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70
“그게 무슨 말인가? 내 오랫동안 경기를 떠나 있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 하네만···.”
그렇게 민신이 운을 띄우자, 농민의 입에서 나온 진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웬 역적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 하여 나랏님께서 땅을 전부 뺏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살던 놈들은 모두 어딘가로 끌려간 뒤에 사라지고.
웬 하얀 가루 같은 것을 땅에 뿌리고 이것저것 재 보더니··· 또 갑자기 떠나가셨습니다요.”
“하얀··· 가루?”
“예, 하얀 가루 말입죠.”
그 내용을 다른 사신단에게 전달한 뒤에도 민신은 영문을 몰라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슬그머니 윤봉이 곁에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인다.
“이보시오. 잠시 따라와 보시오.”
“아니 무슨 일···”
민신은 윤봉에게 이끌려 어느 곳으로 향한다. 다른 곳과 다를 바도 없는 황량한 땅일 뿐인데···.
“흙의 맛을 한번 보시오.”
황당한 이야기에 무어라 대꾸하려다, 윤봉의 표정이 하도 참혹하여 잠시 눈을 감고 흙을 주워다 혀에 찍어 보았다.
···짜다.
맙소사.
민신이 눈을 뜨자 얼굴이 시퍼래진 윤봉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여, 여, 역적들의 토지를 뺏은 뒤에··· 살던 농민들은 모조리 어딘가로 쫓아내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렸나?
한성의 인구를 지탱하는 것은, 더하여 관료들의 녹을 충당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기의 평야다.
그런데 그런 곳에 ‘짭짤한’, ‘하얀 가루’를 뿌린 뒤 농민들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런··· 이런 일이 있을 수는···.”
민신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그가 알던 수양은 다소 교활한 자일지라도, 광인(狂人)은 아니다.
조선의 정국이 안정되었다는 풍문에 급히 에센에 대항할 군세를 모으러 온 사신들이다.
그것도 에센이 장악한 요동을 피해 모두가 마다하는 위험한 해로를 뚫고서.
민신 또한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역신의 앞에 머릴 조아릴 각오를 하고서 온 몸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건 예상조차···.
“여러분, 제가 무례를 범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이곳은 한양 가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신숙주다.
벌써 윤봉은 겁에 질려 기절하기 직전이다.
“아, 알, 알겠소.”
민신은 공포감을 삼키고 신숙주가 가리키는 길로 따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성문이 보였다.
성문을 지나서 보니 뭔가 어수선하고 아직도 어딘가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기분이 든다···.
기분이 아니네?
이제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거열된 채로 거리에 널려 있다.
이제는 창백해지다 못해 몸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 보이는 윤봉은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 했다.
곧 모화관에 이르니, 임금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전하?”
“···.”
이홍위는 순간 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대는···”
이홍위가 그를 마주본다.
역적들의···역적들의 땅에 소금을 뿌린 연소한 폭군이···!
“분명 금성을 지지했었지.”
민신은 경악감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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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신단이 오는 길에 있는 곳은 전부 작업 취소요! 일꾼들은 전부 어딘가로 박아 두고 즉시 작업을 중단하시오!”
“하, 하지만 경기 지역은 이제야 막 소개가 끝나고 실험용 질소비료만 조금 뿌려 뒀을 뿐인데···”
“명국에 수상해 보이면 전부 도루묵이니까, 그냥 멈추시오!!”
한양은 한동안 난리가 났었다.
명나라의 의심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련 측에서 온 모든 비 조선인 인사들은 원산으로 철수했다. 마침 급한 일이 있었다는 트로츠키 또한 차라리 안도한 듯 원산으로 향하는 말안장에 올랐다.
조선이 ‘오랑캐’와 손잡았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되기에.
순찰이나 돌던 병사들은 급히 모화관을 치우고,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소련식으로 지어진 이런저런 가설건물들은 철거되거나 천막으로 감춰두었다.
자신이 공들여 설계했던 집이 해체되었을 때 마이어는 울상을 지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농업기술위원회의 업무도 전부 정지.
그렇게 한양으로 올 대국의 손님맞이에 모두가 한창 바빴다.
일종의 가장무도회처럼, 조선에 소련인들이 오기 전의 모습을 연기하며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막 국난(國難)이 마무리된 직후, 안 그래도 소련과 협업해 커다란 공사들을 벌여 나라살림이 빠듯한 시국이니 조정의 신하들은 매양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게다가 내부 안정화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 지금껏 명국에 먼저 사신을 보내지 못한 상태에서 도리어 명국의 사신이 먼저 왔으니 그 결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걸 트집잡아 명국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광경이 명국의 사신들에게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민신과 윤봉을 지켜보며 그를 생각한 신숙주는, 일부러 도성에 사람을 보내 이런저런 명령을 내려놓았다.
