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1
“아, 예. 맞습니다.”
응?
뭔가 이상하다.
바스키는 조선에서 온 손님들이 낯설어 그냥저냥 대답하지만, 블레어와 베순은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에 빠르게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저들은 항상 상대의 이름자를 부를 때 굉장히 낯설어 하고 어려워했다. 상대의 이름을 직접 부르길 꺼려하는 전근대 동아시아적 관습 때문이다.
트로츠키에게는 그나마 친숙하게 이름과 직함을 부른다 하더라도, 블레어나 로처럼 그나마 자주 보는 인민위원들도 겨우 직함으로 조심조심 부르는 저들이다.
그리고 업무영역상 베순 동지는 저들과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저런 태도가?
“하하하. 참으로 의원들이 고생이 많으이!”
“아닙니다. 자, 정말 반갑습니다.”
바스키가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한다.
어? 그런데 신료들의 표정이?
약간 심사가 뒤틀린 듯한 얼굴로 박팽년이 고개를 돌려 블레어에게 말한다.
“아니, 블레어 대감! 어찌 의원 따위가 선비와 맞먹으려 한다는 말이오? 마땅히 관(官)과 리(吏)의 구분이 있거늘, 감히!
블레어 위원께서 한번 무어라 꾸짖어 주시오!”
아니, 시발?
갑자기 의료원의 분위기가 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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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사라진 창공 (3)
“···참으로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아닙니다, 하하. 결국 문화의 차이에서 온 사소한 오해 아니겠습니까?”
“취금헌이, 이 친구가 선생들께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땅히 선비로서 지켜야 할 예가 있거늘. 그를 어겨 이리 선생들의 기분을 해쳤으니 어찌 저희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과연 신숙주. 세 치 혀가 날아다니는 것이, 혀로 피아노를 쳐서 베토벤 26번 소나타도 완주할 수 있을 듯하다.
어느새 자기가 나서서 사과하며, ‘내가 이 중에서 대장이오.’ 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
게다가 의사들에게 ‘무례를 범하’고 ‘선비로서 지켜야 할 예’를 못 지킨 잘못을 박팽년 한 사람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자기는 자연스레 책임을 회피하기까지···.
저 짧은 문장에 도대체 몇 수가 담긴 건지, 주위 사람들은 그저 망양지탄(望洋之歎)에 빠져 신숙주의 거미줄 같이 교활한 말재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블레어가 박팽년의 표정을 살펴보니, 영 좋지 않다. 당장 박차고 나와서 신숙주의 간이라도 씹어 먹을 기세다.
“···제가 소련의 예을 잘 알지 못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무례하였습니다. 바스키 선생과 베순 대감 두 분께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런 사소한 실수들보다야 앞으로 쌓아갈 관계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관대하게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함에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박팽년도 일단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있다 보니 고개를 숙였다. 베순이 약간 떨떠름해하는 가운데, 사과를 받아주는 것은 대부분 바스키의 몫이었다.
그 뒤로 미묘한 분위기에서 설렁설렁 의료원 안내가 이뤄지더니 아무래도 무안했던 조선 관료들 측에서 빠르게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겠다며 떠나버렸다.
신료들이 의료원을 나서고 나서, 그렇게 블레어와 바스키, 베순만이 남았다.
“어··· 음···. 대체 왜 그런 거랍니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스키. 처음 만나보는 이들의, 전혀 예상치 못한 태도에, 아직도 입안이 얼얼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아니, 바스키 동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나는 이미 인민위원 회의에서 몇 번 마주치기는 했을 텐데? 길게 본 것은 아니어도 우리가 어느 정도 중량감 있는 인사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 말에 손수건으로 삐질삐질 흐르는 식은 땀을 훔치면서, 블레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두 사람을 달래려 애썼다.
“그··· 방금 저들끼리 속닥대는 것을 들어보니 저들로서도 착각할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한 모양이더라고요.”
“아니 대체 이유가 뭐였습니까? 한번 들어보기라도 하고 싶군요.”
“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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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들에게 의원이 중한 직업인지는 몰랐지! 자네들은 알았나? 왜 나한테만 그러나!”
“그래도 면전에서 그리 이야기하며 손을 뿌리치는 법이 어딨나? 굳이 시간을 들여 블레어 위원 대감이 소개를 해주고 있으면, 적당히 ‘아 중요한 사람들인가 보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나?”
