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1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아, 그 ‘만맹’ 말씀이십니까? 곧 당사자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집단상소를 올릴 것이라고도 이야기하던데···.”
“그렇다면 곧 여기서도 만나보겠군요.”
블레어는 조보 한 장을 집어 호주머니 대신 소맷자락 속에 넣었다. 이제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생활하는 데 완연히 익숙해진 ‘조지월 대감’이었다.
“수고하십시오.”
“아닙니다. 대감께서도 살펴가십시오.”
이제 하급관원에게도 존대하는 전무후무한 영의정 대감께 완전히 적응한 관원들은 블레어의 인사를 받은 뒤 다시 인쇄 작업에 열중한다.
이전이었더라면 저 수백수천 장을 모조리 손으로 베껴 썼겠지만 지금은 그나마 원시적인 인쇄기라도 쓰고 있으니···.
블레어는 물끄러미 그 모습들을 바라보다, 열린 문 너머 섬돌을 디디며 전각을 나섰다.
승정원 건물을 나서자 이제 1456년, 천순(天順) 3년은 겨울이었다. 시린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으나 영의정 체통상 프랑스에서 건너올 때 입었던 오랑캐 같은 겨울옷을 입고 다니기에는 면이 서지 않았다.
“만주족··· 민족주의자라···.”
블레어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주인들이 고토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근대화에 나선다. 지금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난민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규합해 나아가고 있다.
저들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게토에 모여 옛 팔레스티나 땅의 추억을 곱씹는 동아시아의 유대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됐다. 이 정도 사건의 전망을 살펴보는 일은 자신의 역량 밖임을 블레어는 인식하고 있었다.
“반도의 옆구리에 자리잡은 이질적인 민족 공동체라···”
아마 소련이 조선에 밀고 들어왔을 때 조선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가 접붙여지는 듯한 기묘함이라.
블레어는 잠시 그런 생뚱맞는 생각을 하며 경복궁을 거닐었다.
앙상하던 나무에 얼음꽃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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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윤허하여 주십시오!”
“윤허하여 주십시오!!”
그 팔에 저마다 하나씩 완장을 찬 야인들. 붉은 천 위에 만주의 만(滿) 자 하나를 적어 놓고 다들 무릎을 꿇은 채 광화문을 향하여 절들을 올리고 있었다.
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러, 한양의 주민들은 육조거리에 모여 야인들의 생김새와 그 기묘한 복장을 보며 서로들 쑥덕대며 토론하고 있었다.
이런 시위가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고,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논의가 이어지니 만주인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조정에서 입에 올리지 않은 당상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초유의 사태를 불러온 장본인들은 변함없이 고개를 숙이며 주상 전하를 부르짖을 뿐이니.
“옛 주(周)는 중앙과 그 족속과 풍습이 다른 나라에는 봉건의 법을 시행하여, 그로써 천하의 올바른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따스한 광명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조치하였으니 비로소 덕으로서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서로의 예부터 내려온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를 다스리면 반드시 불화가 생기고 백성이 고통을 받습니다. 하오니 전하께옵서 저희 수용시설 인근을 부디 속현(屬縣)으로 지정하시고 만인(滿人) 중에 호장(戶長)을 세우시어 나라를 평안케 하여 주소서!”
“하여 주소서!!”
“또한 옛 레닌(禮仁)께서도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 선언’을 공포하여 만민족들의 자주와 자결권을 선포하시었습니다. 부디 저희의 뜻을 가여이 여기시어 자치권을 허하소서!“
유자(儒者)들은 주나라와 레닌이 한 사람의 입에서 인용되는 이 신기한 순간을 보기 위해서,
머나먼 변방 야인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동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이내 주상 전하께서 몸소 광화문을 나서서 그들 앞에 서신다. 그의 곁에는 여섯 정승과 한 명의 재상이 죽 늘어서 있으니 그 위엄이 더하였다.
야인 무리의 고개가 한껏 숙여지고 “전하!” 하고 부르는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스스로의 족속들을 보살피고자 하는 너희의 뜻이 참으로 갸륵하도다. 북변에 살던 너희가 아조에 신속한 지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가거늘 너희가 오늘날 쫓기어 와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두 과인이 그대들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임이라.”
“아니옵니다, 전하.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이아구와 함께 이런저런 야인들이 외쳐오자, 이홍위는 곧 근엄한 태도로 좌중을 둘러본다. 어느덧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가며 늠름해진 얼굴선이 눈에 띄었다.
