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5
“고작 단것으로 군왕의 마음을 꾀어내려 하다니··· 참으로 몹쓸 사람일세···.”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너무 잘 통하는 수가 아닌가? 몇 날 전에도 전하의 이가 썩을 듯하여 양치질을 거듭 당부하였던 것이···”
성삼문이 눈치없이 대꾸하다가 모두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문다.
“그럼 한번 다음 인민위원평의회에 자문역으로 나갈 때 다들 이야기해 보세. 저들에게도 인정(人情)이 있으니 어찌 쉬이 거절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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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 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소? 대체 이유가 뭐요?”
“아니 이유를 굳이 이야기해야 합니까? 귀국의 내전 상황 때문에 피난민이 물밀 듯 들어옵니다! 이 상황에 외유라니 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료들의 청을 거세게 물리친 것은 올리버 로였다.
···아무래도 왕을 들고 날랐다는 인간들의 ‘월권행위’를 확인한 게 외무인민위원이던 그인지라, 로는 타국 관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호통을 치다가 입을 닫았다. 그렇다 보니, 신료들 입장에서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소련의 예조판서? 비슷한 양반에게 나쁜 인상을 남긴 게 이리 돌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그렇게, 울먹거리며 “내보내 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소!”라고 외칠 이홍위의 얼굴을 생각하며 신료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노먼 베순이 급하게 그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의사로서의 소견을 밝히자면, 아무리 안전 때문이라도 어린 나이에 조선국왕 전하가 한 곳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건강에도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 육지를 밟든 어떻든 인근을 둘러보며 산책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아동의 신체에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조선국왕께서 지루하신 게 문제라면, 그때 신분 확인차 조선국왕 전하를 잠시 뵀던 매원인가 하는 가수를 불러 공연이라도 하게 하는 게···.”
“그, 좋은 생각이기는 하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같은 장소만 맴돌면 지루하기도 하고, 건강에도 나쁠 것입니다.
듣자 하니 산책 시간을 늘리려고 조선국왕께서 일부러 늦게까지 수면을 미루며 갑판에서 머무르신다는데···.”
블레어의 제안에 다시 베순이 반박하자 이번 논의도 점차 수렁에 빠져들 기미가 보인다.
‘이 망할 소비에트 회의 시스템.’
다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아니다. 회의하다가 표결 부치고, 또 회의하다가 또 표결 부치고··· 사회주의자라는 인간들은 본래 회의를 좋아하여 일 조금 벌이려면 회의로 몇 날은 보내야 하니, 마라톤 회의에서 몇 사람씩 쓰러지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어린애 산책 문제로 몇 시간씩 끌기에는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아까운데···.
“아, 그럼 이건 어떻소?”
갑자기 트로츠키가 손을 들고 말하자 모두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찬성표를 던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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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제···제길.”
“취금헌, 아무리 일신이 힘들다 한들, 전하께서 앞에 계시는데 어찌 선비가 그리 더러운 말을 내뱉는가?”
“송, 송구하옵니다, 전···우엑···.”
신숙주의 핀잔에 급하게 사죄를 올리면서도 헛구역질을 멈추지 못하는 박팽년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까지 자신에게 이것저것 따져들던 박팽년에게 복수하는 기분이 들어 신숙주는 내심 흐뭇한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원산 앞바다. 작은 보트 위.
조선국왕 이홍위, 그를 수행하기 위해 뽑힌 신숙주와 박팽년, 거기에 조종사 한 명이 전부였다.
“허허, 몸이 편찮으신가 봅니다, 박팽년 동지?”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겠사오나, 부디 하대하거나 호로 불러주시길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경어인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영 어색해서···.”
“아,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미안합니다, 취금헌 동지!”
갑자기 끼어든 트로츠키를 빼면.
그 외에 혹시 몰라 구조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다른 보트가 주위에 두세 척 떠있을 뿐. 겨울바다는 꽤나 쾌청하게 탁 트여 있어 시원스런 풍광을 내보였다.
트로츠키가 낸 제안은 바로 뱃놀이.
아무튼 바깥으로 나가기는 하고, 또 보안 걱정도 크지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 치고는 괜찮은 대안이었다.
