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6
일본 내 소비에트의 건설을.
만일 신숙주가 일본사 서책에서 보았고 일본학자들에게 들었던 잇코슈의 세력에, 소련의 지원, 효율적인 조직 체계가 더해진다면 그 파문이 어디까지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가신이 주군을 죽이고, 동생이 아들이 되며, 아들이 역신이 되는 저 불안한 사세 속에서 공산주의라는 독은 저 해동제국(海東諸國)의 오장육부를 돌이킬 수 없이 바꿔 놓으리라.
물론 이 대책을 처음 말했을 때, 열렬한 찬성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종교란 곧 피착취자의 영혼이 소외된 결과입니다. 그를 이용함이 공산주의자로서 옳은 일입니까? 저들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식민 제국이 파견한 기독교 선교사의 모습과 겹쳐 보이자 양심상의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지만, 지금의 생산양식, 사회구성체 하에서는 어쩔 수 없소.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직 그 맹아만 보이는 시대에 뚝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그들이 처한,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상황을 들어 트로츠키가 설득하자 여론은 곧 진정되었다.
이 정도면 믿음직하고 훌륭한 천하 경영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된 세력기반도 없이 공산주의를 정확히 어떻게 설파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을 해결한다면 앞으로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이란 일사천리.
헌데··· 지금에 와서는 신숙주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일전에, 트로츠키와 소비에트 연맹의 인민위원들은 신숙주에게 완전한 전향을 요구했다.
조선의 충신이 아니라 소련의 충실한 혁명가, 아니 사냥개가 되라고 종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까지 생각하면 더욱 골치가 아파온다.
비록 주상 전하를 살살 구슬려 트로츠키가 파 놓은 함정은 피해갔다. 소련이라는 외국 정부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옵서 옥체를 의탁하신 동맹의 청을 받아 파견 나가는 형식으로 그림을 짜맞추었다.
그럼에도 외국을 위하여, 이단적 사상의 전파를 목적으로 일했다는 전적은 분명 앞으로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고작 알랑방귀 좀 뀌었다고, 공산주의 찬양 좀 했다고 여기까지 부담을 안긴다? 젠장, 소련 쪽에서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다.
자신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확 트로츠키의 모든 손가락을 서류 모서리에 베이게 만들고 한 일주일 동안 잠 못 자게 묶어 놓고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개뿔이. 국외추방 네 글자만 눈앞에 아른거릴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이 한을 좀 다른 데라도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소련이 이미 자신에게 정치적 부담을 안겨 놓았다면, 아예 갈 때까지 가보자는 광기 어린 생각이 곧 신숙주의 머릿속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왕 할 거라면, 화끈하게, 강렬하게···.
원래 통신사가 늘상 가던 경로대로 쓰시마부터 찍었다.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이틀에서 사흘 사이였으니 과연 증기선의 놀라운 속도에 감탄을 마지아니할 수밖에.
당연히 한 100리 바깥에서부터 신나게 경적을 울리며 나아갔고, 왜놈들이 혼비백산하는 꼬라지를 즐겁게 지켜보다가 당당히 상륙하여 조선국 통신사임을 밝힌 채 나아갔다.
그렇게 쭉쭉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쓰시마의 도주 앞에 나아가니, 도주 소 시게모토는 아주 주인 만난 개처럼 살갑고 열렬하게 자신을 맞이하였다.
“이번 통신사에서 정사(正使)로 온 신숙주라 하옵니다.”
“부사(副使)로 온 이명민이라 하옵니다.”
“허허허, 온마음을 다하여 환영하오! 아주 오랜만에 상국의 사신을 맞이하니 이리 반가울 데가 없소!”
그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오다시피 한 시게모토는 곧바로 그들을 앉혀 놓고 기나긴 신세한탄을 이어갔다.
전란으로 조선국과의 왕래가 끊기니 죽을 맛이라는 둥, 상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러 해적이 되어가기 직전이라는 둥, 조선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답답하였다는 둥···
뭐, 요약하자면 ‘교역 언제 열어줄 건가? 꼬우면 해적 들어가는 거 알지?’ 정도의 징징거림과 반(半) 협박.
당연히, 듣고만 있을 신숙주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견선들이 지금 교역이 멎으니 쓰시마에 적체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 어찌 한탄이 나오지 않을 소식이겠습니까? 이 장사치들은 본래 성정이 흉포하여 본도(本島)의 백성들에게도 이리 횡포를 부리니 장차 조선국에 닿는다면 필시 악학(惡虐)한 해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수 없군요. 전란이 닿지 않는 곳에 새로이 통교를 허함이 옳겠습니다.”
