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1
우상 대감께 드릴 귀한 품종의 국화, 병판께 올릴 희귀한 거북껍질, 대사헌께 올려야 할 도기그릇 등등. 대군의 창고에 쌓여 있던 가산들이 이리저리 비단 보자기에 싸여 배달되었다.
안 그래도 힘든 사정에, 사치품을 들여와 선물로 올려야 하는 판이니 수양이든 그 휘하 참모들이든 골머리를 썩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안평과 피 흘리며 다투는 일이 잠시 멈춘 이상, 이런저런 수싸움에서 밀리면 끝장이다. 신료들을 포섭하고, 알게 모르게 세력을 공고히 함이 중요해진 상황.
이렇게 부패가 판치는 때, 관리의 부정을 알려야 하는 대간들은 뭘 하고 있나··· 하면 그냥 옆에서 같이 떡값이나 받아먹고 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왕이 없는데, 부정을 어디에다 탄핵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창고에서 쌓인 물건을 하나하나 나르던 중, 한명회가 인부들에게 콕 집어 명령을 내렸다.
“이 물건은 대군 대감이 직접 부탁하신 걸세. 반드시 가장 화려한 보에 포장하여 가져다 드려야 할 것이야. 내가 직접 가서 전할 터이니 꼼꼼히 신경 쓰게.”
“예, 나리.”
한참 창고가 시끄럽다가, 운반될 것이 모두 운반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 한명회는 아랫것들을 데리고 행차를 나갔다.
그렇게 무리를 대동하고 한길을 걸으니 모두가 양옆으로 비켜선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감히 한명회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고 어깨가 움츠러들며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한때, 경덕궁직이라 그를 괄시하던 이들도 저 안에 끼어 있을까? 모르겠다. 그깟 관직이 무어라고.
얼마나 높다란 갓을 썼든 칼 아래 피 흘릴 때는 모두 같은 인간이었다. 지금 한양에서는 오직 칼을 쥔 이들만이, 그리고 그들을 부리는 이들만이 하늘이었다. 그 위세를 느끼며, 지나치게 우쭐해지지 않도록 한명회는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곧 좌상의 집이다. 청탁하러 가는 자는 눈빛을 오만하게 하지 않는 법.
대문 앞에 당도하자, 하인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옆으로 비켜선다. 문간을 넘어 마당에 들자, 과연 별천지라는 좌상 댁의 화려함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삼엄한 경계. 우락부락한 이들이 문 안팎에서, 담장 밖 곳곳에서 주위를 눈으로 훑고 있다. 당연히 한명회 또한 그들의 무수한 눈빛이 자신을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난세에 부유한 이는 적이 많은 법이고, 적이 많은 이는 몸을 사리는 법이니. 명나라 주 씨와 조선 이 씨의 족보에 한 다리씩 걸친 능구렁이다운 처사였다.
“사우당, 자네가 어인 일인가?”
멀리 사랑채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풍채 좋은 남성.
“좌상 대감을 뵈옵는데 다른 연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번에 귀물을 얻어 전하려 하니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허, 귀물이라니?”
“이리로 가져오너라!”
한명회의 등뒤에서 험상궂은 사내가 나온다. 임어을운, 힘 깨나 쓰는 종놈으로 수양대군이 특별히 붙여준 호위다. 임어을운이 보자기의 매듭을 끌러 속에 든 것을 드러내자 한확이 몸을 기울여 내다보았다.
기다랗게 뻗은 한 자루의 칼이다.
“왜도입니다.”
한확은 조심스레 한명회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서늘한 감촉의 칼손잡이를 쥐어 본다. 뱀가죽으로 감싸 놓았다.
저 뱀을 구하느라 수하들이 굴러다니며 겪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한 놈은 지금 독사에 물려 사경을 헤매는 터이고.
그 고생이 헛되지 않은 듯, 한확의 눈이 빛난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사치스럽게 장식된 왜도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에서 마음에 든 기색이 확연하다.
왜놈들이란 멋을 몰라, 본래의 허접한 장식을 모조리 들어내고 새로 보석과 가죽을 붙이는 데만 큰 공력이 들었다. 거기다 지금은 흉흉한 시국이다. 웬만한 남정네도 감히 홀로 돌아다니기 힘든 시기에 구한 물건들이니만큼 값지다.
“고맙네.”
그리고 그 사실을 한확 또한 알아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좌상 대감의 은덕에 대한 대군 대감의 보답일 뿐입니다.”
집어 들었던 칼을 아랫것에게 넘겨주고, 한확은 한명회에게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올라와서 차라도 한 잔 들고 가게나.”
