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6
“있네. 허후를 탄핵하는 데 명분으로 내걸었던 문서이니, 그를 어찌 잊어버리겠나?”
“원산은, 조선과의 화의를 바랐네. 그들은 책봉을 원하든, 환관과 공녀를 원하든,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러나 그들은 원산 주변의 아주 작은 강역과, 백성들이 자유로이 왕래하고 교역할 권리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네.
심지어 조공까지 바칠 수 있다고 슬쩍 뜻을 내비쳤다고 들었네. 조정에서는 도적떼를 어찌 조공국으로 두겠냐고 하며 관두었지만.”
조공을 바쳐오면 상국이 되어야 하고, 상국이 되면 신하 된 나라를 함부로 내칠 수 없다. 조정의 신하들 모두가 언젠가 수복될 강역을 잠시 잃은 것에 불과하다 여겼으니, 원산을 조공국 삼음은 아니될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산이 조공국이 되겠다 강제했더라면 막을 방도도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조선의 의중에 철저히 맞추어 가면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조선이 치외법권 등의 양보를 강요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는 저들이 기본적으로 화의를 바랐다고 생각하네. 어느 나라의 유민이든 간에 이 땅에 머물기 위해 도래하였으며, 싸움은 우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만일··· 만일 원산으로 가서 군사를 빌리든, 뭐든 할 수만 있다면 최상일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구태여 우리와 주상 전하를 해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조선이 그들보다 강대하고 강역 또한 훨씬 넓었기 때문이 아닌가? 조선에 전란이 일어난 상황이니 그들이 무슨 흉한 마음을 품을지 어찌 알겠나?”
성삼문의 지적에 신숙주는 다시 고개를 도리질하였다.
“그럴 수가 없네. 저들의 세력은 많아 봐야 1만여명밖에 되지 않아.
작고한 하령군의 장계에서 이미 보지 않았나? 저들은 병졸의 수효가 적고 유리한 지점을 잡기 힘드니 싸움에선 오직 수세만을 취하였네. 일이 잘되어 군사로써 조선을 평정한다 하더라도,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寧可以馬上治之乎)?
어찌 우리와 주상을 해하려 하겠나? 차라리 입조하고자 꾀함이 더 설득력 있을 터.
그리고, 우리가 대신들에게 가서 패한다면 우리와 전하의 목숨은 간 데 없을 것이고, 대군들의 편에 선다면 결과가 어찌되든 역적으로 남을 걸세. 그렇다면 차라리 생을 부지하고 명분을 챙기는 쪽으로 감이 옳지 않겠는가?”
신숙주의 지적에 다들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궁리하는 듯했다.
미처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대신들에게 가길 택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선비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대신들을 반 죽여 놓은 게 우린데? 지금 가서 예쁘게 봐줄까?’
그럴 리가.
그럼에도 외적들에게 주군의 안위를 넘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또 부담이 되는 일이다. 고민이 거듭될 수밖에 없는, 사활을 걸어야만 넘어갈 수 있는 길.
그런 고민이 끝난 것은,
“그리하면, 나는 원산으로 가는 것인가?”
“저···전하!”
주상 이홍위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이후였다.
이홍위는 어린 몸을 일으켜 부스스한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좁고 허름한 방, 울퉁불퉁한 바닥, 곤룡포를 입지 않고 신하를 만나는 자신. 어젯밤에는 마치 꿈결 같더니, 지금에 와 일어나 보니 현실이 온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삼촌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다는 말에 겁에 질려 반강제로 따라온 길이었다.
평생을 한양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자신으로서는, 한양을 등진 지금이 세상을 등진 것과도 같은 충격이었고.
고작 13살. 13살의 나이에 온세상이 자신을 쥐새끼처럼 잡아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왜? 자신이 왕이기에.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왕이었고, 그저 그 어린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러던 중에 원산이란 이름이 들렸다.
의금부에서 죄인들의 신문을 참관할 때, 색목인은 유창한 조선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왕도, 사대부도 없는 나라에서 왔거늘! 내가 대체 누구에게 불궤한 죄를 짓는단 말이오!”
‘그렇다면 누군가를 왕이라고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 어린 마음, 짧은 생각에서 나온 결론. 그러나 지금은 그 결론이 이홍위가 붙들 희망의 전부였다.
“나는 기꺼이 원산으로 가겠다.”
처음으로, ‘정부와 의논하겠다’라는 말이 아닌 자신의 뜻으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머릴 조아린 선비들이 서서히 뜻을 굳혀가는 것을 본다.
