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3
겨울바람이 차지 않다면 이상한 것이겠건만, 한명회에게 이토록 뼈까지 시린 바람이 부는 것을 어째서인가? 웬지 바람 속에 칼이 숨겨져 다가오는 것만 같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발 밑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 생각에 괜시리 더 옷깃을 여미며, 흙탕물까지 얼어붙은 한양바닥을 그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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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자의 난 (8)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세종대왕의 차남과 삼남.
지나치게 불사에 치중하여 인망이 좋지만은 않았던 수양과 어렸을 적부터 문인들의 관심을, 자라서는 뭇 선비들의 흠모를 받은 안평.
그 두 왕자.
두 사람.
서로를 죽여야 하는 형제들.
아들이 죽었다.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도 죽었다. 불과 수개월 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 뒤로는 이제 사찰에 다니던 일도 끊고 다시 찾지 않았다.
부처가 되리라는 생각은 이제 할 수 없을 터였으니 말이다.
곧 죽여야 할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흘려야 할 피, 손에 묻혀야 할 피가 한양 길바닥을 모두 적시도록 넘쳤다.
···물론 그 중에 뜻하지 않게도 조카가 죽었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놀랍게도 그뿐이었다. 시원섭섭, 조카가 죽었는데.
기묘할 정도로 조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불궤(不軌)를 결심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사람의 심장을 버린 것인가 싶기도 하였다.
형님은 길 복판에서 울었다고 하였다. 안평 자신은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안평은 잠시 책상에서 일어났다. 함께 의논을 나누던 이들을 잠시 물리고 방안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는 듯한데, 곧 밤이 지나가면 그 물이 얼어 온 한양바닥을 빙판으로 만들 것이었다.
그렇게 무언가 얼어붙은 듯, 막혀서 흐르지 않는 듯, 답답한 시간들이 흘러가고만 있다.
수양과 안평. 그 기묘한 권력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지 대신들의 유배라는 거대한 사건 하나 때문이었다.
사류(士類)들의 여론은 안평에게 유리할 것이며, 미리 순군들을 끌어모아 놓은 것이나, 도청의 자금을 융통하여 이미 자기 인사들을 곳곳에서 지원하고 있던 것 또한 못난 형님보다 앞서 나가는 지점들이었다.
대신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미묘하게 수양 측과 가까운 인사들.
그러나 벼슬에 굳이 나가지 않은 명망높은 문인들을 비롯하여, 안평의 시회(詩會)에 참석한 적 있다 하는 많은 이들은 서서히 안평의 발아래로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안평의 세력이 한양에서 그리 축소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갑작스레 대신들이 한양을 떴다 하더라도 그 잔존한 인사들을 흡수하고 포섭하였으며, 그러지 못한 이들은 사직시키거나···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게 하였다.
그 미묘한 평형상태. 안평이 조금 더 유리하기는 하나, 수양을 아예 잡아먹을 수는 없을 만큼은 수양의 세력이 건재한···.
그 조금의 우위를 믿어 칼을 들었다가, 지금 애꿎은 피만을 뿌리고 다시 무기한적으로 저 불측한 형님의 명줄을 살려 놓게 되지 않았는가?
이게··· 이게 무어란 말인가? 원산에 자리를 꿰찬 저 색목인들이란 어떤 족속들이며, 또 어느 귀신의 땅에서 왔기에 수천 군졸을 단번에 구천을 떠도는 원혼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인가?
어찌 나의 대계를 이리 갈기갈기 찢어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저들은 수양의 편에 붙어 섰다는 말인가?
어찌 그 관원으로 주장하는 이들이 수양을 도운 것이며, 또 그들이 꾀어낸 백성들이 수양을 위해 싸웠다는 말인가?
그리고 원산 오랑캐들이 수양의 편을 들었다면, 지금은 어째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가?
그 의문들에 대해서는 지금 답할 이유도, 그 답을 찾을 여유도 없다. 눈앞의 수양을 견제하기 바쁜데 어찌 그와 친교한지도 아닌지도 모를 오랑캐들의 거동을 신경 쓴다는 말인가?
그 생각에 안평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세필 붓을 꺾어버렸다. 모든 것이 그 한 가지로부터 틀어지고 말았으니 어찌 원통치 않으리오?
그 이족(夷族)의 무리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그는 권신이 되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군왕이 되는 길을 향하여 걷고 있었으리라.
뭐, 사소한 방심으로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법이니 만일은 모르지만 말이다.
