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2
결국 세력이 커지고 강성해질수록 렌뇨는 도망 다닐 일만 많아진다.
다른 곳을 본산지로 삼을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렌뇨가 마극종으로 이름을 바꾸고 종파의 교리도 완전히 갈아치우자 기존 정토진종의 사찰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반(反)렌뇨파로 돌아섰다.
그렇게 원래 있던 지역적 기반들 상당수가 증발하거나 불안해지니 어쩔 수 없이 떠돌아야 했다.
십수 명의 사내들을 잃고, 다시금 두메산골로 몸을 숨기는 지금처럼.
사람의 흔적이 더 보이지 않을 만큼 먼지 일으키며 말달리고 나서야, 그 모든 추격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스승님, 다른 사찰을 하나 세워서 요새화하는 방안은 어떻습니까?”
겨우 도망쳐 산골 신도의 집에 몸을 의탁하자, 곧바로 준민이 바로 말을 꺼낸다. 준민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가쿠마를 향하고 있다.
그럴 만하다. 이 기약없는 도피생활이 얼마나 지치겠는가? 특히 몸도 약한 가쿠마에게 이런 여정은···.
그러나 렌뇨는 고개를 저었다.
“그 요새를 구축하고, 관리하고, 방어하는 데 쏟아야 할 역량이 아깝네.”
게다가 분명 그런 사찰을 지어봤자 주위에 포위당해 고사할 것이 뻔하다.
“스승님의 말씀이 옳으네. 소련과 조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먼 곳까지 힘을 직접 뻗칠 수는 없으니 우리가 발로 뛰는 수밖에 없어.”
렌뇨의 말에 가쿠마가 조용히 거든다. 자신의 처지를 걱정해준 준민을 마주보면서.
시내 바깥에서 합류해 은신처로 들어온 신로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스승님과 가쿠마의 말이 맞네. 사찰이든 뭐든 그저 저들의 공격을 집중시킬 약점일 뿐일세.
당장 사찰 하나만 지어놓으면 며칠 안 가 천태종이나 법화종 승려들이 때로 몰려와 반파시켜 놓고 가지 않나?”
심지어 탄압이 집중될까, 시내에 사찰 하나 짓지 못하는 상황.
신도 각자의 집에 비밀히 제단을 꾸리게 하거나, 다이묘와 각종 종파들의 모를 벽촌의 험지에다 몰래 박아 놓은 사찰···이라기 보다는 피신처만이 있을 뿐이다.
“본산지 삼겠답시고 으리으리한 성을 쌓아 놓으면 득달같이 달려들 걸세.”
신로가 말을 마치자 렌뇨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준민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우리의 세가 더 커졌을 때도 이처럼 소극적인 방향으로만 살아남을 순 없네.”
“맞습니다. 우리 또한 본거지를 마련한 뒤 착실히 지역적 기반을 쌓으면···”
“그럼에도 가쿠마와 신로의 의견이 타당하니, 지금 어딘가 눌러앉음은 아니 될 일일세. 내 보기에도 작금의 사세는 범인으로서는 돌파해낼 수가 없는 바이니···.”
“범인으로서 불가능하다 하신다면···?”
“지필묵을 가져오게. 급히 써야할 서신이 있네.
···이 피신처에도 전신기가 있었지.”
잠시 후 렌뇨가 휘갈긴 붓글씨는 점과 선으로 번역되어 하늘을 날고, 전파는 파도가 거센 현해탄을 건너···
“이번엔 또 어디서 온 전보이길래, 동지가 직접?”
“일본입니다. 신분 식별용 암호를 주고받으며 확인해 보니 렌뇨 선사였습니다.”
조선으로 닿았다.
그것도 에티앙블과 신숙주에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연락이 온 것이오? 지난 두세 달 동안 직접 전보를 친 적은 없었잖소?”
“현재는 아마 전신기가 설치된 열세 곳 피신처 중 한 곳에 급한대로 숨은 모양인데, 또 피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엔 정말 아슬아슬했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살해 시도가···”
“저희에게 렌뇨가 보고한 것만 따졌을 때 67건입니다.”
67번, 사람이 약 3년 동안 예순 번 넘게 죽을 뻔하고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나 있을까?
렌뇨는 아무튼 가능했다. 신숙주가 일본 내 조직책으로 렌뇨를 점 찍은 것이 옳았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였다.
“하지만, 이대로는 한계가 있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타개책이 없겠냐고 물어오는군요.”
