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4
“여기가 중국이고, 여기가 조선일세.”
“그것은 지세를 보니 알겠네만, 조선땅에 쓰여 있는 이게 무슨 뜻인가? 무어라 적혀 있는 것인가?”
성삼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글씨. 신숙주는 잠시 망설인다.
아, 이래서 역사학자들이 침묵을 지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건 말일세···. 이렇게 읽네.”
신숙주는 낯선 언어를 입에 담았다.
‘Japanese Chōsen’
“그러니까, ‘일본령 조선’이란 뜻일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신료들은 조선과 일본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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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힘이 강성해지며 그들의 세력권은 전세계로 확장된다. 국제적 경제권역이 형성되고 곳곳에 자본주의가 이식된다.
그 중에서도 몇몇 국가는 식민지화라는 운명을 빗겨나가는데, 그 운 좋은 몇몇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었다.
일본.
일찍이부터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소규모로나마 경제적 교류가 이뤄졌던 동양의 봉건제적 국가.
17세기에는 전세계로 그들의 은을 흩뿌렸으며, 이후에는 그들의 문화적 산물로서 서구세계에 자포네스크(Japonesque, 일본풍)를 유행시켰다.
그러나 지금, 저 열도에는 아직 어떤 유럽 세력도 진출하지 못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닿기까지는 아직 40여년 정도 남았다.
즉 포르투갈도, 네덜란드도 아직 동방의 고립된 섬나라를 밟아보지는 못했다는 소리.
“다들 신숙주 동지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흠··· 일단 그 제안 자체보다도 신숙주라는 인사의 변화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그렇군. 옳은 지적이오. 그러면 이렇게 질문을 바꿔 보겠소.
무엇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었을 것 같소?”
블레어의 지적에 트로츠키가 인민위원들에게 다시 화두를 던졌다.
“아마 원산으로 떠났던 연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시기상 그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겠지만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해 보시오.
뭔가 결정적인 계기나 원인이랄 것이 있지 않겠소?”
그 말에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지만 트로츠키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이렇소. 저들의 가슴속에는 분명 이러한 감정들이 떠올랐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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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러움, 황망함, 놀라움, 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려움.
신숙주는 천천히 신료들의 얼굴을, 그 위로 떠오르는 각양각색의 감정들을 살펴보았다.
아마 거울이 없어 파악하지 못할 뿐, 신숙주 자신 또한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리라.
그 두려움의 감정이,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내면의 바보 같은 목소리들을 물리치고 결국에는 승리할 공포감이 저들의 변화를 이끌어내리라.
신숙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이 지도에 나와있는 대로면 조선은 일본에 의해 망한다는 것인가?”
“그렇네. 한번 저들이 말해준 그대로 이야기해보겠네.
‘조선국의 왕은 일본 천황의 신하가 됩니다. 조선 전체는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조선인 2,000만 명은 모두 제국의 이등시민으로 전락합니다.’”
“아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있을 수가 있네. 처음 덕원부사나 함길도 도절제사도 소련인들이 일본어를 썼다고 증언하였네.
저들은 진심으로 이곳이 일본의 일부라 생각하여 소통하려 한 것이야.”
이해가 되지 않던 사실들이 모여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니 신료들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하나씩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이상하네.”
“뭐가 말인가, 취금헌?”
박팽년의 질문에 신숙주가 되묻는다.
“생각해보게. 일본이 아무리 그 강역이 거대하고 인구가 많다 하더라도 조선에 비해서는 기술의 수준이며 나라의 힘까지 제대로 미치는 것이 없었네.
그런데 갑자기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지배할 만한 역량이라니. 대체 그럴 힘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바로, 여기서.”
신숙주는 길게 대답하는 대신 역시 지도 한 구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을 대체하였다.
“유럽.”
대진국(大秦國), 아니 로마제국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저들의 역사.
중세의 어지러운 환난을 지나 국가들이 제 형세를 갖추니, 그 힘이 곧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 나가더라.
중국도, 천축도, 힘 있고 권세 있던 뭇 황제와 군왕들이 무릎 꿇려지는 가운데 일본만이 우뚝 동양의 제국으로 일어섰다.
상투를 자르고, 양이의 옷을 몸에 두르며, 스테이크를 입에 쑤셔 넣으면서.
뼛속까지 자기자신을 부정하면서 말이다.
자신들은 유럽이 되겠다느니, 아시아의 야만적인 이웃들과 연을 끊겠다느니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리고 조선을 쳤다.
더 나아가 도탄에 빠져 있던 중국대륙을 침략했다.
