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
차라리 방향을 잘못 들어 대서양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가정이 맞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아니다. 세계지도가 있고, 무선통신이 있으며, 없는 것은 오직 미지의 바다다.
곧 있으면 위도와 경도를 확인해 위치를 확정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이 같잖은 표류도 머지않아 끝나리라.
어느새 하나둘씩, 수뇌부는 다시 포격 전처럼 회의를 위해 켈틱 1호의 함교에 모였다. 직사각형 탁자 주위로 사람들이 삥 둘러섰다. 누구도 속 편히 앉아있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며 일어나 있었다.
“회의를···진행해봅시다.”
어느덧 트로츠키 옆으로 와있던 켈틱 1호의 선장이 말을 꺼냈다. 그는 창 밖 뱃머리 너머로 보이는 작고 소나무 울창한 섬을 향해 손짓했다.
“저···기 섬 보이십니까?”
“해안 근처의 저기 말입니까?”
우스운 꼴이었다. 20세기에 섬 이름도 몰라 다 큰 어른들이 바보 같이 이거, 저거, 하는 모습이란.
“예, 저 섬에 배를 정박해야 할 예정입니다. 저기서 어느 정도 재정비를 마친 뒤에야 정상적 운항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알겠습니다. 또 하나 여쭤볼 건 식량 문제인데···탑승자 15,000명을 먹일 만큼 충분합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페인으로 가는 구호물자와 기부품들을 모아가다 보니 밀이나 그 외 식량은 충분합니다. 아마 전투인력에 우선 배급하면 2개월 반, 긴축하면 3개월은 버틸 만할 겁니다···. 물론 그렇게 오래 표류할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구조신호를 받은 항만이나 선박은 얼마나 됩니까?”
이 질문이 노조 지도자들 중에서 튀어나오자 모두의 이목이 선장에게 집중됐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신호를 받은 이들이 해안을 경비하던 모로코 주둔 스페인 반란군이라면···.
그러나 이들의 걱정은 이상한 방향으로 해소되었다.
“현재로서는 어떤 신호도 잡히질 않습니다.”
“예? 말도 안 됩니다. 바로 저 쪽에 육지가 있잖습니까? 이런 대서양, 어쩌면 지중해 근해에 신호를 수신하는 선박이 한 척도 없다는 건···.”
“저희도 지금으로선 통신장비의 고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세 척 모두의 통신장비가 운 나쁘게 모두 고장난 것이 아닐까 싶지만, 아직까지는 기존의 항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유효할 수 있습니다.”
“끄응···.”
함교에 일제히 신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말도 안 되게 재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말 재수없을 때를 대비하는 차원이지만···”
갑자기 프랑스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가 흘러나왔다. 트로츠키가 고개를 돌려보니 ‘프랑스 군 출신 의용병’ 같았다.
“현재 무기고의 상황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엔 트로츠키가 답변할 차례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대체로 상황이 괜찮지만 한계가 있다고 답변하겠소.”
트로츠키가 서두를 떼자 다들 간절한 눈으로 그의 입모양을 좇고 있다.
제발, 제발 파쇼 놈들이 와도 쏴 죽일 수는 있다고 말해줘!
갈 때 가더라도 파쇼 몇 명은 쏘고 갈 수 있다고 말해줘!
그냥 붙잡히지는 않을 거라 말해줘!
···대강 이런 내용의, 침묵의 외침이 트로츠키에게 일제히 쏟아졌다.
“일단 여러분 모두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보병 장비’는 있습니다. 개인용 화기도, 탄약도, 수류탄도, 철모 같은 간단한 장비도 충분합니다. 앞으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몇 번은 특별히 보급 없이도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다만’. 안심하던 얼굴들이 다시 썩어 들어간다.
“야포? 한 문 정도 있습니다. 전차? 역시 한두 량 정도입니다. 어차피 연료가 없으니 토치카 정도로 쓰이겠고. 이런 상황은, 역시 치명적이겠죠.”