“내, 내가 아니었으면 자네가 나처럼 말했겠지!”
“어허,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가정하면서까지 남 탓을 하다니 장부답지 못하네?”
“끄응···.”
박팽년은 요리조리 공격을 피해가는 신숙주의 화법에 당해낼 재간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머지 셋도, ‘우리 모두 실수했다’보다야 ‘박팽년이 저 친구가 왜 그랬을까, 허허!’ 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한지라 다들 가만히 신숙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허어··· 그러고 보니 취금헌 자네 말대로 소련의 의원 대접에 대해 전혀 모르기는 하였네. 그 베순이라는 사람도 그리 중한 이일 줄은 어찌 알았겠나?”
“그, 그래. 맞으이! 노먼 베순이라는 의원이 블레어 위원이나 트로츠키 의장처럼 인민위원일 줄이야···. 조선으로 치자면 판서급 인사가 아닌가?”
그나마 이 성토대회를 더 못 들어주겠다 싶었던 이개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기 전까지 박팽년은 계속 신숙주에게 사실적시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개가 나서주자, 박팽년이 득달같이 달라붙어 맞장구를 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얄팍한 모습을 보며 신숙주는 피식,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동감의 뜻을 표했다.
“그렇기는 하네. 우리가 베순 위원 대감이 그런 지위의 사람인 줄은 어찌 알았겠나? 기껏해야 다른 인민위원들의 주치의인 줄로만 알았지···. 공식직함이 ‘사회복지인민위원’이었던가?”
“그랬네. 이제 우리를 싫어하는 대감이 조선뿐만 아니라 소련에서도 늘어가는구만, 하하.”
성삼문이 농을 던지자 다들 양심이 찔려서 웃지를 못했다. 올리버 로에 이어서, 이제는 노먼 베순?
‘이거, 잘못하면 국외추방이 멀지 않았다.’
신숙주뿐 아니라 다들 비슷한 생각에 닿았는지 이마에 식은땀들이 맺혔다.
대강 문인으로 보이던 블레어나 트로츠키, 그리고 실무 담당자로서 자주 만났던 올리버 로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신료들도 인민위원들과 접점이 없다보니 어떤 사람인 줄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심지어 의원 따위의 잡술인(雜術人)까지도 대감의 지위로 올라가는 세상이라니···.
매원이라는 광대에게까지 트로츠키 의장이 존칭을 써주는 것도, 그에게 관작을 내리는 것도 대강 공을 세우는 이에게 직첩을 내리던 조선의 모습과 겹쳐 보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소련이라는 사회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늘어간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대한 차이가 조선과 소련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아니, 신숙주가 여태까지 알아온 어떤 나라, 어떤 족속, 어떤 풍습과도 소련의 습속은 달랐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신숙주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그 자신의 굳은 생각으로 그를 깨우치기에는 너무 어려울지도 모른다.
신숙주라는 한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의 벽 때문에, 이 완전히 이질적인 사회를 이해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저들이 슬며시 이야기하듯, 저들은 ‘미래’에서 왔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해해야 한다.’
왠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소련이라는 국가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주상 전하를 뫼시고 신료들을 손님 대접해주는 동안 반드시 답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면,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리라.
신숙주는 왠지 모르게 그런 서늘한 생각이 닥치는 것을 느끼며 괜시리 몸을 떨었다.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블레어 대감! 이야기는 잘 끝내셨는지요?”
“예! 그럼 다음 장소인 의류 공장과 국립 극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아직 ‘연수’는 오래 남았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넉넉하다. 너무 조급하지 말자.
그리 머릿속의 고민을 밀어내고, 신숙주는 블레어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슬며시 하늘이 붉어지고, 여기저기서 흐릿한 별들의 형상이 나타난다. 왠지, 소련에서 보는 별들은 조선에서보다 더 희끄무레하고 불분명한 것만 같다.
낯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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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臣), 명회가 국명을 받잡아 원산으로 나아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나이다.”
“홀로 오랑캐 무리의 진 안에 용감히 들어가 나라의 뜻을 관철시켰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마땅히 그 위업에 따른 치하와 가자(加資, 관리의 품계를 높임)가 뒤따라야 할 터. 누구 다른 의견이 있는 자가 있느냐?”
“어찌, 전하께서 지당한 말씀을 하시는데 따르지 않을 이가 있겠사옵니까?”
