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3
“가독, 인근의 상인들 중 8할이 마극종의 신도입니다. 저의 말 한 마디에 이들의 돈줄이 걸려있기에 누구도 쉬이 저항하고 반역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독께 가문의 성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나가노부는 화를 식히고는 곧 저도 모르게 호조즈 성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로 몇 해 전에 아버지가 저기서 살해당하고, 자신도 겨우 도망쳐왔던 가문의 본거지.
이제는 적의 손아귀에 떨어진.
“제가 드린 그 책을 손에 쥐신다면, 제 의견을 받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신다면···”
이번에는 렌뇨가 몸을 일으켜 나가노부를 내려다보았다.
“그 결과는 장담하기 어렵겠습니다.”
나가노부의 주름 없이 젊은 얼굴에 순간 노인과 같이 깊은 시름이 깃든다.
아버지, 가문, 원수, 부처, 요승···
결국 나가노부는 책자를, ‘공산당 선언’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영주가 렌뇨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선사님, 이제 떠나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동지’. 제가 오래 머물면 동지께서도 대업을 이루기 어려우실 것이며, 동지 또한 본래 동맹과 가신을 모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는 처지가 아니십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직 배우지 못한 바가 많습니다! 특히 이 노동의 소외에 관한 부분은···.”
“그런 건 동지가 조상의 성채를 되찾고 정식으로 가독의 자리에 오를 때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다시 찾아 오리니 동지께서는 다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 선사님께서도 부디 대업을 이루시기를···!”
첫 만남에서 그를 ‘악승’이니, ‘마귀’니 하였던 나가노부가 지금 그를 지극정성으로 배웅하고 있다. 어느덧 마극종의 신도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경제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라는 미끼에 낚여서였지만, 가면 갈수록 젊은이다운 열정에 붉은 물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선사, 여기 적힌 이 말이 사실이오? 진보씨가 본래 정토진종의 군세에 참패해 몰락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련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자기 가문의 미래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때였다. 지금 사력을 다해 가문을 되살려 봐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영락할 운명이라니.
그 충격에 나가노부는 한두 다경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진보 가문의 미래보다도,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대의와 지식에 탐닉하게 된 것 같았다.
원래 처음에 저리 잘 알지 못하며 반감을 드러내던 이들이 도리어 열성적인 신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혐오감이 강했던 만큼, 공부에서 오는 충격 또한 강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생을 헌신해 온 가문의 초라한 미래에 대해 듣고야 말았으니···.
아무튼 제자들과 떠날 채비를 하였을 때, 진보 나가노부는 이미 한 사람의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자 다이묘라니, 대체 무슨 기묘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보 마사노부를 떠난 뒤, 렌뇨와 제자들은 엣추를 벗어나 바로 근처의 카가(加賀)로 자리를 옮겼다.
북쪽의 여러 나라 중 이곳에서의 교세가 특히 강성하기도 하였고, 또 에티앙블이 이야기했던 정토진종의 나라가 세워진 곳이 바로 카가가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여 시내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영주들의 통제력 바깥에 있는 마을에 세워 둔 은신처를 향하였다.
―“진보 나가노부 포섭 성공.”
당연히 조선에 전신을 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 . 추후의 계획은?”
―“포섭 가능성 있는 유망 인사들을 탐색할 것.”
즉, 계획이 없다는 뜻이다.
별수는 없었다. 다이묘 몇몇을 운 좋게 포섭할 수만 있다면야 좋겠고, 미래에 날아오를 야심가들을 미리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다면 더욱 기쁘리라.
그렇다면 안정적 조직 기반이 생길 여지들이 생기고 렌뇨 한 사람이 죽더라도 조직이 순식간에 와해되는 일은 없을 터이다.
아니, 그 기반에 렌뇨가 눌러앉는다면 조직 자체가 안전해지리라.
하지만 렌뇨는 욕심이 컸다.
그가 보기에, 아직까지 필요한 것은 안전보다는 확장이었다.
그리고 안정성을 위해 후계 구도를 정하려 해도, 도리어 권위를 손에 쥔 후계자가 칼자루를 거꾸로 잡아 렌뇨를 위협할 수 있으니 저어하게 된다.
결국에는 이렇게 직접 전국을 떠돌며 세력 확대에 나서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명확한 계획이 없다는 말이, 다음 행선지를 정해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교(京, 교토)로 갈 걸세.”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위협하는 종파들의 본산지가 교토 아닙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그곳에 가야만 하네. 우리에게 있을 위협을 미리 감지하고 인근의 조직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게다가 아예 대책이 없지도 않다.
“그리고 이 기록에 따르면 적임자가 있네. 작금에 낭인으로 떠돌고 있을, 아마 승려로 활동하고 있을 인물이네. 이름이 불확실하여 잘 모르겠다만···.
