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7
그러나 그 사실에서 허망함을 느끼든, 소외감을 느끼든, 아랫것들은 무기를 쥐었으면 응당 나가서 싸워야 했고. 그렇게 수도 없는 목숨들이 나가서 죽었다.
청계천에 시체가 대여섯 구씩 떠내려오는 것도 이제 예삿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조금만 늦게 떠내려왔으면 가짜 주상의 시체는 발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싸움. 도성 곳곳에 보이는 핏자국은 지워질 기미가 없다.
주상을 사로잡고 끝나는 단기전이 될 가망이 영영 사라지자, 두 대군 모두 경기, 충청, 황해 등 인근의 병력들까지 끌어 모아야 할 판이 되었다.
그렇게 무장한 사람들이 한양을 향해 올라가 싸움에 합류하려 하니. 경기권 전역의 치안이 불안정해진 것도 당연지사.
그러니 거기에 있을 소련인들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들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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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기 서부, 충청 북부에 파견한 인사들 상당수가 기한 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혁명군사평의회 의장 조지프 푸츠가 서두를 떼자 인민위원들 사이에서 탄식성이 들려왔다.
원산에서는 한양과 경기에 가 있을 조직가들에게서 연락이 두절되자 초조함에 떨어야만 했다.
드디어, 전란이 시작됐다. 뭐가 어쨌든, 변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함길도 지방에서의 인적 이동도 뭔가 이상하다. 병사들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원산 방향을 향한 것인가 싶어 경계태세에 들어갔지만, 현재까지의 동향만 보아서는···
이 나라의 중심을 노리고 있다.
그 외에도 병장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인근 지방 토호들이 농노들을 소집하고 있다. 이런 정보들만 산발적으로 귀에 들어온다.
뭔가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만 알겠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정보도, 대응책도 모르겠으니 소련 정부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특히, 제 손으로 프로파간다용 요원들을 보냈던 블레어는 매일 휴게실에서 서성였다. 이미 비워진 재떨이들을 뒤져보며 꽁초가 남아있나 살피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동양학 전문가들을 소집해 자문을 구한 결과도 부족했다. 기껏해야 중국학이나 일본학 전공자밖에 없다 보니, 조선에 대한 지식은 매우 간접적이었다.
나온 결론은 고작 이것.
“확실한 것은, 고려왕국과 조선왕국에서 발생한 지방적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반란세력에 대한 전 지역적 호응이 있으며, 중심부에서의 혼란이 가중되었을 시에는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수식어가 붙었지만 결국 ‘모르겠는데요?’라는 뜻이었다.
“국경 지방의 수비를 더욱 단단히 하고, 정보 수집에 박차를 가해야 하오.”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 그러나 트로츠키가 던질 수 있는 말도 이뿐이었다. 어차피 세부적인 논의는 실무진과의 회의에서 할 것들이고···
그렇게 이런저런 안들을 만지작거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인민위원들은 빠르게 일어나 회의장을 벗어났다. 다들 고민거리를 어떻게든 털어버리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트로츠키는 그러나, 무질서하게 퇴장하는 듯 보이는 인민위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미묘하게 두 무리로 갈라져 있다.
정말로 조선왕국 내부의 내전이 현실화되자, 봉합되었다 여긴 논쟁이 다시금 비져나오고 있다.
조선과의 전면전이냐? 아니면 화친이냐?
트로츠키는 안다. 전면전만은 안된다. 제한된 병력과 장비들을 가지고 국가 하나를 평정한다? 트로츠키는 16세기의 코르테스가 아니고, 조선도 석기문명에 머물러 있던 아즈텍이 아니다.
내란으로 지친 조선에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하더라도··· 어떻게 통치하겠는가? 1만 5000명이 인구 수백만의 봉건왕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가능성을, 트로츠키는 전혀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이지만, 코르테스에게는 식민지를 지원해줄 스페인이란 본국이, 카를 5세라는 유럽 최강의 후원자가 있었다. 원산··· 아니 소련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여기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와~ 쟤네 서로 죽이네?’하면서 내전을 관람하는 게 제일이다. 휘말려들지만 않으면 다행이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트로츠키는 몰래 베란다로 빠져나와 주머니 속에 숨겨둔 담배갑을 꺼냈다. 블레어가 발견한다면 눈이 벌게지겠지만 이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겨둔 트로츠키의 보물이다.
막 불을 붙이고 입에 물어 한 모금을 빨 때···
“트로츠키 동지!”
