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66
이번에 답한 것은 트로츠키였다.
“우선, 역신들의 전답을 모두 저희에게 맡기신 바에 대해 크게 감사를 표합니다. 이를 통하여 조선의 피폐해진 민생을 복원, 개선하고 에센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진행하는 데 큰 힘을 쏟겠습니다.”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그들의 일파가 가지고 있던 땅은 당연히 모두 국가의 소유로 회수되었다.
물론 금성대군은 엄밀하게는 역적이 아니었으나, 그의 휘하에 있던 무리들이 종사에 지은 죄를 씻겠다며 ‘자발적으로’ 바친 토지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새로 새워진 ‘농업기술위원회’라는 생소한 이름의 관청에 그 운영권이 일임되었다.
당연히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다시피, 소련에서 온 인력들이 세운 기관이었다.
“병판,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나?”
“어찌 신하 된 몸으로써 두 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명분은 확실했다. 소련이 조선이 감당해야 할 에센과의 교역물자와 일본의 조공에 대한 답례품을 모두 대신 지불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해당 토지들은 이제 몽골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질 국제무역의 적자를 쳐내고, ‘최우호국’ 소련의 각종 자원에 대한 국가적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활용될 것이다.
물론 조선의 기술력으로는 그 토지를 활용하여 전자의 목적조차 모두 달성하지 못할 테니. 조선 입장에서 잃는 바는 없는 장사였다.
그리고 박팽년이 말을 덧붙인다.
“또한 본래 마땅히 전하의 것인 토지를 맡긴 것이온데, 어찌 그를 넘어서 사취함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박팽년의 혀끝으로 선이 그어진다.
한편으로 그 토지는 신(新)대신파와 친소련파 사이의 합의된 한계선이었다.
조선의 교역을 위해, 그리고 친소파의 정책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최대한의 토지는 거기에서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백성들이 굶주릴 정도로 ‘사취’하는 바가 있을 시에는 언제든지 회수되리라.
이홍위든 박팽년이든, 누구도 소련에서 담당지역의 농민들을 빈곤하게 놔두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은 소련에 해당 지역의 재건에 대한 부담까지 맡겨놓은 것이다. 성과가 시원찮을 시 언제든 회수할 수 있으리란 단서를 달고서.
허나 그 외의 토지는 조선의 의지에 따라 운영될 것이다.
···물론 블레어와 함께하는 지주들의 기묘한 운동도 ‘조선의 의지’로 포함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 외에도 이미 박팽년을 비롯한 신대신파와 신숙주와 트로츠키 등의 친소련파 사이에는 수많은 물밑 합의가 오갔다.
소련이 점유한 토지가 어떤 식으로 활용될 것이고, 그것의 예상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그리고 그 효과가 신대신파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지, 거기서 양측이 어떻게 이득을 취할지에 대한 합의.
방금 이홍위의 앞에서 요약된 것 이외에도 수백 가지 사항에 대한, 수천 줄로도 다 적을 수 없을 세밀하고 정교한 협정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세부내용들이 정해지는 와중에 일일이 이홍위가 협정의 중재자이자 무게추로서 움직였기에, 조선국왕 자신 또한 그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양측 어디에도 기울지 않을 블레어의 기묘한 무리들 또한 긴장감을 더해주니, 조정의 균형감은 팽팽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세 개의 파벌, 그들이 나누어 맡은 세 가지의 역할, 그 사이에 선 주상.
삼분지계(三分之計)는 이토록 매끄럽고 안정적으로 안착하였으니.
앞으로 변해갈 조선의 향방은 조정을 떠받칠 세 기둥의 형세가 결정하리라.
오늘은 더 이상 무언가를 합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트로츠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팽년 또한 공손히 몸을 숙이며, 주상 또한 가만히 머리를 주억거린다.
암묵적인 합의가 끝나는 날.
오늘은 조선의 미래를 확정지은 날로 역사에 남으리라.