수양대군과 한확의 사이를 겨우 떼어놓았다. 허나 한확이 안평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보좌에 올려주리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안평에게는 이미 동맹과 수하가 많으니 수양처럼 한확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결국 다시 한확이 겁쟁이처럼 웅크린다면···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남는다. 대신들은 허울 좋은 임금으로 금성을 세워놓고선 한양으로 밀고 들어오는 지금. 이 급박한 순간에.
촉박하다··· 너무도 촉박하다···.
원산의 오랑캐들이 다시 조선을 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또, 금성대군에 맞서 황해, 경기, 충청의 지방관들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는가? 아니, 버텨줄 이유는 있는가?
만일 통제력을 상실한 한양의 두 바보들을 버리고 지방관들이 금성에게 붙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지금의 상태에서 균열을 만들고 비집어 들어가야 한다. 수양을 죽이고, 나아가 금성과 구(舊) 대신 무리를 주살하며, 원산을 평정하든 무얼 하든 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겨울이 얼어붙게 한 것은 내리는 비뿐만이 아닌 듯하였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한양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남북으로 4개 도에서 난역의 불길이 치솟거늘···.
안평은 질끈 눈을 감고는, 그 갑갑한 가슴속을 정리하려 애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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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려주···.”
“자네가, 그 색목인이 맞는가? 원산에서 왔다는?”
“맞소! 내가 소비에트 연맹의 한성 연락책이오!! 나를 제하고는 모든 이들이 도망쳤으나, 나만 미처 빠져나오지를 못하였으니···”
“그 증좌(證佐)는? 패는 어디 있는가?”
“ㅍ···패 말이오?”
“그래, 패. 낫과 망치 문양이 그려진. 그리고 그··· 뭔가 다섯 갈래로 꽃잎처럼 갈라져 삐죽빼죽한 것도 있다던데···.”
“오각성(五角星) 문양 말이오? 아… 아, 맞소! 여기, 여기 있소!”
“그래, 그래. 잘 알았다.”
임어을운(林於乙云)이 색목인 남자 앞에 쭈그려 앉는다.
이미 묶이고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 꿇려진 남자는 임어을운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두려움에 바둥바둥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쓴다.
뺨 한 대 치니 버둥거림이 잠시 멈춘다.
“여기, 적힌 거나 봐라!”
“보고··· 있소···.”
대강 그려진 한양지도에 이런저런 집 위치들이 표시되어 있고, 정음(正音, 훈민정음)으로 서툴게 집주인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여기에 있는 저택들이 다 네놈의 당여(黨與)들이 오간 곳이 맞으냐? 총 열세 채?
“그, 건··· 크헉!”
대답을 망설이던 남자에게 발길질이 몇 번 오가자 남자는 날숨과 함께 피 섞인 가래침을 입밖으로 뿜어낸다.
“다시하지. 여기가 네놈들 당여가 오간 곳이 맞다고?”
“···맞소. 총 열세 채.”
“좋아··· 열세 채라면 거기에 남은 머릿수는 한···. 흠, 되었다, 이 정도면.”
그렇게 읊조리며 임어을운이 옆에 있던 사내에게 지도를 넘긴다.
글 모르는 임어을운 대신 그 사내가 이리저리 무언가를 끄적인다. 아마 임어을운이 읊었던 내용을 받아 적는 것이리라.
“이제 패도 내놓게.”
“그건···! 도대체 그 메달로 뭘 하려고···.”
남자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으스러진 두개골 사이로 피와 찐득찐득한 액체가 머리칼에 스며 나오니, 임어을운은 신을 더럽힐까 싶어 발을 치웠다.
그리고 죽은 남자의 손에 끝까지 들려있던 그 패를 잡아채고, 필기를 맡겨 놓았던 사내에게 지도를 넘겨받는다. 그제야 일을 모두 처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한다.
“치워라!”
“네!”
살육의 현장을 뒤로 한 채, 임어을운은 성큼성큼 걸어 반쯤 얼어 있는 차가운 개울물로 손과 얼굴의 피만 대강 닦았다.
근처에 준비해둔 옷으로 변복한 뒤, 피 묻은 저고리와 바지는 산짐승들 씹어 먹으라고 어디 수풀에나 던져두었다.
마지막으로 땔감이 놓인 지게를 멘다.
그렇게 산속에서 걸어 나오자, 평범하게 힘 좋은 머슴 하나가 우뚝우뚝 땔감을 장만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어느 정도 어둑하니 해가 질 것이고, 오늘은 당번이 아니니 성내의 날도둑놈이나 이런저런 죄인들을 잡아족칠 일도 없다.