블레어가 황급한 얼굴로 달려오다가 트로츠키의 손에 들린 장초를 보고 약간 표정이 굳었다.
“지난번에 여쭸을 땐, 분명히 다 떨어졌다고···.”
“아, 아니 이건··· 아무튼 뭔가?”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아까운 담배를 바다로 던져버린 트로츠키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블레어도 추태를 잊어주기로 한 듯,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조선 국왕이, 망명했습니다.”
담배 한 개비 아까워하던 마음이, 트로츠키의 머릿속에서 싹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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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자의 난 (1)
신숙주와 일행들이 천신만고 끝에 원산에 다다랐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사방에 깔린 철조망이었다.
참호, 모래주머니, 철조망, 군데군데 박힌 초소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기다란 국경선. 한양을 둘러싼 높다란 성벽보다 초라한 위용이었으나. 낯선 문물과 무장 보초들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게 철조망의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 삼엄해 보이던 국경선에도 입구가 있었다.
‘출입국관리소’. 저곳을 지나면 이국(異國)이다.
나랏님을 데리고 원산으로 향한다. 그 결정이 주는 무게감은 언제나 컸으나, 지난 며칠 동안 닥쳐온 순간순간의 불안감은 지금 당장 너머의 일을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선비들은 모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시리 고삐를 쥐었다 놓았다 했고, 의관을 고쳤다.
눈앞의 초소가 삼도천이라도 되는 것마냥.
“···언제까지 이곳에 서있을 것인가?”
그러다 겨우, 주상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에야 선비들은 정신을 차리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역사에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사직을 팔아 넘긴 배신자로 남을지 모른다.
그 무게감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실려 있었고.
마침내 초소에 다다르자 신숙주는 덜덜 떨며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미리 써 놓은 서신을 보초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초가 서신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전달을 위해 안쪽으로 돌아간 지가 일각, 이각…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고 분명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기다리는 시간은 지난 며칠 간 이곳으로 향해온 여정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이, 이제 어쩔 겐가?” 하위지가 신숙주에게 귀엣말로 속삭여 온다.
“뭘 어쩌긴 어째?”
“서신을 받았는데 아직도 답이 없지 않은가? 혹시라도 저들이 우릴 주살하려고 오고 있다면···”
“주상께서 들으시겠네. 그 입 다물게!”
그러나 신숙주의 일갈에도, 돌아온 것은 하위지의 영 시원찮은 표정이었고, 다른 이들의 표정도 불안과 초조함에 가득 차 있었다. 신숙주는 그들을 속으로 딱하게 여겼지만, 거울이 있었다면 자신도 똑같은 얼굴임을 알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잔인하도록 기나긴 시간이 이어지다,
-빰! 빰! 빠밤!
뭔가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기다림은 끝났다.
“헉, 헉, 헉···젠장, 아, 아니··· 조, 조선의 국왕 전하를 화, 환, 환영합니다!”
원산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의 더듬거리는 환영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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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체가 발칵 뒤집힐 소식.
신숙주의 서신이 한창 진행 중이던 소련인민위원평의회에 전달되자,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바빌로프가 입을 열자,
“다···당장 환영식을 열어야 합니다···. 군, 군, 군주를 동양에서는 어떻게 모, 모시는지?”
바로 회의 취소가 결정되었다.
“일단 군악대부터 불러와요! 그리고 우리 다 나가야지! 딴 건 나중에 생각들 하라고요!”
그리고 블레어의 의견에 따라 급히 소집된 군악대가 엉성하게 행진을 시작했고, 트로츠키와 인민위원들이 오도 열도 못 맞춘 채로 황급히 걸어갔다. 아니, 뛰어갔다.
그렇게 출입국관리소가 가까워지자, 장관진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고, 혁명군사평의회 의장 조지프 푸츠는 몰아치는 긴장감에 갑자기 쓰러져 실려가야만 했다.
이 엉성하고, 바보 같은 환영식은, 당연하게도 선비들에게 ‘이딴 게··· 나라?’라는 의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주상 전하를 알현하면서 절도 올리지 않고 고개만 꾸벅 숙이자 의구심이 가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저 꼴을 보면 노력하는 게 눈에 들어오니 안쓰러울 지경이었지만.
“조선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 의장이자,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인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라고 합니다. 모쪼록 소련에서의 체류가 만족스러우시길 바랍니다.”
“···소련? 이곳은 원산이 아니었소?”