조선국왕도 처음에만 구명조끼를 입고서 그 생소함에 불편해했을 뿐, 지금은 신이 나서 배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닌다.
트로츠키 또한 안전과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잠시 귀찮은 업무들을 다른 인민위원들에게 떠넘기고 나왔으니 마음이 개운했다. 지금이야 다들 욕하고 있겠지만 이미 늦었다. 그게 아니꼬우면 제안했을 때 찬성표를 던지지 말았어야지.
원산으로 피신하면서 몸의 피로가 쌓여서인지 유독 뱃멀미가 심한 박팽년은 내버려두고 실상 신숙주, 이홍위, 트로츠키만 즐기는 유람이었다. 이 여유, 실로 오랜만이다.
“참으로 신기하구려. 어찌 사람이 노를 젓거나 닻을 달지도 않았는데 이리 배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털털대는 증기엔진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 수증기를 지켜보며 이홍위와 신숙주가 탄성을 내지르면, 트로츠키가 ‘아아, 모르는가? [증기기관]이라는 것이다. 석탄만 있으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지.’ 정도의 설명으로 우월감을 충족시키는 즐거움도 각별했다.
“이리 배로 움직여 유람함이 옥체를 보신하기에도 이롭고 세간의 눈을 피하기에도 용이하오니 참으로 묘책이었습니다, 의장.”
“하하, 아닙니다. 손을 모시는 입장에서 갑갑함을 안겼으니 저희가 죄송하지요. 부디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저어기, 원산의 여염집들이 마치 손가락처럼 작아 보이는구료!”
“하하하, 조선국왕 전하. 너무 난간에 기대지는 말아주십시오. 겨울바다는 물이 차갑습니다.”
이렇게 신숙주와 트로츠키가 능청스레 주거니 받거니 하고, 박팽년이 토악질을 하는 동안, 이홍위는 맘놓고 풍경이나 관람하며 뽈뽈뽈 돌아다니고···. 괜찮은 계획이었다.
“안 그래도, 돌림병에 전란으로 인간(人間)에 흉흉한 일이 가득하니 이리 뭍에서 떨어져 있음은 전하를 뫼시기에 참으로 안심되는 일입니다.”
“돌림병이라 하였소?”
“예, 전하. 들리기로는 팔도 곳곳에서 상한(傷寒)이 창궐하였는지 앓는 이가 한둘이 아니라 하옵니다.
허나 이곳 소련에서는 어진 정치가 펼쳐져 몸이 아픈 이들을 고치고, 몸이 성한 이들을 지키니 안심하셔도 되옵니다.”
듣기에 좋게도 신숙주의 금칠이 이어졌으나, 내심 트로츠키로서는 뜨끔한 바가 있었다.
이 땅에 의용병들이 당도하고, 행정 공백 속에서 패잔병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뒤에 곧 조선 곳곳에서 전염병이 돈다?
-···이거 우리가 원인 아닌가요?
이미 소련 지도부는 반쯤 확신했다.
일단 의용군들만 멀쩡한 것도 이상하고, 원산에서도 작년에는 좀 시름시름 앓는 사람들이 많다가 이제야 면역력이 붙었는지 사태가 잠잠해진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 곳곳에서 전염병이? ···원인이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어찌 이것이 지도부만의 덕택이겠습니까? 이 땅의 농민, 노동자 모두가 애써준 결과이지요.”
“의장께서는 참으로 겸공하십니다, 하하!”
“하···하하하! 앗, 이제 원산 외곽을 벗어나고 있군요! 저기가 저희가 통제, 구휼하고 있는 지역들입니다!”
양심에 무리가 가던 트로츠키가 급하게 화제를 돌리자 모두들 트로츠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튼다.
“저희 조직가들이 저곳에서 인민들을 구휼, 계몽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국의 행정적 공백으로 인해 발생한 원산 인근의 혼란을 막고자, 저희 쪽에서 부득이하게 인사들을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기 저쪽에 형형색색의 깃발들을 내건 것이···.”
“아! 아마 저기서 각종 물자를 나눠주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암만 살펴보아도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같사오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구(舊) 소련에서 교육받은 사상적으로 가장 투철한 정치장교들과 그들을 돕는 자원자들이 대중 교육에 힘쓰고 있···.”
