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2
···그리고 신문 과정에서 얼핏 보았던 모습이라도 기억에 남았는지, 매원이 조선국왕을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니 국왕의 신원 확인 문제도 마무리.
그 뒤로는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어 적체돼 있던 업무들이 물밀듯이 진행되었다. 그 덕에 인민위원회 회의실들에서는 신음소리가 간간히 울려 퍼졌지만.
혹시 모를 외침에 대비해 국경 경비를 강화해야 하니 자신과 조지프 푸츠가 속한 군사인민위원회가 고생했고, 각지의 정보원들을 관리하느라 외무인민위원회와 올리버 로가 여러 밤을 새웠다.
문화예술사업 예산이 갑자기 대폭 축소되자 블레어 또한 갖은 사업안을 조정하느라 볼살이 꺼졌으며, 당연하지만 예산 조정과 국경 인근 농지개척 취소라는 칼날이 들이닥쳤으니 바빌로프도 죽는 소리를 냈다. 사회복지분야의 노먼 베순이나 에드워드 바스키도 과로 끝에 자기들이 먼저 병상에 누울 판이었고.
그렇게 당장 떠오른 일을 쳐내더라도 할 일은 차고 넘쳤다.
예를 들면, 지금 하려는 일처럼.
“에티앙블.”
“예, 무슨 일입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소. 언젠가 한양 땅을 내 두 발로 밟게 될 수도 있고, 소련이란 나라가 조선에 흡수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아니, 그런···.”
“충분히 가능한 길이오. 우리는 고작해야 도시 하나를 점거한 지방정권일 뿐이니. 어쩌면, 정말 저 영구혁명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우리가 코리아의 반도 전역을 집어삼키고 공산화할지도 모를 일이지.
어찌되든 간에 나는, 아니 우리는, 조선과 그 주위세계를 알아야 하오.
그러니 알려 주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에티앙블이 되묻는다.
“이미, 조선국왕과 휘하 신료들에게 주요 인사들은 어느 정도 ‘과외’와 같은 것을 받고 있소.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어떤 나라인지, 어떻게 사회가 구성되어 있는지 같은 것을 말이오.
그러나 이들도 조국에 대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을 것이고, 모르는 것 또한 있을 것이오. 조선왕국의 왕과 관료가 아닌 20세기의 동양학자로서, 이 세계에 대해 알려주시오. 또 필요한 지식들을 전달해주시오.
내 기억으로는 중국학과가 고전학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을 텐데, 그쪽 지식을 갖추는 것도 괜찮겠구려. 콩푸시아니슴(Confucianisme, 유학)을 모르는 이들은 야만인 취급받던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고.”
“···한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고맙소.”
그렇게 에티앙블의 손을 맞잡고, 또 매원에게도 격려와 감사의 이야기를 전한 뒤 트로츠키는 상상해본다. 하위지나 박팽년 등과 더불어 칸푸찌(Конфуций, 공자)에 대해 논하는 트로츠키라니···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비웃음이나, 어처구니없는 웃음인 것만은 아니다.
낯선 것에 대한 기대감. 기묘할 정도로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열병 같은 즐거움.
이 세계가 정말로 과거라는 것, 그것도 머나먼 카레야(Коре́я) 땅이라는 것이 이제야 실감되는 것만 같다. 1년이 지나고나서 이제야!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호탕하게 웃어본다. 차갑고, 건조한 극동의 겨울공기. 멀리 침엽수림의 풀내음과 가까운 바다의 소금기가 어려 있다. 매원과 에티앙블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하하하하! 한번, 잘해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트로츠키는 다 타들어 간 꽁초를 바다로 던져버린다.
저게 마지막이다. 점점 20세기의 흔적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타고 온 이 거대한 배조차도, 언젠가 세월 속에 녹슬어 갈 터이다. 애초에 폐선 처리될 것을 들고 온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집과 고향의 기억이 지워져 간다면,
이곳이 새로운 집이 되어 있으리라.
트로츠키는 멀리 서쪽을 내다보았다. 저 너머에 한양이 있다. 그 낯선 동양 왕국의 왕도(王都)도 이곳 원산도 지금은 검은 밤하늘 아래 싸여 있다.
그러나 이제 곧 새벽이 오면, 동쪽에서부터 밝아오는 붉은 태양이 이곳을 비추리라. 그때가 되면, 지금 어둠 속에 잠겨 알 수 없는 것들이 비로소 드러나리라. 뿌옇게만 보이던 사물의 색깔도, 델포이의 신탁처럼 알쏭달쏭하던 앞날의 운명도 확연해지리라.
깊은 밤 너머로, 새벽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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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자의 난 (7)
“좌상 대감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고맙소.”