그렇게 대강의 논의가 마무리된 뒤, 박팽년과 트로츠키가 각자 인사를 건네고 떠나려는데···
“트로츠키 의장, 그대는 남아 주시오. 개인적인 담화일 뿐이니 병판은 돌아가도 좋소.”
박팽년이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직하니, 조용한 정자에 두 사람과 바람소리만 남는다.
이제 날이 꽤나 덥다. 아직도 비는 내리지 않으니 백성들은 올해를 가장 끔찍한 기근이 닥친 때로 기억하게 되리라.
“트로츠키 동지?”
“무슨 일입니까, 전하?”
이홍위는 비릿한 웃음을 띄운다.
“본래 모든 정난에는 공신이 있지 않소? 아조(我朝)가 개국될 때도 태조대왕의 곁에는 개국공신들이 있었고, 태종대왕께서 무인년에 정도전 일당을 죽였을 때도 정사공신들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트로츠키가 천천히 대답해오니, 이홍위는 멀리 흔들리는 대가지들을 내다본다.
“그런데··· 내 곁에는 공신이 없구려?
한낱 ‘대신’과 ‘외적’이 있을 뿐.”
트로츠키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모든 정난에는 공신이 있고, 군주는 그 공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아야 한다.
헌데 이홍위에게는 그를 복벽시켰으나 정작 지나친 개입은 꺼리는 소련과, 딱히 그에게 정치적 빚을 안긴 적 없는 대여섯 명의 소소한 공신들만이 있을 뿐이다.
왕권이 강해질 적기.
“의장, 나는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앉은 이 보좌가 너무도 싫었소. 이 자리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만 같았고, 실제로 거의 그럴 뻔했지.”
이홍위의 시선이 무심코 옮겨간다. 이홍위 자신은 모르겠지만, 정확히 수양이 효수되어 있는 방향을 향해 있다.
허, 하고 이홍위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 먹었소. 보좌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내가 보좌를 잡아먹겠노라고.
그를 결심하게 된 것은 의장, 그대를 보면서였소.”
“저··· 말입니까?”
“그렇소.
그대가 소련에서 얻었고, 또 행하던 압도적인 권위가 부러웠소. 논쟁이 벌어지고 파벌이 나눠질 때 그대의 말 한 마디가 봉합점이 되고 또 종착지가 되었지.”
“하오나 저는 군주가···”
“아니지. 헌데, 어떤 미친 자가 러시아 혁명의 영웅인 ‘그 트로츠키 동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투표하겠소?”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대에게 언제나 고맙소. 나를 살려주고 보호해주어서.
우습겠지만, 그대가 나를 왕으로 만들었소. 공산주의자가 왕을 세웠지.
그러니 보시오. 그 왕이 무엇을 하는지.”
이홍위의 눈이 빛난다. 등뒤로 저물어가는 붉은 황혼 속에서 곤룡포에 금실로 수 놓인 용이 바람에 펄럭이며 춤춘다.
마치 날아오를 것만 같다.
하지만 어디로?
트로츠키는 기묘하게도, 이홍위를 바라보며 불안이 자라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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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기울어가는 태양은 대지 위에 그림자로 기나긴 선들을 긋는다.
고작 도토리가 어린아이 팔뚝처럼 기다란 그림자를, 어느 벚나무가 에펠탑처럼 웅대한 그림자를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드리운 그림자 또한 길게 늘어진다.
고뇌의 그림자다.
여전히 조선국왕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어린아이의, 군왕의, 아니 이홍위라는 인간의 머릿속에 담겨 있을 생각들을 짐작키 어려웠다.
하나의 인간은 곧 하나의 우주고,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며, 셀 수 없이 많은 방을 가진 저택과도 같으니.
-‘그대가 나를 왕으로 만들었소. 공산주의자가 왕을 세웠지.’
이 기묘한 역사의 모순.