그렇게 사랑방으로 이끌려 가니, 곧 문들이 닫히고 주위의 경비들이 감싸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하다. 마치 이 집 전체가 바깥과 분리된, 한확만의 나라인 것만 같다. 순간 그 정경에 압도되었다.
그렇게 방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이어지는 침묵.
곧 다과상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명회가 말을 건넸다.
“한합(한확의 성에 합하를 더한 말), 힘을 보태 주십시오.”
“흠? 대군 대감께서 내게 도움을 구하실 일이 어디에 있다 그러는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한확. 더 직설적으로 나가야만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전하께서 불시에 돌아가셨으나, 안평과 역적의 무리들이 여전히 나라를 어지럽히니. 어찌 충량한 신하로서 정난(靖難)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난. 그 단어가 입밖으로 나오자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허허, 신하라···.”
한확은 잠시 웃음을 띠고 수염을 쓰다듬다, 시선을 한명회의 눈에 똑바로 가져다 댄다.
“자네는 지금, 수양대군 대감의 신하가 아닌가? 돌아가신 대행대왕의 신하가 맞는가?”
역시나 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언사.
“대감께서 칭왕하심은 난세에 금성이 난을 일으키니 어찌할 수 없었던 바입니다. 제가 대행대왕의 신하라면, 역시 저는 법도에 맞는 후계의 신하이기도 할 것입니다. 연소하신 전하께서 돌아가셨으니 가장 가까운 종친이 바로 수양대군 대감 아니시겠습니까?
비록 안평이 불궤하여 옥좌를 탐하고 있으나, 금성이라는 큰 도둑을 잡기 위해 잠시 작은 도둑을 눈감아주었을 뿐입니다. 마땅히 난이 평정되고 나면 지존의 자리는 마땅히 그에 걸맞은 이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마치 미리 적어놓은 것을 읽듯, 한명회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공격을 어느 정도 받아 쳐내자, 한확은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에는 임금이 셋이고, 나는 사이군(事二君)하기를 원치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나?”
“대감은 나라의 기둥이십니다. 그리고 큰 기둥은 흔들리기를 꺼리는 법입니다.”
그 말에 한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갑자기 다완을 집어들더니, 떫어진 찻물을 창밖에다 쏟아버린다.
다완에 남은 물기를 톡톡 털면서, 한확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것? 자네나 대군이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언가? 내 누이는 대명(大明) 황실의 어른이고, 나는 이미 정승의 자리에 올랐네. 영의정의 자리를 주겠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으나 크게 기꺼운 바는 아닐세.
재물? 내가 이 집의 곳간을 보여주겠네. 그곳의 보화가 수양대군의 것보다 많으리라 자신하겠네.
다시 묻겠네.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더 받겠는가?”
“대감의 딸은 수양대군 대감의 며느리입니다. 대감께서 즉위하시면 한합의 외손자가 세자가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더 없나? 없다면 돌아가 보게. 왜도는 잘 받았네.”
그렇게 능청스레 한확이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한명회는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저도 모르게 핥았다.
정말, 이걸 말해도 될까?
흉중에 웅크린 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 목젖에 걸려서는 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말은, 뱉어야 한다.
천천히 한명회는 입을 열었다.
“···대감.”
“왜 그러나?”
“수양대군 대감은 주위에 보좌하는 이가 몇 없습니다.”
“나도 아는 바이네.”
“그러니, 대감께서 이 정난의 일등공신이 되신다면, 김종서와 삿된 무리들에게서 이미 앗은 전답은 모두 대감의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금성대군이 다시 김종서 일파와 난을 일으켰고, 그에 지방 토호들이 대거 가담하였으니 그곳에도 땅이 빕니다.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1할에서 2할은 대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선언에, 한확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연한 일이다.
한명회조차도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으니.
사실상, 조선을 조각내어 한확에게 팔아 넘기고 있다.
“···대군 대감의 뜻이 그러한가?”
“이미 이야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좌상 대감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라 하셨고, 그 한도는 저의 재량에 맡기셨습니다.”
모든 것, 그래. 왕위를 빼고 모든 것을 준다. 이리도 말도 안 되는 짓이라니.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쓰릅, 한확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난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방 안은 조용해지고, 한명회는 몸이 달아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멀리서는 쥐새끼 기어가는 소리, 가을에 죽은 벌레 시체가 낙엽과 함께 떨어지는 소리, 호위들이 기침하고 마른 가래를 뱉는 소리.
“좋네.”
바라던 대답이다.
아니, 정말 바라던 대답이 맞나?
감당할 수 있는 거래였을까?
모르겠다.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사합니다, 좌상 대감.”
한명회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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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자의 난 (6)
“대감, 다녀왔습니다.”
“그래, 사우당(한명회). 이번에는 간이재가 무어라 했는가?”