짐짓 위엄을 갖추려 애썼으나 그 속의 처량함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정승, 그것도 ‘호랑이’라 불리우던 김종서라 할지라도 어찌 할 바 없는 일이다.
몰락만을 목전에 둔 정치인이란 처량하고도 비참한 것이니.
괜히 차가워오는 가을바람이 더욱 뼈에 스미는 듯하여 김종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노환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 모습은 추풍을 맞아 떨어지기 직전의 낙엽이 말라비틀어지는 형상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수양대군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으나, 김종서는 더 이상 모욕에 반응할 심적 여유조차 없었다.
“대감께서 외방에서도 몸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논의 중일 뿐인 그의 귀양을, 이미 결정된 사항이나 다름없다는 듯한 태도로 말하는 데 있어서는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김종서가 귀양을 간다 해서 고된 생활을 겪지는 아니하리라. 무려 정승 격의 인물이 멀리 떠날 터이니, 고을의 수령도 한양에서의 소식을 얻고 귀한 연줄에 닿고자 그를 융숭히 대접할 것이며, 근방의 학생들도 그의 수하에 들고자 바글바글 몰려들 터이다.
허나 단지 일신이 불편하고, 정든 경화(京華)을 떠나는 것만이 선비의 고통이겠는가?
그 이름이 오욕으로 더럽혀지고, 존숭받아 높이 떠오르던 정승의 자리에서 단숨에 내려앉음이 흉중을 괴롭히는 가장 큰 통증이거늘···.
과연 불씨의 말에 집착하는 자답게 용렬하기 그지없구나. 어찌 정적이라 하여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마음도, 이제는 내색할 길이 없다. 눈앞의 저 자신만만한 종친이 이제 자기 대신 정승의 자리에 앉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노신(老身)을 위해 위로를 하여 주어서 고맙소.”
“아닙니다. 대감께서 몸을 추스리며 쉬고 계시면 제가 추후 대감을 다시 불러 모시겠습니다.”
“선비를 부르고 또 내침은 오직 군왕의 뜻에 의한 것이니, 어찌 신하가 함부로 논할 수 있는 것이겠소!”
결국 그 교만함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김종서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리고 쇠약해진 심신이 그 대가를 치르는지, 노성을 낸 직후 기침이 나와 수양대군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하하··· 성치 않으신 몸으로 나라걱정이 깊으시니 스스로를 깊이 해치실까 겁이 납니다. 영중이 무사(營中武事)하니 부디 목 좋은 곳에서 댓소리, 물소리 들으시며 편히 있으시지요.”
비웃음 조의 말을 던진 뒤 수양대군은 무언갈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읍하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던 양 휙 몸을 돌려 떠나는 모양이, 지금 김종서가 처한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곧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조용히 초야에 파묻히게 될 것인가···.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런 씁쓸한 제 처지보다 수양이 잠시 중얼거리고 간 그 뜻 모를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입모양의 움직임이 어땠는지가 더 신경 쓰이는 김종서였다.
///
그렇게 퇴청한 뒤에 김종서는 수양과의 만남에서 느낀 불쾌함을 씻고자 서책 몇을 꺼내 뒤적이다 덮기를 반복했다.
글씨를 쓰는 것도, 난을 치는 것도 모두 흥을 주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을 놓고 어딘가 천리타향(千里他鄕)으로 떠날 생각에 계속 속이 뒤숭숭하였다.
이런 굴욕이라니.
세묘조(世廟朝, 세종의 치세)와 문묘조(文廟朝, 문종의 치세)의 파릇파릇한 시절부터 차근차근 공적을 밟아와 정승에 이르렀다. 무릇 위로는 보필할 임금만이 있고, 아래로는 보살필 만백성만이 있는 자리이니 그만한 명예가 없으리라 뿌듯한 마음을 살피던 것이 바로 어제와 같았는데.
이제 승냥이 같은 수양대군이 권세를 쥐고 연소한 금상(今上, 지금의 임금을 일컫는 말)을 미혹하려 하는데 김종서 자신은 외적에게 패해 이름을 더럽히고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이 어찌 원통하지 아니할까.
그렇게 겨우 분기를 삭히며 떨리는 붓끝으로 난을 몇 줄기 뻗쳐 나가던 때, 부르는 손님이 있어 문을 나섰다.
안평대군이다.
그래, 안평이 있다. 저 수양의 무도한 무리가 설치지 못하도록 막아줄 마지막 버팀목.
비록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어 놓고, 이리 그를 허무하게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이 께름칙했으나 결국 의지할 것이 그뿐이니 어찌하랴?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 왔소?”
“좌상 대감께 문안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곧 주안상을 차릴 터이니 들어오시오.”