“너희 또한 아조의 백성이니 어찌 내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로 이고납합을 호장으로 하며 북청의 너희 거처하는 바를 따로 떼어내 ‘만주현(滿洲縣)’이라 이름하겠노니 너희는 다시 돌아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근대화에 힘쓰며 아조의 덕화가 너희 족속들에게 미치도록 힘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와아아아아!! 조선 천천세! 주상 전하 천천세!!”
조정의 논의가 모두 끝났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트로츠키는 신숙주와 성삼문과 눈이 마주쳐 잠시 미묘한 미소를 짓다가 곧 군중 속으로 흩어진다.
이곳에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곧 소련에서는 조선을 따라 ‘북청 만주족 자치구’에 대한 논의가 오갈 것이며, 그에 따라 만주인들이 직접 지정한 지도자가 자치구의 적법한 통치자로서 우뚝 설 것이다.
양국의 논의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은 조선 내부에서 나름의 판단을 거쳐 결론을 내놓은 것이고, 그에 맞춰 소련은 따르는 형세로.
두 나라가 점차 발걸음을 맞춰가면서 함께 가는 모습을 대외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만들어가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침략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 소련인들에게든, 내정간섭을 바라지 않는 대신파와 조선의 보수주의자들에게든.
자치구에도 이전처럼 에드워즈가 상주하기는 하겠다만, 이제 자문과 감독 수준의 역할에 머무를 것이며 실질적인 행정 권한은 만주인들에게 이관될 것이다.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일 수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된 적법한 권한을 만주인이 쥐게 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다.
이제 저들 민족주의자들은 독자적인 정치체를 세웠다는 명분으로 더욱 세를 불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치’구로서, 자치적인 행정력 행사를 위해 주민들에게 징세를 시작할 테니···
아마 자치구 내에서 본격적인 경제활동들이 등장할 것이다. 만주인들을 곧 인근의 농업공장에서 심심찮게 만나보게 되리라.
결국, 조선과 소련 모두 돈만 잡아먹는 하마였던 수용시설을 떼어내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판이다.
아무리 수용소에 들어가는 자원이 푼돈이라 하더라도, 조선-소련은 지금 대규모 토목공사를 쉼없이 벌이고 있으니 쌀 한 톨, 면화 한 송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영향이 크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함흥과 장진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 사업, 그리고 장진강 댐 건설에 보탬이 되어 주리라.
이제 많은 짐들을 덜어내고 조선과 소련, 만주족이 함께 묶여 거대한 변화를 이룰 때다. 단지 트로츠키에게 어수선해진 소련 내 정세를 다잡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뭐, 그 방법은 당장 고민할 바는 아니다.
정신을 문득 차려보니 눈앞에 성삼문과 하위지가 서있었다. 방금의 포고가 마무리되었을 때 그를 따라온 것이 분명하다.
“···이판과 호판은 무슨 일로 이 노구(老軀)를 구태여 보러 오셨소?”
“백옥헌(白玉軒, 이개의 호)은 지금 주상 전하와 형법 체계의 개편을 위해 논의를 하느라 오지 못했습니다.
취금헌(박팽년의 호)은 아마 어딘가에서 야인들의 상소문에 뿔난 유림들을 달래느라 고생하고 있을 터입니다. 오랑캐에게, 그것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치라니 말이 되냐고 성을 내는 작자들이 있으니 말이죠.”
성삼문이 대답을 내놓았으나, 동문서답이다. 트로츠키는 왜 두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를 물었지 왜 나머지 둘이 여기에 없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트로츠키가 의아한 표정을 띠자, 성삼문은 길게 읍을 올린다.
“그리고 저희는 트로츠키 동지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갑작스레 무슨 감사요? 어서 고개를 드시오.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럽구려.”
“선생께서 저희에게 보여주신 양보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에 소련에서 내놓은 자치구 법안에서, 만주족 자치구는 그 법적 지위가 애매했다.
소련의 영토인가? 그 사실은 명시되지 않았다. 그저 해당 지역은 만주족들의 자치지역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감독관으로서 에드워즈를 ‘파견’한다는 내용만이 있을 뿐.
소련의 가맹국인 독립국인가? 그 또한 아니었다. ‘자치구’라는 호명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국가가 아닌 지역임을 명시할 뿐이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일원이나, 동시에 ‘공화국’이라 불릴 국가는 아닌, 그러면서도 조선과 원산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정치체.
이렇게 법리적인 해석을 애매모호하게 뒤틀어 놓으니, 소련이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소비에트’로 구성된, ‘공화국’들의 연맹이라는 헌정의 기초까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는 그저 ‘만주현’이라는 속현을 추가했을 뿐.