처형한 지 꽤나 시일이 되어 거둬들여야 할 시신을 그대로 효수해 놓는다든가, 특히 안평이나 수양 같은 ‘거물’들의 경우에는 대강 묻어 놨던 것을 다시 파내어 큰 길마다 걸어다 놓는다든가.
당연히 신숙주는 일부러 그 시신들이 눈에 띄도록 사신단을 이끌었다.
또한 모화관에서의 접대가 끝나고 다시 몇 번씩 조선국왕을 만나거나 조선의 문무백관들이 사열하는 자리가 있을 때, 유난히 빈자리를 강조하는 자리배치를 주상 전하께 권유하였는데 그 또한 전하께서 흔쾌히 받아들이시니 반영되었다.
“저기··· 지금 정승의 자리에 사람이 없는 연유가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각 조의 판서들은 임명하셨으되, 삼의정의 자리는 비워 두시고 직접 6조와 논의하여 정무를 보십니다.”
이럴 때마다 윤봉과 민신의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을 보니, 그 만한 오락이 없더라.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이들에게 줄 ‘깜짝 선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전하께서 천사(天使, 중국의 사신) 분들께 전하라 하신 물건이옵니다. 대국에서 귀물을 내렸으나 이제 이를 받을 바 없으니 다시 되돌려드리는 것이 제후 된 도리라 전하께서 거듭 말씀하시니···”
그렇게 불안감에 떠는 윤봉과 민신이 상자를 열어보니.
짜잔, 수양대군(이었던 것)이 받은 곤룡포와 고명이다.
그때 윤봉이 지은 표정을, 신숙주는 평생토록 즐거움으로 여겨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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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은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이, 이런 말을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아오. 하지만 작금의 조선국왕은 미친 자요!”
“일국의 군왕에 대한 무례입니다! 말을 삼가십시오!”
“하, 하지만 그대도 보지 않았소? 역적들의 땅이라 하여 소금을 뿌리고, 그 백성들은 잡아가고, 도성에서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으며 심지어 정승과 온갖 관직들마저 폐하며 직접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정사를 본다고 하지 않소?
저런··· 막 나가는 자가 왕으로 앉아 조선에는 명을 위해 동원할 군졸이 없다 하니, 여기서 닥달했다가는 아예 옛 정도전처럼 명에 거역하든 몽고에 신속을 해버리든 할 것이 아니오? 더 볼 것도 없소. 나는 흉포한 자에게 내 목이 달아나지 않는 것에 만족할 테니 이제 그만 떠나겠소.”
“나는··· 두고 말이오?”
“그대는 명국에서 관작도 받아서 조선땅에 돌아온 몸이 아니오? 죽을 일은 없을 터요.”
방금 전에 자기가 죽을지 몰라서 도망간다는 양반이? 어떻게 바로 다음에 마음에도 없는 말이 이어지나?
하지만 민신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윤봉은 황급히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정말 형식적인 수준으로만 환송의 예를 받고는 조선을 떴다.
본래였다면 개인적인 뇌물도 두둑이 챙기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조선의 목줄을 쥐었을 그 윤봉이.
그렇게 민신만 덩그러니 조선에 남아버렸다. 에센의 견제를 위해 명과 조선을 연결한다는 허울뿐인 명분만 남은 채로.
심지어 그를 남겨 놓고 떠나는 바가 조선국왕의 요청 사항에도 있었다는 소식에, 민신은 하루종일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지난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알아보려 하더라도 삼엄한 감시가 이어졌고, 한양에 남아있는 사람들 중 자신과 가까웠던 이들 중에 살아 있는 이는 없었다. 공조판서 직을 맡은 이명민 말고는.
하지만 이명민 또한 무언가를 급히 중얼대며 바쁜 듯 뛰어다니다가, 그를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급히 도피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조선 땅인데도, 그것도 수십 년 동안 관직생활을 한 한양 땅인데도, 홀로 만리타향에 떨어진 듯한 불안과 고독을 느꼈다.
그럴수록 한 가지 예감만이 뼈에 사무치도록 맴돌았으니.
이제 죽었다.
···헌데 그리 생각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사약을 들라고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이들도 없고, 그에게 얌전히 오라를 받으라 외치는 의금부 관원들의 기척도 없다.
정말 가만히 넘어가나? 살아서 도성을 나갈 수 있나? 그런 희망이 새록새록 피어나던 그때.
“계십니까?”