장탄식과 침묵이 이어졌다.
어디까지나 이번 수송의 대상은 ‘병력과 자원’이었다.
그 병력들이 개인 화기나 겨우 다루는 상태에서, 프랑스 정부는 당장의 야포나 전차는 사치라고 판단했다. 결국 후속 지원을 통해 본격적인 중장비를 운송할 예정이었다.
여기가 아무리 봐도 유럽 어드메 같지는 않으니 아프리카라고 가정해보자.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은 모로코 주둔군이다.
모로코 주둔군. 내전의 시작을 알린, 오직 프랑코에게만 충성하는 정예들.
다행히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모로코 즉시 독립을 선포해 현지인들의 호응은 상당히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이미 모로코는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몇몇 베르베르족 족장들은 이미 프랑코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독립전쟁을 거쳐 역량이 출중한 현지인 게릴라, 공화국의 독립선언 덕에 그들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페인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출중한 스페인의 정예병력들이 모로코에 모여 있다.
그들에게 맞서서 싸울 수단이 고작 알보병이라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거나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 싸우는 수밖에.
그 뒤로는 영양가 없는 질문과 답변이 꾸준히 이어지며 회의가 지루해지기만 하였고, 선장들은 서로에게 눈짓하며 슬슬 회의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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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난장판이군요.” 트로츠키가 말했다.
“완전히 걸레짝이군요.”
블레어가 무심코 덧붙였다가 의기소침해진 선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장은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켈틱 1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트로츠키와 선장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매끈하던 선체가 저렇게나 울퉁불퉁한 걸레짝이 되었다. 수 년 전, 고급 여객선으로서의 기능을 다했을 때 이미 실내장식들은 하나둘씩 뜯겨 나가 경매에 붙여졌지만, 마지막 남은 것들까지도 대규모 대피 도중 많이들 깨지고 상했다.
배에 대한 애정이 큰지 선장은 꽤나 상심이 큰 것 같았고, 트로츠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계단으로 걸음을 떼며 말을 붙였다. 트로츠키가 전속 기자로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한 블레어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아이들 칭얼대는 소리와 분주히 움직이는 부모들, 그리고 선원들이 한데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다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1층 갑판에 닿자 분주히 움직이는 의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창고로 개조된 카페에서 각종 약품과 기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마 가져온 의료장비들의 무사 여부를 살펴보는 이들일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이상하군요. 아직도 우리의 현재 위치가 확정 나지 않았단 말입니까?”
“아, 지금 보고에 의하면 크로노미터(항해용 정밀시계)가 고장 나서 수리하는 중이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아직 위도와 경도를 확정 짓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허, 별 게 다 고장이 나는군요.” 트로츠키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불찰이죠. 이렇게나 시설들이 난장판이었다니···.”
“아닙니다, 선장. 누구에게나 운 나쁜 순간이 있는 법이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번엔 계단에서 탑승객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다녀야 했다.
넓은 계단이었지만 수많은 인파들이 오가느라 마치 좁고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걷는 것만 같았다. 우왕좌왕 짐들을 싸들고 대피하러 나온 승객들은 안전이 확인되자 다시 각자의 객실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쪽 층들에 있는 다소 널찍한 1등석 객실들은 반이나 반의 반으로 쪼개져 가족 단위로 승선한 자원자들이 가득 채웠지만, 이쪽으로 내려오자 좁은 객실마다 부부 동반이거나 자식이 한 명밖에 없는 승객들만이 작은 객실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그쳐가고 있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걸음소리 같은 생활소음들이 강하게 느껴졌다. 저 너머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선원 몇 명이 트로츠키와 함께 있는 선장을 발견하곤 다급히 달려와 그들을 수행했다.
몇 명은 보고 사항이 있는지 선장을 붙잡고 이야기하였고, 잠시 트로츠키와의 대화가 멎었다.
“저기, 선내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 봅니다.” 블레어가 속삭이자 트로츠키도 귀를 기울였다.