그렇게 말하다 잠시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보자, 바다를 향해 오색 깃발들이 휘날리고 마찬가지로 화려한 빛깔의 소매 휘날리는 누군가가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앞에 음식상이 떡하니 펼쳐져 있는데··· 저거 소련에서 보낸 구호물자인데?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누군가 홀연히 일어서서 바다를 향해 뭔가를 흩뿌린다.
저거 제사용 술이다.
그리고 그 술잔 든 자의 얼굴을 보니···
“메리머어어어어언!!!!!!”
어느덧 해안에 가까워진 보트에서 트로츠키가 소리지르자, 같잖게도 두루마기를 걸친 메리먼이 화들짝 놀라 잔을 놓친다. 서투르게 나무를 깎아 만든 제기가 푸른 동해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서는 저 멀리 떠내려간다. 떠내려가는 잔을 따라 메리먼이 먼 바다를 내다보자···
체면도 잊고 얼굴 붉어진 트로츠키가 그를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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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외유 (2)
그 전까지 뱃놀이는 괜찮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기 원산 해안 근방에 정박해 있는 것이 다양한 기자재 생산공장 겸 정부청사와 정착민들의 숙소를 겸하고 있는 SS 게르마닉 호입니다!”
“호오, 정말로 크구려!“
“정확히 따져보면, 저기 있는 게르마닉 호도 사실 전하와 제가 머무는 켈틱 1호와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몰랐소! 배 안에서 그리 많이 돌아다니지를 못해서···.”
“곧, 조선국왕 전하도 자유의 몸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원산 시내를 한번 둘러보도록 하죠.”
“아주 좋소! 고맙소, 트로츠키 의장!”
이렇게 해안 근처로 (당연히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향하여 소련의 전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마, 맙소사. 제가 월척입니다! 월척인 것 같습니다!!”
“보한재 동지, 어서 당겨보십시오!”
“어어··· 어어어··· 나온다! 나왔다!”
“···저건 해초 낀 짚신이 아닌가?”
낚시도 즐기고···.
그러나, 잠시 원산 외곽으로 나가 소련의 ‘영향권’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딱 메리먼을 마주치면서,
트로츠키의 계획이 살짝 엇나가고 만다.
내전이 발발한 뒤로 하루도 쉴 틈 없이 전란으로 몸살을 앓는 조선국!
그리고 그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한 혼란! 조선의 지방 통제력 상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그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화하는 소련!
문명이, 그리고 공산주의의 대의가 점차 퍼져나가는 가운데, 그 선봉에 서 있는 소련과 트로츠키!
이 아름다운 구도를, 혁명적인 서사를 조선의 군주와 신하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소련의 위세를 자랑하고자 했던 원대한 기획.
추후 내전이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지든, 조선국왕(지금 4명 정도 있기는 하다만.)에게 소련의 국력을 다소 과장되게 인식시키고, 그 사상적 정당성과 우월성을 각인시킨다면 그 잠재적 이득이 상당하리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런데, 딱.
메리먼이 무당 옆에서 헬렐레 하는 꼴을 보였을 때 트로츠키의 기분이란···.
허나 역사의 위대한 진보란, 때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콤라드(Comrade, 동지) 메리먼! 당신 죽고 싶어!!”
“ㅁ···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주욱. 고오. 시잎. 냐아. 고오오오!!”
“아아안. 드으을. 려어어어. 요오오오오!!!”
“개애애애. 자아아아. 시이이익. 아아아아아!!!!!!”
21세기 한국의 TV 예능 프로그램 기획자라면 이 장면을 보고 손쉽게 게임 하나를 연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지금 뱃멀미로 토악질을 해대고 있으나 주당으로 소문난 박팽년이나, 역시 술 좋아하는 성품으로는 밀리지 않는 신숙주가 트로츠키와 메리먼의 꼬라지를 보면서 떠올린 것도 그와 똑같았다.
이후에 그들이 육지로 돌아와 동료 문신들과 진탕 술에 취하며 즐길 때, 귀에 솜을 넣고 서로에게 고래고래 엉뚱한 소리를 지르며 깔깔대고 바닥에 구르길 반복했고.