그러자 섬돌을 넘어 성큼성큼 걸어온다. 문약해 뵈던 지난날의 기풍보다 확연히 당당해진 모습. 홀로 어수선해질 조정을 정리하는 큰 짐을 떠 앉게 되어서일까? 어찌되었든 그 위세에 김종서는 사뭇 자신의 노기가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래. 안평대군만 잘 버텨준다면. 권토중래를 도모함도 가능할 터이며, 뭣도 모르고 쏘다니는 신숙주와 혈기만 넘치는 무리들을 다스릴 수도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품고는 안평과 이런저런 담소로 시간을 때우는 사이 주안상이 들어온다. 술병에 서로의 술을 따르고 안주를 집어먹다 보니 가볍던 이야기도 술기운을 먹어 점차 깊은 주제로 나아간다.
“대감, 대감의 사람들을 제가 통솔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양과 그 일파가 삿된 말로 선비들을 현혹하며 주상 전하의 눈귀를 어지럽히려 합니다.
이때 불운한 일을 맞아 주상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필해야 할 대감께서 외방에 나가게 되셨으니, 마땅히 뜻있는 이들의 세가 흩어지지 않도록 그러모아야 할 터입니다.”
“···옳은 말이오. 내가 이런저런 자리를 준비해 두었으니, 경화의 올곧은 선비들이 비해당의 뜻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 두겠소.”
“그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뭔가 이상하다.
안평대군의 눈썹이 기묘하게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그 아래의 인상이 변한다. 문득 뱀이 어린 시절의 허물을 벗고 독니를 꺼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더 이상 사람 좋던, 유유자적하는 문인의 얼굴이 아니다.
김종서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한 줄기 지나간다.
“···무어가 부족하다는 말이오?”
“제가 한때 거두었으나 옳은 뜻을 놓고 공명심을 좇아 수양과 뜻을 합치시킨 여러 신료들이 있으니, 단지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컨데, 외관들에게도 방비를 해 두라 전해주십시오.”
“그 무슨 소리요! 방비라니!”
“···수양이 혹여나 불측한 마음을 품을까 싶어 한 말입니다.”
“불측한··· 마음?”
이 나라에서 대군이 속내에 불측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 의미는 하나뿐이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일단 그 제안을 궁리만 해보겠소.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이제는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소.”
“부디, 명현한 판단 내려주시기만을 바라겠습니다.”
안평대군이 떠나자, 김종서는 방 안팎의 이곳저곳을 살피었다. 마치 어딘가 보는 눈이 있기라도 할 것처럼.
안전이 확인되자 다시 책상 앞에 주저앉아서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책을 치우고 붓을 들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붓에 먹물을 먹이며 김종서는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수양이 난역(亂逆)의 마음을 품는다? ···안타깝게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를 막을 방법은 무엇인가? 경군을 놀려 그의 일당을 추포하고 국문하여 죄목을 낱낱이 알림에 있을 것이다.
헌데, 외관의 도움을 요청함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외관을 통하여 각지의 토병(土兵)의 도움을 구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안평은, 역모를 꾸미는가?
그러다 갑자기 김종서의 머리를 치고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양이 읊조린 말이 무엇이었던가? 그가 중얼거리던 그 한 마디가 무엇이었던가?
-군왕의 뜻이라··· 나의 뜻과 곧 다르지 아니할진데···
그것이 군왕을 제 뜻대로 움직여 조종하겠다는 권신의 배포인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근심에 질식되어가는 듯하면서도 김종서의 붓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원봉(圓峰, 이징옥의 호), 나일세.
···준비하게나.
서울에서 난이 일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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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편찮으신 일 있으십니까?”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김종서는, 이징옥의 부름에 놀라 칼을 쥔 오른손을 순간 움찔거렸다. 마치 누군가 다가오길 두려워하는 작은 피식자 같은 모습이다.
“아무것도··· 아닐세.”
이징옥은 무언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물러선다. 김종서는 어느새 땀이 찬 손을 칼자루에서 놓았다.
한양에 남는 이들은 모두 안평의 손아귀에 들어가리라 생각하였고, 그 생각이 맞았다. 한때 쉼없이 김종서의 대문을 넘나들던 이들이 어느덧 안평의 수하가 되어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을 알았기에, 외방에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힘써온 지난 1년이었다.
수양이 노리는 바가 한낱 정승 자리가 아니라 보위 그 자체였음을 너무 늦게 눈치채 버렸다.
순한 양과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던 안평이 구밀복검(口蜜腹劍)하는 역괴임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막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임금이 죽었다.
그 죄는 영원토록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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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오?”