오늘 순찰도 안 서고 불침번도 막동이 몫이니, 대감이나 한명회 나으리께서 별 말씀이 없다면 그냥 곯아떨어져 잘 것이다.
언제나와 같은 임어을운의 하루였다.
아니, ‘언제나와 같은’이라는 말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임어을운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죽였다. 한길에서 쳐죽이고, 저택에서 베어 죽이고, 다리에서 빠뜨려 죽이고, 집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그게 한 며칠을 갔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또 맞고···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다 이제, 또 대군 대감과 역적놈(이 놈도 대군이긴 하다.)이 화약을 맺었다 하니 대놓고 죽이지는 않고 성 바깥 야산으로 살살 끌고 와서 이것저것 캐묻고는 몇 명씩 죽였다.
훨씬 조용하고, 깔끔하고, 또 무엇보다도 한가로운 나날이 지속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의 그 아수라도(阿修羅道)는 마치 꿈결과도 같이 멀게 느껴진다. 물론, 임어을운 같은 싸움꾼이 아니라면야 다른 한양 사람들처럼 그 지옥 같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혀 버렸겠다만···.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렇게 돈 많이 모아서 나중에 시주라도 하면 부처님도 용서해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수양대군 대감께서도 그러니 불공(佛供) 드리기에 매진하시는 것 아니겠는가?
오히려 천한 몸으로 천한 일 하며 전생의 업(業)을 씻고 있으니, 공양만 잘 드리면 내생(來生)에 어찌 잘 살게 될 줄 알겠는가?
깊이 파고들어가야 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고, 다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그 열한 자 외는 것밖에 모르는 임어을운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또, 주인어른이라는 수양대군이 그에게 보여준 것이 그런 모습이기도 했고 말이다.
임어을운은 대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저기 그슬린 곳, 아직도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곳들을 지나 이리저리 가다 보면 놀랍게도 지난 전란 동안 무사했던 대군 대감의 저택이 나온다.
대감의 저택이 보이니 괜시리 어깨에 힘주고, 목을 세워 걷게 된다. 나는 대감이 신임하는 이, 나는 대감을 위해 누구보다도 많이 죽인 이.
물론 그 신임이라는 것도 요새는 전혀 드러나고 있지만··· 잠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고작해 봐야 잠시 자신이 쓰일 데가 없으니 생기는 일이리라···.
‘정말 그런가?’ 임어을운은 잠시 떠오르는 의구심을 억누르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나으리가 계신 방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나으리, 접니다.”
“···누구지?”
“쇤네, 임어을운입니다요.”
“아, 그래. 들어오거라.”
임어을운은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펴면서, 섬돌을 밟고 올라가 방 안에 든다.
무릎을 꿇어앉으니 한명회가 사뭇 점잖은 자세로 앉아서는, 읽던 책을 옆으로 치운다.
“제대로 처리하고 왔습니다. 뒷수습은 다른 아이들에게 시켜놓고 우선 전달할 것부터 전달해 드리러 왔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좋아, 패는 어디에 있지?”
“예,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뭔가 꽃잎 같은 것이 다섯 방향으로 펼쳐져 있고, 또 낫이랑 망치가 겹쳐 뉘어져 있으니···.”
“맞네. 제대로 가져왔어. 이번에 네가 잘 하였구나.”
“아닙니다요. 쇤네, 그저 시키시는대로 하였을 뿐···.”
“그러면, 다른 정보는?”
“아, 여깄습니다.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집들에서 머슴과 종놈들을 꾀어냈다고 합니다.”
“그래그래··· 그러면 그 ‘공산주의자’란 놈들의 수효는?”
“한, 100명쯤 되지 않을 성싶습니다.”
“100명쯤?”
“예··· 아니, 그.”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슬며시 시선을 올려다보니 한명회의 시선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된 놈들의 수효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 아닌가? 여기, 이 지도에도 고작해봐야 어디어디 집들만 원산과 연이 닿아있다 뿐이지. 정확히 그 놈들의 숫자가 어찌되는지는 모른다는 게 아니냐?”
“그···그건 미처 파악을 못해서···.”
“내가 난리가 있던 밤에 그들을 직접 보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저들은 이미 어디에 자기네의 조력자 머릿수가 몇이요, 끌어들일 만한 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꿰고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 정확한 수효를 알아와야 할 것 아니더냐!”
“죄송합니다. 제가 미련한 실수를 하여··· 어떻게든 만회를···”
“이미 그 놈은 죽였을 것 아니더냐? 어찌 만회를 한다는 말이냐?”