그 피와 쇠로 점철되던 난 속에서도 영상(領上)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정인지가 엎드려 말을 올렸다. 그 말에 흡족해하며 수양은, 아니 주상 전하께옵서는 빙긋이 웃으시었다.
다들 느끼고 있었다. 금상(今上)께서는 이제껏 있어왔던 어느 주군보다도 타인의 의견을 많이 물으신다.
의견이 없다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온전히 저 자신의 뜻대로 공론이 돌아감을 확인하고, 또 감히 주상의 면전에서 이견이 있다 지껄이는 불충한 신하가 없음을 다시금 곱씹기 위해서.
자신의 권력에 스스로 도취되기 위해서.
그 많은 피를 뿌리며 얻은 권좌다. 그리고 그 권좌를 위해서 아직도 뿌려야 할 피는 되(升)로 세든 말(斗)로 세든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으리라.
그러니만큼 더더욱 절대적 권위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취약한 기반과 명분을 감추려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림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 사실을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
여전히 안평의 시체였던 것이 겨울 한풍에 썩지도 못한 채 너덜너덜 내걸려 있는 참이니 말이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안평의 심장은 원통함에 팔딱팔딱 뛰고 있다더라, 하는 괴소문마저 돌았고. 그 말에 진노한 주상께서는 소문의 발원지를 찾아 원흉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안평의 심장은 특별히 시체에서 꺼내 한수(漢水)에 빠뜨려 버렸다.
그런 권력이다. 그런 시국이다.
“그렇다면 유(瑜, 금성대군의 본명)라는 잔악한 역적 괴수, 간교한 악당이 아직 평양에 버티고 있어 미루었으나 이제 지난 정난의 공신을 발표하여 그들의 이름을 드높일 때가 된 것 같소.”
그러니 주상이 다시금 의견을 피력하였을 때, 감히 무언가 말을 덧붙일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신!
아아, 그 얼마나 아름답고도 달콤한 말인가!
정녕 저 이름을 얻기 위하여 더럽고 진창 가득한 좁은 샛길을 걸어왔나니.
“···정인지, 운성위, 박종우, 김효성, 이사철, 이계전, 박중손, 최항, 홍달손, 권람, 한명회 등을 정난 일등 공신에 봉한다.”
정난 일등 공신(靖難一等功臣). 영의정인 정인지나, 한확의 빈 자리를 이은 좌의정 박종우나, 모두 저 명단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다.
그들의 이름보다도 한낱 경덕궁직의 이름이 모두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며 그 위명을 빛내고 있으니!
“이들에게는 전지(田地) 400결과 노비 50구, 구사 10명과 반당 15인을 내리노라. 그리고 그 중에서도 품계가 3품 아래인 자는 세 자급을 초자(超資, 벼슬의 차례를 건너 뛰어 올림)하노라. 그에 더하여 한명회는 이적(夷狄) 무리를 다스리고 온 공로가 있으니 한 자급을 더 올리겠다.”
“성은이··· 망, 망극하옵니다.”
이미 모두 짜여져 있던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임에도, 한명회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올릴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주상께서는 더욱이 흡족한 미소를 보이는 듯하였다.
‘이제 드디어 나의 시대다. 과거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여 천대받던, 길가의 개처럼 무시받던 한명회의 시대다!’
혹여나 자신을 대체하는 권신이 될까 염려하였던 한확이 그리 비명에 가고 말았으니, 그 노친네가 죽은 것이 이리 전화위복으로 돌아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공신에게 지급될 보상에 대해 들으며 한명회는 다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는 바닥이 10길 아래까지 파일 듯 깊숙이 고개를 숙여 절하였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금성대군을 참(斬)하고 외방에서 일어난 역도의 무리까지 완전히 제압한다면 다시 공훈을 따질 터. 한명회의 직급은 천장이 어딘 줄 모르고 마구 솟구칠 것이니.
삼정승 육판서가 모두 바닥에 엎드린 한명회의 존재감을 강하게 의식한다. 저 치가 이제 앞으로 그 자신들의 뒤를 이어 한 단계, 한 단계 권좌의 길을 밟아 올라가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주상 전하 천천세다.
절을 올리는 한명회는 남들 보지 못하게 얼굴에 환한 미소를 피워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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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잔악한 역적 수괴”이자 “간교한 악당”인 금성은···
“풀하우스일세!”
