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5
“정 그렇다면 그대의 기량으로써 힘껏 동맹을 도우라.”
“예, 전하. 하교(下敎)를 받잡겠사옵니다.
트로츠키 의장? 전하께서 윤음을 내리시니 이에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힘과 지모가 미약하나 그 재주 닿는 만큼 소련을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해석: 봤냐, 개새끼야? 이게 지략이다.
“허허, 좋소. 아주 훌륭하오. 그대 같은 인재를 허락해준 조선국왕 전하께 감사드리고, 또 귀한 의견을 들려준 그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겠소.”
해석: 대가리는 잘 굴렸지만 넌 여전히 내 밥이다.
“하하하하!”
“허허허허!”
트로츠키와 신숙주. 두 사람의 시선이 스치자, 그 찰나에 서로의 가슴속 만감이 교차한다.
문득 신숙주의 간담이 서늘해지니. 분명 앞으로 다가올 업무폭탄을 예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예감은 가장 불길할 때 비로소 가장 잘 들어맞는 법이다.
“시바아아아알! 내가 어쩌자고!!”
그 뒤로 신숙주는 3일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사업기획서를 작성했다.
미래에는 관료들이 전부 이 따위 방식으로 일을 한다는 말인가? 무슨 이상한 표 양식이나 줄줄이 채우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익숙지 못한 업무용어들, 익숙지 못한 업무처리 방식, 익숙지 못한 조직체계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류와의 전투를 벌이고 있자니, 신숙주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해냈다.
단 한 자의 오타도 없이, 약간의 오류도 허용치 않고.
다음 회의에서 기획안을 받아든 인민위원들은 모두 그 편집증적인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 저들도 중세 아시아인이 여기까지 해내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훌, 훌륭하오, 동지. 신숙주 동지가 작성한 사업안은 완벽에 가깝소. 그런데, 그런데 만일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사업안대로 진행할 시에는 분명 동지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텐데?”
트로츠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찬사를 내놓다가 그 내용을 다시금 훑어보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신숙주를 쳐다본다.
뭐, 쫄았나? 그래도 칼을 뽑았으면 무 정도는 잘라야 하지 않겠나?
“저의 졸문에 대한 칭찬은 온마음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트로츠키 동지. 그런데 저에게 생길 이런저런 문제라는 것은 무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동지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 말이오. 이대로 진행하면 신숙주 동지는 단순 기획 및 진두지휘가 아니라···”
“아, 그 문제 말입니까?”
신숙주가 웃어보이자 에티앙블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포커판에서 저 인간이 사람 엿먹이기 직전에 짓던 그 미소다.
아직도 그때 털린 주머니가 시려오는 에티앙블은 트로츠키를 쳐다보았으나, 그쪽은 별 낌새를 못 알아챈 듯하다. ‘어어, 저거 막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맞습니다. 제가 직접 일본행에 앞장서겠습니다.”
기획안에 도장 쾅.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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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켈틱 2호.
터놓고 말하자면 소련의 사령부로 쓰이고 있는 RMS 켈틱 1호나, 원산 해안가에 정박해 거주구역으로 활용되는 SS 게르마닉 호에 비하자면 크게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산업시설로서 활용하자니 웬만한 기자재는 다른 배에도 실려 있고, 또 공장들이 척척 원산에 건설되어 버리니 애매했다.
또 거주구로 사용하려 하더라도 이미 원산에 건설한 주택들과 켈틱 1호, 게르마닉 호가 어느 정도 주거지 수요를 충족시켜서 켈틱 2호는 잉여분에 가까웠다.
실사용이 이뤄지지 않으니 수리보수 작업에는 차질이 없어 가장 빠르게 사고 이후 원상복구가 되었지만, 거꾸로 보면 수리가 이미 다 끝난 뒤로도 쓸모가 없어 방치된 채 내버려져 있었다는 소리.
그렇게 당분간은 그저 매 시 정각에 경적 소리 울리는 게 그 커다란 선박이 담당하는 업무의 전부였다.
사실상 길이 200미터에 톤수로는 20,000톤을 넘기는 거대한 자명종 꼴인데.
너무 아깝다.
단순히 창고로 쓰기에는 그 속에 집약된 기술력과 기자재가 너무 낭비이고.
뭣보다 저게 현재 전 세계에 단 세 대밖에 없는 증기선이다.