북청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국토를 이족에게 넘기냐며 따지는 보수주의자들을 진압할 명분을 얻었다.
이에 대한 성삼문의 감사 표현이었던 것이다.
“별것도 아니오. 어차피 내가 아니라 이후의 법학자들이 고생할 일이지. 동지들은 조선을 위해 동지들만의 역할을 해 나가면 될 것이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덕담 같은 말을 던지고 트로츠키가 떠나자 성삼문은 하위지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들었다.
“···이제 당분간은 한시름 덜었군 그래.”
“그러게 말일세? 이거이거 자네와 백옥헌이가 밤새 고민하던 문제가 쉬이 해결되니 안심이 아닌가?”
“그걸 이야기한 것이 아니네. 어제 회합에서 대체 뭘 들은 건가?”
“···어제 회합이 있었던가?”
“이 친구야!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하지 않았나?”
“에잇! 본래 선비가 이야기를 나눔에 있어 청주는 빼놓을 수는 없네. 그러니까 자네가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서생인 것 아닌가!”
“자네처럼 과하게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사람인 것보다야 낫겠군?”
그렇게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다, 성삼문은 손을 내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농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것 같군.”
“뭘 말인가? 어제 함께 스탈린이라는 선비의 저작을 읽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후, 그나마 조금 낫구만. 그래···.”
“지난번에 스탈린과 함께 레닌이라는 의사(義士)를 공부하던 내용 기억 나나?”
“기억하고 말고. 나는 자네 같은 둔재가 아니니 말일세.”
“요사이 둔재는 장원 급제도 하나 보지? 실없는 소리는 관두고 함께 궁리해 봐야 할 것이 있네.”
“우리 당파에 관한 것이로군.”
“맞네, 우리 당파에 관한 것일세.”
성삼문은 사랑채의 문을 닫은 뒤, 하위지의 맞은편에 앉는다. 어째 이상하게도 먼저 들어온 하위지가 주인장 자리에 떡 하니 앉아있지만 원체 흥이 많은 친구니 그러려니 한다.
“아무튼 간에 우리도 새로운 논거가 필요함은 여러 번 이야기하던 차이지.”
“허나, 아직까지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를 않았으니 우리 중에 공맹(孔孟)이나 마르크스 같은 천재는 없으려나 하고 한탄만 하지 않았나?”
성삼문은 잠시 다시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더니 책장에 있던 책 중 하나를 뽑아 펼쳐 든다.
“레닌 선생은 말했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이들의 민족주의는 진보를 만들어내며, 마땅히 지지받아야만 한다고.”
하위지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성삼문은 그의 눈을 쳐다보고 다시 말했다.
“소련인들의 것과 겹치지 않으면서, 인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명분, 그러면서도 진보로 이어질 수 있는 대의명분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그것이 여기 있네.”
성삼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단어를 하위지는 찬찬히 들여다본다.
서구의 언어를, 일본이 번역하여, 시간을 넘어 조선으로 건너온 하나의 낱말.
‘민족(民族)’.
작가의말
마지막 두 줄은, 저의 설정 설명이면서 안타까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담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종교, 사회, 경제, 철도, 댐(dam), 그리고 민족까지. 모두 조선에는 없던 개념과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소련인들은 어떻게 조선어를 쓰면서 해당 개념들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특히 초기의 김동인이 ‘조선어로는 단어가 없어서’ 소설을 쓰기 너무 힘들었다, 일본어로 구상하고 머릿속에서 조선어로 번역해서 썼다, 라고 할 정도로 한 언어를 탈바꿈시키는 일은 격변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소련인들도 바로 김동인과 비슷한 해결책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이 일본어 텍스트를 가지고 있고, 이들 중 일본학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번역어를 통해, ‘샤카이(社會)’를 ‘사회(社會)’라고 읽고 ‘민조쿠(民族)’를 ‘민족(民族)’로 읽으면서 아마 소련인들은 조선어를 근대적 언어로서 사용할 수 있던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이렇게 조선어가 근대어로 개조되는 과정은, 한국에서 근대라는 시대가 일본제국의 식민지화를 통해 경험되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일본어는 조선어보다 앞서 근대어로 개조되어, 지식인들은 그 일본어를 경유하여 근대적 문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가 아직까지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숨쉬며 우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언어에는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때는 1457년, 고쇼(康正) 2년의 봄.