그 볼썽사나운 추태들을 보며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나중에 술벗들과 놀거리를 궁리하면서 그때 그 양반네들의 술자리 놀이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니 그 꼴사납기도 하고, 사람 배꼽 잡게 만드는 놀이가 소련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이엄(耳掩, 귀마개)을 시기에 맞지 않게, 안팎을 가리지 않고 끼고 다니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KBS 가족오락관 방영으로부터 533년 이르게, ‘고요 속의 외침’이 발명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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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뱃놀이가 끝나고 싱글벙글 하며 돌아온 이홍위는 왠지 모르게 축 처진 트로츠키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니, 왜 저렇게 기운이 또 없어졌지?
특히 아까 메리먼과 뭔가 알 수 없는 말로(트로츠키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지, 메리먼에게 쏟아낸 쌍욕들은 모두 영어였다.) 지껄이더니, 금방 벌개진 얼굴을 수습하고 아무 일도 없던 듯 태연하게 다시 유람을 즐기는 체했던지라 더더욱 그 연유를 할 수 없었다.
멀미 기운에서 막 헤어나와 속 차리기 시작한 박팽년이나, 아까까지 ‘야, 야, 쫄았냐?’하면서 그런 박팽년을 톡톡 건드리고 놀리던 신숙주도 그런 트로츠키의 모습에 의아한 마음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
그야 당연했다. 무릇 나랏녹 받아먹는 벼슬아치라면 백성들이 산신제니, 해신제니, 하는 것들을 열 때라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다독여야 하는 것을.
그들에게는 하찮은 귀신이고 괴력난신이라 할지라도 민(民)의 마음이 거기에 닿아 있다면 마땅히 정치하는 자로서 살펴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그 악폐가 심하다면 마땅히 징치하고 엄금하겠다만은.
그러니, 공산주의자로서 소련의 근대문물을 자랑하던 트로츠키가, 어째서 저리 쪽팔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메리먼, 반드시 기억하겠다···.’
그렇게 어른의 못된 마음을 품고 있던 트로츠키에게, 조선국왕 이홍위는 뛰어와서는 그의 등을 토닥거리고는 “기, 기운내시오···.”라고 중얼거리고 휙 선내로 들어가버렸다.
갑자기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속 응어리가 풀려 나간다. 세르게이나 니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앙증맞았던가? 한참 전 일이라 기억도 안 나는 젊은 시절 추억을 헤매다 보니 메리먼에 대한 유치한 복수심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물론 이홍위가 추후 이어질 ‘메리먼에게만 회의 때 불편한 의자 제공하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역시, 사람이 아무리 순해져도 본판이 트로츠키다 보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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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즐거운 뱃놀이가 잠시 끝나고 난 뒤, 다시 일상업무로 복귀하기 전.
“아이고오오! 저 막되어 먹은 스탈린 놈아아아아! 어찌··· 어찌··· 천륜이 있고, 인정이 있거늘, 사람 목숨을 그리 파리 잡듯이 잡아버린다는 말이더냐!!”
블레어가 제안한 문화예술 공연이 한바탕 다시 이어졌다.
“흐히히히, 본좌가 보건데 본좌는 마르크스보다는 도척이 더 좋으니 도척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낫겠소이다? 흐익킥킥킥!”
“크허헉··· 저, 저놈을··· 저 흉악한 놈을 막아야··· 끄륵.”
“아이고, 레닌 선생님!! 레닌 선생님께서 홧병이 나서 돌아가셨디야!!!”
“아이고··· 아이고··· 엉엉. 이제 저 도척(盜蹠)처럼 잔혹하고 장교(莊蹻) 같이 흉악한 자가 일어나는데 누가 막을 수 있냐는 말이냐··· 으헝헝!!”
“크하하하하하! 이제 나를 막을 건 트로츠키뿐이다!”
“저 장면이 바로 레닌 동지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레닌 동지는 결국 유서를 남겨 저 사악한 스탈린의 독주를 막아내고자 안배하였으나, 결국 스탈린의 간교한 계책으로 그조차 가로막혀버리지요.