결국 이 배를 더 이상은 묵혀 둘 수 없다는 것이 요사이 소련 지도부에서 떠오르고 있는 문제의식이었다. RMS 켈틱 2호의 새로운 사용처라는 이슈가 소련 전역에 화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작정하고 커다란 아파트 취급한다면 수천 명을 수용가능하기도 하고,
공장으로 활용한다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산업시설로 거듭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 선박의 재활용이 소련의 국가적 관심사가 된 것은 당연지사.
···라는 정보를 신숙주는 진작부터 입수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살살 꼬드겼다.
“대저 선박이란 무엇입니까? 바다를 접어 달리고, 그 위로 스치도록 날아다니며 사람과 화물을 싣는 것이 제 본분 아니겠습니까? 헌데 이리 암초처럼 가만히 붙박여 달리질 못하고 있으니 다리가 잘린 명마처럼 안타까운 꼴이 아닙니까?”
이렇게 켈틱 2호의 선장을 찾아가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서 저 커다란 기물을 다 챙기기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작금에도 저 커다란 골칫거리를 유지하느라 과로에 시달리신다 들었습니다.
만일 한 몇 달만이라도 자리를 비워준다면 베순 동지의 업무가 꽤나 가벼워질 것을···..“
또 이렇게 켈틱 2호의 관리를 짬처리당한 사회복지인민위원회에 다가가 그 고충을 톡톡 건드려 주었다.
“동지들, 만약에 동지들이 중세인이라 가정하고서. 저 멀리에 이런 함선이 보인다 생각하여 보시오. 보는 순간 기가 꺾이지 않겠소?”
마지막으로 올리버 로 몰래 외무인민위원회 구성원들의 옆구리를 한 번씩 찔러보니.
“어··· 신숙주 동지? 잘 다녀오시오.”
“하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성심을 다하여 조선과 소련 양국의 국익을 위해 헌신토록 하겠사옵니다.”
-부우우우.
“그 놈, 경적이 참으로 우렁찹니다그려? 아주 힘이 넘쳐흐르는 명마에 오르는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저것도 강철로 된 거대한 말이라 할 수 있겠군. 어떻게든 투자한 바가 많으니 성과를 꼭 거둬오길 바라오.”
“신숙주 경, 잘 다녀오게.”
“전하, 그리고 의장! 두 분 모두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좋은 소식만을 들고 오겠사오니!!”
신숙주는 RMS 켈틱 2호에 올랐다.
먼저 갑판에 올랐던 이명민과 그의 일행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조선사람 중에 공무에 접근해본 게 이들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박팽년과 소장파 동료들은 모두 주상 전하의 수행을 위해 소련에 남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들이 배에 올라있다.
“신숙주 동지?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말을 들어보니 그냥 환송 차 올라온 듯하다.
“아··· 로 동지, 메리먼 동지, 고맙습니다. 동지도 아무쪼록 강녕히 계시길.”
“제가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말씀주십시오.”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그러나?”
“잠시만 기다려 주게. 곧 끝날 테니.”
올리버 로는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원산 부두께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조선국에 당도했을 때, 수천 명이 넘도록 학살했습니다. 피로 강을 만들었고 시체로 산을 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그것은 싸움 중의 일이니 어찌할 수 없던 것이 아닙니까?”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아직 제국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지요?”
“예, 서책으로 말고는···.”
로는 잠시 한숨을 쉰다.
“저는 공산주의자들이 선주민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경험은 더 이상 겪지 않길 바랍니다.
부디, 우리가 조선에서 했던 것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 주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의 로와, 얼떨떨해 보이는 메리먼 두 사람 모두 하선했다.
그리고 다시 경적이 울리자 부둣가에 몰려있던 환송인파가 다시 환호를 지른다. 신숙주도 그에 화답하여 손을 흔든다.
“대감, 이제 출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바람도 차니 이제 슬슬 들어가지요.”
이명민의 말에 그렇게 답하면서도, 괜히 신숙주는 떨리는 마음에 난간을 꼭 쥔 채 떠나질 못한다.
곧 강철로 된 섬처럼 보이던 켈틱 2호가 움직인다.
바다 동쪽을 향해 거대한 쇳덩이가 물살을 밀치고 나아간다.
한 번도 이 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크고 육중한 강철 덩어리가 차분히 몸을 뒤척이니, 마치 배가 출항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이 움직여 그로부터 멀어지는 듯하다.
