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67
창호지 너머로 형체도 모르게 흩어져 있던 궁녀들이 무릎 꿇으며 방안으로 든다.
이름 없이, 그저 고개 숙이고 있을 뿐이었던 환관들이 예를 갖춰 그들을 대면한다.
시위하던 무사들이 낯선 상황에 놀라 절을 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가까이에 있는 궁녀에게 다가간다.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소.”
“저, 저는 차개시입니다.”
“그대의 이름도 알려줄 수 았겠소?”
“어···엄자치이옵니다.”
“그대는?”
“저는···”
색깔도 없이 희뿌연 그림자로만 존재하던 이들이 형체를 얻어 그들 앞에 섰다.
목소리 없이 그저 “예, 전하.”하고 대꾸만 하던 이들이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름 없던 자들의 이름이 떠오르고, 형체도 얼굴도 없던 자들이 감히 왕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게 모두의 소개를 받은 뒤 트로츠키는 조용히 뒤돌아 이홍위를 바라본다.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 자신의 눈을 피한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전하, 누구든 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저라도 제 머리 위에 왕관이 씌워지고 강고한 왕권이 제 손에 들린다면 전하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생각이, 그 잠시간의 착상이, 그저 착각일 뿐입니다.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급했구려.”
“그렇습니다.”
트로츠키가 잠시 이홍위의 눈을 바라본다. 무언가에 홀린 듯하던, 혼란과 격정으로 뒤흔들리던 눈빛은 이제 가셨다.
“두려움을 이겨내려 하지 마십시오. 없애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인정해야 합니다.”
“···.”
“좋습니다. 이제 모두와 함께 조선을 바꿔볼 수 있겠습니다.”
트로츠키가 손을 건네자, 이홍위는 잠시 머뭇거리다 역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악수를 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짧은 토론을 끝낸 뒤, 물러나 있던 블레어와 신숙주를 데려와 경연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각을 나와보니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노을이 지고 있다. 돌아보니 여전히 이홍위의 표정에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어려 있다.
낮과 밤이 바뀌고 천지가 개벽하는 이 순간에 이홍위는 여전히 수심처럼 기나긴 그림자를 마음속에 드리우고 있다.
아마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그 마음속 모순, 불안. 그러나 꺾이지 않고 앞으로의 격변을 마주해야 하리라.
낯선 세계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 속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아야 하리라.
하지만 그가 용기를 가진다면···.
트로츠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잠시 눈을 뗀 찰나 동안에도 저무는 태양은 산천의 모습을 끊임없이 새롭게 빚어내고 있다.
변화의 시간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말
이번화와의 연결성을 고려해 지난화 마지막 부분에 한 줄 정도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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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위대하고, 실로 고통스러운 이 전환의 시대 (…)
모든 교차로마다 어떤 짙은 어둠이,
우리가 내내 열렬하게 기다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우리가 희망을 거는 사건들의
저 먼 어떤 적자색 노을이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소제목은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글에서 따왔습니다. 블로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의 자제로, 러시아의 대표적인 상징주의자 시인입니다.
1880년에 태어나 1921년까지, 러시아에 몇 번의 혁명들이 불어닥친 격변 시대 속에서 짧은 삶을 살아간 시인은 인텔리겐치아로서 느낀 불안과 죄책감, 그리고 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자신의 시구 속에 녹여냅니다. 이 구절이 이홍위의 심정을 잘 드러내주지 않나 생각하여 그의 글로 이번 화 소제목을 정했습니다.
“잘··· 되어 갑니까?”
“아, 바빌로프 동지! 오랜만에 한양에서 뵙습니다?”
“아, 아··· 반갑습니다. 이명민 동지? 그런데 왜 여기에?”
바빌로프가 오랜만에 상경해서 처음 방문한 곳은 농업기술위원회였다. 지난 난에서 대거 발생한 역신전은 모두 담당하게 된, 그야말로 조선 근대화의 핵심지.
그곳에는 소련에서 옮겨온 농업인민위원회의 일원들과, 자신과 함께 일했던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들을 다시금 접하니 타향에서 고향을 찾는 감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끼어 있는 사람이 있다.