“결국, 미래는 서방으로부터 올 것이네. 그 미래가 수백 년 일찍 왔을 뿐이야.”
신숙주가 단언하듯 말했다.
국체가 무너지고, 임금이 오랑캐에게 신속하여 꼭두각시가 되는 일을 더러 어찌 저리 침착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 생각하다가 박팽년은 곧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지도를 쥔 신숙주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기에.
“수백 년이 지나면 공맹(孔孟)의 이름도, 주자(朱子)의 말씀도, 중화(中華)의 큰 덕도 모두 사토에 묻혀 한낱 농담거리가 될 뿐이네. 우리가 믿던 모든 것들은 바보들의 헛소리 취급을 받겠지.
그렇다면, 그러한 미래가 기다린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그 미래를 피하려 하겠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모두의 시선이 흔들려 감히 신숙주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좋다. 설득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제각기 충격에 빠진 마음을 추스리느라 신숙주의 말에 반박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신숙주는 덧붙인다.
“단순히 일신의 안녕에 따르는 것이 아닐세. 이 나라와 전하의 안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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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라는 인간은, 철저히 일신의 안녕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오.”
트로츠키가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조선에 대한 지식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알게 된 몇 안 되는 사실이, ‘배신자 신숙주’에 대한 이런저런 오명들이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행실을 살펴보았을 때 신숙주라는 인간은 어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제 몸 불사르리라 하는 타입의 숭고한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저런 인간이 도저히 나라와 주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리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로 전향할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이길 것 같으니까?”
“정확하게 보았소.”
바빌로프의 중얼거림에 트로츠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숭고한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영리하고 영악한 인간임에는 분명하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언어와 학문에 바로 몇 주 안 되어 숙달하는 뛰어난 학습능력, 근대적 문명이 가진 위력을 누구보다 빠르게 실감하는 본능적인 상황판단감각.
실로 천재적인 인물이다.
“그런 이가 조선에서 우리의 승리를 예측하고, 또 우리의 사상에 감화된 듯 보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런 보신주의적인 인물이 굳이 적극적으로 우리의 편을 들고 우리에게 달라붙는다면 그에 따르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지적이 들어온 것은 로 쪽이다.
“옳은 지적이오. 아마 당연히 우리가 조선에서 정권을 쥔 이후의 권력과 지위를 바라고 있겠지.
그런 인간일수록 배반할 수 없도록 우리와 그 사이의 이해관계를 똘똘 뭉쳐놓을 필요가 있소.
신숙주라는 인간은, 우리 소련과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하오.”
“그렇다면 어떻게 말입니까?”
“그거야··· 곧 알게 될 것이오.”
트로츠키가 시원스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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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민위원평의회가 열리고, 다시 신숙주를 비롯한 조선의 신료들이 자문역으로 참가하였다.
이번 회의의 서기는 바빌로프.
“어, 여러분 모두 와주셔서 감사하고 환영합니다. 일단 이런저런 인사들은 나중으로 미루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난 회의에서 보한··· 아니 그, 신숙주 동지가 건의해주신 일본 진출의 안은 가결되었습니다.”
“정말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트로츠키 의장과 다른 인민위원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신숙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사인사를 올리자, 괜시리 바빌로프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기 주저한다.
결국 소심한 바빌로프 대신 총대를 맨 것은 언제나처럼, 트로츠키.
“그리하여 우리는 작전을 담당할 적임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소.”
잠시 좌중을 둘러보다가 말을 잇는다.
“우선, 일본 진출을 전담할 이는 당연하게도 일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만 하오. 일본 사회의 특징과 취약점을 잘 파악하고 그 틈새에 파고 들어가야 할 능력이 요구되지.
또한 접촉했을 때 일본 사회에서 눈에 띄어서는 안 되오. 이에 따라 소련의 많은 일본학자들이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었지. 이들은 보조적인 역할이라면 몰라도 주도자로서는 활동할 수 없소.”
어··· 어?
신숙주의 불안한 눈빛,
점차 낌새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신료들의 웅성임,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이홍위,
이 모든 상황에 태연하고자 노력하는 인민위원들,
그리고···
뭔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트로츠키.
“그리고 이 시대의 일본을 한번이라도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최적임자라 할 수 있을 테요.
그러니, 신숙주 동지. 인민위원평의회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적임자로 판단했소.”
니가 가라, 일본.
“크헉···.”
“신숙주 동지, 괜찮소?”
괜찮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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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의 확장주의적 행보 (3)
‘이 미친놈들이 작정을 했나?’