“제 형님과 재미난 일을 꾸미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내보이는 한확의 앞에서, 정말 태연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려주겠다는 듯 안평대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집어 들어 입안에 그 뜨거운 내용물을 털어 넣는다.
“포기하십시오. 명국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신다니 제가 대신 구해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그, 그건···.”
“괜찮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좌상께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일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만 있으시오.”
하십시오 하던 말을 하오로 바꾸며 안평이 술잔을 탁, 내려놓는다. 술 방울 몇몇이 한확의 얼굴에 튀었으나 닦아내지도 못할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이만.”
안평대군이 대문을 밀치자, 따라온 종복들이 날개처럼 좌우로 달라붙어 그를 호위하고 나섰다.
그 살벌한 위세에서 이전의 호인(好人) 비해당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가면을 벗고 권좌를 향해 우뚝 나아가는 한 마리의 늑대 같은 교활함이 엿보일 뿐.
안평은 손에 쥔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길 반복하며 고심했다.
‘기어코 대신들은 나의 곁을 떠났다.’
김종서에게 기회를 주었다. 역신이 될지라도 부귀가 기다리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건넸다. 그의 일파를 통하여 지방을 능히 평정하고, 장안(長安)에서는 수양을 베어 화근을 없앤다.
그렇게 모든 가시를 쳐낸 후에 도도히 보위에 올라 조선을 손에 넣는다면 누가 그에 맞서리오? 대신들은 연배가 있어 곧 사직하면 이제 온전히 조선이 손에 들어올 것이었다.
주상은 어리지 않은가? 어디서 독이 든 열매라도 주워 먹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고. 형님은? 뭐, 명망도 없으신 사람이니 어렵 잖게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서의 대답은 침묵이었고, 그렇기에 부득이하게 멀리 돌아가는 길을 걸어왔다.
도성에서는 칼부림이 오가야 했고, 쓸모도 없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잠깐 돌아갈 뿐이다. 늦춰졌을 뿐이다. 한 걸음씩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쥘부채를 접었더니, 부채살끼리 엉켰는지 종이가 찢어지고 대나무살이 휘어진다. 거슬린다. 거슬려.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던져 버린 뒤, 오직 걸어갈 길만을 바라보았다. 이 사대문 안의 피비린내, 그 속에는 권력의 냄새가 스며 있으니···.
안평의 두 눈이 야망으로 불탄다.
///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안평이 나가자 한확은 머리를 싸맨다.
어쩌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종복들은 믿을 만한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도 모르게 한확은 문고리에 쇠젓가락을 끼워 넣어 잠그고는 생각에 빠진다. 허나 그렇게 단단히 문을 잠갔는데도 눈치 없는 어느 종놈이 창호를 흔들며 외쳐온다.
“좌상 어른! 지금 수양대군 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요!”
“그, 거, 거사는 일자를 미룬다고만 전해라!”
“한합,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일이 급한 일이거늘 어찌 이리 한 마디 상의 없이 계획이 바뀐다는 말입니까!”
제길, 한명회의 목소리다. 급하게 문을 열어 섬돌에 내려놓은 신을 꿰어 신고는 마당에 선 한명회를 맞이했다.
“사우당, 미안하게 되었네. 그러나 일을 도모함에 있어 너무 급했던 것은 아닌가 싶으네. 안평 쪽에서 눈치라도 챈다면···.”
“그렇기에 오히려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닙니까? 명재일각인데, 어찌 사람을 부리고 뜻을 얻음에 지체를 두겠습니까?”
“안된다면, 안되는 걸세! 이전의 계획은 일단 취소일세! 나에게도, 자네에게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
한명회의 눈빛이 의심으로 젖어가지만 입을 열 수는 없다. 안평에게 계획이 발각당했음을 알리면 적과 내통했을지 모른다는 혐의와 약점을 살 뿐.
“위험부담은 이미 군세를 일으켰을 때부터 지고 있던 것인데 이리 말을 바꾸면···”
“자네는 이제 돌아가게. 여봐라! 손이 돌아 가신다지 않느냐! 어서 채비를 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아니, 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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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말도 다 못 마친 채, 한확 댁 머슴들의 손에 이끌려 제 발로 걸어나가야 했다.
그렇게 쫓겨나듯 문간 밖으로 나오니 한스러운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이런 젠장! 저 교활하고 심약한 늙은 거미새끼 같으니··· 저 놈의 유약함이 거사의 걸림돌이 되는구나···.”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호위격으로 따라온 임어을운이 참견을 한다.
“넌··· 신경 쓸 것 없다. 대감 댁으로나 가자.”
“하지만···”
“신경 쓸 것 없대도!”
“···”
그런 울분 섞인 소리를 내더니 비틀비틀, 한명회는 수양대군 대감 댁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임어을운이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