“참으로 그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이 곤란이 어찌 쓰시마에만 해당하는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일본 66국 모두에 통교를 허해야 하겠지요.”
“···예?”
도주의 얼굴이 확 굳어온다.
지난 계해년(1443년, 세종 25년)의 약조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는 세견선은 모두 대마도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얻어진 대마도의 대 조선 무역 독점권을, 허물겠다고?
“염려 마시오. 세견선의 수효에 대한 제한 역시 폐기할 것이니.
또한 대마도주의 사신이 다른 쿠니(國)들에 앞서 입조하여 그들을 이끌어 온다면 크나큰 사례를 베풀겠소. 단, 전장을 피해야 할 터이니 반드시 인천으로 곧바로 배를 올려보내야 할 것이오.”
다시금 대마도주의 머리가 멍해져 온다.
지금 정사라는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무역의 제한을 아주 풀어버리겠다고? 게다가 그와 별개로 무려 한양과 직통으로 연결될 공무역에서 쓰시마에 특혜를 주겠다는 암시를 풀고 있다.
대체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개항할 곳은··· 이곳 원산이오.”
기다렸다는 듯 신숙주가 소매에서 지리지를 꺼내 가리킨다. 그리고 그 ‘원산’이란 곳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느라 대마도주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신숙주의 세상을 향한 악의로 가득한 표정을.
자신을 물 먹인 인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엿 먹이겠다는, 저 흉악한 심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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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과 수 개월 뒤 한양에서.
“시, 시, 신숙주··· 이 호로새끼가아아아!!”
조선국왕, 아니 참칭자 이유(李瑈)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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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유람기 (2)
“그러니까, 여러분의 말에 따르면···”
“통신사가 4개월 전에 쓰시마에 도착하여 통교를 허한다 하였습니다.”
“그 항구가 분명히 원산이라 하였습니까?”
“예, 맞습니다.”
“대마도 측에서는 다들 몰랐습니까? 분명히 원산 인근에 이족 무리가 도적질을 하고 관(官)에 저항하여 큰 난리가 있었거늘···.”
“상국의 소식은 전란 전까지만 해도 제때제때 전달되었기에 사정을 알고는 있었으나, 자신이 조선국에서 보낸 정사(正使)라 자칭하던 이는 그 색목인 도적떼가 이미 토벌되고 신속하였다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철선(鐵船) 또한 그네들이 진상한 것이라, 그리 설명하였습니다.”
“철선이라고 하였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제 대마도에서 온 사신 후루가와도, 조선의 신료들이 체신머리 없이 놀라는 일에 익숙해졌는지 조곤조곤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분명히 배의 겉은 시커멓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정박된 배의 옆면을 두들겨보니, 나는 소리가 곧 솥이나 갑옷을 두드릴 때와 같았습니다. 그 크기는 장중하고 위엄 있었으며 굴뚝으로는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니 그 위용이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이는 분명 사절로 원산을 다녀왔던 허후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허후가 대행대왕의 조정에서 아뢰길, 실로 거대한 철갑선이 있으니 승선하고 하선할 때조차 작은 배에 도르래를 연결하여 오르내려야 했다고 하였습니다.”
“저 말대로입니다. 그때 두려움에 찬 구경꾼들과 경계를 하러 나온 무사들을 따라 저도 그 철선의 거동을 지켜본 바, 실지로 저 이야기와 같이 작은 나룻배를 쇠사슬에 연결해 내려왔사옵니다.”
“흐으음···.”
후루가와의 설명이 통역되어 들어오고, 그에 동평관(東平館)에 상근하던 담당관리가 조금씩 부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 모든 증언들을 종합하여 판단해보자면 지금 상황은 이렇게 간략히 요약될 수 있으리라.
좆 됐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확실해져만 간다.
원산, 아니 소련의 개입이 끼어 있다. 그것도 단순히 상황에 휘말려 들어간 수준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 조정을 엿 먹이려 작정한 태세다.
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할 사태였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막아내는 것은, 불행하게도 한명회의 몫이었다.
