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6
“아니오. 비록 귀국에 변이 생겨 망명한 처지라고는 하나, 마땅히 따라야할 예를 따랐을 뿐이니 괘념치 마시오. 옛 주공(周公) 또한 손님을 맞이할 때면 멱을 감다가도 나아가 머리채를 부여잡고 귀한 손을 대접하였는데, 주공보다 한참 부족한 후대의 사람으로서 하물며 타국의 군주를 대접하는 데 있어 소홀할 수 있겠소이까?”
“아니, 머나먼 이국의 사람이 주공의 위명(偉名)을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역시 예와 도를 흠숭할 줄 아는 어진 지도자가 있으니 소련이 이리 부강하고 한가 봅니다, 하하.”
“과찬이오, 허허허.”
트로츠키의 대답에 조선의 선비들 또한 조금씩 놀라며 그의 일취월장한 고전 지식을 칭찬하였고, 멀리 뒤에서 바라보는 에티앙블이 보이지 않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밤새워가며 트로츠키에게 한문을 읽혀가던 그 세월이여!
“아무튼 이리 접대를 하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좋은 기억이 양국의 선린우호(善隣友好)를 더욱 깊이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찬가지의 마음입니다. 모쪼록 오늘 하루 피곤하셨을 터이니 푹 쉬시기를 바라오.”
그렇게 신료들이 꾸벅 읍하고 물러가니, 이제야 좀 의전용 미소를 풀고 마음 편히 어깨를 스트레칭하는 트로츠키였다. 뭐, 조선국왕을 에스코트한다는 핑계로 군무 관련 귀찮은 서류 업무는 푸츠에게, 회의 주관에 관련해서는 다른 인민위원들에게 떠넘겼으니 이 정도 피로도만 받아도 남는 장사이긴 하다.
아무튼 우드득 소리를 내며 목관절을 푼 트로츠키는 매원과 에티앙블에게로 걸어갔다.
“동지들도, 모두 수고 많았소. 매원 동지? 열연이 기가 막히더군. 마치 한 사람이 아니라 열댓 명의 무대와도 같은 박진감이었소. 르네, 자네가 만들어준 ‘속성 활용 고사성어 모읍집’ 효과가 죽이는군.
다들 수고 많았소. 추후에 동지들이 힘써줄 일이 있을 때 다시 부르겠소.”
“앗, 저기··· 트로츠키 동지?”
“매원 동지? 무슨 일이오?”
쫄래쫄래 따라온 매원에게 묻자 뭔가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우물거리다 입을 연다.
“저기, 그, 새로 극을 열었으니 한번 봐주러 오십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희가 적백내전을 소재로 가극을 짜는데, 아무래도 그를 생생하게 보고 들은 분이 말씀 주시면 창작에 용이할 듯합니다.”
“흐음··· 하지만 지금도 다른 이들에게 내 업무를 맡겨둔 상태라 한가로이 다니기가···.”
“저희 가인들이 초빙하는 형식으로 할 테니. 한 번 구경 와 주시는 것쯤은 괜찮지 않겠습니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려.”
그렇게 답하고는, 트로츠키는 앞장선 매원의 뒤를 따라 나선다.
기분 좋은 외유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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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외유 (3)
대저(大抵), 군신의 법도가 지엄한 바 군왕께서 저리 유폐되신 듯 거동이 자유하지 못하신데 신하 된 이들로서는 경망스럽게 일신을 놀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공식적으로는 이미 죽은 송장 취급을 받는다 하여도, 조선국왕인 이홍위를 모시는 신하들로서는 ‘아레메수(RMS) 켈-티크 1호’를 벗어나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당연히, 그건 이 신숙주도 마찬가지였고.
주상 전하부터가 정치적으로 최중요 인물이라는 이유로 배 안에만 갇혀 힘들어 하시거늘, 어찌 인신(人臣)이라는 이들이 주군의 그를 나몰라라 하고 저 혼자만 즐거이 유람을 즐기겠는가?
···굳이 이런 아름다운 겉포장을 떼어내자면, 외부적으로 다섯 신료들이 전부 ‘선왕’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라는 다소 꺼림칙한 이유도 있기야 하다만.
아무렴, 얼굴이라도 아는 인간을 마주쳤다가는 ‘어? 선왕의 시해자 강상죄인들? 모가지 컷!’ 당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야 주상 전하에 대한 충심이 더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암, 암, 그렇고 말고.
물론, 그러한 주상 전하의 갑갑함도 많이 나아진 듯싶어 다행이었다.
뱃놀이를 위해 작은 나룻배에 호위용, 구조용 보트 몇 척 더하여 띄우는 것쯤은 소련 입장에서야 일도 아니었으니.