이자를 끌어들인다면 아마 장차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네.”
렌뇨는 에티앙블이 준 책의 기나긴 인명 목록에서 이름 하나를 가리킨다.
***
‘호조 소운(北条早雲)’.
먼 훗날에 붙은 별명으로는 나라를 훔치는 자.
이마가와 가문의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어 작은 성의 성주가 되고, 다시 간토(關東, 관동) 지역의 패권 다툼에 끼어들어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전국 시대 간웅의 표본이다.
최초로 하극상을 통해 다이묘의 이름을 탈취했다며 후대에 위명을 떨친 자.
“작금에 사용하는 이름이나 정확한 행방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마 훗날 이세(伊勢)씨와 연을 맺고 기진(義尋, 훗날 현 쇼군 요시마사의 동생. 훗날 쇼군의 양자로 입적해 ‘아시카가 요시미’라는 이름을 씀.)을 보좌하게 되는 것을 본다면···.
그 인연이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교토에, 그것도 기진이 거처할 조도지(浄土寺)에 자리할 것이네.
한번 교토의 정보망을 통해 수소문해 보지. 마침 초상화도 있으니.”
그리고 렌뇨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소승께 무슨 볼일이십니까?”
“허허, 안녕하시오. 우리 상인회에서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들으러 하오.”
“저는 이 절에 의탁한 한낱 낭인일 뿐이오니 저 말고 다른 이를 찾으심이···.”
“아니오, 스님이어야 하오. 스님의 존함이···?”
“그냥 신쿠로(新九郞)라 부르시면 족합니다.”
미래의 호조 소운을 찾아낸 것이다. 아직 ‘호조’라는 성도, ‘소운’이란 이름도 쓰지 않던 시절이지만.
“얼굴 형태도 늘그막의 호조 소운을 그린 초상화와 일치하며, 또한 사용하는 가명(假名, 본명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해 쓰던 호칭, 호와 비슷함.)도 똑같습니다.”
“···좋네. 그렇다면 한번 회유에 들어가 보지. 이번엔 신로, 자네가 가 보게.”
아무래도 교토라면 렌뇨 본인이 직접 거동하기에는 위험하다. 인근의 숙소에서 머물되 그나마 신뢰할 만한 제자를 내보냄이 상책일 터.
신로는 복종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는 길을 나선다.
***
미래의 호조 소운, 또는 신쿠로, 또는 모리토키(盛時)는 의문스러운 초대를 받아 가마까지 타고 흔들흔들 교토의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가마까지 태워 주는 호사스러운 대접에 익숙지 않아 멀미를 하니, 그를 초대한 상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그를 달랜다.
“저도 예전에 자주 멀미를 하고는 했습니다만, 익숙해지면 이 흔들림이 구름을 타는 기분이라 아주 기분이 좋으실 겁니다.”
“제가 이런 대접에 익숙해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욱.”
“하하하, 이제 곧 모두가 대접받는 데 익숙해지는 세상이 올 겁니다.”
상인이 중간중간 뭔가 뚱딴지같은 말을 던졌으나, 모리토키는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거대한 별장에.
“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을 모시게 되니 참으로 무안스럽고도 영광스럽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이리 아름답고 보석 같은 곳을 가꾸시니, 주인 되시는 분의 높은 심미안을 알 만합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부끄럽습니다. 자, 자, 여기로 드시지요.”
그렇게 대문간 안에 들어서니 수많은 일꾼들이 그들의 신과 옷을 걷어 가고, 문을 여닫으며, 각종 다과를 내어온다. 말그대로 손 하나 까딱 않고도 모든 일이 이루어지니 요술과도 같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중정에는 잘 다듬어진 이끼들이 솜털처럼 땅 위에 돋아나 있고, 기기하게 뒤틀린 나무들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곳곳에 인공 연못과 모래알로 만든 가짜 연못이 뒤엉켜 신비로운 풍광을 빚어냈다.
게다가 처마에 씌워진 금박과 색색 단청, 화려한 막새기와···.
사치라는 개념을 물화한다면 바로 이 장소와도 같으리라.
하지만 가장 기묘한 모습은 바로 일꾼들의 모습.
제각기 화려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고 있으며, 모리토키에게는 극진할지언정 집주인에게는 격의 없이 대하고 있다. 도리어 주인 쪽이 일꾼들에게 보다 공손한 태도였다.
그리하여 다과를 내온 계집아이가 뒷걸음질 쳐 방을 나설 때도, 상인이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돈이 많고 많으면 사람이 미쳐 버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상인이 입을 열었다.
“아, 아직 제 이름자도 소개하지 않았군요. 저는 가쿠로입니다.”
“소승은 말씀드렸다시피 신쿠로라 불러 주십시오.”
“예, 신쿠로 님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통성명과 인사가 끝난 뒤에도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것이 불편하고도 이상야릇하였다.
