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0
그러나 싸움은 없다. 최소한, 가시적인 무력분쟁은 자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둘 모두 성안에서 병력을 물린다는 사항에 대해서 합의하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한명회가 대강 논의를 마무리하자 안평대군 측에서 파견된 이명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대강의 급한 불은 껐다. 한명회는 회담 장소였던 의정부의 전각을 나서며, 방금 이뤄진 약조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 두 대군은 모든 무력 분쟁을 멈출 것. 다만 안정적인 치안유지를 위해, 결원이 생기고 무력화된 순군을 대체하여 두 대군 모두 힘써 병력을 순찰시킨다. 순찰구역은 합의에 따라 결정한다.
두 번째, 그 외의 모든 병력은 도성에서 철수시킨다.
세 번째, 지방에서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의 협력을 약조한다.
이 이상의 세부적인 사항은 그저 수사적인 겉치레에 불과하니··· 일단 합의결과는 정도로 요약될 수 있으리라.
나머지는 추후 정리될 사항들이고. 일단 의정부의 이름 하에 경기, 충청, 황해의 지방관들에게 전란을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까지는 의견이 맞아 떨어졌다.
뒤에서는 물론 각지의 수령들을 서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작질을 부리겠지만···. 아무튼 대신들이 쳐들어오는데 서로 등에 칼이나 꽂다가 끝장난다는 결론은 어찌저찌 피해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렇다, 지금 당장은.
당연하지만 왕이 둘일 수는 없다. 대가리가 둘 달린 뱀이 없고,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법이 없듯이. 작금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불안불안한 균형이 자리잡고 있을 뿐.
지방관들에게 보낸 것도 방어와 수성의 명령뿐이다. 그들을 지휘할 지도부가 없으니 어찌 토벌이 가능하겠는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모두 상대가 코앞에 버티고 있는 한, 각자가 쥐고 있는 병력을 반란 진압에 돌리고 싶지는 않을 터.
명령의 주체 또한 ‘조정’, 그리고 ‘의정부’였다. 그러고도 서로를 못 믿어, 수양과 안평은 지방에 보내는 헌패(憲牌, 상급 장관의 명령서)마다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그렇게 직인이 몇 개씩 찍혀 너덜너덜한 헌패들이 지방으로 배포되었으니···
지방의 수령들은 아마 그 꼬라지를 보고 대강 한양 상황을 짐작했으리라.
그나마 도성의 성문을 이리저리 틀어막고 싸우느라 대부분의 신료들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 ‘정부’라고 불릴 만한 관료들이 전부 죽거나 도망쳤더라면, 그 날로 바로 금성대군이 옥좌에 앉게 되었을 게 빤했다.
···신숙주,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 그 개새끼들만 빼면 말이다. 한명회는 그 이름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다 저도 모르게 이가 갈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만 없었어도 일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을. 차라리 주상의 신변을 빼앗든, 빼앗기든 단기결전이 나았다. 이렇게 서로 역량을 소모하다 대신파의 반란에 덜덜 떨게 되는 것보다야···.
물론 저들이 주상을 살해해준 덕에 안평대군에게 주상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순간, 그 불궤한 생각이 혹여나 입밖에 나왔을까 싶어 한명회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누구도 그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다행히도 영의정으로 앉은 정인지나, 좌의정 한확, 우의정의 박종우가 모두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이 어찌 행운이 아니랴?
또한 그 중에서도 좌의정인 한확은 수양대군 대감의 사돈. 충분히 이쪽 편으로 가담할 수 있도록 꼬드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사다.
한확.
물론 정인지나 박종우 모두 중량감 있는 인사로서, 추후 국정을 장악해 나가려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 거물들임에는 틀임이 없다.
그러나, 한확은··· 그의 중요성에 비하면 두 사람 정도는 버릴 수도 있다. 고작 원로격 대신들 몇몇의 존재감을 그에 견줄 수는 없으리라.
명 황제의 처남을 누구와 비하겠는가?