그리고 저와 동료들 또한··· 그의 계략에 이기지 못하고··· 크흑.”
“선비가 곧은 길을 걸으며 인과 의를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오. 허나 트로츠키 의장의 뜻이 고매하여 하늘이 이리 과인과 의장을 만나게 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감사한 말씀입니다, 조선국왕 전하.”
실제로 레닌의 유언을 반스탈린 세력이 발표한 뒤 타격을 입은 것은 외려 트로츠키와 반스탈린 파벌이었으나, 뭐 어차피 시간여행 이전의 역사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트로츠키는 맘 편히 레닌의 유언과 사망 원인을 날조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홍위와 신료들로서는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연극의 내용에 몰입해갈 수밖에.
옆에서 고급 조선어와 한문 어휘 통역을 위해 따라붙은 에티앙블이 ‘아, 아니야. 여러분 그거 다 개구라입니다···.’하는 눈빛을 열심히 쏘아 보냈으나 판소리에 집중한 그들이 에티앙블의 애절한 시선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그 덕에 매원의 ‘러시아 혁명가(판소리용 편곡 ver.)’ 열창과 더불어, 오늘도 트로츠키의 ‘새로운 역사 알기’ 사업은 여기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저 스탈린이라는 치는 참으로 악랄한 자구료.”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스탈린이라는 자의 악행이 가신된 자로서 주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차지한 노나라의 양호(陽虎)와 같사옵니다. 그 양호 말하기를 위부불인의(爲富不仁矣, 부를 좇으면 인을 얻을 수 없다.)요, 위인불부의(爲仁不富矣, 인을 좇으면 부를 얻을 수 없다.)라 하였사오니 딱 그와 같은 형세이옵니다.”
트로츠키가 장면에 부가 설명을 붙이면, 박팽년이 옆에서 교훈을 읊어주고, 아까 보트에서 인사불성이 된 박팽년 몫까지 수행을 도맡았던 신숙주는 온전히 흥미진진하게 판소리에 몰두한다.
대강 이런 역할분담이었다.
신료들로서는 어린 주상에게 광대놀음을 구경시키는 것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으나, 망명해온 이웃나라의 ‘건국서사’이기도 하고 교육의 기회도 이렇게 불쑥불쑥 챙겨주니 그리 나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전하, 부디 즐겁게 관람하셨기를 비옵니다.”
“내 참으로 즐거웠네! 자네에게 무언가 줄 것이 없음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아닙니다. 저는 이미 소련 정부에서 녹봉을 받아 일하니 괜찮습니다요.”
“녹봉을 받아 일한다니? 자네는 떠도는 가인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소련 정부에서 돈을 받으면서, 외방에 파견나가기도 하고··· 소련의 극장에서 소리를 부르기도 하니, 어찌 보면 소련의 어엿한 관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매원 동지의 말이 맞습니다! 소련에서는 직업의 귀천을 두지 않으니 모두의 노동이 존경받습니다.”
트로츠키가 막간 프로파간다의 각을 보았는지, 매원의 말을 거드니 조선의 국왕과 신료들도 제법 놀란 모습이었다.
아무튼 공연이 끝나고, (전) 나랏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매원과 이홍위의 짧은 인사치레도 이내 마무리되었다.
신숙주와 박팽년, 트로츠키과 에티앙블, 매원과 그 옆에서 북 치던 고수까지. 다들 하나둘씩 방을 나서니 성인 댓명이 들어차서 좁아 보이던 방도 다시 군주에게 어울리는 대형 객실로 돌아온다.
텅 비어가는 방에서, 이홍위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지금까지의 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즐거웠던 순간들과, 내심 불편하고 불쾌하기도 했던 순간들을 톺아보았다.
그렇게, 짧지만 열두 해 동안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을 되돌아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곳 소련이.
그리고··· 그 공산주의라는 것이.
오랜만에 돌아다녀 피곤해진 몸을 뒤척이니, 슬며시 눈이 감겨오는 것이 느껴진다. 지친 몸의 무게감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이내 이홍위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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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바쁘신 나날을 보낼 의장께서 접경하는 나라의 군왕과 신료들에게 이리 극진히 예우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