤의 주위로 적이 오지 못하게 살핀다.
“자네의 말은 다 틀렸어. 우선 우리는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할 걸세. 그리고….”
마르코르기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파디샤는 가뿐하게 마르코르기스의 어깨를 때리고 발 기술을 걸어 그를 넘어뜨린다. 죽음을 각오하던 그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자, 메흐메트 2세는 쪼그려 앉으며 말한다.
“자넬 죽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왜 카간 좋으라고 분란의 씨앗을 없애 주겠나?”
마르코르기스는 세게 들어오는 주먹질을 느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자 그는 마차에 누워 있었다.
아침이었고, 그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강역이 놓인 동쪽으로. 마부도 자세히 보니 몽골인 패잔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