아직 양력으로는 경칩(驚蟄) 초, 겨울철 얼음이 얼었던 계곡마다 이제 막힘없이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아직 조선에서는 추위에 움츠리고 있을 벚꽃이 일본에서는 만발하고 있다.
수백 송이의 쌀알 같은 벚꽃들이 오밀조밀 촘촘히 자라난 형상이 성대하여 뭇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개화는 곧 낙화를 예비하나니.
지금 강산을 하얗게 지워버린 벚꽃의 화려함 같은 무로마치의 성세, 그리고 쇼군 요시마사의 사치스러움 또한 그 밑바닥에서부터 몰락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몰락의 이름은 이러하였다.
마르크스.
부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천황의 옥좌에 오물을 끼얹는 귀신 같은 무리들.
조선이라는 강대한 외세에 기대어 바다 동쪽 천하의 평안을 깨뜨리는 역적들.
도덕과 법도를 무너뜨려 더럽고 악덕한 자들이 천하의 주인 되게 하리라 작당하는 모리배들.
하나의 유령이 일본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일본의 모든 세력들, 즉 조정과 다이묘,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 법화종의 과격파와 천태종의 승병들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맙소사.
그리고 그 귀신 같은 무리의 수장, 역적 중의 역적, 악덕한 모리배의 으뜸··· 렌뇨는 시름에 잠겨 있었다.
분명 여느 때보다 마극종은 강력하다.
어느 도시에 가든 상인들과 그 아래 날품팔이들은 마르크스의 이름을 외우며, 새롭게 도래할 공산주의를 노래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이제 역사가 움직이리라. 푸로레타리아 아라 렌다 페아이니히토 오이하(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천하무산자합일(天下無産者合一)···.”
“마르크스, 마르크스, 천하노동자합일(天下勞動者合一)···.”
그리고 불교 종파라는 겉껍질에 걸맞게 주문을 외우게 하고,
“여러분! 항상 저희에게 깨달음의 편지를 보내오시던 렌뇨 존사님께서 이리 저희 상인회에 참석하여 주셨습니다!”
“천하무산자합일, 여러분께 깊고 맑은 불심··· 혁명정신으로 인사드립니다.”
“천하노동자합일, 존사님을 마음 깊이 환영합니다.”
곳곳에 교리(?)를 해설하는 편지를 뿌리고, 간간이 각지의 조직에 얼굴 비추면서 단결과 충성을 유도한다.
게다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조선과의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꾸준히 상인집단의 후원을 받은 도시 지역의 신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들을 제대로 조직하여 마극종의 역량으로 묶어내는 것은 렌뇨의 몫이지만.
아무튼 마극종 자체는 꾸준히 성장세를 걷고 있고 렌뇨도 급팽창하는 세력의 내부관리와 외연확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극종이 아무리 강해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마주한 문제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쿠콰쾅!
“너희! 너희는 불적(佛敵, 불교의 적)이고 이단이다! 당장 이 지역에서 나가!!”
“네, 네놈들이 우리 상인회의 회합에 무슨 짓이냐! 이러고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갑작스레 허리에 칼을 찬 이들이 경비들을 베고 저택에 난입한다. 피투성이가 된 비열한 얼굴들이 머리 깎은 중들의 위치를 쫓는다.
“천태종의 이름으로! 마극종을 퍼뜨리는 땡중 놈들은 모두 죽여버리고 경서도 모두 불태워버려라!”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이 지역 영주님의 명도 받았다! 네놈들도 모가지가 아깝다면 함부로 나서지 말란 말이야!”
“조···존사님, 이럴 때를 대비한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여기로 나가시면···.”
“···감사합니다.”
히에이산의 승려들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본산지도 없이 떠돌게 된 지가 벌써 2년은 넘었다.
그리고 여전히 마극종에는 본산지가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을 수십 번이나 겪으면서 마극종은 점차 음지에 숨어 세를 유지하는 비밀결사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렌뇨의 통제 바깥에선 밀교스러운 전통과 혼입된 지파도 있다고 한다.
처음 그들을 몰아낸 히에이산을 비롯한 천태종.
마극종과 함께 급격히 세를 불렸으나 조선이라는 든든한 뒷배에 밀려난 법화종.
그리고 렌뇨가 한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주(宗主)를 맡았으나 결국 마극종으로의 전환에는 반대하여 각지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정토진종.
이 외에도 수많은 불교 종파들이 마극종을 불적으로 선언하면서 그야말로 전일본을 뒤덮는 거대한 탄압이 이뤄지고 있었다.