모든 광경이 비현실적이었다.
그 모든 풍광과 시간에 취하여, 마침내 원산이 까만 점이 되고 나서야 선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회의실에는 이명민과 여타 인사들이 몰려와 선장에게 앞으로의 항해에 대한 짧은 안내를 듣고 있었다.
칠판에 달라붙은 지도에는 점선으로 앞으로의 항로가 그려져 있다.
그 선을 따라가니, 최종 목적지는 교토.
해가 뜨는 곳에서 섬나라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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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유람기 (1)
4 개월 뒤, 한양 조정.
“전하, 일본국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성직(宗成職, 소 시게모토)의 사자(使者) 후루가와(俣樓加臥)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언뜻 보아도 이질적인 복장의 남성들이 예법에 맞게 몸을 구부리며 들어와 엎드렸다. 일본에서 건너온 토산품이 들어와 하나씩 진열되었고, 마침내 대열이 정비되자 다시 예를 갖춰 절하고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조선국왕 전하께 절하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 저희가 먼 데서 듣건대 국중(國中)에 병란(兵亂)이 있어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 염포(鹽浦)가 모두 적도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들었사옵니다.
하여, 오랫동안 내조(來朝)하는 일이 끊겨 예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도주(島主)께서도 어찌 군병이라도 보내어 도울 수 있을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그 뜻이 매우 장하도다. 허나 너희의 강역이 삼한 땅과 바다로 가로막혀 거리가 있으니 어찌 거병하여 백성을 힘들게 하고 그 목숨을 위태하게 하겠느냐?”
“참으로 거룩하신 뜻에 마음이 감동하나이다. 전하께옵서 이리 아름다운 뜻으로 치세하시니 어찌 적괴들의 난이 사그라들지 못하겠습니까?”
“너희의 충심이 참으로 갸륵하도다. 삼포(三浦, 세종조에 계해약조를 통해 왜인들의 거주와 왕래를 허가한 세 포구. 앞서 언급한 부산포, 내이포, 염포가 이에 해당한다.)를 거치지 못하고 남해안이 모두 역란에 휩싸여 있는데 멀리 왕성에까지 직접 내조하여 왔으니 그 노독(路毒)이 어찌 없겠는가?”
“아닙니다. 상국이 곤란에 처하였으니 이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수양, 조선국왕 이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마도에서 온 사신을 내다보았다.
어차피 왜놈들 따위, 그것도 대마도주 정도가 보내는 군병이 뭐 그리 쓸모가 있겠는가? 쓸모가 있다 한들 저들에게 내주어야 할 것은 그 이상일지니 제안을 물림이 상책이다.
그리고 저들로서도 조선땅에까지 출병하여 난적(亂賊)들과 싸울 역량이나 여유가 있겠는가?
어차피 거절할 것을 알고서 예의상 던져본 말일 터, 듣기 좋은 말이나 건네고서 뭐 하나 더 받아가려는 속셈일 터이다.
나중에 면포나 쌀이나 이런저런 사치품을 챙겨다 주면 의례적으로 있던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성상(聖上)께옵서 사사로운 무역을 허하사 많은 이들이 조선국왕 전하의 은덕을 널리 퍼뜨리고 또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가오니 어찌 상국의 은혜에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게 무슨 뜻인가?”
“전하께옵서 항구를 열어 일본 66국에 통교를 윤허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갑작스레 장내가 술렁인다. 사신들의 앞이라 절제된, 그러나 분명 곤혹감이 차올라 넘실대는 분위기. 신하들이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휘둥그레한 눈으로 서로를, 그리고 감히 주상을 흘겨보고 있다.
대마도에서 온 사신 또한 영문을 몰라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통신사를 보내어 유시(諭示)하시기를 앞으로 원산을 개항하여 일본인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사로운 무역을 통허하시고, 또 그 선박의 수나 품목에 있어 제한을 두지 않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어라!!”
사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주상이 외치자, 사신이 움츠러들며 다시 몸을 엎드린다.
그렇게 나는 그런 적 없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하고 캐물으려는 차에 신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류의 눈빛을 쏘아보내자 겨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것을 참고 사신을 물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수양은 머리에 힘을 주고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보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무지의 바다 속을 헤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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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신숙주의 계획은 간단했다.
영감을 준 것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지금도 원산 인근에서 횡행하고 있는··· 레닌 신앙.