분명 상인회에서 불렀다 하였는데 어찌 상인이라고는 눈앞의 가쿠로 한 사람뿐인가? 또한 말씀 듣기를 청한다 하였으면서 아직도 다과상 하나만 내오고는 별 이야기가 없는가?
그런 의문들이 피어나는 것을 가쿠로 또한 인식했는지 머쓱해하며 말한다.
“제가 스님께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인회가 부르기로 결정한 것도 맞으며, 또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님의 의견을 여쭙고자 하는 것도 맞습니다.”
“허면, 어째서 상인회의 나머지는 오지 않았습니까?”
“신변의 안전 때문이지요.”
더욱더 알쏭달쏭한 대답이다. 그러나 가쿠로의 말은 이어진다.
“스님께서는 참으로 총명해 뵈는 눈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이곳까지 몸이 불편한 여정이었는데도 방석을 놓아 드리자마자 앉으시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덕이 높고 훌륭한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눈여겨보았고,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계시는 사찰이 정토종(淨土宗)의 사찰이지요? 혹시 정토종의 교리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까?”
“제가 그저 떠도는 낭인인지라 앎이 일천하나, 대강 거리의 문맹자들보다는 나으니 불법에 대해 말씀드리기에 부끄럽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가쿠로의 은근한 부추김에 불법을 논설하니, 그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가쿠로는 단순히 접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듯 눈을 반짝이며 모리토키의 강론을 들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리 학식이 높으신 데도 아직 진흙 속의 진주처럼 묻혀 계시니 안타깝습니다.”
“변변찮은 소승을 지나치게 높이고 계십니다.”
“아닙니다. 하오나···.”
“하오나?”
“스님의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람 좋은 미소는 가시지 않은 채, 가쿠로는 말을 잇는다.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 어찌 현생에서 이리 큰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까? 고난과 고통이 곧 악덕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악덕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고통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께서는 당연히 악인들까지 굽어살피십니다.”
“허나 정토종의 가르침에서 악업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까? 이는 보다··· ‘사회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사회’가 무엇인지요?”
“아, 너무 흥분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간에 저희는, 크흠, 그런 사회··· 아니,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중생들에게 악업을 강요하는 이 현실 자체에 개탄하며 이를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본래 제 이름 가쿠로의 한자 또한 큰 산 악(岳) 자를 써서 가쿠로(岳郞)였던 것을, 세상을 고치자 하여 고칠 혁(革) 자를 써서 가쿠로(革郞)로 바꾸었지요.
스님께서 낭인이라는 이유로 그 재능이 꽃피지 못함은 너무도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합니다.”
“···설마.”
“맞습니다.”
미닫이문이 옆에서 드륵, 하고 열리더니 또 한 사람이 나와 그의 앞에 예를 갖춰 앉는다.
“신로라 합니다. 렌뇨 선사님의 미천한 제자입니다.”
“렌··· 뇨!”
“네, 그분의 제자입니다.”
가쿠로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그 대신 엄숙함이 얼굴에 깃든다.
“우리가 바로 마극종입니다.”
***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노예와 같이 사는 이들에게 희망은 마극종뿐이라고. 신분이라는 한계에 얽메이지 않는 세상은 그 자신들의 신념과 힘으로부터 열리고 말 것이라고.
실상은 하나의 제안이었다.
‘교토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여 주겠다.’
대신 마극종의 교토 조직, 그 가운데 한 축을 맡아 달라.
마극종을 적대하는 인물들과 세력들의 동향을 살피고, 교토에서 조직을 은밀히 뻗쳐 나갈 동량이 되어 달라.
들키는 순간 포위되어 살해당할 위험이 있고, 또한 살아남더라도 전일본 불자들의 적이 되겠지만···.
나쁘지 않은 거래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 제안에 대해 숙고해 보겠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락을 주신다면 장소와 사람은 ‘이곳’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가쿠로는 쪽지를 넘긴다. 대강 교토 시내, 어느 일꾼들 숙소에, 갈대 모자를 쓰고 진달래꽃을 가슴에 꽂은 사람을 찾아가면···.
쪽지를 받아 든 모리토키는 왔을 때처럼 가마에 올라 길을 나섰다.
“···감시를 붙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신로 동지?”
“동지께서는 낌새를 채지 못하셨겠으나, 분명 저 눈빛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몰래 고변할 수도 있으니 사람을 불러 미행해야겠습니다. 위험 요소를 남겨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야.”
신로의 예측은 옳았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사실입니다. 가쿠로라는 상인이 저를 불러내어 마극종에 입교하라 설득하였습니다.”
“가쿠로 님은 우리 사찰을 후원하는 큰손이시네! 어찌···!”
“그만두게. 내가 잘 타일러 볼 터이니.”
사찰 측에서 믿지 않았다는 사실만 제하면.