“그건···.”
“되었다. 물러가거라.”
그렇게 임어을운이 슬며시 뒤돌아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한명회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몸집만 컸지. 머리를 쓸 줄 모르니 영 쓸모가 없어서는···.”
그 한 마디에 임어을운의 등 뒤로 훅, 식은땀 한 줄기가 스친다.
만일 이 난리가 끝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수한 피를 흘린 악업은 무엇으로 메꿀 것인가?
들어올 때보다 처진 어깨를 들고, 휘적휘적 행랑채 좁은 방구석으로 향했다.
방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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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러니까··· 인수부(仁壽府)라는 관청의 처음 용도가···.”
“공정대왕(恭靖大王, 조선 2대 왕 정종에게 명나라가 내린 시호)께서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조선의 3대 왕 태종의 묘호에 명나라가 내린 시호 ‘공정’을 붙인 호칭. 정종의 시호와는 한자가 다르다.)을 세자로 책봉하실 때 세자를 봉공하는 일을 맡기고자 세운 관청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후계자를 위해 세워진 관청이··· 이후에···.”
“이후에 태종대왕께서 즉위하셨을 적 혁파되었다가, 태종대왕께서 세종대왕께 양위하신 뒤 다시 설치되어 태상왕 전하를 보필하는 관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이 되기도 하고, 다시 일본 대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는 말이오?”
“맞습니다.”
트로츠키가 거듭 되묻자 신숙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설명에 트로츠키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어떻게 기관의 역할이 ‘왕실 후계자 관리에서, 상왕 관리로, 다시 왕실 재산 관리 및 외교관 접대로…’라는 말도 안 되는 경로를 거쳐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저 역할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가 더 힘들어 보였다.
차라리 ‘태종대왕’이라는 한 사람의 군주를 보필하는 기관이라고만 생각하면 앞의 두 기능은 이해가 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정부부처의 방만한 역할 분담은 근대적 관료제에 익숙한 트로츠키에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행정 체계라는 것이 대부분 저런 식이었다.
건국된 지가 갓 60년 지난 젊은 국가면서도, 온갖 관례와 정치적 변동에 따라 각 기구와 관리의 권한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였다.
또 예산 절약을 위해 한정된 인원으로 정부를 굴리고자 만들어진 겸직 체계와, 전근대 국가의 태생적 한계인 부족한 행정력으로 인하여, 조선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대로 파악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물론, 이러한 인상평가는 지금이 15세기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온당치 못했다. 자신이 ‘현재’로부터 약 500년 뒤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곱씹으면서 트로츠키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선을 평가하려 애썼다.
일례로, 앞서 말한 인수부의 용도변경도, 기존의 기관을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보다야 용도변경이 효율적이니 나온 결과일 테고···.
“후,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행하도록 합시다. 그··· 조선국왕 전하도 힘들어 보이시니.”
“난 괜찮···. 아니오, 생각해보니 지친 것 같구료.”
조선국왕은 생각없이 답하려다, 트로츠키의 시들시들해진 모습을 보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박팽년은 신숙주에게 눈짓을 보낸다. 마무리하자는 이야기다.
“···좋습니다.”
“···가끔은 일조일석(一朝一夕)으로 깨우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니 말이오.”
객관적 평가를 위해 애쓰더라도, 가끔은 지금처럼 세계관의 차이에 두뇌가 과열되기 마련.
힘에 부치는 기색이 역력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핑계 삼았음에도 넘어가 주는 걸 보니, 봉건 군주 치고는 괜찮은 인성이다. 트로츠키는 잠시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식혔다.
미간을 주무르며 마음을 추스르는 트로츠키를 보며, 조선의 신료들과 이홍위는 잠시 트로츠키를 위한 대기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적응이 힘들다 하지만, 방금 대답에 있어서도 제법 문자를 쓰는 걸 보면 트로츠키는 꽤나 괜찮은 학생이었다. 물론 동양학 전공자인 에티앙블의 집중 과외 덕이었지만.
조선국왕의 망명 이후, 트로츠키에게는 새로운 일상이 열렸다. 곧 왕을 위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교육을 이어가야 하겠다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맞춰 트로츠키 또한 특별한 일정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 ‘경연’이라는 시간에 트로츠키는 부디 양국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해 함께 할 수 없겠느냐 하는 제안(겸 강요)을 던졌고. 신료들은 어차피 얹혀 사는 신세이니, 주상에게 허락을 구한 뒤 트로츠키의 경연 참가를 용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