“저야, 공조판서 아니겠습니까? 소련으로 따지면 산업인민위원이지요! 어찌 아국의 농업을 크게 일으키고 국토를 개발하는 데 제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런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명민이란 사람은 소련에 있을 때조차 많이 접한 적이 없다. 애초에 저 사람은 소련에 망명 온 뒤 수 개월의 시간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느껴지는 사람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뭔가··· 찌든? 피곤한? 그런 관료의 느낌이었던 이명민에게,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흥분과 열정이 감돌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온갖 곳에 널따란 도로와 큼직한 건물이 지어질 것이며! 그렇게 대명천지(大明天地)를 뒤집어 놓고 산하(山河)를 갈아엎어 숱한 도시들이 새로이 만들어질 것이 아닙니까!!”
어? 뭔가···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드는데···’
바빌로프는 전혀 몰랐겠지만, 이명민이라는 자는 본래 토목공사로 흥하고 또 망한 인물이었다.
세종조 시기, 내불당(內佛堂)을 성대하게 지을 때 사대부들에게 욕먹어가면서 그 역사를 감독하여 두각을 드러낸 것이 정치인생이 꽃피기 시작한 계기였다.
그 이후부터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아 이런저런 토목 관련 업무를 도맡으며 그 품계가 점차 상승한 것이다.
마침내 원 역사에서는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관청인 도청(都廳)을 통해 대신파의 자금과 세력을 관리하다 역적으로 몰려 계유정난 당시에 죽었으니, 그와 토목공사는 실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물론 바뀐 역사에서도 안평대군을 위해 그 자금과 세력을 쓰다 도망쳐왔으니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아무튼 소련으로 도망쳐온 그가 본 광경이란 나름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던 그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자리잡은 지 1년 정도 막 지난 이들이 수만 명을 수용할 도시를 건설해내다니! 심지어 저들의 관청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물 위에 뜬 강철성 켈틱 2호가 아닌가!!
아아, 이 어찌 이명민의 가슴속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긴 일대사건이 아니리오?
그리고 이 어찌 이명민의 야망에 불을 지른 생애의 전환점이 아니리오?
그가 소련에 잽싸게 붙어 아첨한 바에는 단순한 생존욕구뿐 아니라 다른 포부도 있었던 것이다.
‘저런 걸 짓고 싶다!’
저 정도 규모의 역사를 지휘하고 싶다. 저 칼 같이 각이 맞는 도로와 주택들을 보니 드는 생각은 오직 그뿐이라.
조선에서 소련측 인사들이 대규모로 토지를 관리하게 되었다니 그가 군침을 흘리며 다가온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작금에 이르러, 아국에서 토목의 기예가 소련의 것에 크게 못 미치니 이 어찌 통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헌데 이리 소련의 기술자들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조선의 농법을 흥하게 하고, 그 기물을 일신하는 데 참여하니 공조판서로서 제가 이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크나큰 불충이며 태만함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군요.”
“제가 장담컨대 단 10년! 아니 5년만에 아국은 뽕나무 밭이 바다로 바뀌듯 변할 것입니다! 이곳의 성과는 정말 놀랍습니다!
어서 소련을 따라잡아 철강들을 쏟아내 창칼과 전각을 마련하고 콘크리트를 부어 도로를 짓는다면···“
아, 알겠다.
바빌로프는 드디어 이명민에게서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낯선 조선의 관료에게서 5개년 계획의 냄새가 난다.
그렇게 조선의 미래에 대해 열변을 쏟아내면서도 이명민은 위원회 건물 곳곳을 쏘다니며 이곳저곳을 들춰보았다.
연구원들은 시종일관 눈을 빛내며 탐욕스럽게 갖은 설계도와 계획서를 훑어보는 그를 부담스러워 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기사 이런··· 속된 말로 ‘뿅 간’ 표정이라면 그럴 만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를 내쫓거나 잠시만 나가달라고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명민 본인이 주상에게 직접 판’농업진흥위원회’사(判’農業振興委員會’事)의 직책을 공조판서의 겸직으로 받아온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장관급 인사이신 ‘판사(判事)’께서, 직접 왕림하시어 그 업무내용에 맞게 진행사항을 시찰하고 감독하는 꼴이니. 여기에 대해 누가 감히 불편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명목상 외부 자문역이고 소련 인민위원이니 동급인 내가 얘기해줘야···’
“그런데 이렇게 위원회 실무 영역까지 들어오시면 연구원들이 불펴···”
“와! 정말 소련의 토목기술은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 이 전각만 해도 한양에 입성한 지 3개월밖에 안 지났는데 빠르게 조립되지 않았습니까!”