조도지의 몬제키(門跡, 황실이나 귀족 자제인 주지스님)이자 쇼군의 동생인 기진은 온화한 눈빛으로 모리토키를 내려다보았다.
“신쿠로, 우리의 입장을 살펴 주게나.
사찰의 새로운 전각을 올리는 데 거의 8할을 투자하셨을 가쿠로 님께서 사실 마극종 신도라는 주장은 믿기가 어렵네.
게다가 하필 이곳에 머무를 뿐 어떤 지위도 없는 자네를 회유하려 했다는 말도.”
“하지만 사실입···.”
“거꾸로 자네가 우리의 눈에 들고 싶어서, 귀한 후원자분을 모함하고 영웅이 되려 만용을 부리는 것이라는 설명이 우리에게는 더 믿음직하네.”
“···.”
“이해해 주어서 고맙네. 서운해하지는 말게나. 다만 절에서 쫓아내는 일은 없을 터이니 이를 우리의 소소한 자비로 여겨 주게.“
온몸에 힘이 빠진 모리토키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조도지를 걸어 나왔다. 곧 기진으로부터 소문이 퍼질 터이니 자비니 뭐니 해도 저 사찰에 발붙이기는 글러먹었다.
아니, 교토 어느 사찰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절망적이다. 차라리 마극종에 붙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아니다. 이미 고변을 하였으니 더는 신뢰감도 없으며, 교토의 불교계에서 쫓겨날 참이니 이제 쓸모도 없는 몸이다.
차라리 위험 부담이 큰 마극종보다는 무려 쇼군의 동생이 주지로 들어앉은 이곳에서 인맥과 명성을 쌓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 틀렸던 건가?
그리 생각하며 기운 없이 걷다 보니, 문득 인기척을 느낀다. 분명 그밖에 없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한 사람이 더 있다.
순간 모리토키의 빡빡 깎은 머리통 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살수(殺手)인가? 그럴 리는 없다. 모리토키는 죽일 이유도 없는 존재다.
살수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가···.
그리고 입에 담을 낱말을 고르고 고른 모리토키가 드디어 운을 떼었다.
“나오십시오. 마극종에 대한 대답을 정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접선인으로 지정된···.”
“이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소? 그냥 나와 주시오.”
역시나, 골목 한쪽 그늘에서 어두운 옷을 입은 사내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온다. 그의 형상이 어둠 속에서 가까워질 때마다 모리토키의 손아귀에 땀방울이 맺혔다.
사내는 말했다.
“그렇다면 마극종에 귀의하시는 겁니까?”
모리토키도 답했다.
“꼭 그렇게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덕을 본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리토키는 감추고 있던 단도를 뽑아 사내의 목에다 꽂아 넣는다.
사방에 피가 튀고. 사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 고꾸라진다.
“내가 당신과 마극종의 핏값으로 덕을 볼 테니.”
모리토키는 사내의 품 안에 있던 칼을 꺼내 뽑아 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벤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온다. 연기하려 하지 않아도 고통 때문에 마치 진짜 같다.
“사람 살려!”
곧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든다. 서둘러 온몸에 피칠을 한 모리토키는 다친 어깨를 부여잡고 사람이 많은 대로변으로 광인처럼 뛰쳐나갔다.
“마··· 마극종이 사람을 죽이려 했다! 암살이다!”
아, 달콤한 피 냄새여.
출세 가도의 돈 냄새로다.
작가의말
호조 소운(또는 신쿠로, 또는 모리토키)은 생애 초반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실합니다. 그의 직업, 출신, 나이, 심지어 이름까지 많은 것이 미스테리에 싸여 있는 사람이지요.
그럼에도 학계에는 일단 정설이라는 것이 있고, 지금 일본 학계에서는 그가 1456년생이라는 학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만 저는 1432년생설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처럼 저는 소설의 전개와 재미를 위하여 현재 학계의 이런저런 설들과 여러 일화를 조합하고 엮어 내 그의 생애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실제 역사나 현재 학계의 정설과 이런저런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부디 문학적 허용으로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과를 하고 싶소.”
“아닙니다. 일전의 사소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불적 무리를 소탕하는 책무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시카가의 일원, 그것도 현 쇼군의 동복동생, 조도지의 몬제키(주지승).
그런 그가 일개 낭인에게 조심스럽게 사과를 청하였고 그 낭인이 사과를 거절한다.
“그대는 대인이오. 내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개의치 않다니···.”
“저는 다만 더 큰 대의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또한 몬제키 님이 하셨던 말씀을 모욕이라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높은 자리에는 더 많은 책무와 경계심이 요구되는 바이지요.”
“이해해 주어서 고맙소.”
아직 나이도 몇 살이나 어리다. 스무 살도 안 된,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은 사내가 그렇게 면박을 주었으니 기분이 오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