누나와 누이동생을 모두 명나라 황제들에게 시집보내고, 이후로도 누이동생이 살아남아 명나라에서 황실의 어른이 되었으니. 그는 명과 조선을 잇는 가교였고, 또 조선 내부에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확고한 입지가 있는 이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확의 포섭이 중요해지리라.
한명회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곧 한확의 창고는 재물로 가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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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 대감, 대군께서 사돈에게 예를 다하라 이르시니, 귀한 거북 등껍질을 얻어 바치옵니다.”
“내 보화를 얻음에 기꺼워하는 이가 아니나, 사돈의 정성을 어찌 무시하겠는가? 허허.”
···
“대감, 안평대군께서 난을 치시다 보니 그 시원하게 뻗은 자태가 좌상 대감의 절개와 같아 선물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림을 그리는 데 참고한 난초도 이렇게 보냅니다.”
“대군께서 이리 추켜세우시니 부끄럽구려. 내 이 선물을 잘 받겠소. 명국에서도 서화에 능하기로 알려진 대군이니 어찌 그림 한 점 가짐이 기쁨이 아니겠소? 허허!”
이게 인생인가? 이게 삶의 정점인가? 근래 들어 아름다운 꽃길만을 걷다 보니 한확의 미소는 가실 날이 없었다.
그렇다. 대신일지언정, 군왕의 명 아래에서 산 권신이 되기도 하고, 죽은 역신이 되기도 하는 법.
그러나 황제의 지척이라면 어찌 번국의 임금이 그를 주살하려 하겠는가? 누가 그를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이 나라에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나라 위에 있는 곳에서 그 권위를 끌어와야 하는 법.
영의정? 내가 그 위의 위야!
한확은 그 전략에 충실했고. 현명한 선택의 덕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바야흐로, 좌상 대감의 집 계집종이라도 흰 쌀밥이 아니면 입을 대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좌상 대감의 집 개라도 몸에 늘 비단을 두르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렇다면 한확 본인은 어떻겠는가?
거기에 더하여 지금은 임금이 부재하는지라, 옛 주나라의 예를 받들어 명목상으론 재상들이 공화(共和)의 통치를 펼치고 있다. 물론 대군들의 입김이 상시 미치고는 있지만.
아무튼 재상의 자리를 보고 만인지상 일인지하라고 하나, 이제 그 위에 설 군왕이 없으니 재상이 곧 나라의 수령 아니겠는가? 좌의정으로서 한확은 난세가 가져다주는 이득을 최대한 빨아먹고 있었다.
담장밖은 아직도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으나, 좌상 댁의 대문을 넘으면 고기반찬 냄새에 넋을 잃게 되니 진정 다른 세상 같았다.
이렇게나 받아먹으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지 않을까도 싶지만··· 한확의 꼬리는 명나라에 있는데? 누가 감히 건드리겠는가?
대군들의 난 이후, 양 진영의 포섭대상 1순위로서 어마어마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었으나 한확은 결코 어느 쪽에도 쉽게 뜻을 주지 않았다.
수양이든, 안평이든, 저 멀리서 난리를 피우는 금성이든, 누구든 간에 언젠가는 이기게 되지 않겠는가? 굳이 그걸 앞당겨서 지금의 영화를 포기해야 하나?
“으흐흐흐··· 하하하하!”
“하, 하하하하하! 역시 호탕하십니다!”
갑자기 웃어제끼는 한확의 모습에, 수양대군이 보낸 사자가 재빨리 비위를 맞추며 마주 웃는다. 저 노심초사하는 꼴 좀 보라지. 죽으라는 명만 빼고는 뭐든 들어줄 기세다.
“이번에 보내주신 쇠고기는 감사히 받겠소. 내 나이를 먹으니 몸이 편치 않아 보신을 해야 하겠다 마음먹고 있었거늘···”
“대군께서는 이렇듯 대감의 안위에 걱정이 아주 많으십니다. 대감께서는 나라의 기둥과도 같으신 분이니 모쪼록 몸을 편히 하시길 바랍니다.”
“하하하하! 고맙소!”
그렇게 사자를 돌려보내고 한확은 방안을 한번 간단히 둘러보았다.