머나먼 미래에 말세의 민초들을 구원할 레닌미륵. 그 거룩한 이름 아래 지상의 억만창생이 구원받아 곧 지상에 세워질 공산주의의 극락정토에서 살리라고 하더라.
그리고 그와 대립하는, 레닌미륵 또한 덕화하지 못한 악인들의 마음을 먹고 자라나는 악신 스탈린서기장. 서기장의 발 아래 무릎 꿇고 평생 악을 퍼뜨리며 살리라 마음먹은 부루주아와 엔카베데 마귀.
레닌이 장차 극락정토의 나라를 열 때까지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겠다 서약한 부와 재물의 신 부하린도령이나, 공산주의의 해로운 적들을 섬멸하는 무신(武神) 트로츠키장군에 이르기까지, 이 민간신앙에도 참으로 심오하고도 복잡다난한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특히 여기에 석가모니와 레닌미륵을 엮어 놓은 민담들까지 파고 들어가면···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번다한 요소들을 모두 빼고 나면.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가 말세의 혼란을 끝내고 태평한 세계를 가져오리라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강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현세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신(人神)이고, 그가 원산에 세운 소련은 곧 극락정토의 전초기지.
즉,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원산 외부에서 공산주의는 사실상 황건적의 태평도나 홍건적의 백련교와 같이 혼란기의 예언 신앙 정도의 위상이라는 것.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전형적인 말세의 요언(妖言)이다.
요사하고 삿되니 뭐라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학문하던 자로서 퍽 심오하다 보았던 변증법의 이치나 역사에 대한 논설도 모두 삭제되거나 기기묘묘하게 왜곡되어 버리니 선비로서는 차마 논할 가치도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허나 이는 사세당연한 귀결이다. 소비에트 연맹의 조직가들이 아무리 애를 썼더라도 그 분투의 과실이 이리 틀어질 것은 정해져 있었으니.
공산주의란 학문은 본디 자본주의 이후 역사의 귀결에 대한 과학적 추론에서 비롯한다 하였다.
계급이 소멸하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일어날 뿐, 공산주의 사회는 인류역사의 한 과정이지 지상낙원 같은 것이 아니었더라.
그런데 자본주의조차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착취 없는 세계’라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
신숙주 그 자신조차도 최근까지 공산주의에 대해 막연한 인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 아닌가?
아마 소련 바깥의 조선인들 중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신숙주 외에는 별로 많지 않으리라.
하··· 자신의 놀라운 귀재에 문득 스스로도 두려운 마음이 드는 신숙주였다.
결국 소련 국외에서 공산주의를 전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자신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말세의 요승(妖僧)이 되리라는 자각을 해야 하리. 그러한 관점에서부터 공산주의 확산 전략을 조망해 본다면,
완전히 새로운 자구책이 열린다.
이 지점에서 연결되어 신숙주의 대전략에 크게 영향을 준 두 번째 요소.
바로, 일본 잇코잇키(一向一揆, 일향일규).
잇코슈(一向宗, 일향종), 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급속히 세를 확대한 일본의 불교 종파.
그들이 지방 영주들에 맞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잇코잇키’라고 부른다, 라고 일본학자들은 전하더라.
잇코슈는 부패한 타 종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면서 많은 농민과 상공인들, 승려와 무사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후 다이묘(大名, 중세 일본의 대영주)들조차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세력으로 성장한 그들은 곳곳에서 신도들에 의한 자치 공동체와 자치 국가를 건설했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100년쯤 뒤에 일본 전국을 재패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권신에 필적할 힘을 갖고 있었다 하니···.
기회다.
기록에 따르면 렌뇨(蓮如)라는 종교지도자가 잇코슈의 세력을 확대시키기까지 10년 넘게 남은 상태.
전국시대라는 혼란이 도래하고, 산산조각난 일본 곳곳에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쟁투가 일어나기까지도 10여년이 남아 있다.
작금의 무로마치 막부는 무능한 쇼군이 다스리며 권위가 약화되고 있으니, 만일 그 틈새를 공산주의가 비집고 들어가기만 한다면.
공산주의라는 ‘종파’를 널리 각인시키면서, 그 ‘교리’를 조금 손보아 농민과 상공업계 종사자들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한다면.
그렇게 다른 불교 종파들이 메우지 못한 뭇 백성의 마음을 공산주의가 채워준다면.
능히 해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