렌뇨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신의 평안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그저 요새화한 사찰들에 틀어박혀 지금의 세력을 굳히는 데만 집중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마극종은 수금책으로만 활용하고 기존 정치세력들과의 갈등을 최대한 피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렌뇨의 야욕은 전일본에 뻗쳐 있는 듯했다.
모든 공격을 감내하면서도, 마치 위대한 정복자처럼 일본 66국 곳곳을 순회하며 광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지금까지는 꽤나 큰 판돈을 따낸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는.
“더 이상은 한계가 있을 겁니다. 매 순간 목숨을 걸어서 얻을 득보다는 위험부담 자체에서 오는 실이 더 커졌다는 판단이 섰으리라 봅니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여기서 해결책이 나올 리가 없다.
그저 외부로부터 간접적인 지원만을 받는 렌뇨가 일본을 뒤흔들 힘을 손에 넣었다면, 곧 죽어야 한다. 누가 그를 살려두려 하겠나?
기존 종파들의 지원을 받는 다이묘와 사무라이들? 아니면 구게(公家, 공가)들?
천하의 공적이 되었으니, 그는 일본 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죽어야 한다.
“방법이 있소.”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두 사람은 말을 꺼낸 뒤, 곧바로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에티앙블이 자연스레 전보로 칠 내용을 작성했고, 신숙주는 그를 받아들고는 곧바로 승인했다.
조선과 소련 제일의 일본 외교통이 된 그들이 승인하자 곧바로 전기신호가 다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를 받아든 렌뇨는 크게 당황하였다.
“···이, 그게, 중간에 왜곡되거나 빼먹은 글자는 없었습니까?”
“예, 쇤네가 수십 번 확인해보았고 수하들에게도 모두 점 하나, 선 하나까지 살펴보라 하였습니다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렌뇨의 손에 들린 종이장에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내용이 쓰여 있을 뿐이다.
-‘미래의 다이묘 후보를 찾아라.’
“미래의··· 다이묘라니?”
렌뇨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신기 담당 총책을 마주볼 뿐이었다.
“기반이 되어줄 영주를 구하라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접선지에서 전해줄 자료에 있을 겁니다.”
“기반이 되어줄 영주라···”
렌뇨는 전신기에서 튀어나온 말에 헛웃음을 뱉었다. 공산주의자 보고 봉건영주에게 일신을 의탁하라니.
“하지만 미래의 다이묘는 무슨 말입니까?”
“너무 짧게 짧게 약어로 전달되어 쇤네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곧 일본 전역에 큰 난리가 일어난다고 하덥니다.
그 와중에 고꾸라지는 이들도 있고, 새로이 일어서는 이들도 있을 터이니···”
그리고 전신기 총책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자신이 적어놓은 쪽지를 꺼내 보여준다.
-“거기서 살아남을 놈들 중 택일할 것. 입맛에 맞게.”
통신용 약어를 겨우 번역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를 보냈을 당사자는 단 한두 번밖에 만나본 적 없으리라.
하지만 알아볼 수밖에 없다. 신숙주의 말이다.
그 능글거리는 표정이 점과 선으로 이어지는 신호 속에서도 생생히 그려지는 듯하다.
이 문장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렌뇨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세 명의 수제자들, 그리고 그 외의 숱한 제자들과 수하들이 그를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과, 과연 하늘은 스승님께서 올바른 불도를 퍼뜨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소련이라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한 귀퉁이를 조선에 보내시어 존사님께서 전 일본을 교화하라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천명입니다!!”
사실 마극종의 교의는 점차 주술적인 것에서 벗어났다.
특히, 렌뇨의 곁을 따라 과학적 공산주의의 더 심오한 이치를 파고들어가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들은 ‘자본’이나 ‘가족, 국가, 사유재산의 기원’ 같은 성스러운 경전에 아무런 제약도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 늘어나는 수요를 경전의 공급이 뒤따르지 못할 뿐.
이는 굳이 마극종에 신비주의적인 내용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바다 건너편의 조선이 융성함은 상인들의 입소문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만백성이 솜옷을 걸치고 술을 빚어 마시더라도 미곡이 넘쳐나는 땅이 되었다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미래에서 온 이들이 렌뇨를 돕는다. 지금 사용하는 전신기처럼 명명백백한 증거들을 가지고서.
여기서 더 무엇을 꾸밀 필요가 있으리오? 어떤 종파도 극락과 구원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지만, 렌뇨는 기꺼이 그들에게 구경시켜 줄 수 있었다.