트로츠키는 이홍위에게 역사의 순리를 가르쳤다. 부르주아가 귀족을 폐하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폐한다. 그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옥좌와 십자가 또한 그 순리 속에서 스러져갈 역사의 쓰레기일 뿐라고.
그러나 정작 트로츠키는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를 결심하게 된 것은 의장, 그대를 보면서였소.’
‘나를 보면서···라고?’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더더욱 그의 머릿속에 대해서 알 수 없으니, 트로츠키 또한 마음이 고민으로 가득 찬다.
-“봉건적인 군주제는 구 체제의 상부구조입니다. 변화하는 하부구조에 따라 사회는 맞지 않게 된 허물을 벗는 나비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그 허물을 벗어나갈 겁니다.”
일국의 군왕 앞에서 감히 입에 담기 불온한 내용들을 그는 입에 담았었다. 다름 아닌 이홍위 자신이 졸랐기 때문이었다.
이홍위는 마치 스펀지처럼 미래세계와, 소련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과 이론들을 빨아들였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역사의 일반법칙’과는 완전히 다른 궤도 위에서 나아가는 조선이다.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만연한 조선왕국에, 붉은 빛 예복을 휘날리는 공산주의자가 보좌에 앉았다.
공산주의에 저토록 호감 어린 감정을 품은 소년이, 군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공산주의자? 절대주의자? 서기장? 계몽군주?
그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이홍위는 어디로 나아가려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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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그러하였듯, 아니 조선으로 넘어온 이후로 더더욱, 트로츠키와 이홍위가 만나 진행하는 기묘한 ‘경연’의 중요성은 컸다.
이제 무엇보다도 조정의 세 축을 이룰 세력들 중 두 곳이 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존속하게 될 터였다.
그들을 다스리는 군주로서라도 조선국왕은 트로츠키의 입에서 나오는 경연의 내용을 열심히 들어야만 했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는 변혁된다. 도덕과 종교, 형이상학 등은 스스로 자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삶과 연결되는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장.”
“무슨 일입니까, 전하?”
그래도 명목상 경연이기에, 이홍위와 트로츠키에 더하여 영의정으로서 영경연의 자리를 맡은 블레어, 그리고 예조판서인 신숙주, 저 멀리 국왕의 부르심이 있을지 기다리는 내관들이 조용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은 늦은 오후, 날짜는 이홍위가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고서 바로 다음날.
그런 사건이 있었던 만큼 트로츠키는 이홍위의 질문하는 입을 조용히 주시하며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집중하였다.
“궁금한 것이 있소. 허나 이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오랫동안 배우지 못 한 이나, 직접 나라를 경영하여 본 바가 없는 이는 답할 수 없는 바 같아 속이 답답하기만 하구려.”
은근한 암시에 옷깃 스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신숙주가 뒷걸음질 쳐 방을 나선다. 마치 원래부터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눈치가 부족한 블레어는 신숙주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소릴 죽이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창호 너머로 이런저런 수행인들의 그림자가 일렁이지만, 지금 당장 방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다.
“트로츠키 경, 아니 의장. 나는 항상 궁금하였소.”
경연이라는 익숙한 분위기에 취했는지 이홍위는 원산에 있을 때처럼 잠시 트로츠키를 ‘경’이라 불러왔다.
그 사소한 결례를 못 들은 채 넘어가며 트로츠키는 다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본다.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조선은 자본주의 사회요?”
“빈 말로도 그리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물론 그렇소.”
이홍위는 떠보듯 트로츠키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음흉한 계산 속에서 트로츠키의 속내를 파고들려는 수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한 지식에 틀린 바가 있을지 염려하는 학생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자본이 발전하고 있다 보기에도 어렵겠소?”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본과 인간이 노동을 자유로이 사고파는 노동시장 또한 없을 것이오.”
“예, 맞습니다.”
“산업예비군으로서의 거대한 노동계급도 없을 터이지.”