이 인간, 알고 있다.
과장된 어투로 말을 자르고선, ‘응? 무슨 말씀하셨소?’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바빌로프는 그만 이명민에게 질려버렸다.
괜히 공식직함까지 달고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아랫사람들이 불편해 할 것을 알면서도 온 것이다.
“제가 이번 개발계획에 대해서 좀 설명을 드릴 테니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아··· 뭐··· 그렇다면야···.”
굳이 바빌로프가 직접 설명해주겠다는 데도 약간 실망하는 기색이 엿비친다.
이명민이 잠시 나가기 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연구원들이 급히 눈을 피한다.
거기에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여태까지 연구원들을 괴롭히며 새디스틱한 쾌감을 느껴온 것이다.
만일 바빌로프가 지금 집필되고 있을 문종실록의 초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면 ‘이명민은 탐오(貪汚)하고 덕행이 없으며, 다만 토목(土木)의 사무만 알 따름이었으며···’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나마 저들이 소련 쪽 인사들이기에 망정이지, 만일 조선인이었더라면··· 대체 무슨 내리갈굼을 했으려고···.
조선 내 친소련 인사 중 벌써 둘이나 인성파탄자라니 소련과 조선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아무튼 위원회 전각 바깥에 마련된 간이 벤치에 앉으니, 장식용 콘크리트 수반이 눈에 띈다. 수도는 연결되지 않은 것을 보아, 아마 기술자들이 낯선 곳에서 자재를 다뤄보며 연습한 결과였으리라.
“결국 핵심은 토지의 정밀한 측량, 그리고 거대한 토목과 건축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 전역을 먹여 살릴 미곡을 키우고! 목면을 원산의 포목공장으로 옮길 교통망을 마련하고! 또 공장을 확장하며 그 인부들의 거주와 편의를 위한 시설들을 지어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함길도의 기근을 없앤 자’에게서 직접 농업계획을 설명받는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자기가 이해한 바를 열심히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들을 많이 빠뜨리셨군요.”
“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순간 바빌로프에게 짓궂은 마음이 든다.
내 사람들을 그토록 괴롭혔으니, 이 정도로 놀리는 것쯤이야 죄도 아니리라.
“바로 공기에서 쌀을 만드는 겁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령 소련이라도 그는 불가능합니다!”
“아뇨. 언젠가는 가능해질 겁니다. 방법을 아니까요.
필요한 원료를 구하고 그 제반 시설을 꾸리려면 5년 정도는 걸릴지 몰라도 불가능은 아닙니다. 뭣보다도 발전용 댐이 몇 대가 필요하긴 한데··· 아, 아닙니다. 이건 잠시 후에 자세히 설명드리죠.”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비유가 섞여 있을 뿐.
“뭐, 그때까지는 아마 말씀하신 바처럼 아마 토목건축 및 행정 작업이 주된 업무이니까 크게 다를 바는 없겠군요.”
“그, 그야 그렇겠지요. 헌데 아무리 그래도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담도 거짓말도 아니니 기대하십시오.”
바빌로프는 별 생각 없이 주위에 굴러다니던 조약돌을 주워서 던진다. 예의 콘크리트 수반에 맞아 깡, 하는 소리를 낸다.
이 가뭄이 끝나면 저기에도 진짜 물이 흐르게 될까?
“언젠가 공기로 쌀을 만들어 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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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민이 끊임없이 졸라댄 결과, 그는 곧 바빌로프에게서 공기로 쌀을 만드는 기술에 관한 진상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어진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듣고도 몇 번이나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할까?’
제방을 세운다. 거기서 물이 움직이는 힘을 모아 공기를 압축시키고, 압축 공기에 석탄 등을 넣고 전기를 내뿜어 반응시킨다.