자신이 원산에 가겠다 하였으므로, 원산에 갈 것이다. 처음으로 제대로 누려보는 왕으로서의 권능.
주상 이홍위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이곳이 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 물을 것이 있는데.”
“예, 말씀하소서.”
성삼문이 답하자 이홍위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그··· 공산주의란 것이 무엇인지 정녕 아는 사람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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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여전히 아수라장,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
길거리마다 시체와 핏자국이 널려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담장 밖을 넘어가지 않았다. 아예, 바깥은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칼들이 오갔고, 화살이 날아다녔다.
“역도들이 주상 전하를 납치했다! 죽여야 한다!”
“무슨 소리! 저 놈들이 주상 전하를 감추고 그 죄를 씌우려는구나!”
심지어 주상의 행방도 불분명해졌으니, 싸움 자체가 기약없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분명, 수양대군 쪽에서 데려갔다고 생각했건만··· 소장파 대신들이 수양의 일파가 아니었던 것인 것인가?’
대신들의 권세 하에서 안평이 김종서와 손을 잡을 때까지는, 분명 신숙주든 박팽년이든 점점 자신과 거리를 두고 수양에게 기울어가는 형세임이 확실했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대군의 명이라며 주상의 신변을 확보해갔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준동은 분명 수양대군과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허나, 분명 여론을 잡고 정권에 가까워졌을 때부터는 수양과도 별 연계를 보이지 않던 그들이 아니었나? 갑자기 돌연 마음을 바꾸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수양이 주상의 신변을 확보했더라면, 즉시 만방에 알리고 자신이 주상을 수호하는 위치에 서 있다며 명분상의 우위를 가져가려 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수양 측은 꾸준히 ‘안평대군이 주상을 납치했다.’라는 거짓 소식을 전하기까지 하고···.
혹시 그냥 독단적으로 주상을 빼돌린 것일까?
그렇다면 왜? 가만히만 있는다면 관료들을 포섭하여야 할 승리자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올 것이거늘···.
안평대군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더라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무익해 보이는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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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역시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
“···안평 측 인사들에게 뇌물을 먹여보았으나, 여전히 전하의 신변은 파악치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시선을 넓혀보는 수밖에. 한양 바깥에 사는 선비들 중에 안평과 연이 있는 자를 찾아라. 그들 중 주상 전하를 데리고 있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예, 대감. 이 몸이 부스러지더라도 반드시 주상 전하를 구해내겠습니다!”
그렇게 한명회와의 대담을 마무리한 뒤, 수양은 아직 피가 묻은 칼날을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명회가 주상의 신변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하여 왔을 때,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 한명회의 목을 쳐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리한 상황에서 힘껏 노력해온 책사를 죽임은 온당하지도 못하며, 진영의 사기를 생각하더라도 손해만 극심할 것이 명약관화.
게다가 한명회는 여전히 쓸모가 많은 인재였다. 한양 안팎의 힘 깨나 쓴다는 이들을 불러온 것도 한명회이며,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한명회였다. 그리고 난이 일어난 그 날,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그나마 대등하게 싸울 수 있던 것도 그가 목숨을 걸고 안평의 군졸들을 유인해준 덕분이었다.
결국 주상을 놓친 죄는 용서하되, 그에게 더 많은 공을 세워 갚으라 이야기했을 뿐.
그러나 그날 밤, 수양은 홀로 얼마나 많은 술병을 비우고 눈물을 흘렸던가.
그렇게 다음날 죽으러 간다는 마음으로 일어나 다시 전장에 나섰을 때는, 웬걸? 안평 측에서 주상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않은 채 도리어 자신이 주상의 신변을 위협하고 있다며 방을 붙이고 다닐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 음흉한 안평이 이제 무슨 흉계를 꾸리는 것일까?
그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마당에, 어쩐지 지원을 명한 지방관들에게서도 답신이 없는 상태. 아마 도성에서 명분 없이 난을 일으킨 세력들에게 붙는 위험부담을 걱정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방이 너무도 고요했다.
한양과 그 근방만이 조선에서 홀로 떨어진 섬처럼, 핏물로 강을 이루고 있었다. 고요함의 바다가 그 외딴 섬을 불길하게 감싸고 있을 뿐.
수양은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으나, 불안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더하여 홍달손이 말하길, 소장파 신료들이 난리를 틈 타 자신의 명령을 사칭하여 도성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렇게 수양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이들이 조금씩 한양에서 도망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은 안평도 마찬가지이리라 애써 위안을 삼아보지만, 결국 사대부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안평에게 일이 유리하게 돌아갈까 두렵다. 주상을 확보하지 못한 때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공론이 안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 것이고···.