그 덕에 주상 전하께서도 낚시에 취미를 붙이신 듯하니 이전보다야 훨씬 밝아지시고, 나이에 맞게 유쾌한 모습을 되찾으신 것이다.
처음 전하의 뱃놀이를 함께 수행한 박팽년은 물론이고, 이후로 돌아가며 배를 타고 나들이 나가시는 전하를 지켜본 하위지, 성삼문, 이개도 모두 인정한 사실이었다.
사실 대군들의 난이 일어나기 전, 이치에 맞게 시어소에서 왕 노릇하며 지내셨을 적의 모습보다도 행복해 보이시기도 하였다.
만일 대군들의 배반과 국외로 도망쳐 나온 처지라는 신세만 아니었더라도, 용안(龍顔)이 띠고 있는 분위기가 작금보다 훨씬 명랑하였을 터이다.
아직 지우학(志于學, 15세)의 나이도 채우지 못하신 전하께는 국주(國主)라는 지엄한 지위가 가져다주는 압박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제왕으로서의 공부에 대한 부담이 흉중에 괴로움으로 남았을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저 망명자로서 소련에서 머무르는 지금의 생활이 전하께는 더욱 나은 삶이 아닌가?
아니다. 망령되고도 불충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신숙주는 고개를 저었다.
감히 나라의 은혜를 받아 신복(臣僕)이 된 몸으로서 주군의 마음을 제 맘대로 생각하고 헤아리려 들다니···.
옛사람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하였으니, 그 도를 지킴에 성심을 다함이 신하의 도리 아닌가?
물론 이 땅에 공산주의라는 학문이 흥한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이학(異學)일 뿐. 선비라면, 모름지기 선비라면···.
‘됐다. 내가 취금헌(醉琴軒, 박팽년의 호)도 아니고 뭐 그리 인(仁)이니 의(義)니 따져들고 앉아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신숙주는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저 멀리서 끼룩끼룩 갈매기들이 우니 문득 잡념에서 깨는 듯하다.
대군들의 난 내내 자리에 꼼짝 말고 엎드리려던 것도, 주상 전하를 들고 이곳 소련으로 도망해 온 것도 모두 이 한 몸의 안녕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가족들은 모두 어느 한적한 지방에 숨어 있으니, 관군도 잡으러 올 상황도 아닐 터라 웬만하면 일신의 안녕 정도는 다들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더 멀리, 더 높이 뛰기 위해서 눈앞에 있는 것만 똑바로 주시하면 될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신숙주가 슬며시 소매에서 ···뺑(pain, 빵)이란 것을 꺼내 떼다 던진다.
갈매기들이 잘도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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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신하들도 지루함은 어쩔 수 없었다.
선박 안에서 무얼 하고 살 것인가? 전하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하루에 경연 세 번, 돌아가면서 며칠에 한 번씩 뱃놀이 따라가기 말고는 크게 할 일이 없다.
그나마 술만큼은 손님들 대접한다고 소련 정부 측에서 넉넉히 대접한지라 (그 실무진 상당수가 러시아계였다.) 몇 번은 붓고 적시고 즐겼으나, 그것도 매일 전하를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주상 전하를 뵙는데 딸기코를 하기에는 다들 마음속 삼각형이 아직 닳아 없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그 대신,
“핫하! 에이스 포카드!”
“취금헌 자네, 손장난 친 것 아닌가!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요새는 천운이 따른 것도 손장난이라 억측하는가? 참으로 인심이 바닥까지 떨어졌구만 그래? 흐히히히히···.”
“크헤헤헤! 세 판을 연달아 잃기만 하니, 단계(丹溪, 하위지의 호) 자네도 속이 터져 죽겠나 보지?”
노름이 답이 되었다.
아직 투전(鬪牋)도, 골패(骨牌)도 들어오지 않은 조선 초기.
그리고 그런 조선 초기의 관원들이 선원들을 통하여 우연히 접한 플레잉 카드.
전근대 조선국의 소문난 술꾼들. 이들이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렬한 도수의 근대적 주류. 그리고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
이 세 가지가 모이자,
괴물이 탄생했다.
때는, 이홍위가 공부와 나들이를 쉬는 주말.
이때만큼은 신료들도 그 동안 청정해진 간에게 지옥을 경험시킬 수 있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하나둘씩 선원들이 끼면서 노름판이 열린다. 주로 판돈은 사소한 옷가지나 배급받은 기호품 등등의 작고 가벼운 소품들.
그리고 한창 술잔이 몇 번 오가고, 카드가 몇 바퀴나 돌아가며, 패가 수없이 섞이고 나서 선원들이 토악질과 함께 술을 깨어보니,
속옷까지 빼앗겨 있었다.
특히 플레이어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이는 바로 훗날 원 역사의 실록에서도 노름을 잘하였다 적힌 신숙주.