그러면 지력이 쇠해 버려진 전지(田地)는 다시 기름지게 하고, 기름지던 땅에서도 이전의 몇 배로 수확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무언가’를 가지고 염초를 이용하지 않는 화약을 만들 수도 있고.
바빌로프는 그 무언가를 일컬어 그렇게 불렀다.
암모니아, 그리고 질소비료.
···정말 떠올리기만 해도 꿈 같은 이야기다.
물론 바빌로프의 설명에도 이명민의 흥분은 가시질 않아서, ‘그렇다면 정말 커어다란 제방들을 지어야 하겠습니다!!’라든가, ‘그 공장의 크기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자재는요? 그것도 저 철근콘크리트라는 것으로 짓습니까?’ 같은 질문을 쉼 없이 뿜어냈다.
결국 바빌로프는 질린 듯 자리를 비키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쪽지 한 장을 건네면서.
-“원래 이쪽으로 매일 출근하는 사람인데, 어제 현장 측량에서 돌아와서 좀 쉬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 적힌 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이쯤인데?”
이명민은 바빌로프가 적어준 쪽지에 적힌 위치로 대강 걸음을 옮겨왔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기에, 바빌로프가 판서씩이나 되는 이명민에게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다가 보니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아니다. 눈에 띄는 게 아니라, 그것밖에 안 보인다.
소련에서 보던 건축자재들 그대로인데, 그것들이 뭔가 기묘한 형상으로 조립되고 정돈되어 있다.
열려 있는 대문을 넘어 마당을 거니니, 이 생소한 건물의 실체가 드러난다.
딱딱한 회색의 직육면체들이 모여 있는 것은 소련에서 봤던 것과 똑같다. 그러나 그것들이 묘하게 비대칭적인 형상을 이루며 물 흐르듯 동선이 연결되고 있다.
이명민은 자기도 모르게 산책하듯 집을 둘러보다 응접실로 추정되는 공간에 들어왔음을 깨닫고 놀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화살촉 같은 것을 벽에 걸린 사진에 열심히 던지고 노는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벽에 걸린 사진은 두 장. 모두 인물 사진이다.
“햣하! 죽어라, 그로피우스! 죽어라, 스탈린! 겸사겸사 나치새끼들도 죽어라!!”
···그리고 그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시발놈들! 나는, 내가 바우하우스 교장이란 말이야! 난 거물이라고! 네깟 것들이 뭔데 내가 짠 커리큘럼을 갈아엎어!! 내 도시계획을 씹어!!!”
“크흠, 주인장 계시오?”
“···누구쇼?”
슬쩍 보아하니 저것이 바로 그 소련인들이 즐긴다는 ‘다트 놀이’인 듯했다. 투호와 비슷한 듯하나 던지는 화살이 손가락에 집힐 정도로 작을 뿐.
남자는 방금의 추태를 가리려는 듯 급히 벽에서 인물 사진을 떼어내고 ‘다트’를 숨겼으나, 그 과정에서 손이 찔렸는지 “끼얏!” 하는 소리를 냈다. 바보 같은 꼴이 아닐 수 없다.
“그쪽이 바빌로프 동지가 천거하였다는 건축가 맞소이까?”
“맞소. 아직 삽도 제대로 못 뜨기는 했다만. 그쪽은 그럼?”
“소련에서 뵌 적이 없나 보구려. 나는 이명민이라 하는 사람이오. 편히 이명민 동지라 불러도 좋소. 조정에서 공조판서를 맡아 미욱한 재주로 주상 전하와 트로츠키 동지를 돕고 있는 몸이고.”
“공조···판서?”
갸우뚱거리는 남자, 그러나 이명민은 소련인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시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산업부장관이오.”
“아아!”
그런데 반응이 생각보다··· 과하다.
“이런! 이럴 수가! 국가 주도 프로젝트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장관 각하께서 직접 수행인도 없이 저를 마주하러 오셨다는 말입니까?
역시 이번에야말로 퇴짜 안 당하고 밀어붙일 수 있겠구만!”
“뭐···뭘 말이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다소 흥분하고 말았군요.”