방 한 켠, 호리병에 꽂힌 공작 깃털이 살랑살랑 외풍에 흔들리고 있다. 저것도 안평 측에서 보내준 선물이었지.
“’안위에 걱정이 많다’라···.”
너무··· 많이 받아 처먹었나?
슬슬 반쯤 돌려서 협박이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은근한 압박을 주기도 한다···.
지난번에 안평이 보낸 편지에도 그랬지 않은가?
‘좌상 대감, 대감은 나라의 크게 쓰일 기둥입니다. 집에 기둥은 여럿이 있으나 그 크기와 쓰임새가 모두 다르니, 가옥의 중심에 서서 모든 기둥의 모범이 되도록 굳건하고 곧게 선 거목은 감히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여럿 모인 기둥들이 하나의 지붕을 떠받치니 어찌 집이 견고하지 않겠으며, 여러 신하들이 하나의 임금을 뫼시니 어찌 나라가 평안치 않겠습니까?
대감께서는 삼가 올리는 저의 말씀을 잘 기억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총총.’
‘하나의 지붕’을 떠받치라··· ‘하나의 임금’을 모시라···.
이것들이 주제 파악이 되지 않은 건가?
웃기는 꼴이다. 얼마 전에 대임을 떠맡느니, 종사의 큰 짐을 지느니, 하면서 칭왕을 하던 인간들이 어느새 그런 일은 없었던 양 다시 스스로 대군이라 칭하고 한확을 대감이라 떠받드니···.
이리도 지조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들이 뭐라고, 임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느 임금이 신하에게 말할 때 스스로의 말을 ‘말씀’이라 낮추며, 어느 임금이 이리도 신하에게 아첨한다는 말인가?
바보 같은 인간들. 어차피 누가 이기든 한확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불과 몇 해 전 세종조 때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때도 대왕께서 자신을 주벌하거나, 압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거늘. 하물며 일말의 정통성도 없는 이들이 어찌 ‘좌상 대감’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아직도 천조(天朝)와 통하려면 어떻게든 한확 자신을 빼놓을 수는 없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재화가 쌓이는데 어찌 몸을 놀려 행운을 쫓아내겠는가?
한확은 안평이 선물한 난초 이파리를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너희끼리 계속 죽여대라. 나는 가만히 앉아 너희가 떠먹여주는 죽이나 덥석덥석 받아먹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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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함길도와 평안도의 병력이 점차 집결하여 황해도 부근으로 남하하는 듯합니다. 남부 지방에서의 봉기는 현재,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합니다.”
올리버 로의 보고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는 조선의 신료들과 국왕 또한 자문역으로 참석하여 평소보다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삼남 땅은 이미 태종조에 대왕께서 사병을 철저히 혁파하신 바 있소. 그러나 북방은 아직 여진족들의 위세가 거세어, 마치 제깟 것들이 고을 수령이 된 마냥 갖은 권력을 누리고 있는 형편이오.
“그 말인 즉슨?”
블레어가 묻자 박팽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영호남에서는 토호들과의 조력이 그리 필요치 않으니 지방군의 포섭이 잘 되었기만 하다면 일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오. 그것이 아니라면 쉽사리 난이 진압될 것이고. 아마 전자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허나 이 북방에서는 토호들의 지지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오. 여러분이 죽인, 언급해서 미안하오, 김밀과 같은 이들도 이 지역의 토호들이오. 저들은 지방군은 휘어잡았으나 토호들에게까지 입김을 뻗치기는 어려웠을 터이지.
아마 그 때문에 여러분의 도움을 그리 간청했을 것이오. 뒤가 불안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싸움을 도모하기 어려운 법이고. 토호들을 지지하게끔 이끌려면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니···”
“흠··· 북방에는, 아직 동화되지 않은 이민족과 봉건적 영주들의 권력이 잔존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만일 우리 측에 조선의 국왕 전하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아마 순식간에 세력이 붕괴할 거요. 시간 문제일 뿐, 영호남의 군세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저, 그건 수도의 세력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노먼 베순의 질문에 신숙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만, 일단 대군들은 수년에 걸쳐 세력을 뻗치고 난을 준비해왔을 것이오. 소련과의 전쟁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 그 기반은 훨씬 강고하오. 그러니, 앞날을 미리 짐작하기에는 어렵소.”