벌써 몇 차례 한확의 집에 다녀온 한명회를 맞이하며, 수양대군은 입을 열었다.
“그 자신이 고명사은사로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느냐 물었습니다.”
“허나, 양계(평안도와 함길도)를 통하여 요동으로 돌아가는 경로는 사용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미 대신들과 금성의 군세가 명국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으니···.”
“위험부담을 지더라도, 인천을 통하여 곧바로 산동반도나 다른 화북 지방에 닿는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하여도, 이 시기에 안평에게 들킴이 없이 명국으로 가는 배를 띄울 방법이 있겠는가?”
“그는 후에 생각할 일입니다 일단 고명을 받는다 한들 다른 책략이 앞뒤로 따르지 않는다면 천자의 조서(詔書) 역시 한낱 종잇장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위선(爲先), 다른 문무백관을 설복시켜 우리의 대의에 따르게 하고 적괴(賊魁)들을 미워하게 할 방안 또한 필요할 것이며, 안으로는 안평의 무리를 물리치고 바깥으로는 금성의 불측한 군세를 다스릴 계책 또한 갖추어야 합니다.”
“흐음··· 알겠네.”
“그리고··· 또 좌상 대감이 말씀하길, 후에 첫째와 둘째 아들 또한 공신으로 끼워주기를 바란다고···”
“뭐? 첫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차자(次子)의 나이가 어찌되었던가?”
한명회는 슬며시 수양대군의 눈빛을 살폈다. 결코 사돈 되는 이의 아들놈을 몰라서 묻는 눈치가 아니다. 저 미간에 선명히 그려진 내 천川) 자가 수양의 감정을 생생히 말해주고 있었다.
한명회는 자연히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다보며 말할 수밖에.
“열네 살입니다.”
“···이제 여기까지 오고 말았단 말인가?”
한확은 아직 상투도 틀지 않았을 어린아이를 공신으로 대접해달라고 하고 있다. 아직 수양대군의 머리에 익선관이 올라가지도 않았으며, 어깨에 용포가 둘러지지도 않았는데 이런 형국이다.
무리한 부탁이다. 그럼에도 한확이 굳이 이를 말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
한명회는 방금 전에 만났던 그가 자신에게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되새겼다.
-자네, 내 둘째 아들이 기억나는가? 경신년에 난 놈인데 벌써 어엿한 장부가 되었다네.
그때의 그 능글맞던 얼굴. 웃음 속에 감춰진 비웃음.
‘개새끼.’
무리한 부탁을 던짐은, 관계의 우위를 확인하는 일이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는지,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지가 여기서 밝혀진다.
“···나중에 정난이 끝나면 공신 목록을 보내겠다고 전해주게나.”
“···..”
그리고 방금 수양대군의 대답에서 한확과 수양의 상하관계는 완전히 정립되었다.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훗날의 영광을 위해 잠시간의 수모를 참는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허나 대감이 보좌에 오른 뒤면 한확이 가만히 있어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통성이 없는 군왕, 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찬탈자. 그런 왕이 천조(天朝)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대신을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는 한명회의 입장에서도 달가울 수가 없는 상황이고. 애초에 수양의 편에 붙은 것이 그 주위에 커다란 공신이 없기 때문이었거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한확의 연로함. 그가 곧 늙어 죽기라도 한다면, 아들들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장남을 제외하면 나이 어리니 그 위세가 크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한확은 곧 수양의 사돈이니, 권신의 피가 장손의 핏줄에 섞여 흐르게 될 것이다. 저 일가가 세도를 누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허나 대안은 없다.
말없이 수양의 손이 주전자로 향한다. 찻물이 보랏빛으로 찰랑이며 찻잔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다 손잡이를 쥔 손이 떨리자, 몇 방울이 튀어나가 대군의 소매를 적신다.
한명회는 그를 적당히 못 본 체하였다.
인사를 올리고 대군의 방을 나오자, 호위격으로 붙은 임어을운이 눈치를 본다. 조용히 자신이 부리는 장정들을 모아 길을 나서는 한명회를 둘러싸 보호한다.
영악한 것. 바깥에 서서 이야기를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틀림없다. 소리 죽여 말한 데다 일부는 보안상 필담으로 이어갔으니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겠지만. 한명회의 심기가 불편한 것만큼은 파악한 듯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임어을운이 천천히 입을 뗀다.
“나으리··· 저 혹시 한확이라는 대감님이 골칫거리입니까?”
“네깟 것이 논할 바가 아니니, 입에 올리지 마라.”