신숙주가 찾아왔다.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신숙주는 안부인사만 몇 번 건네고 명국의 동향에 대한 고급정보들을 캐내는 것 외에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 그 다음날도··· 몇 번씩이나 그런 만남이 반복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신숙주에게서 그런 말이 나왔다.
“이것으로 대감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습니다.”
“대감이라니··· 역적 된 몸으로 어찌 그리 불리겠나?”
“역적이 아니십니다. 전하께서는 금성대군과 그에 협력한 일파들의 죄를 모두 사하시고 다만 외방에 두셨을 따름입니다.”
금시초문이다. 이 중요한 소식을 안 알려주고 지금껏 벌벌 떨게 하다니.
황당한 마음에 눈이 커졌으나, 그럴수록 태연한 신숙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질 않는다.
애초에 명 사신단을 겁주고, 자신을 압박해서 최대한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온 것이다.
그런 마음에 화를 내려 몸을 일으키려니, 신숙주가 선수를 쳐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한동안 바쁠 예정이라.”
“···뭐?”
저택 밖에서 갑자기 우렁찬 환호 소리와 뭔가 구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브! 나로드! 브! 나로드! 가자! 농촌으로! 가자! 인민에게!”
-“우우, 이단들은 꺼져라! 곧 의장 전하께서 돌아오신다! 소련 천세! 조선 천세! 근로인민 천천세!!”
“이, 이 무슨 소란인가?”
“뭐, 이쯤 되면 집회가 열리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저를 따라온 것일 텐데··· 대감께 누를 끼쳐 송구합니다.”
“그, 무슨···!”
그러나 민신이 붙잡을 틈도 없이 신숙주가 대문을 여니, 그 앞에 뭔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환호하는 청년들이 있다. 천것들도, 그냥 양민들도, 선비들도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저기! 신숙주 동지께서 나오셨다!!”
“와아아아아아!”
어떤 악의도 없이, 존경하는 듯한 말투로 보한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흥분한 군중들은 갑자기 신숙주를 들어올려 헹가래를 친다.
“신숙주! 신숙주! 마르크스! 마르크스!”
“허허허, 다들 고맙소! 이대로 운종가까지 갑시다!”
“와아아아아아아!”
민신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저, 저분이 토로츠키도노이시다!”
“호오, 과연 예사롭지 않으니 가히 신인(神人)의 풍모라 할 수 있겠도다!!”
“하하, 고맙소. 고맙소. 동무와 친구들을 많이들 데리고 오시오!”
트로츠키가 급히 돌아와 보니, 블레어가 말한 ‘골칫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잠잠해진 상태였다.
공무역이 제대로 활성화되고 전쟁 중에 손해보면서 삼포로 갈 자원들 매수하던 일도 끝났으나, 여전히 일본의 선박이 무역을 위해 원산으로 오는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그 중 수백 명이 잠시 머무는 것쯤이야 원산 자체에서 빠르게 수습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그뿐이었더라면 트로츠키가 원산으로 급히 달려올 필요도 아마 없었으리라.
현재 한양에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있다 하더라도 잠시 어딘가 지방에서 쉬다가 다시 상경하면 될 것이었다.
“전보가 아니라 실물로 뵙는 것은 처음인데 이리 불미스러운 일로 마주하게 되니, 참으로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도 이렇게 일이 빠른 양상으로 진행될지는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우선 주지의 자리에 오르신 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동지.”
하지만 렌뇨가 직접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면 얘기가 다르다.
두 달 전쯤 소련으로 전보가 왔을 때 모두가 렌뇨에게 소련 내방을 극구 만류하였다.
신숙주가 조직을 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통신사가 자금과 책자를 흩뿌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를 제대로 된 조직적 기반으로 닦아 강력하게 휘두르는 일은 렌뇨의 몫이니, 그가 원산을 향해 위험한 항해를 감행하다 사망한다면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조직은 구심점을 잃고 도루묵이 된다.
하지만, 렌뇨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우리의 세가 늘자, 히에이산의 승려들이 법난(法難)을 일으켜 사찰과 신당을 무너뜨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기, 르네. 원래 렌뇨 선사가 겪는 법난이 언제였지?”
“1465년입니다.”
확실히 일본과 중국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보의 해상도에 있어 수준이 다르다.
원 역사에서 수양대군이 찬탈에 성공한다는 사실 또한 명나라의 기록 한두 줄에 의존해 겨우 추론해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고작 불교 종파 한 곳에서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연도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래보다 10여년은 앞서 법난이 일어났다는 뜻이니 그만큼 세력의 확대도 빨랐다는 뜻이겠소?”
“그,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렌뇨는 트로츠키가 미래인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마다 연신 이마에 땀을 훔치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설마, 설마 하던 것이 정말 사실일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만.”