심리전에 천재적 재능을 보이며, 포커페이스와 블러핑을 적절히 섞어가며 상대의 주머니를 초토화시켰다.
게다가 조선의 신료들에게는 한 가지 비밀무기가 더 있었으니··· 바로 넓은 소매.
어라? ‘우연하게도’ 카드가 옷자락 안에 쏙 들어간다?
배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못된 장난질부터 궁리해낸 이들은 곧 둘, 셋으로 조를 나눠서는 바보 한둘씩 판에 앉혀 탈탈 털어먹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이 ‘꾼’들의 솜씨에 걸린 호구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시 며칠 치 식권을 걸며 덤벼오다가 말그대로 아사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이것이 소련 정부에 중대 문제로서 가시화된 것도,
“어··· 르네? 그 이번 제철산업 관련한 철강노동자 소비에트에서의 보고서 좀··· 르네? 카마라드(Carmarade, 동지) 에티앙블? 르네?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일이야! 정신 좀 차려보게!!
이보게, 여기 사람이 쓰러졌네!!”
트로츠키의 코앞에서 에티앙블이 아사 직전에 쓰러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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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좀 배 바깥에서 바람 좀 쐬고 오는 것이 어떻겠소? 요 며칠 사이는 겨울 치고는 꽤나 온난한 날씨라고들 하던데, 이 근방 겨울 산세도 구경 좀 하고 오시오.”
“저···저희가 아니면 주상 전하를 보위할 이들이 없지 않겠습니···.”
“괜찮소. 우리 측에서도 이미 입단속이 잘 되어 있는 인사들이 있고, 이전에 조선국왕 전하를 알현한 이들이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수행을 부탁하겠소.”
“그, 그렇지만 전하의 경연을 담당할 이가 없사오니···!”
“그것도, 당분간은 내가 직접 교육을 전담해 보겠소. 일단 양국 교류차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경제학에 대해서만 간단히 소개하는 주간을 가져보려 하오.
다음번에는 그대들이 조선의 철학과 문화를 아예 한번 전담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식으로 번갈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겠소.”
“···하오나, 저희는 대외적으로는 대역죄인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러니 호위도 붙여주겠소. 좀 쉬다 오시오.”
“···그, 정말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호위가 아니라 감시역 아닙니까? 종이패를 가지고 노름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걸 잘못인 줄 아는 새ㄲ···분들이 그러셨소?”
“···의장께서 배려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육지에서 소련의 우수한 문물들을 두루 둘러보고 양국간의 이해와 우호선린을 더욱 돈독히 하는 기회를 얻기를 희망하옵니다.”
“고맙소,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의 호) 동지. 듣기로는 동지의 최근 별명이 ‘도박판의 마술사’라던데 참으로 고약한 모함이 아니겠소? 허, 허, 허, 허.”
“···.”
그렇게 마지막까지 혓바닥이 길던 신숙주도 제압당한 채, 모두 며칠간 강제 외유를 떠나게 되었으니.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거창했다. 이름하야, ‘조선왕국 관료들의 공산주의 연수 프로젝트’.
“자, 여기가 농업인민위원회의 주관 하에 운영되는 농학 및 육종학 연구소입니다!”
“허어, 저것이 그 매일 식탁에 오르던 포테토란 것이오? 열매가 아니구려!”
“예, 맞습니다! 보시다시피 땅에서 나는 덩이줄기를 캐다가 먹는 작물로, 영양이 뛰어나고 재배에 용이하여 최근의 기근에서 원산을 구해낸···.”
대강 이런 식으로 가이드 따라서 소련의 이런저런 시설을 보고 감탄사 조금씩 섞어주면 되는 일종의 코스 관광.
중간중간의 자유시간에는 호위 두서너 명씩 끼고서 원산 시내를 돌아다녀도 괜찮았으니, 호위용 경비들만 빼면 사실상 19, 20세기의 패키지 여행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 연수에 대한 ‘권고’가 통과되고 당장 신료들이 당분간 반강제로 쫓겨날 상황이 되자, 밤늦게까지 회의가 열렸다.
“젠장, 자네 그래서 내가 의장의 비서 하는 양반은 그만 벗겨 먹으라 하지 않았나!”
“내가 벗겨 먹었나? 저이가 직접 와서 벗겨먹어진 거지?”
“그만··· 그만들 좀 하게나···.”
성삼문과 신숙주의 이러쿵저러쿵 하는 쓸데없는 논쟁을 잠재우고, 박팽년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 여행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어찌 생각하긴? 보한재 저놈이 우리가 하자는 대로 그 비서관이란 인사만 돌려 보냈어도, 이리 사고가 안 일어났을 것 아닌가?”
“아니 그런 것 말고···
이 여행의 속뜻 말일세.”