분명, 신도들 개개인의 안위는 위험하지 않다.
신도들 중 많은 이들이 지역의 유력 상인 본인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니 각지의 영주와 종파들로서는 굳이 알 잘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을 것이며 괜한 화근을 불러오고 싶지도 않으리라.
물론 그럼에도 불구 탄압이 없는 것은 아니라, 렌뇨는 신도들에게 다른 불교 종파도 함께 믿으라고 권유했다. 후원금도 해당 종파에만 지불하라고 훈시를 내렸고.
이 명령을 들은 각지의 신도들이 다시 렌뇨를 우러러보며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참된 존사님이라 치켜세웠으니. 탄압도 피하고 교세도 늘리는 일석이조의 방책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활동자금의 대부분은 조선과 교역하는 상인들의 기부금에서 나오니 말이다.
···문제는 일반 신도를 건드릴 수 없게 된 여타 종파들의 선택에 있었다.
“젠장! 렌뇨 그 한 놈만 죽이면 마극종은 끝장이란 말이다! 그 불적 놈은 어디에 있나? 우리 천태종에서 건 현상금을 받아갈 놈들은 말해라!!”
“존사님··· 서둘러 나가십시오. 목숨을 건지셔야 합니다! 여긴 저희가 막아볼··· 크악!”
“저깄다! 쫓아라!!”
“헉, 흐억, 헉···.”
“스승님께서 살아계신다! 당장 이곳 바깥으로 뫼셔라! 호위조 나머지는 칼을 뽑아!”
“불적 무리가 저깄다! 막는 놈들은 베어라!”
“신로는? 바깥 상황은 어떠한가?”
총명하고 손익판단이 빨라 종단의 자금 관리를 맡고 있기도 한 신로(親勞). 비밀통로를 빠져나와 접선지로 향한 렌뇨가 가장 먼저 사세를 물어본 제자도 그였다.
그러나 렌뇨의 물음에는 가쿠마(覚馬)가 대신 답한다.
“신로는 지금 바깥에 있습니다. 그 전에 전해주기를 시내에는 아직 적병들이 적다고 했습니다! 지금 큰길로 빠져나가면 됩니다!”
“아닙니다!! 지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준민(順民)이 신로의 의견에 손사레를 치며 반박한다.
“무슨 이유로 그리 말하느냐?”
“신로가 남쪽 큰길을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적병들이 없었는데, 후에 따로 보낸 척후들을 통해 보니 머리 깎은 사내들이 칼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분명히 함정이니 서쪽 좁은 길목으로 빠져나가 인근 은신처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준민의 말대로 하겠다. 지금 말들을 준비시키거라! 신로는 상황을 알면 은신처로 찾아올 게다!”
적들은 참수작전을 선택했다.
아무리 세력이 강성하더라도 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신도들을 마극종의 이름 아래 능란하게 집결시키는 것은 렌뇨의 역량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곧 렌뇨를 살해한다면 마극종이 망하거나 빠르게 와해되리라.
상당히 합리적이고··· 불행히도 적확한 판단이었다.
거대한 세를 지닌 다이묘들은 이미 기존의 종파들과 깊이 연을 맺고 있었다. 거기다 종파들 각각이 지닌 병력들까지···
모두 렌뇨 한 사람의 목만을 노리고 있다.
“앞에 네댓 명이 막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철퇴를 쥔 준민이 말의 추진력을 그대로 실어 칼을 휘두르자 앞장서서 창을 꼬나들던 천태종 승려의 목이 날아간다.
동료의 죽음에 경악하는 병사 앞에서 이번엔 말의 앞다리를 일어서게 한 뒤, 말이 주저앉을 때 동시에 철퇴로 내리찍는다. 콰직, 하고 두개골이 부숴지는 소리가 난다.
나머지는 말 탄 놈 하나에 활을 든 놈 하나. 활 든 놈은 말의 무릎으로 어깨를 들이받아 뼈째 부숴버리고, 기수가 그의 어깨를 노리자 능숙하게 피한 뒤 뒷덜미를 잡아채 말에서 끌어내렸다.
말 잃은 기수는 뒤따라오던 렌뇨와 다른 제자들의 말발굽에 치어 온몸이 으스러졌다.
이 피바람, 이 아귀도(餓鬼道)···.
잘 때도 칼 끝 위에 매달려서 자는 것 같고, 서 있을 때도 머리 위에서 화살이 날아올 것만 같다.
홀로 있더라도 누가 엿보고 있나 의심스럽고, 안전한 장소 같다가도 함정일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