단지 바다만 건너면 그곳에 사회주의가 있었으므로.
괜히 마극종의 교세가 순식간에 거대해진 것이 아니었다. 만일 여타 종파들의 탄압만 없었더라도 이미 일본은 렌뇨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리라.
그렇기에 렌뇨는 조선과의 교신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칠 수 있던 것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의 승리는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저 곧게 뻗은 그 길을 따라가면 될 뿐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천하무산자합일!! 천하노동자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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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접선의 그날, 백제의 후손이라는 오우치 가문이 다스리는 이와미. 그리고 그곳의 항구마을 도모가우라(鞆ヶ浦).
본래 그저 많고 많은 항구 중 하나로 크게 눈 여겨 볼 곳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개항 이후 이곳은 대조선무역의 핵심으로서 이와미의 밥줄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면포가 이곳을 통해 산인도(山陰道) 곳곳으로 흩어졌고, 다시 일본 무역상들이 그러모은 수은, 후추 등의 사치품들이 도모가우라를 통해 강화도와 원산으로 향했다.
렌뇨는 멀리 항구를 내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기묘한 역설이라니.
각지의 영주들은, 특히 조선과 인접한 큐슈나 남쪽 지방의 영주들은 마극종 신도들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들을 영지에서 내몬다면 대조선무역에서 (상대적인) 손해를 보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기존 종파들의 눈치를 보느라 명시적으로는 마극종을 탄압하고 이단시했다.
그리하여 영주들도 렌뇨를 쫓고는 있지만··· 아마 정말 자신이 죽는다면 망연자실하리라.
이리 복잡한 상황이니, 조선으로 항행하는 신도들의 배가 이리 많더라도 정작 자신은 모습을 감추고 접선 장소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직접 나가시는 일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언제까지나 소련과의 접선에서 스승님께서 직접 나서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준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내자, 가쿠마가 그를 거든다. 신로는 큰 반응없이 가만히 있는다.
“너희들의 걱정은 잘 안다. 하지만 근심은 버리거라. 조선과 가까운 땅일수록 곧 우리의 영지나 다름없으며, 또한 나를 보호하여 줄 상인들이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고 내가 직접 나가지 않는다면 저들이 어떻게 우리를 신뢰한다는 말이냐? ‘렌뇨 선사’가 직접 접선하겠다 미리 이야기하였으니 그를 뒤집는다면 저들의 의심을 살 뿐 아니겠느냐?”
점차 자상한 말투로 말하던 렌뇨의 목소리가 무거워진다.
“우리는 항상 백척간두의 상황에 놓여 있으니, 조선의 신뢰를 잃는다면 우리 마극종은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질 것일세. 일신의 안녕이 중요하겠는가? 대의가 중요하겠는가?
혹여나 내가 잘못된다면 너희 셋이서 우애롭게 교단을 지켜나가거라.”
“크흑, 스승님!”
그의 말에 준민과 신로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려 운다. 저 순박하고 쌈박질 잘하는 준민은 그렇다 쳐도 신로는 영악하구나. 방금까지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면서···.
가쿠마는 허약한 체질로 강행군을 했더니 연신 기침을 뱉는다.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는지 “스승님 부디···” 같은 말을 꺼내지만 렌뇨는 빙긋이 웃어주고 곧바로 숙소 바깥으로 나선다.
가발도, 적당히 졸부 상인처럼 차려 입은 복장도 주위에 녹아 들어 눈에 띄지 않는다. 좋다.
인근의 호위들도 그저 조선행 한탕으로 갑작스레 떼돈을 번 이 흥청대는 갑부를 지키는 계약 칼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을 여기에 데려올 수 없다. 너무 위험하다.
···더 정확히는 제자들을 이 중대한 자리에 끼워줄 수는 없다.
지금껏 렌뇨는 단순 호위 이상의 인사들을 대동하고 조선과 접촉한 적이 없었다.
혹여나 조선에서 보내준 귀중한 자료들이 유출된다면?
더 중요하게는, 조선에서 수제자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한다면?
그들을 통해 마극종 내 세력구도와 자세한 사세를 간파해내려고 한다면?
···훗날, 제자들을 위시해 쓸모 없어진 렌뇨를 대체하려 쿠데타를 획책한다면?
렌뇨는 세상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아끼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중책은 그 사람이 아니면 맡을 이가 없었다.
바로 렌뇨 자신.