그러니 미래의 지식을 읊던 트로츠키가 대화를 멈춰 세웠을 때 그가 얼마나 긴장했을지는 뻔했다.
“원래··· 선사께서 혼간지의 주지가 되는 해가···.”
“그건···! 1457년입니다!”
에티앙블 또한 수첩을 뒤져보더니 다급하게 외친다.
원래보다 2~3년 빨리 아버지 존뇨가 사망했다? 뭐, 역사의 나비효과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제가 선물 드린 차를 마시시고 사례가 들리셨는지 조금 앓다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직접 치웠다.’
트로츠키의 의심 어린 눈빛에 렌뇨는 정면 돌파하겠다는 듯 태연히 답했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서자의 몸이지만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선대 법주(法主, 불교 종파의 지도자)의 적자들을 제낄 힘이 생기니, 일처리 또한 과감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밀한 부분까지 술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미 렌뇨는 소련을 운명공동체로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약점을 드러내 보이면서까지 그가 바라는 바 또한 분명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역시 그렇겠지.”
“세력이 크다고는 하나, 사방에 흩어진 ‘마극종(馬克宗)’의 역량을 집중시키기는 어려우니 안전을 위해 결국 본산지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정처없이 떠돌다 이곳 소련까지 오게 되었으나 언제까지 이곳에서 몸을 의탁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어떤 지원을 바라시오?”
“···이곳에 오는 장사치들 중 마극종의 신도들에게만 특혜를 베풀어주시지요. 더 높은 값으로 물건을 사주든, 더 많은 물자를 풀든 해주십시오.”
“그건 어째서요?”
“이곳 겐잔(원산)이 개항한 뒤, 일본 전역에서 대조선 무역이 활기를 띱니다. 교역 중심지가 북쪽으로 옮겨가다 보니 기존의 산인도(山陰道)나 산요도(山陽道)뿐 아니라 호쿠리쿠도(北陸道)까지 활황이 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마극종 신자들에게 특혜를 베푸신다면···.”
“교세가 순식간에 확산되겠소? 특히 상인 집단을 통한 자금력 확보가 클 것이고.”
“맞습니다.”
트로츠키는 속으로 손익을 재어 보았다. 안정화된 무역 구도나, 확대될 산업역량을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다.
“좋소. 받아들이겠소.”
“현명하신 선택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강 용건이 마무리되고, 렌뇨가 데려온 종파의 핵심인사들에게 원산 구경이나 시켜주면서 충성심 키워주는 잡일들만 남아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양으로 대강 트로츠키의 근황을 전보로 쳐서 보내니, 답이 이렇게 돌아온 것 아닌가?
-“상(上)께서 흥미로워하심. 렌뇨를 한양으로 데려올 것.”
“젠장.”
또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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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자네도 소식 들었나?”
“이미 들어서 알고 있네.”
경기북도에서부터 소문이 자자한 소식.
‘섭정 트로츠키가 일본의 승려와 함께 입성하러 온다!’
‘일본에서는 승려가 공산주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이 아닌 밤중 봉창 두드리는 듯한 소식에, 도성의 뭇 사람들은 놀라 이 주제를 가지고서만 며칠 밤낮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당연히 이 소란에 김종직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치 아니겠는가?
“개입해야 하네.”
“어떻게 말인가?”
대안을 내놓을 줄은 모르고 그리 멍청히들 서 있는 향민계의 ‘동지들’을 보니 김종직의 머리가 다시금 지끈지끈 아파온다.
후, 내가 대장이다. 내가, 내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다. 블레어 대감께서 돌아오시는 중이니 지금 이 계를 이끌 것은 오직 나뿐이다.
즉, 나 김종직이 한양 공산주의의 거두로서 우뚝 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 아닌가!
“격문을 써붙이게!
대의를 퍼뜨리기 위해 종교에 의지함은 곧 사도(邪道)이며 이단이라고!
조선 땅 곳곳에 흩뿌려진 미신들을 타파하기 위해 농민들을 계몽하는 우리의 노선이 곧 정통이 아니겠냐고 말일세!!”
그렇게 향민계원들이 급히 움직인 결과, 바로 다음날 한양 곳곳이 폭탄이 떨어진 듯 시끌벅적해졌다.
“우리가 정통이 아니라니? 트로츠키 동지께서는 일본의 봉건적인 현실에 맞는 정세판단을 내놓으신 것 아니겠는가!”
“그 말이 맞네! 일본에 왕래하기도 어려운 바인데 어찌 변통을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불도의 형태를 차용하더라도 바른 사상의 씨앗을 심었으니 올바른 바일세!!”
트로츠키와 신숙주의 가르침에 경도된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