“아, 그거야··· 바로 국력의 과시 아니겠는가?”
“그거야 맞지만, 굳이 우리에게 그러한 과시를 할 필요가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이들이 아닌가?”
박팽년의 의문에 하위지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이렇게 식량이나 축내며 (동시에 노름판이나 열면서) 소련에 어떠한 도움도 제공하지 않는 신료들이다.
주상 전하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 조선에서 전하는 이미 돌아가신 몸이다. 그리고 그 후계를 참칭하는 이들은 벌써 셋이나 되니···.
박팽년의 지적대로, 정말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인사들이 아닌가?
그들의 생존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상 전하의 생존을 안다면 죽여서라도 없애고 싶어할 이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전하와 그들 신료들의 존재는 소련에 있어서는 잘해봐야 군식구 이상이 아니다.
조선의 정세만 안정된다면, 이 ‘대역죄인들’은 조선에 인도하여 외교적 카드로 활용하고, 또 주상 전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거나 말그대로 살려’만’ 두고서 조선을 압박하는 용도로 쓰는 게 최선일 터이다.
그런데, 어째서 소련은 자신들을 이리 후히 대접해 주는가?
어째서 그들에게, 더 나아가 주상 전하께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을 전파하려 드는가?
답은···
“저들은, 조선을 칠 생각일 수도 있네.”
신숙주가 다소 유보적으로 말했으나, 신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일 수도 있다’가 아니다.
저들이 조선을 칠 생각이 없다면, 그리하여 전하께 보위를 되돌려드리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들을 구태여 손으로 대우해 줄 이유가 없다.
그들은··· 소련은··· 그리고 트로츠키는···
“조선을 장악하려 한다?”
누구도 말하고자 하지 않던 바를, 이개가 힘겹게 언급하였다.
저들은, 적어도 저들 중 일부는 조선을 얻으려는 꿍꿍이를 갖추고 있다.
사실 그들이 바라왔던 결과가 그것이다. 소련의 군세를 빌려, 한양으로 나아가 안평과 수양의 목을 치고 정난공신이 되는 것.
그 편이 신료들에게도, 무엇보다도 주상 전하께도 명백히 최선의 결말이리라.
약간 흥분된 마음,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오간다는 무게감에 긴장된 마음으로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취금헌, 자네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투로츠키 의장께선 첫 뱃놀이에서 그리 말씀하셨네.”
신숙주가 입을 연다. 제법, ‘투로츠키’라는 이름을 발음함에 있어 이전보다 능숙해진 모습이다.
“‘곧, 조선국왕 전하도 자유의 몸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전하께 하신 말씀일세.”
이제 분명해진다.
소련은, 이제 전쟁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그 의중의 변화는, 전쟁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짐은 무엇에서 연유한 것인가?
그들은 곧 대답을 얻게 되었다.
다음날 트로츠키가 그들을 소집하자, 부름에 응하여 회의실로 향하였다.
모든 인민위원들이, 심지어 평소에 그들과 약간 거리감이 있던 올리버 로도, 어떤 무거운 짐덩이를 진 듯한 진지한 태도로 그들을 마주하였다.
“조선에서 온 관료 여러분···”
곧 트로츠키가 말했다.
“한양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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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 (1)
조선국왕과의 뱃놀이 시간이 지나가자, 다시 트로츠키에게 업무들이 물밀듯이 들어온다.
권력에 의한 효능감, 이 몸이 무려 ‘소련’을 세우고 있다는 충족감도 하루이틀이지. 결국 동아시아 어느 작은 땅뙈기 떼다가 소꿉놀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런 만족감도 점차 사그라 들어가고 있었다.
뭔가···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느낌이다.
아무리 ‘소비에트 연맹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달고 있다 해도, 실제로 관할하는 게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라니.
안다. 15세기 기준으로 5만의 인구면 거대 도시를 일궈낸 것이라는 사실쯤은.
하지만, 고무장갑에 장화 신고, 한 손에는 주전자에 막걸리 담아들고서 논두렁에 나가 선거 유세해야 할 것 같은 이 소박함.
마을 이장인가?
아냐! 아니다! 나는 소련의 지도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를 지도하는 위대한 혁명가!
전세계의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약 15,000+a명)이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아아, 나는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한가!!
뭐, 이렇게 열심히 자기최면을 걸어가면서 꾸역꾸역 업무효능감을 채워가는 것이 최근 트로츠키의 모습이었다.
뭐, 이제는 아무리 용을 써봐도 업무에서 탈출할 기회가 없으니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보는 것이지만.
매원의 청을 못 이기듯 따라나섰던 것이 가장 주요한 패착이었다.
오랜만에 원산에서 시찰도, 감독도, 회의 참석도 아닌 여유로운 나들이도 즐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