···그렇게 자신없이 툭툭, 마치 무언가의 밑밥을 던지듯 말을 꺼내는 이홍위에 트로츠키는 대부분 큰 이변 없이 수긍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조금씩 질문들이 구체화되면서 이홍위가 묻고자 하는 바의 밑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트로츠키 동지.”
의장에서 경으로, 경에서 동지로.
사방이 내밀한 가운데, 이홍위가 마침내 트로츠키를 동지라고 불렀다.
“예, 조선국왕 전하.”
“부디, 동지라고 불러 주시오.”
트로츠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자 공손함을 가장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이홍위에게는 오히려 답답한지 재촉하는 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알겠습니다, 이홍위 동지.”
“좋소! 아주 좋소!”
이홍위는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작게 손뼉을 치며 입을 연다.
“동지, 이곳은 봉건사회요. 공산주의를 열어젖힐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노동계급은 아직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공산주의는커녕 소련이라는 작은 고을이 조선에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조선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소.
그저 조금 더 좋은 총과 철을 지닌, 원래대로 일본에 멸망해 굴욕 속에서 사라질 그런 국가 말이오.”
이홍위는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마치 그가 소련에서 트로츠키와 함께 구경했던 매원의 판소리 속 러시아제국의 공산주의자 지하조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신중하고 조용한 척을 하면서.
마치 트로츠키와는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낸 ‘혁명동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땅이 부강하게 될 수 있겠소? 이미 노정된 역사의 진로를 따라 발전하며 나아갈 수 있겠소?
단지 순리대로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소. 암만 보아도 그는 답이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하오.
결국 이 땅에는 고육지책이 필요한 것이오. 이 몽매한 땅과 무지한 인민을 일으켜 세우려면.”
이제, 슬슬 트로츠키는 이홍위가 말하려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경제권력은 봉건지주들에게 있는 상황이며, 근로인민은 단결하여 정치적 움직임을 내보일 제반조건도 마련되어 있지 않소. 저들은 무지하고, 수동적이며, 사방에 흩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 하오.”
이홍위는 그리 말하고서는 주위를 둘러본다. 이름도 없이, 형체도 없이 어슴푸레한 그림자들이 문 너머로 그들 두 사람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 중요한 사람은 오직 자신과 트로츠키 두 사람뿐이라는 듯한 태도로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겠소? 오로지 믿을 것은 정치권력뿐이오. 그리고 지금 보좌에 앉은 것은 나요. 나의 부친은 문종대왕이고, 조부는 세종대왕이며, 증조부는 태종대왕이오.
이리 분명하게 이어지는 왕통(王統)은 전조(前朝)의 그 어떤 임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요. 나를 막을 자들은 모두 반역을 꾀하다 죽은 지 오래요.”
목소리에는 점점 감정이 실려가고 있으나, 그것이 굳은 결심인지 아집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오.
절대적인 권력.
그 권력을 바탕으로 나는 지금의 비참한 미개를 건너 문명으로 나아갈 것이오. 조선을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할 것이오.
알량하게 성현의 가르침을 드러내며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일신의 잇속을 챙기는 이들은 모조리 그 입을 다물릴 것이고 그들에게 역사의 순리가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오. 그들이 역사의 쓰레기로밖에 남을 수 없는 이유를 내 친히 알려줄 것이오.”
어제는 단지 당찬 포부를 담은 눈빛이라 여겼던 것이, 이제는 어떤 치기가 엿보이고 있다.
어제 느꼈던 그가 날아오를 것만 같았던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피부로 와 닿고 있다.
저 멀리 하늘을 보는 듯한 국왕의 눈빛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당장이라도 이 지상에서 떠나버릴 것만 같다.
지상세계를 버리고, 저 홀로 관념 속의 천국으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다. 저 옷에 수놓아진 금빛의 용들이 그에게 천상의 권능을 속삭이고 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자리에 앉은 것 같은 고양감.