라고 말하면서도 남자는 여전히 잔뜩 흥분하여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명민을 붙잡고 건물 안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조선의 지도.
그런데··· 뭔가 기묘한 표식들이 흩어져 있다. 따로 색칠된 곳들이 있고 아닌 곳들도 있는데, 표식들은 색칠된 곳에만 주로 분포되어 있었다. (색칠된 곳이 몰수된 역신들의 토지임은 나중에 알았다.)
그 표식들을 서로 연결하는 선과 점선의 망으로 조선국 전역이 그물망에 사로잡힌 듯한 형상이었다.
“조선의 국토 전역을 활용할 겁니다! 삽소비치가 말한 것처럼 곳곳에 소도시들을 배치하고 그를 중심으로 농촌은 재조직화됩니다! 조선 전역의 근대화가 그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삽..소비치?”
“쉽게 설명하자면, 나라에 농촌이 대부분이니 곳곳에 소도시들을 배치하고 그를 중심으로 산업화와 인프라 설치 등 국토 개발을 주도하자는 겁니다. 삽소비치 동지의 주장이죠.”
그 뒤로 기능과 형식이니, 격자형 도시구획이니, 공동생활공간과 업무공간의 동선 배치니···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들이 흘러들러오는 것을 참지 못한 이명민이 마침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그렇군. 헌데 아직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하였소.”
“아···아? 정말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하네스 마이어라고 합니다! 한때 세계 최고의 건축학교를 이끌었던 사람이죠.”
마이어가 자부심 어린 얼굴로 악수를 청하자, 이명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마주 내밀었다.
그 뒤로도 다시 한참동안 이야기는 이어졌다.
바우하우스(Bauhaus).
독일에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켜 보자는 사람들이 모여 학교를 세웠다.
창립자 그로피우스는 모든 기예가 건축을 중심으로 묶여 인간 생활을 설계한다고 생각했고, 그 이념에 따라 각 분야의 예술가와 장인들을 끌어모았다. 마이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둘의 사이가 삐걱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이어의 대량생산과 효율성 중시는 그로피우스의 생각과 맞아떨어졌기에 추후 마이어는 그의 뒤를 이어 2대 교장에 오른다.
“근데 나치란 놈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때려잡았다.
거기에 점점 그로피우스와의 관계가 망가지면서 나치에 폐교되지 않으려던 그의 압력 하에 마이어는 쫓겨나고, 미스 반 데어 로에가 3대 교장에 오른다.
물론 나치는 바우하우스 따위 빨갱이 학교, 그냥 폐교해버린다.
이후 마이어는 소련으로 향하고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향한다. 마이어는 모스크바를 설계하고,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뉴욕에 유리와 철로 된 마천루를 건설한다.
“물론 저는 여전히 스탈린주의자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의 미감은 솔직히 구려요. 안 그러면 내 위대한 도시계획이 빠꾸 먹··· 아니 채택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렇구려.”
“그리고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이 나치에게 붙어먹은 반동새끼··· 죄송합니다. ‘체제 친화적인’ 이들에게 쫓겨났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생산성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자원과 기술력이 제한되고 극한의 효율성이 중요할 때 그 놈들이 왔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반짝반짝 쓸데없는 유리궁전이나 짓고서 ‘크··· 아름다워.’ 감탄하고는 트로츠키 동지에게 구둣발로 채여서 쫓겨났을 겁니다. 제가 조선으로 온 것은 조선과 저 마이어, 둘 모두에게 행운이겠죠.”
“그렇구려.”
“아무튼 간에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저희가 조선에 온 계기에 대해서는 들으셨겠죠?”
“그렇구··· 아, 트로츠키 동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
이어지는 이야기가 지루해 잠시 신경을 끄고 있던 이명민이 답했다.
“바빌로프 동지나 저나 모두 소련을 나와서 스페인으로 향했다지만, 내막은 많이 다릅니다.
저야 뭐 스탈린 동지가 절 마뜩찮아 하고 건축계에서의 영향력도 점점 떨어져가니 나온 거지만, 바빌로프 동지는 무려 스탈린 동지가 직접 떠나도 괜찮겠냐고 설득도 했다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