“그럴 수밖에. 일단 정박부터가 정말 급할 걸세.”
“어, 그럽니까? 식량도, 배를 수리할 자원도 충분하다면 부족할 건 뭡니까?”
“아, 자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 혹시 보통 선박에 석탄을 며칠 치 정도 실어놓는지 아나?”
“예?”
“열흘치라네.”
“예에에?”
원래대로라면 프랑스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일주일. 이 배의 평균 속력이 16노트(약 시속 30킬로미터)임을 고려한 수치다.
그리고 잠수함에 추격당해 표류하게 된 오늘이 5일째.
아무튼 5일치 석탄만이 남았다고 본다면··· 몹시 애매하다. 선장도 곧 구조될 거라 호언장담하곤 있지만, 결국 만일이란 것을 대비해야 한다면 더더욱.
또한 증기선은 특성상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 석탄을 잡아먹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증기선은 엔진이 멈춘다면 난방 또한 없다. 물론 분명 연말인데도 기묘하게 더운 이 날씨를 생각하면 난방은 필요 없겠다만.
혹시 우리가 아열대까지 와버린 것일까? 아니다. 어느 아열대에 소나무가 자라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이 지중해답지 않게 무더운 날씨는 대체 뭐란 말인가? 트로츠키의 머릿속에 잠시 의문이 자라났다가 선장이 말을 걸어오자 끊겼다.
“아, 보고가 끝났습니다! 두 분을 기다리게 해 죄송하군요. 다시 가던 곳으로 갑시다.”
세 사람은 각자 나름의 걱정거리들을 나눠 진 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아래층으로, 다시 아래층으로.
거대한 식당,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오후 두 시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승객들이 몰려들었고, 선장의 지시에 따라 빵, 버터, 잼, 간단한 채소 정도로 구성된 다소 초라한 식사가 제공되고 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의 일로 심신이 지친 승객들은 이게 어디냐는 태도로 허겁지겁 각자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식사를 하러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선장이 안내하는 대로 더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무기들이 실린 창고를 지나, 스페인으로 갔어야 했을 구호물품들을 지났다.
“저게 아까 언급했던, 그.”
“맞습니다. 그 식량들.”
거대한 분량의 밀알들이 포대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치 3개월이 아니라 영원토록이라도 먹을 수 있을 양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것들에 손댈 일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우리가 먹으려고 마련한 게 아니니까요!”
맞다. 스페인의 끔찍한 식량 사정을 개선하려 프랑스가, 그리고 전세계의 기부자들이 모은 식량이다.
저것에 손대는 것은 스페인으로 돌아갈 몫을 한 움쿰씩 도둑질하는 것과도 같다.
그 생각에 트로츠키는 덧붙였다.
“맞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영원처럼 기나긴 총과 밀의 복도를 지나서, 다시 계단으로.
마침내 바닥 밑에서부터 거대한 엔진의 구동음이 들려오는 층으로 내려왔다.
-우우웅
-끼기기기이이익
금속들이 부딪히고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여기가···공작실인가요?” 블레어가 조심스레 묻자 선장이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선박의 자체 수리를 위한 기자재들이 모여 있죠.”
선반들 위에 놓인 금속과 목재를 기술자들이 자르고, 붙이고, 구부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옥도 이곳보다는 덜 소란스러울 것처럼 시끄러웠다.
선장은 트로츠키를 이곳저곳으로 데려가며 각종 기자재들의 구성과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블레어의 수첩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메모되고 있었다.
블레어는 바쁘게 펜을 놀리다 다시 선장에게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가 든 오른손에는 잉크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렇다면 선장님. 만일에, 아주 만일에 구조가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선박을 수리해 항행할 수 있겠습니까?”
“뭐, 현재 선박의 상태가 세 척 모두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맛이 갔다고 밖에 할 수 없군요. 근시일 안에 더 운항했다가는 그대로 고물이 될 겁니다. 뭐··· 하지만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어느 정도 말끔히 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걸리겠소?”