“뿐만 아니라 조정의 신료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가 중요할 것이오. 이미 도성의 군권을 두 대군이 쥐었거늘, 어찌 먼 곳의 주군을 쉽사리 따르겠소?”
박팽년이 신숙주를 거들었다.
“흠··· 그렇다면 우리가 조선국왕 전하의 신변을 공개한다면···”
“지방군의 난이 패배할 것이오.”
“허··· 그렇다면, 당분간 우리는 조선국왕 전하의 소재를 감춰야 하겠소.”
트로츠키가 논의를 일축하였고. 다들 납득할 만한 결정이라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쪼끄만 손이 탁자 위로 반짝 솟아오른다.
“네. 이홍··· 조선국왕 동지··· 아니 전하의 발언권 신청 받았습니다.”
이번 인민위원평의회의 서기를 맡은 바빌로프가 이홍위의 손을 보고 말했다. 실수로 이름을 그대로 말하려다, 조선 신료들의 경악에 찬 표정을 보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직도 전제군주와 공산국가의 기묘한 동거는 어색하기만 하다.
아무튼, 어린 왕은 그런 긴장은 알지 못한 채 트로츠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트로츠키 경, 경은 어찌하여 내가 이곳에 거함을 숨기려 하는 것이오? 설명을 들었지만 이해하기가 어렵구료.”
“하하, 너무 생략이 많았군요. 미안합니다, 전하. 천천히 설명하죠.
일단, 저희가 지금 국왕 전하가 이곳에 있음을 선언하면 어찌되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방군은 무너지고 두 왕자 중 누가 이기든 간에 수도의 세력이 빠르게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되겠습니까? 수월하게 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이 곧바로 소련을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양 세력의 힘이 빠진 이후에야, 전하의 소재를 밝히든지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하옵니다, 전하. 우선은 몸을 웅크리고 있음이 훗날 크게 떨쳐 일어날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한 고조를 도와 대업을 이룬 한신 또한 길거리 비렁뱅이의 다리 사이를 걸으며 굴욕을 견디지 않았습니까? 군자는 훗날의 큰 뜻을 위하여 당장 몸을 사림을 꺼리지 않는 법입니다.”
트로츠키의 말에 하위지가 덧붙이자, 다시 이홍위는 알쏭달송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트로츠키는 웃음이 비져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허허허, 중국 고대사를 빌어 설명하니 이해가 어렵나 보군요. 다시 설명해드릴 테니 제 방으로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국왕 전하가 좋아하는 사탕도 준비해 두었답니다!”
“좋소! 트로츠키 경, 아주 고맙소!”
그렇게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조선국왕을 보며 트로츠키는 자연스레 미소지었다.
사탕 하나에 저렇게 신나 하는 아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자, 그럼 회의는 파해도 되겠소? 손님이 생겨서 말이오.”
그렇게 회의를 파하고.
사탕 생각에 펄쩍펄쩍 뛰는 이홍위의 손을 잡고, 트로츠키는 선실로 걸어갔다.
주머니에 한 움쿰, 사탕을 집어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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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자의 난 (5)
“간이재(한확의 호) 그 작자··· 너무 거슬려···. 그를 포섭하지 않고서 일을 진행할 수는 없겠는가?”
“그러나 좌상의 미움을 사면 곧 명국의 미움을 살 터이니 방도가 없습니다.”
“허나, 갈대처럼 재물이 오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기울기만 할 뿐 마음을 정하지 않는 교활한 이가 아닌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가 반심(叛心)을 품지 않게끔 막는 데 그치니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설령 천자의 친족이 아니라 천자가 직접 오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방도가 없다··· 어찌해야 하겠느냐···.
수양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권람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고로 참모를 한다 하면, 주인이 계책을 물을 때 질문이 아니라 대답으로 돌려주어야 할 진데. 자네는 어찌 이리 눈과 귀가 막힌 듯하는가!!”
“송구하옵니다, 대감···.”