더 이상의 잡념을 베어내려는 듯, 수양은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깔끔한 선이 호롱불 빛을 튕겨내며 허공을 갈랐다.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 이해가 되지 않는 정세.
지난 수년 간 이토록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도, 쇠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지리라. 기약도 없이, 목적도 흩어진 채.
수양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비몽사몽으로 아침을 맞았을 때,
“대···대감! 청계천에 용포를 입은···어린아이의 시체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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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Say, run. (3)
아주 우연한 사건이, 가끔은 모든 걸 뒤틀어 버리기도 한다.
첫 번째 우연은, 소장파 신료들이 주상을 들고 날라버리는 와중에 개천 근처에 놓인 어린아이의 시신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때는 동대문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간.
“···안타깝네. 어째서 무지한 소년이 몇몇 사람들의 탐심(貪心)에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박팽년이 혀를 찼고, 다들 우울한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와중에 신숙주의 머리를 파고든 기발하고··· 끔찍한 발상.
“저 아이··· 주상 전하와 비슷한 나이대로군.”
“그러게 말일세. 그러니 슬픈 마음이 더해지는구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용포가 몇 벌이지?”
“잘은 모르겠네만 세 벌은 되네. 왜 그러나?”
눈빛이 흔들리던 신숙주는 박팽년의 질문을 무시한 채, 뭔가를 결심한 듯 나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웃통을 벗어 멀리 놓아두고는.
-퍽, 퍽, 퍽.
“자, 자네 뭐하는 짓인가!”
“어차피 잡히면 역적이 되어 죽을 우리일세. 묻어주지도 못할 몸, 사직을 위해 쓰도록 하려 하네!”
그렇게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와중에, 신숙주는 헐벗은 몸으로 근처의 돌을 주워 아이의 얼굴을 짓이기고는 말 등에 올려놓은 짐에서 용포를 꺼내 입히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시체를 다시 개천으로 던져버렸다.
“···이걸로 추적이 따돌려질 걸세.”
“···.”
떠내려가는 어린아이의 시체를 보며 신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말 위에 눕듯이 기대어 자고 있던 주상이 이 꼴을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 뿐.
그리고 두 번째 우연.
그 시체가 청계천까지 떠내려가다, 결국 한양도성 안에서 발견된 것.
오줌을 누러 잠시 천변으로 향했던 누군가가 물 위에 뜬 화려한 색감, 익숙한 문양에 경악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고.
얼마 안 되어 한양 전역에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랏님이 돌아가셨다! 청계천변에서 옥체가 떠다니다 발견됐다!!”
운 좋게도 그 소식을 먼저 전달받은 것은 수양대군이었다.
“마, 마, 맙소사···.”
수양이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낀 감각은 불가해함.
불면의 밤들을 지나며 피폐해진 그의 정신은, 주상의 객사라는 정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지구의 지름을 재려는 개미처럼 힘겹게, 그 거대함과 무시무시함을 가능할 수 있었을 뿐.
그리고 머릿속에서 무질서하게 떠돌던 왕, 옥체, 청계천, 죽음, 시체라는 단어들이 마침내 조립되어 하나의 문장으로 이해되기 시작할 때, 그가 느낀 감정은 경악이었다.
당연하지만, 손에 조카의 피를 묻힐 각오를 하고 개시한 정변이다. 언젠가 주상의 목숨을 이 손으로 직접 없애게 되리라, 수없이 마음을 굳히고 시작한 거사였다. 그러나 이토록 허망하고 참혹한 죽음은···.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의문과 혼란.
대체 안평이 어쩌다 주상을 죽이게 되었는지, 어쩌면 단순히 불행한 사고였는지 그리고 주상의 죽음을 은폐하려 얼굴을 짓뭉개 놓았다면 어째서 용포는 벗기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질문.
마지막으로 청계천변에 직접 달려가 찬물에 오그라들고 상처들로 망가진 시신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우습게도 애수였다.
형제의 아들, 아버지의 손자, 나의 조카.
죽었구나.
“···.”
한명회와 권람이 만류하는데도,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이 제멋대로 옥체를 더듬었다.
강물에 불어터진 살점, 너덜너덜한 자상, 그리고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까지.
피와 오물이 손에 달라붙었으나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정략적인 인간이라면 무언가 비장한 말을 던져야 할 때, 안평대군과 그 일파가 저지른 최악의 불충을 규탄해야 할 때.