지난 원산으로의 파견 이후 다시 품계도 몇 자급 올라 종3품이 되었다. 이제 당상관이 턱밑이다. 분명 앞으로 거칠 과거에서는 전하께서 이 1등 정난공신 한명회의 ‘편의’를 보아주실 터이니,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라는 자리도 바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참이다.
그 전까지만 잠시 예빈시(禮賓寺)에서 소윤(小尹) 자리를 맡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봉변을 맞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저기 아무래도 누군가 통신사(通信使)를 참칭했다면 그 이름자라도 알아봄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 내 지금 한 번 물어 봄세.”
그렇게 목을 가다듬고 질문을 꺼내려 후루가와를 슥 쳐다보는데.
왠지 불길하다.
왠지 이 질문의 답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
머리로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생존본능에 직결된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한명회, 전하께서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부르며 친애하는 제일공신!
천하를 세 치 혀와 담대함 하나로 뒤집은 장부가 아닌가! 이런 미신적인 감각에 겁을 집어먹어 물러설 수는 없는 법.
“혹시··· 통신사의 정사와 부사를 칭한 이들의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일행이라도.”
“아, 그거라면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쓰시마에 일어난 가장 요란한 대사건의 장본인들이니까요!
정사의 이름이 신숙주고, 부사는 이명민이라는 자였습니다.”
시발.
가끔은 미신이 맞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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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신숙주, 이 간덩이를 꺼내 씹어 먹을 새끼! 죽일 놈! 육시럴 놈! 쿨럭, 쿨럭.”
“전하, 부디 옥체(玉體)를 상하게 하지 마소서.”
“옥체를 아낄 수 있는 정세를 신하들이 만들어야 군왕이 옥체를 아낄 수 있지 않겠나?”
누가 들어도 ‘야, 이 새끼야. 너 때문이잖아’라는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말에 더 이상 한명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상께서는 겨우 신숙주를 입으로 오체분시(五體分屍)한 뒤에야 진정하셨으니 그때까지 한명회가 주상 전하 앞에서 엎드려 있던 시간이 장장 2각(刻, 1각=15분)이나 되었다.
“후··· 그러면 대마도 사신의 청을 물려야 하지 않겠나? 한양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공무역을, 그것도 서너 개월에 한 번씩이라니. 그리 허통을 허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결국 역적 모리배들이 간사한 세 치 혀를 놀려 제 맘대로 나라를 판돈으로 건 것일세. 조정이 그를 지켜야 할 이유는 없네!”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전에 약조한대로 관직을 받은 이만을 1년에 한 번 내조하게 하며 나머지는 삼포가 개항되는 대로 그곳에 체류케 하면 될 것입니다.”
“소한당(所閒堂, 권람의 호), 자네가 말하는 바가 무슨 소리인 줄 알고 그리 경솔히 이야기하는가?
아니되옵니다! 왜적들은 본래 품성이 잔악하고 성급하며 칼 다루기에 능하니 이를 거절하면 필히 되갚아 올 것입니다.
일국이 평정된 때에도 왜구가 들끓으면 그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이 난적들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어떻겠습니까?”
권람이 적당히 주상의 말에 비위를 맞추다 새로 영의정을 맡은 박종우에게 호되게 반박당한다.
워낙에 비밀히 이야기되어야 하는 주제다 보니 주상의 면전에는 박종우, 권람, 그리고 한명회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믿을 수 있을 일등공신이거나 재상의 자리를 거머쥔 이들.
모두 지난 한 해 동안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각자 제 몫을 얻어간 이들. 수양대군, 아니 금상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그러면 이 긴박한 정세에도 불구, 저들에게 이런저런 자원을 따로 떼어서 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저들이 진상하여 오는 물자에는 병장기를 만드는 데 긴요한 유황이나 동(銅)이 있사오니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일을 위해 조금 많은 대가를 치를 뿐이라 헤아려 주소서.”
박종우의 대답에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주상 또한 그 말에 반박할 길을 찾지 못해 애써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저들이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여 가는 형세라 할지라도 이 전시 상황에서는 결국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난을 완연히 평정한 뒤에 다시금 제대로 된 약조를 체결하는 수밖에.
물론 굳이 입밖으로들 내지 않았지만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이대로 계속 통신사행을 부정하면, 수양은 역적놈들이 사신 사칭하는 거 하나 못 막는 모자라고 무능한 임금이 되고 만다.
결국 다시 크게 한숨을 쉬고는, 슬슬 그 날카로운 시선을··· 한명회에게 돌린다.