저 홀로 지고한 자리에서 역사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저 무지한 대중을 이끌 수 있으리라는 우월감과 선민의식. 이홍위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란 그런 것들이다.
인민을 구원하는 왕이라, 기묘하다. 인민을 숭배하는 동시에 경멸하고, 가벼이 여기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트로츠키가 주입한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이, 이홍위의 눈앞에 보여준 소련의 강력한 힘이, 그리고 이 나라에 유일무이한 전제군주라는 그의 위치가 그 시야를 뒤틀어 놓고 그를 아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탕에 붉은 빛을 띤다 하더라도 곤룡포는 왕의 옷이다.
곤룡포가 붉은 이유는 이홍위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중국의 제후이며 이 나라의 국왕이기 때문이다.
“전하.”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소. 앞으로 조선 전체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대의 도움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오. 그대에게 줄 권한으로는···”
“전하.”
트로츠키가 두 번째로 그를 불러세우고 나서야, 이홍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트로츠키와 눈을 마주쳤다.
차마 꺼내서는 안 될 말이란 게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인 순간도 있다.
트로츠키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두려우십니까?”
“대체, 뭐가 말이오.”
“전하가 말씀하신, ‘역사의 쓰레기’가 되는 일 말입니다.”
“그게 무슨···!”
“전하,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은, 자신이 사랑하고 친하게 여기던 것들이 영원히 변해버리는 것이라고.
그러나 두렵다 하여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는 한 사람의 군주입니다. 전하는 역사의 심판자가 아닙니다. 노동계급의 대변자도 아닙니다.
전하는··· 그저 전하입니다. 받아들이십시오. 스스로가 공산주의에 매료되었음을, 그러나 스스로가 군주 된 몸이기에 변화가 두렵기도 함을.”
“···.”
이홍위는 잠시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하고 트로츠키를 크게 뜬 눈으로 바라만 본다.
트로츠키의 제자 또는 학생으로서, 이홍위는 공산주의에 열광한다.
그러나 보좌에 앉은 한 사람의 군왕으로서, 그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한다.
왕위 쟁탈전 속에서 죽을 뻔한 자이기에 더더욱 봉건적 왕정제를 혐오하나, 자신에게 남겨진 자산이라고는 스스로가 그 혐오스러운 왕정제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뿐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모순들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모순들이 해소되지 못 하고, 소년에게 혼란만을 가득 안기고 있었다.
그는 역사의 중심에 선 듯 보이나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날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타파하고 싶은 대상이 바로 그 자신이 들어앉은 옥좌라는 불운한 처지에 서 있다.
지금 당장 조선도 세계도 변화할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그 변화를 바라마지 않던 자신이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지 않을지 전전긍긍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 ‘공산주의자 왕’이었으리라.
세계와 역사를 그 어깨에 짊어지고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됨으로써 그 자신이 처한 모순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필경 많은 고민과 노력 끝에 나온 생각이리라.
하지만 틀렸다.
트로츠키는 문득 이홍위와의 대화에서 주의를 돌린다. 단 둘이 앉아있는 듯한 이 방에는 사실 트로츠키와 이홍위 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
창호지 너머로 일렁이는 인영(人影)들이 보인다.
“하, 하지만··· 그대는? 그대는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오?”
“아닙니다. 그런 건 소비에트 권력이 아닙니다.
제가 의견을 내서 통과되는 것이 반도 되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연극 내용 하나도 제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했죠. 노먼 베순 그 놈이 제 회심의 역작을 가위질해 놓은 것만 생각하면···.”
“그러나 작금의 조선에서는 나 말고 누가 또 이룰 수 있다는 말이오? 누가 역사의 진보를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대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소. 나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대변자가 될 수는 없소.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누가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길을 열어젖힐 수 있겠냐는 말이오?”
이홍위의 항변에 천천히, 트로츠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말한다.
“···여기로, 들어오시오.”
이홍위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말에 바깥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굳게 닫혀 있던 문들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