그러나 수양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전···하···왜 이리 누워 계십니까···.”
일어나야 한다, 스스로가 굳건함을 보여야 한다, 하는 생각에도 주저앉은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얼굴은 바보 같이 일그러졌다.
주상의 죽음이 슬퍼서?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어쩌면 그저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며 온갖 감정이 쏟아져서?
아무튼, 수양의 몰골에 주위의 수하들까지 모두 엎드려 곡했다.
이곳은 청계천변, 민가들이 가깝고 백성들의 눈이 닿는 곳. 그들은 조카의 더러운 몸을 끌어안고 서럽게 우는 삼촌의 모습을 보았다.
수근거림이 일어난다. 자네 보이능가? 수양대군께서 저리 울으시니 저분이 역적이라던 김처사의 말이 틀린 것이야. 내 눈에도 그리 뵈네. 저 스스로 조카를 죽였다면 어찌 저리 아이 잃은 소처럼 슬퍼하겠나?
그것은 수양의 행운이었다.
다시 거처로 돌아온 수양은 몇 가지 명령을 내리다, 힘없이 침소에 들었다.
놀랍게도 편안히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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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날이 밝자 급하게 준비한 상복을 걸친 수양이 수하들 앞에 나가 외쳤다.
“제 손에 주군의 피를 묻히니, 간악한 무리들이 마침내 사람의 탈을 벗고 아귀와 같은 꼴이 되었다! 주상께서 내셨을 피 울음 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선하구나!
어찌 사람 아닌 무리와 세상을 나누어 살아갈 수 있겠으며, 어찌 원수들이 살아있는데 주상의 영령이 무사히 서방정토로 향하실 수 있겠는가! 내 저들을 죽여 인의를 바로 세우고, 저들의 피와 살로 술을 빚어 주상의 신주 앞에 올릴 것이다!”
이 느닷없는 벼락선언에 안평 측 역시 곳곳에 방을 붙였다.
‘적괴 이유(李瑈)는 보라! 섬기던 주군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충을 어김이요, 혈육을 죽여 그 죄를 내게 덮어씌우니 이는 효와 인을 버림이라!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의 패거리를 모아 아직 나이 어리시던 주상 전하를 죽이고. 그 죄가 부끄러운 줄은 알아 감히 용안을 짓부수고 한수(寒水)에 내던져 숨겼으나 이미 하늘을 너를 버렸고 땅은 너를 부끄러워하느니라.
참혹한 죄를 지은 너를 내 직접 사지를 찢어 네 거리에 걸어 놓으리니, 구차한 목숨을 살릴 생각일랑 버리고 목을 내놓아라.’
“이···이런 제기랄, 신숙주! 신숙주!!”
그리고 방을 읽은 수양은 그제야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소장파 신료들을 쫓기 위한 추격대를 내보냈다.
물론 안평의 대응이 그뿐만은 아니었고,
“수양대군이 주상 전하를 죽이고, 그 피를 마셨다더라!”
“주상께서 돌아가신 날, 수양의 방에 밤새 불이 켜져 있고 잔치가 있었다더라!”
곧 수하들을 풀어 곳곳에 흉악한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다시 교란했다.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한양과 인근 지역에서는 꾸준한 무력 분쟁이 있었다. 종각 앞이 피로 물들고, 육조거리에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주인 잃은 궁과 관아에는 더 이상 등청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연한 전쟁 상황.
“저기 담 넘는 놈을 잡아라!”
“어서, 죽여버려!”
당연하지만 이렇게 전황이 질질 늘어지니 두 사람 모두 ‘암살’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에 떠오를 수밖에 없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먹으려던 떡을 개한테 던져주니 사지가 뒤틀려 죽어버리는 꼴을 본다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날 이후로 수양은 담장 안팎에 수십의 호위병력을 추가로 둘러놓았다. 그리고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기미를 시켜야 했다. 그리고 독을 든 떡을 선물로 받았으니 당연히 안평에게 목마르지 말라고 독으로 된 술을 선물로 주었다.
···좋아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안평대군 집에서 하인 하나가 실려나갔다는 소식만 들었다.
아무튼, 그 결과 대군들은 물 한 잔, 밥 한 술도 제대로 뜨기 힘든 처지가 되었고. 두 대군이 직접 군을 이끌고 행차하는 일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수양과 안평이 서로 왕위를 두고 다투는 싸움이었으나, 정작 누구도 두 사람의 얼굴을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 마치 허깨비들을 위해 싸우는 전쟁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