순간 공기 중에 가시와 사금파리가 떠다니는 듯, 한명회는 그 긴장되고 예민한 공기에 호흡하는 것조차 가슴을 할퀴어 오듯 고통스러웠다.
마침내 우신(愚臣)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니, 주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빈시 소윤.”
“예, 전하.”
낮게 깔린 옥음(玉音)의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다.
게다가 평소처럼 ‘사우당’이라 친근히 호를 부르지 아니하고 직책명으로 부르시니 여간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 아닌 모양.
“나는 일전에 그대에게 원산의 오랑캐 무리와 화평을 도모하라, 그것이 용이하지 못하면 평정하고 오라 명한 바 있소.”
“···.”
“그리고 그대가 긴 여로(旅路)를 지나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저 무도한 오랑캐들은 능히 평정되었다고 상언(上言)하지 않았소?”
“예, 전하. 그렇사옵니다.”
“나는 그대를 믿었소. 그대의 능력을 믿었고.”
주상의 다리와 함께 책상이 부르르 떨린다.
“헌데 저들과 우리가 화평을 한 것 같지도 않고, 또 그렇다 하여 저들을 평정해낸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찌 될 일인가?”
“그건···.”
“무어라 말하든 나는 듣지 않겠네. 나는 주군으로서 그대에게 명하였고, 그대는 국명(國命)을 받잡겠다고 떠들었네. 돌아와서는 마침내 그 뜻을 관철하였다 하였고.
그때 해내지 못한 것을 마무리하고 오게.”
한명회는 주군의 주먹에 분에 넘치는 힘이 들어가 벌벌 떨리는 것을 본다.
“반드시 전하께서 명하신대로 행하겠나이다.”
“그래, 반드시.”
모골이 송연해진다.
무조건 수습해야 한다.
“그리고, 소한당.”
“예, 전하.”
“자네도 함께 가게. 벗의 허물을 함께 지고 감에 참된 우정이 있지 아니하겠는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 오랑캐 무리의 교만함을 꺾어놓겠사옵니다.”
“그래.”
권람은 들뜨는 마음에 슬며시 어깨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한명회, 저 친구가 드디어 한번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때가 왔다.
늘상 친우의 그늘에 가려 밀려난다는 것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던 바, 오랜 벗의 실책에 권람은 참으로 사대부답지 못한 저질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둥실둥실 떠오르는 약간의 기대감도.
‘만일 사우당이 저지른 실수를 이 내가 이번 기회에 잘 수습하여 온다면···.”
전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도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권람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
“흠, 잘 모르겠소만?”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와 정확히 똑같이 생긴 선박을 타고서 당도하였다 하는데! 어찌 역도 무리를 도왔음을 뻔뻔스레 부정한다는 말이오!!”
“이보게, 르네? 우리가 타고 온 배가 몇 척이었지?”
“아마 두 척 아니었습니까? RMS 켈틱 1호와 SS 게르마닉 호뿐이었죠?”
“그렇다 하는데 이쪽에서 뭘 어쩌겠소? 아마 조선의 기술력이 단기간에 그리 발전한 모양이오?
마음을 다해 축하드리오. 귀국의 부국강병도 머지 않았나 보오, 허허허.”
‘이 시발놈들이?’
트로츠키와 에티앙블의 실없는 만담을 듣고 있자니 복창이 터져 돌아가실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 따위 고자세로? 이렇게 대놓고 들이받는다니?
최소한의 면피 정도라도 예상했던 한명회와 권람은 둘 다 상정 외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흠, 어쩌면 그··· 쉰슉쥬?라는 인간이 영리하게도 우리 배를 멀리서 염탐하고서는 뚝딱 역설계해갔나 보군. 정말 천재적이야. 일본어에 중국어도 할 줄 안다던데 놀랍군.”
“그 자가 왜어(倭語)에 능하다는 사실은 어찌 알고 있는 것이오?”
“몰?루겠소? 내가 그런 말을 했었소? 르네?”
“에에취! 아, 뭐라고요? 제가 지금 비염이 심한지 재채기가 나와 대화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만?”
“허허허,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소. 내가 나이가 들다 보니 노망이 났나? 아니면 그쪽이 내가 안 한 말을 했다고 주장하나? 잘 모르겠지만 혼란을 드려 미안하구려. 허! 허! 허! 허!”
“하! 하! 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