렌뇨는 제자들을 그리 믿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슬슬 칼을 차고 주위를 경계하는 사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상인들이 고용한 무사들도 있겠지만···
“저놈 잡아! 짐 속에서 불경한 책자들이 나왔다!!”
“크악! 네놈들! 네놈들이 나를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으냐? 내가 원산에 투자한 자산이 얼마인데? 토로츠키도노께서 나를 직접 독대하신다! 나는 거물이란 말이야!!”
“닥쳐라! 토로츠키 놈이든 뭐든 부처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다!”
···법화종 쪽에서 고용한 이들이로군.
“선사님, 조심하십시오. 곧 검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호위 중 한 사람이 슬며시 귀엣말을 해오자, 렌뇨도 몸가짐을 조심히 한다. 마침 슬슬 못 보던 얼굴이 항구에 등장하니 수상쩍어 하는 무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렌뇨의 호위들이든,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사들이든 슬며시 허리춤의 칼자루에 한 손을 올려놓고 걸음걸이를 가볍게 한다.
긴장감이 쌓여가다가··· 한 남자가 렌뇨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 이노시다 씨! 여깁니다!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하하하하!”
“아닙니다. 그간 강녕히 잘 계셨는지요?”
“원산이야 항상 붐비고 뻑적지근하지 않습니까? 이노시다 씨야말로 저희 상품이 궁금하시겠군요! 자, 자, 저희 일등 투자자이신 만큼 곧바로 승선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곧 가마가 다가오며 렌뇨를 태우고 쌩하고 달리니 호위들도 빠르게 달려 쫓아온다. 무사들 또한 경계를 풀고 다시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곧 가마가 덜컹거리니, 승선하는 중이다. 문짝이 열리자 선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보인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도모가우라에 정박한 선박들 중 7할이 마극종 소속입니다. 그래 봤자 그 중에 주요한 기부자는 많지 않지만, 아무튼 인근 도회지 장악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사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방금까지 그에게 굽실거리던 상인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말한다.
“아무튼, 이런 소식이 뭐가 중하겠습니까? 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크흠,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도모가우라의 상인회장에게 공손히 합장을 올린 뒤, 렌뇨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긴다.
선내의 통로는 아주 어두컴컴하고 젖은 나무의 냄새로 퀴퀴하다가, 기름 램프가 타오르는 빛과 냄새에 일순간 풍경이 변화한다.
그리고 램프의 불빛이 새나오는 선실로 들어가보니··· 한 서역인이 서있다.
“그동안 통신으로만 만나뵈었습니다만, 안녕하십니까? 르네 에티앙블입니다. 멀고 힘든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야말로 이리 직접 일본땅을 찾아주시니 영광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존귀한 분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일단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에티앙블이 건네는 책을 받으니 꽤나 묵직하다.
“이게, 뭡니까?”
“향후 150년간 이어질 일본의 역사를 정리한 서적입니다. 일종의··· 예언서죠.”
“···맙소사.”
렌뇨가 얼굴의 경악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에티앙블은 쓰게 웃는다.
“어찌하여 제가, 직접 이곳에 와서 그를 전달하냐 물으신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쪽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믿지 못해서.
렌뇨는 잠시 두 사람이 선 선실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 배에 있는 사람들 중 자신들이 싣게 된 서적의 정체를 알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 서적을 렌뇨 대신 다른 다이묘들에게 팔아 넘긴다면 얼마나 이득이 될까?
“크흠,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수십 년 뒤 정토진종이 혼란기를 틈 타 카가(加賀)를 점령한 뒤 나라를 세웁니다. 당신 생전의 일입니다.”
“뭐, 뭐라···”
“원래, 당신이 조선과 소련의 도움 없이도 세력을 크게 일구리라 기고만장할까 싶어 전하지 않았던 소식이지만. 이미 우리가 한 배를 탔으니 말씀드리면 좋겠다 생각하여 전합니다.
그 내용도 방금 드린 서적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허, 이거 제 몸값을 지나치게 낮게 불렀나 싶군요. 이 소승이 원래 그리 오래 살 것이었단 말입니까? 게다가 다이묘 하나를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하지만 일본 전역을 뒤흔들 만한 힘은 없었을 겁니다.”
“···이미 끝난 문제이니 더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서적은 잘 받겠습니다.”
“잠깐, 한 가지만 더.”
에티앙블의 목소리에 뒤돌아가려던 렌뇨가 다시 자세를 고친다.
“10년 뒤 일본에는 피바람이 붑니다. 살아남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렌뇨는 선박을 나섰다. 이번에는 관처럼 사방이 차폐된 가마에 타고, 화물들과 섞여서.