“아니 전하, 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흐히히히, 그런 허접한 패를 믿고 판돈을 많이 거는 천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 자네 업보일세.”
도박에 심취해 있었다.
애초에 대신들로서도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은 금성대군에게 책임감 있는 군주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성으로서도 ‘전하’ 소리 들을 때마다 몸에 안 받아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그저 자신이 명분용 부적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이리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가장 안락했다.
그렇게 양측의 이해가 합치한 결과.
금성은 훌륭한 허수아비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카두’라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단 말이지. 어찌 이리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기물이 오랑캐들의 손에서 나왔을꼬?”
“하하, 오랑캐라 하여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니 어찌 노름의 즐거움을 모르겠습니까?”
금성과 마찬가지로 바지사장이 된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이 비위를 맞춰오며 ‘카두’를 돌리고 있다. 저 양반도 사실 바지사장이 체질이었던 게 아닐까? 접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카두를 섞는 솜씨가 예사로운 수준을 벗어나 있다.
무엇이든 열중하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던데.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어떤 도를 닦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드는 금성이었다.
이 방에 모인 이들 모두 본래 세력이 애매하든가 대신파 휘하에 이미 대체할 인사들이 있어 별 유감없이 뒷방으로 물러난 이들이다. 다들 금성과 함께 허수아비의 도를 닦는 동지들이니···.
“자, 전하께서 생각하던 것이 금강석(金剛石, 다이아몬드) 일곱 맞습니까? 여기, 이 카드를 뒤집으면··· 짠! 역시 금강석 7이로군요!”
“아니, 어찌 그것을 맞춘다는 말인가?”
“하하하, 본디 환술(幻術)은 그 비기를 모르고 보아야 재미있는 법이니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거 참 신통한 일이로고, 으하하하!”
하지만 원산으로부터 슬며시 흘러나온 ‘카두놀이’ 덕분에 심심할 날이 없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미명에 죽어버린 불쌍한 조카도, 제 형제를 죽이려 눈알이 튀어나와 있는 수양 형님도, 마찬가지로 나대다가 그만 수양 형님께 말그대로 갈갈이 찢긴 안평 형님도.
다 잊겠다.
금성은 자기 차례가 오자 카드를 섞었다. 조수량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손재간이다.
마치 어제가 없고,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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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사라진 창공 (4)
“···이번에 블레어 동지와 함께 안내역을 맡은 노먼 베순 ‘인민위원’입니다.”
“···함께 하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베순 대감.”
“하하하, 이렇게 방금 전에 뵌 분들이 다시 모이니 익숙하고 즐겁군요! 하하, 하하하···.”
어색하다. 어색해.
블레어는 진땀을 흘리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하였으나, 아까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지 베순 동지는 입만 애써 싱긋거리며 얼굴은 굳어 있다.
신료들은 거기에 눈치를 보느라 또 이것저것 허둥대는 데 그 꼴이 다시 베순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듯하고···.
젠장, 내가 왜 이 사이에 낀 거지?
원래 안내를 맡기로 했던 푸츠가 트로츠키와 긴급 군사회의에 들어가느라 일정이 조정되면서 다시 블레어가 안내역을 떠맡게 되었다.
그래도 원래대로라면 로 동지가 맡게 되었을텐데···
올리버 로, 노먼 베순, 조선 신료들? 뭐지, 어색함 참기 챌린지인가?
그 꼴을 차마 가만두기 어려워 자원한 것이 블레어의 패착이었다. 제 발로 고생길로 들어섰으니 또 누굴 원망하겠냐만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일 말 많고 청산유수던 신숙주가 말이 없다. 뭔가 우물쭈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Mr. Bethune?”
흠칫, 베순의 몸이 떨린다. 블레어 또한 그랬다.
약간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발음의 괜찮은 영어가, 갑자기 특별히 영어 교육도 받은 적 없는 동양인 관료의 입에서 튀어나오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제 눈으로 봤으면서도, 블레어는 방금의 말소리가 신숙주의 입에서 튀어나왔음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베순과 블레어가 놀라든 말든, 신숙주는 말을 이어갔다.
“I··· I am apologizing for previous disrespect.”
“···.”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대답도 하지 못하고 베순과 블레어는 멍청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조선 신료들도 깜짝 놀란 듯 신숙주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