“트로츠키 선생께서는 역시 그 점이 궁금하시겠죠··· 어디 보자.”
선장은 머릿속으로 무언가 골똘히 계산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5개월 정도는 걸릴 겁니다.”
“이런 맙소사.”
“허허 그래요, 기자 양반. 정말 맙소사죠. 하지만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구조 선박이 곧 올 겁니다. 지금은 전보의 시대이고, 세계 어느 바다에나 문명국들의 선박이 지나다닙니다. 저희만 한 규모의 무리가 아무리 늦게 발견돼 봐야 2주도 채 걸리지 않겠죠. 심지어 지중해 아님 대서양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런 지형은 저도 처음이지만서도 바다는 넓으니까요!”
“그렇겠죠···.” 선장의 말에 두 사람은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님! 선장님!”
갑자기 어떤 승무원이 급하게 난입하기 전까지는.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던지 숨이 차서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과의 대화를 자른 이 무례한 부하를 보고 선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기가 죽은 승무원은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수치가 워낙에 믿을 수 없어서 크로노미터가 고장 난 줄로만 알았는데···사실 아니었습니다. 기계공들이 두번 세번을 점검했어도 고장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군말은 집어치우고 보고부터 하게!” 선장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어떤 보고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승무원은 마치 점화된 폭탄을 건네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위도와 경도를 측정해본 결과···현재 위치는 위도 39.23도, 경도 127.55도입니다.”
“뭐라고!”
“현재 위치는 아마 일본제국령 조선반도, 겐잔(원산) 앞바다입니다.”
트로츠키는 당장 회의를 다시 소집해 이 소식을 알렸다.
승무원들의 비명.
자원병들의 탄식.
아직 상황파악 못한 머저리들의 어리둥절한 표정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이들의 욕설.
몇 날을 새워가며 그린 탁자 위의 작전 지도는 모조리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회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날, 흡연실은 계속 만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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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곳 (2)
“트···트로츠키 선생!”
회의장에서 나오던 트로츠키를 향해 멀리서 누군가 체신머리도 없이 오도도도 뛰어온다.
누군지 확인하려 눈을 찌푸리던 트로츠키는 이내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다.
“···바빌로프 선생?”
“회의에, 헉헉, 늦었소?”
“바빌로프 선생은 회의에 참석할 필요 없잖소?”
그렇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스페인행 원정군이고 그렇기에 회의는 어디까지나 군사회의다.
그러나 바빌로프는 원정군 소속이 아닌, 어디까지나 선박에 동승한 승객일 뿐이다. 그를 향한 지원 또한 원정군 예산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개인적 인맥과 프랑스 정계와의 합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식물학자 겸 유전학자 바빌로프와, 만일을 대비한 무장상태 점검을 논의하는 군사회의는 거리가 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은 이들에게 바빌로프는 그저 백면서생 군식구로만 보일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학자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서···선생께서는, 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 그건 어째서입니까?”
“저는 조선에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배에 탄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바빌로프의 설명은 이러했다.
지난 수년 동안 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유럽,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 등등 세계 모든 대륙의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러다 몇 해 전, 일본에 도착해 몇몇 종자를 수집하는 김에 조선까지 들러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제가 비록 부산에서···여기 신의주까지 열차를 타고 다닌 것이 전부라 이 근방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흐음···.”
트로츠키는 바빌로프의 말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렇다. 확실히 조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은 전혀 없다. 몇몇이 일본에 다녀왔거나, 일본어를 서툴게 할 수 있을 뿐. 일본총독부의 관리들과는 어찌어찌 소통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여러 애로사항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단 조선 땅을 이전에 밟아 보기라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빌로프의 눈빛이 수상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곤경에 처한 제게 도움을 주셨던 트로츠키 선생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습니다!”
이런. 그때 너무 연기가 심했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트로츠키는 애써 바빌로프의 반짝이는 눈을 피했다.
“좋습니다. 단, 다른 자원자들과 같이 가주십시오.”
“흑흑···정말 감사합니다,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