그가 제자들과 신도들이 머무르는 숙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승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받은 서적이란 것은···”
“일단은 영어로 작성되어 있어, 나 말고는 해독이 어려울 듯하네. 이와미를 빠져나가고 나서 대계를 생각해보도록 하지.”
거짓말이다. 대계는 이미 가마를 타고 이 ‘예언서’를 이 잡듯 훑어보는 사이에 대강 마련해 두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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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추(越中).
이와미로부터 거의 부산과 평양만큼 떨어져 있는 머나먼 땅이다.
아무래도 조선과 바로 지근거리인 산인도나 규슈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곳 역시 동해에 접해있기에 근래 조선과의 무역이 활발해졌다.
즉 마극종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 간의 조직망이 퍼져 있었다.
아마 이 일본 땅에서 미곡이 어디서 나와서 누구 입으로 흘러가는지, 산호와 유리구슬은 어디서 들어와서 어느 집안 안주인의 팔목을 장식할지 같은 일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상인들이리라.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점차적으로 근래 수레와 상품이 어디를 향해 집결되고 있는지 확인해보니, 나오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쇼코지(正光寺).
“놀라운 담력이군요. 바로 호조즈성(放生津城)의 근방이 아닙니까? 바로 곁에 아버지의 원수가 있거늘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항상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다는 그대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소만. 세간이 그대를 불적(佛敵)이라 부르고 요승(妖僧)이라 하니, 그대의 말대로 이 명재경각의 상황에 놓여있는 나로서는 그대를 가까이함이 좋지 않을 듯하오.”
진보 나가노부(神保長誠).
진보 쿠니무네의 아들이자, 성을 잃은 성주. 슈고(守護, 쇼군이 파견한 각국의 지방관)가 버린 슈고다이(守護代, 슈고의 대리인이자 보좌).
막부의 정부에서 가장 위대한 관직을 도맡던 저 하타게야마 가문의 가신 집안인 진보 씨지만,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서 잘못된 편을 들어 가독(家督, 가문의 지도자)인 쿠니무네는 살해당하고 그 아들 또한 이렇게 쫓기고 있다.
아마 이 분쟁을 배후 지원하던 야마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의 갈등이 격화되어 결국 ‘오닌의 난’이 벌어지고, 막부는 붕괴하리라.
그 뒤로는 에티앙블이 예고하던 피바람이다.
“요승이라··· 저희 마극종의 가르침에 대해 아십니까?”
“알지 못하오. 법화경을 가르친다고 들었소만···”
“법화경은 겉껍질일 뿐입니다. 부처도 그렇지요.”
“뭐, 뭐라···?”
렌뇨의 말에 나가노부는 벌떡 일어서 그를 노려본다.
“괜히 불적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군. 그래도 눈빛에 현묘한 기색이 있어 요승이란 말이 헛소문인가 싶었는데! 요승이 아니라 악승(惡僧)이오, 뭇 불자들이 이야기하듯 중생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마귀가 아닌가!!”
“그 옛날 당국(唐國)의 임제의현 선사께서도 살불살조(殺佛殺祖)라 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진리를 위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였을 뿐이옵니다.”
“그 말에 따라 나오는 진리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삶, 그리고 노동.”
격분하는 나가노부의 앞에 태연히 책자를 내밀며 렌뇨는 그리 답한다.
“결국 우리가 마시고 먹고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노동에서 나온 것이니, 제 자신이 일한 바 이상을 취함은 곧 착취입니다. 소승도, 가독께서도 모두 착취자에 불과하오니···.
허나 그 깊은 도리는 나중에 이 책자를 읽어보시면 알 일이고.”
‘공산당 선언-번역 및 해설 신숙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르네 에티앙블’
“소승이 이야기하려는 바는 가독께 마땅한 지위를 돌려드리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허튼 소리. 내가 네놈을 여기서 벤다면?”
“아마 인근의 상인들에게 12시진 이내로 연락이 가지 않으면, 저들은 이 위치를 파악하여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에게 고할 것입니다. 빠져나가시려는 길마다 불타는 수레로 막힐 것이고, 결국 가독께서는 숲과 산을 헤매다 원수의 칼에 맞아 죽겠지요.”
“···.”
이 어린 가독은 총명하기는 하나, 성정은 불과 같구나. 찔러오기는 맹렬하나 되돌아갈 길을 생각하지 않으니 설복시키기에는 딱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