돌아온 질문을 듣고 난 트로츠키는 그제야 조선국왕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금 겁먹은, 그러나 아주 호기심이 많은.
무엇보다도, 아주 어린.
“저희가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겠군요···.”
긴장 풀린 트로츠키의 얼굴이 인자한 할아버지의 그것처럼 누그러졌고, 조선국왕 이홍위의 얼굴에서도 겁먹은 기색이 점차 지워져 갔다.
정말, 서로 나눌 말이 많은 두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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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전하가 대군들의 칼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각 지방에 전해지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번 소식이 전달되면, 메뚜기떼가 휩쓸고 간 것처럼 온 동네가 난장판이 되었다.
대군들 중 승리하는 쪽에 가담할까 각을 재던 영호남과 양계(兩界, 함길도와 평안도를 통틀어 부르는 말)의 지방 수령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낙향한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꾸려 한양으로 향해야 한다는 과격론이 퍼졌다.
누가 보아도, 지방의 민심은 급격히 악화되는 상황.
그리고 그 중심에 김종서와 대신파가 있었다.
“전하께서 승하하셨으니, 이제 누가 대임(大任)을 맡아 아국을 이끌어 나가겠습니까?”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이 술을 따르며 말하자, 김종서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직, 제대로 제(祭)조차 올리지 못했거늘··· 어찌 대임의 향방을 논할 수 있겠는가? 신하라면 마땅히 주군의 돌아가심에 눈물을 흘리고, 그 뒤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겉치레다. 이미 금성대군이 그 후보로 낙점된 지 오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김종서의 머릿속도 앞일에 대한 생각으로 온통 어지러웠다.
‘미친 놈들···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놈들···.’
주상의 죽음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생각한다면, 아마 우발적인 죽음이었으리라. 아랫것이 뭣도 모르고 칼을 놀렸거나, 대피시키던 중 눈먼 창칼에 맞았거나.
그러나 상황은 똑같다. 임금이 죽었고, 칼을 들고 있던 것은 대군들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저들은 선을 한참이나 넘어버렸다.
···그리고 솔직해지자면, 그게 김종서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왕을 스스로 참살했기에, 대군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통성을 얻기는 힘드리라.
처음 반정을 기획했을 때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결심이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마 우리가 떠나고 나면, 대군들이 정권을 쥐려 하지 않겠나?”
“···그렇지···요?”
그때, 허후는 김종서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해 왜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김종서가 흉중에 품었던 생각을 털어놓자, 황보인과 민신 등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였다.
“대군들이 정녕 불궤를 꾸미겠는가? 정승이 되어 위권을 떨칠지언정, 설마 신하가 되어 임금을 쫓고, 삼촌이 되어 조카를 해하겠는가?”
“아니오, 지봉(황보인의 호). 나는···”
김종서는 목소리를 죽였다.
“나는, 저들이 옥좌를 노리리라 확신하오.”
그 짤막한 선언에 다들 숨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없는 방 안에는, 김종서가 신뢰할 수 있다 믿어 추리고 추린 이들뿐.
···그때부터 달려왔다.
1년여의 시간. 권세의 중심에서 외방으로 떨어져 내렸던 수모의 시간. 그리고, 거사를 꾀할 시간.
애초에 대신들이 떠난 뒤,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권력이 사라진다면 안평과 수양은 서로를 죽이려 들 수밖에 없다. 꼭 왕이 되려 하지 않더라도, 저들에게는 생존을 위해 난을 일으킬 이유가 있다.
그런 생각 하에 준비한 거사였다.
만일 난(難)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난(靖難)도 없다. 대군들이 혹시라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죄인의 몸으로 지방에서 군사를 움직인 죄는 곧 반역이다. 그 불미한 죄명은 씻을 수 없으리라.
1년이란 시간은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벗하여 살아온 시간이었다.
역신이냐, 공신이냐. 그 두 길은 종이 한 장보다도 얇은 선으로 어렵사리 구분되어 있었다.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줄타기를 해왔다.
그리고,
이제 공신이 되는 길만이 남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황보인은 강진 병영을 중심으로 호남의 지방군을 장악한다. 전주성을 장악하기로 한 여타 인사들과 세를 합쳐 경기도로 진격한다.
허후는 유배지인 언양에서 울산으로 향한 뒤, 경상도의 군세를 일으킨다. 상주를 통해 충청도로 향하며 북상하는 호남 방면과 합류한다.