그러나 다시 고개를 숙일 뿐, 역시 권람은 뾰족한 수를 세우지 못한다.
대저 친우라 하여 그 성질이 반드시 비슷한 것은 아니라지만··· 한명회에 비하자니 이리도 쓸모가 없을 수 없다.
물론 이는 한명회가 타고난 모사꾼인 탓도 있으니, 권람 입장에서는 비교된다는 사실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권람 또한 주군의 머릿속이 굴러가는 바를 대강 짐작했는지, 수치심에 귀까지 달아오른 채였다.
그때,
“대감.”
“오, 사우당!”
반가이 호를 부르며, 수양대군은 막 방에 들어온 한명회를 맞아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치 제갈량을 만난 유비처럼 기쁨이 만연한 표정. 물론, 그와 대조적으로 권람의 얼굴은 썩어들어 갔지만.
“밖에서 말씀하시는 바를 모두 들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에게는 필시 쓸 만한 방책이 있을 터···”
“안 됩니다. 대계에서 한확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흐음···”
한명회가 칼처럼 딱 잘라 대답하자, 수양대군의 반색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온다.
“어찌 안된다고만 하는가? 내 흉참한 무리를 베어 없애기 위하여 칼을 뽑았거늘, 부정을 일삼는 관리 하나를 잡지 못한다면 나의 뜻을 세상에 어찌 제대로 펼치겠는가?”
“대감, 실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당장 한확이 눈엣가시라고는 하나, 그를 빼놓고 일을 진행하여 얻을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
없다.
애초에 부정을 일삼는 관리니 뭐니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수양이 말을 꺼낸 것도, 딱히 내칠 이유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 ‘부정’에는 수양대군이 보낸 뇌물을 덥석덥석 받아먹은 일도 포함될 것이고.
“대감, 아름다운 뜻을 위해 욕됨을 보는 것 또한 선비의 길입니다. 허나 한확을 죽임에는 얻을 것은 없되 잃을 것은 산더미입니다.
우선, 좌상을 우리가 먼저 의심하여 그로부터 돌아서면, 다른 신료들에게 돌아올 의심과 비난의 화살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균형을 잡아주는 이들은 결국 신료들입니다. 저들이 안평에게 기운다면 도성 안에서 대감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또한 따지자면 결국 한확은 대감의 사돈입니다. 아무리 가운데 서있으려 하더라도 대감께 마음이 기욺은 어찌할 수 없을 터입니다.”
“허··· 그러나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큰일은 어쩌겠는가? 지금 역도의 무리가 숨통을 죄어오는데 어찌 이리 가만히만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허나 대군 대감, 대감께서 정념에 치우쳐 작은 일에 흔들려 큰 일을 그르치신다면, 그것이 안평과 저 불궤한 무리들이 진실로 바라 마지 않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반드시 대감을 위하여 사특한 무리를 일소할 터이니 잠시만 말미를 주십시오.”
“···알겠네, 사우당. 자네를 믿네.”
그렇게 말하며 수양은 한명회의 잔에 찻물을 가득 따라주었다.
권람의 잔 또한 비었으나, 수양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똑같이 부(不)를 말하였을진데, 어찌 이리도 대우가 다른가?
권람은 그렇게 생각하며 분함과 벗에 대한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대군도, 한명회도 이미 그의 속을 짐작하고 있다.
‘허, 어리석은 친구야. 아직도 대감을 그리 모르는가?’
권람은 ‘안 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한명회는 ‘결코 안 된다. 다른 방법을 찾아오겠다.’라고 답했다.
물론 실제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권람에게 없기도 했겠지만, 그 말의 비어 있음이 훤히 대감께 비쳐 보이거늘. 어찌 대감의 마음에 들겠는가?
특히 수양대군은 성미가 급하고, 과감히 움직임을 기껍게 여긴다. 그런 만큼 당당하고 호쾌한 이를 가까이한다. 그러나 권람은 그리 행할 배짱도, 능력도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아무튼 찻잔을 비우며 한명회는 이런저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려 보았다. 벗에 대한 생각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안평을 제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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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뇌물 바칠 시간이 돌아오자, 수양대군의 하인들이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