신숙주는 사례가 들린 가슴을 쾅쾅 쳐 진정시켜 보았지만··· 당연히 진정이 안 된다.
하, 한번, 당장의 상황이나 헤아려 보자.
어디까지나 외국에서 온 ‘자문인’에 불과할 자신이 먼저 소비에트 연맹 정부에 국제 외교의 대계를 제시하였다.
···좋다. 좋아. 여기까지는 이 신숙주가 사알짝 폭주한 것이 맞기는 하다, 하고 인정할 수 있다.
공식 명칭을 줄줄이 늘어놓자면, 이름하야 ‘일본 진출 및 동아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교두보 마련에 관한 사업안’.
자신이 지었지만 이름부터 기깔나는 게 누구라도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 자찬하게 되는 작명감각이다.
물론 박팽년이나 성삼문은 다른 의미로 눈깔이 뒤집어진 듯싶지만.
아무튼, 신숙주의 계획은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동방의 어느 천재 선비가 저들의 사상에 감화하고, 나아가 저들이 나아갈 길을 마련한다면?
자연스레 소련의 지도부 역시 그 거룩한 뜻과 사유의 깊이에 감탄하며 자신을 눈 여겨 볼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점차 인민위원들과, 특히 트로츠키 의장과 점점 더 우애가 깊어만 간다면···.
훗날 저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너네 의장 켈틱 1호 살제? 어! 내가 너네 의장이랑! 같이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하는 식으로 슬그머니 친 소련파 인사로 분류되어 승승장구하리라.
뭐, 이 정도의 깜찍한 발상일 뿐이었다. 어··· 뭐라고요? 변절? 전향? 저는 사실 원래 날 때부터 공산주의자라 피도 빨갛고 심장도 빨갛단 말입니다.
그런데 작전··· 담당자? 책임자?
미쳐버린 건가?
어디까지나 신숙주는 ‘외국의’, ‘망명자’, 그것도 ‘관료귀족’이다. 저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말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규모의 국가적 사업을, 그것도 어쩌면 국가의 사활이 달렸을지도 모르는 사업을 맡긴다고?
제정신이라면 이런 판단이 도출될 수 없을 터.
유일한 가능성은 단 하나다.
한 배를 타라는 신호.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할 것이라면, 그리 열정적으로 소련의 생존을 바란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운명공동체로 같이 묶이자는 것이다.
만일 신숙주가 이를 수락하고 일본 공략의 선두에 선다면, 그는 더 이상 조선의 동부승지 신숙주로 설 수 없다.
소련의 일본통, 소련의 일본 조직책 신숙주가 되어야만 한다.
좆 됐다.
자신의 유능함과 쓸모를 열심히 내보였으니, 소련으로서는 이 인재의 발을 영구히 묶어두는 것을 바라게 될 터.
공산주의자이면서, 당상관으로서 조선의 핵심관료인, 국제정세에 정통한 자를 완전히 포섭하려는 술책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흘깃, 조선에서 온 신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너무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소련이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아무리 그래도 세상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인 바.
적어도 나중에 한 발 뺄 거리감 정도는 유지해야지, 아예 소련에 일심동체가 되어버리면 혹시라도 소련 지도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든 소련이 망하든 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 위험부담을 지겠는가?
그렇기에 신숙주로서는 그나마 최선의 수를 던졌다.
“전하.”
“동부승지, 왜 그러는가?”
“신이 미욱한 협견(狹見)으로나마 우방 된 이들에게 도움되고자 감히 의견을 밝혔사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저의 얕은 재주를 높이 산 소련의 지도부에서 저를 쓰기를 원하나, 저는 이미 전하의 신하이니 어찌 스스로의 거취를 제 맘대로 정하겠나이까?
신은 마땅히 전하의 뜻에 따를 뿐이옵니다.”
“그대는 지난번에 밝혔듯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나? 공산주의자는 그런 봉건적 의식에 얽메이지 않을 텐데?”
아니 시발.
저 어린 주상 전하께서 벌써부터 사람 멕이기를 즐기시나, 싶어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그냥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아마 신숙주가 지난번에 떠벌린 바를 기억하시고 이야기를 꺼내본 것에 가까울 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끼워 맞추는 수밖에.
“하오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였으니, 한번 신하 되기로 마음먹은 몸이 어찌 그 뜻을 쉬이 저버리겠습니까? 청컨데 어심(御心)의 향하는 곳을 알고자 합니다.”
“흐음···.”
잠시 주상 전하의 고개가 갸웃거리고, 신숙주의 이마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가 턱끝까지 굴러와 톡 떨어진다.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