평안도 또한 중요하다. 민신이 영변 병영을 장악하면 코앞이 안주다. 안주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평양에서 남하해 황해도를 넘는다. 개성을 치고, 경기북도를 넘어 한양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종서 그 자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 정예한 병력이 있는 곳으로 왔다.
지난 전란에서 중앙군과 보조해 원산을 친다는 계획이 2만의 손실과 함께 무너지면서, 어정쩡하게 남은 함길도의 익속군은 손실을 거의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 하령군의 목숨값으로 지켜낸 병력이다.
만일 그가 홀로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겠다 판단하지 않았다면, 국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무리하게 익속군의 지원을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이징옥 또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을 터이고 익속군의 피해 또한 막대했으리라.
그에 생각이 미치자 절로 김종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주름진 피부 아래로 굵은 혈관과 강건한 골격이 내비친다. 그 주먹에서 잠시 떨림이 일다 멎는다.
곧 하령군의 묘역에서 술을 따르며, 그 넋에게 승전보를 바쳐 올리리라.
귀양 온 뒤로 이징옥과 함께 함길도의 군사(軍事)를 비밀리에 장악하였고, 병력 배치를 국경 방면의 경계에서 빼돌려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영흥과 평천, 정변으로 이미 병력들이 대기하고 있다. 난을 일으킴과 동시에 평안도 방면과 함께 황해도로 뛰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정규군만으로는 수가 부족하다. 결국 더 많은 군세를 얻고 지역적 기반을 다지려면 여진족 족장들의 동의가 필요할 터.
선대부터 왕업(王業)을 닦게 된 땅이라 하여, 함길도의 족장들은 많은 우대를 받았다. 태조대왕과 동맹하였던 과거, 그리고 그 세력기반이 되어주었던 공이 인정된 결과였다.
그렇기에 이들이 사실상 각 지방의 영주로서 행세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고, 그들이 거느리는 백성들을 사병으로 삼는 것도 눈감아 주어야 했다.
이런 사정이니, 함길도에서 거사를 일으키려면 족장들의 지지를 얻음이 최중요 과제. 지난 1년간 김종서와 이징옥이 바쁘게 돌아다닌 결과, ‘사직이 흔들릴 시에는 가담하겠다’라는 대답을 받아냈다.
일단 지켜보되, 일이 영 안되는 것 같으면 조정에 고변하여 버리겠다는 위협이었으나… 정말로 사직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최근, 많은 족장들이 김종서의 유배지로 찾아와 일전의 약속이 유효하냐며 꼬리를 살랑거리고 떠났다.
물론 김종서 자신이나 이징옥이나, 여진족들과 협력할 기반이 없어 불안한 협력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충분한 준비가 갖춰졌다.
황해도에서 양계의 병력이 만나 경기도로 남하하고, 영호남의 병력이 충청도를 넘어 북상한다. 이것이 전략의 골자. 평안도에서도 호소식들이 들려오니 그 기획의 반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호남, 그리고 양계.
남과 북 양면으로 분리된 군세. 그들이 어떻게 서로 조응하여 나가느냐가 이 난의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거사의 일시도 명확히 정해 놓을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대군들의 난을 전제로 하는, 내란에 대한 사후대응이라는 큰 틀 아래 움직였으니…. 언제 일어날지 모를 대군들의 움직임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착실하게 봉기계획을 준비해나간다기보다는, 내일 당장이라도 군사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 아래 급히 달려온 1년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보게, 원봉(이징옥의 호).”
“예, 절재 대감.”
‘대감’. 파직된 그를 이징옥은 여전히 대감이라고, 좌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김종서는 주안상을 물리고, 그를 마주보았다.
“때가 되었네.”
“예, 대감. 준비하겠습니다.”
“···원산으로 보낼 사신은?”
“저는,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준비했습니다.”
“잘했네. 나가보게.”
그리고는 방을 나가 병영을 향해 움직였다.
이징옥의 동공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인물이기에 김종서는 그를 신뢰했다.
곧 병사들이 다가와 김종서를 모시러 왔다. 그들을 따라가자 병사들이 사열하여 있고, 이징옥이 단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종서는 안내에 따라 이징옥의 옆에 나란히 섰다.
“금일, 주상 전하께서 역도들의 칼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흉참한 소문이 돌아다닌다!”
병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이미 저들 또한 모두 들었을 소식일 터, 어째서 자신들이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 소문은 사실이다! 이 흉한 일을 도모한 이들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종대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였던 이들이 이제 와 그 더러운 속내를 드러내고 마침내 천륜을 어기니 어찌 신하로서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