“허나 대감께서 거사를 꾀하실 때 제게 주먹들을 데리고 여기저기서 싸우라고 내보내셨습니다. 제가 부순 집이 몇 채나 되고 죽인 장정이 수십입니다. 대감의 일이 나으리의 일이라면, 저의 일이기도 합니다. 알고 싶습니다.”
“그만하라 하였다.”
그러자 우물쭈물하던 임어을운이 무어라 지껄이려다 입을 닫는다.
하기사, 저것도 대감께 약속받은 바들이 많았다. 제 손에 묻힌 피도 많았고, 더러운 일도 도맡아 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비단옷을 꿈에 그렸을 것인데··· 그것이 모두 무위가 될 성싶고, 눈앞에 아른아른하던 꿈이 요원해지자 꼬리에 불붙은 듯 마음이 급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명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내가 저 종놈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지금껏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목숨을 건 적도 많았다. 이 길의 끝에는 지존의 자리에 오른 대감과, 제일의 공신이 된 자신의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걸어온 길이다. 그런데 조금 일이 늦춰진다 해서 이리 조급해지다니···
결국 이뤄질 일은 이루어지리라. 한확의 요구가 과하기는 하더라도 협력관계 자체는 큰 문제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확이 견인하여 신료들의 마음이 수양대군에게 기울고, 명국의 인정 또한 받아낸다면 안평이 설 자리가 없어질 터이니.
물론 안평이 아무 대응도 않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무언가 움직일 건더기도 없다. 이대로 일이 착착 진행된다면 예정대로 수양대군이 한양을 장악할 것이고, 지방 반란군들 또한 능히 평정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염원하던 결과가 나타나리라.
경호하는 장정의 손에 들린 초롱불이 걸음 따라 흔들리면서 어둠을 밀어낸다. 대군 대감과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밝았단 사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한명회는 소름이 돋아오는 것을 느낀다.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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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동지.”
“아, 카마라드(Camarade, 동지) 에티앙블. 당신이군요. 소련을 위해 큰 일을 해준 데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트로츠키는 영어나 조선어 대신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다. 끈적한 비음과 복잡한 모음이 섞인 언어. 러시아인 특유의 악센트가 조금 남아있을 뿐 유창하다. 에티앙블은 트로츠키의 말에 손사레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한양에서 조직된 인원들을 다른 세력에게 송두리째 넘겼습니다. 자의적으로 여타 세력과 손을 잡았고, 또 난리 중에서 미처 구출하지 못한 요원도 있으니···”
“한 명, 단 한 명뿐이오.”
트로츠키가 에티앙블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200km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수많은 인원을 당신과 매원이 모아서 집으로 무사히 데려왔소. 그것도 전쟁이 일어난 와중이었소.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지금 가족과 벗들의 품에 안겨 환송식을 치르고 있고. 두 사람의 공로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지. 누가 감히 질책하고 폄훼하려 들 만한 것이 될 수 없소.
···그러니 뒤에서 나오셔도 좋소, 매원 동지.”
마지막 문장을 조선어로 말하자, 멀리 복도 끝에서 서성이던 매원이 부리나케 달려온다.
“아, 옙옙. 숨으려던 것은 아니옵고. 제가 그저 수줍음이 많아서.”
“그대 두 사람 모두 수고했소. 그리고 고개 숙이지 마시오. 나는 동지의 상전이 아니오.”
“앗, 알겠습니다. 트로츠키 동지!”
여전히 굽실거리는 것이 몸에 맞는 듯한, 저 떠돌이 가인을 잠시 트로츠키는 바라보았다.
저 이가 수개월이 걸려서야 자신이 광대이고 가수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머리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트로츠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게 될까? 비굴한 말투를 벗어 던지게 될까?
···이런 질문이 모이면 결국 하나의 커다란 질문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트로츠키 또한 알고 있었다.
언제쯤 이 땅에 사회민주주의가 널리 퍼질 수 있을까?
LMS 켈틱 1호 상층 갑판의 휴게실. 바깥이 내다보이는 창문과 테이블, 그리고 담배 재떨이가 있는 곳이다. 트로츠키가 자주 외유를 나오는 곳이기도 하고. 재떨이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으니 가만히 비어 있을 뿐이다.
그 깨끗한 재떨이를 더럽히기 싫은 마음에, 트로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담뱃재를 튕겨버렸다.
동양의 바다가 아메리카에서 온 낯선 식물의 타고 남은 재를 삼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트로츠키는 지난 날들의 격무를 돌이켰다.
에티앙블과 매원. 두 사람이 한양과 인근 지역의 요원들을 무사히 대피시키면서, 드디어 이때까지 얻은 정보들의 교차검증이 본격화되었다. 한양에서의 내전이나 지방의 반란 등이 실제로 벌어졌음이 검증되었다.
“저, 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