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00
105
“네?”
“샤를로테가 걸었던 힘은 완벽하게 사라졌어.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까 틀림없어.”
힘은 다 풀렸다는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그대로 굳은 채 입을 뻐금거렸다. 당혹스러움을 담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럴 리가. 보석의 힘이 다 풀렸는데 왜… 그대로…?”
그 중얼거림에 하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리엘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내 행동들이 전부 가넷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운이 묻자 리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잖아요. 샤를로테가 오고 나서 바뀌셨으니까.”
“…….”
리엘라의 말에 하운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샤를로테가 오고 난 후 자신의 태도는 바뀌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없던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돌아오기 전 왕궁의 보석술사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들이 달라붙어 살펴본 덕분에 샤를로테가 갖고 있던 가넷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파괴될 가넷에는 임시로 이름이 붙었다. ‘욕망의 가넷’이라는 어쩐지 부끄러운 이름이.
자신에게 걸렸던 가넷의 힘이 사라지고 나서 하운이 놀랐던 것은 자신이 조금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도 보석술사들에게 정말로 힘이 소멸된 것이 맞냐며 몇 번이고 되물었으니까.
힘이 사라져도 리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
그제야 하운은 알 수 있었다. 가넷은 눌러둔 것을 끌어낼 뿐이라는 것을. 욕망의 가넷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진실의 가넷’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석 때문이 아니야.”
“그러면….”
“보석은 그냥 등을 떠밀어 준 정도뿐이고… 그러니까 나는….”
하운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다음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 리엘라.”
짧은 말을 했을 뿐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르륵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넷이 없기에 그가 오롯이 느껴야 하는 감각이었다. 보석의 힘이 없는 지금 그 날것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며 하운은 생각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던 이 감각이 사실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것이라고.
그러니까 계속 말하고 싶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저를 보는 리엘라의 얼굴이 계속 보고 싶기도 하고. 하운은 리엘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답을 듣고 싶은데….”
하운의 말에 가만히 있던 리엘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두면 터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과같이 붉어진 리엘라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재촉하지 않겠다 말했기에 하운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그는 즐거웠다.
“대답하기 힘들면 그냥 하지 않아도….”
“…도요.”
“응?”
리엘라의 작은 목소리에 하운이 좀 더 고개를 숙인 순간 그녀가 얼굴을 들고 외쳤다.
“저, 저도요!”
“…….”
“어, 저는, 대공님을,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그건 잠시였고, 어… 그러니까….”
리엘라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모든 힘을 다해 말했다.
“저도… 좋아해요.”
다음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하운이 그녀를 안아 올린 것이다. 놀라 내려놓으라고 말하려는 순간 하운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
“좋아해 줘서 고마워.”
그 말이 너무도 진심이라 리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옆방에서 훔쳐듣던 네아가 들소처럼 뛰어 들어와 당장 아가씨를 내려놓으라며 하운을 걷어찰 때까지.
***
샤를로테는 신경질적으로 손톱 끝을 물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관리되던 손톱은 잇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평소라면 그녀의 시녀들과 하녀들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깨끗하게 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커녕 그녀들의 목소리조차 며칠째 들을 수 없었다.
“아….”
깊이 물어 버린 탓일까.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제 다친 곳이 아물지 못하고 다시 벌어져 붉은 핏방울이 배어났다.
꽃 축제 연회 동안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보석을 사용한 순간 제 손을 쳐 버리고 나가 버린 하운. 어느새 모습을 감춘 왕비. 웃으면서 대신 상대를 하겠다 찾아온 카르디아의 국왕.
“그대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군, 샤를로테 대공.”
국왕이 그렇게 속삭였을 때, 샤를로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웃으며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의 온도는 서늘했다. 제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전부 다 들킨 것이 확실했다.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 테티아의 사람들은 모조리 보이지 않고 카르디아의 시종들만 가득했다.
“청소가 덜 된 듯하군요, 죄송합니다.”
청소라는 이름 아래 그녀들은 정중하게, 그러나 가차 없이 모든 곳을 뒤졌다. 그러다 결국은 소매 아래 숨겨 두었던 가넷을 들키고 말았다. 왕궁의 깊은 곳, 그것도 국왕 부부가 참석하는 연회에 등록되지 않은 이런 보석을 타국의 사신이 몰래 들고 왔다는 사실은 그럴 의도가 있건 없건 국왕을 향한 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이 완전히 꼬여 버린 것을 안 샤를로테는 제일 쉽게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앵무새처럼 그 말만을 되뇌었다. 그럼 카르디아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무력을 동원하면 그것을 빌미로 다시 협상을 하려 했는데….
“…이리 가만둘 줄은 몰랐지.”
카르디아는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감금당해 있는 꼴이긴 하지만. 꽤 강한 추궁이 시작될 것이라던 예상은 어이없을 만큼 빗나가 첫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샤를로테는 더욱 초조해졌다.
이미 제가 이곳에 있는 사이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인가? 다른 테티아의 대신들은 어떻게 되었지? 설마 이미 카르디아에서 추방당하기라도 한 걸까?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상상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샤를로테는 더욱 힘들었다. 상상의 끝은 언제나 깊고 어두운 바닥이었으니까.
하운 대공을 욕심내지 않고, 회담만 잘 끝내고 갔으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거란 사실이 계속해서 그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샤를로테는 맺힌 핏방울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도대체 그는 뭘 원하는 거야?”
그 연회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춤을 춘 다음, 혼인을 발표했으면 그는 공국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플레노트가 점령한 땅은 원래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었으니 그 위에 세워질 공국 역시 강력한 나라가 되었겠지. 그는 왕이 될 기회를 버린 것이다.
그것을 버리고 선택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샤를로테가 다시 생각에 잠기려 하는 사이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카르디아의 시녀들이 덧창마저 전부 내려 버린 탓에 햇살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창문이었지만 다행히 소리는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여럿이며, 그중에 무거운 소리도 들렸다. 기사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기사와 사람을 몰고 이곳에 찾아올 자가 누구인지 샤를로테는 짐작해 보았다. 하운? 아니면 왕비? 그것도 아니면 다른 자가 처벌하기 위해 찾아온 건가?
샤를로테는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자신은 테티아의 대공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든 걸 포기하고 순순히 질 생각은 없다.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밖에서 시녀가 들어가도 되겠냐 물어보자 샤를로테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치켜든 다음 대답했다.
“들어와도 좋다.”
문이 열리자 샤를로테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꽃바구니를 든 레이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카르디아의 국왕에 그녀는 당황하며 허겁지겁 인사했다.
“사람들을 물리고 회담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 왔네. 이건 선물이야. 왕실의 정원 관리사들이 그대의 쾌유를 빈다더군.”
“…….”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샤를로테는 개소리 말라 소리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강하게 쥐어야 했다. 몸이 안 좋아? 회담에 참석을 못 해? 쾌유를 빌어?
“감사… 합니다.”
“일단 좀 앉지. 이야기할 게 있어서 왔거든.”
레이안이 시녀에게 손짓하자 그녀들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는 가져온 꽃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카르디아가 자랑하는 장미가 가득 꽂힌 바구니였다. 샤를로테는 바구니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레이안을 노려보았다.
별 볼 일 없는 왕이라고 생각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동생, 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는 왕비에 비해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왕. 인상도 그렇다. 미남에 속하긴 하겠지만 이목구비가 짙고 강렬한 동생에 비하면 흐릿한 용모다. 그런데 왜 그가 직접 여기까지….
“테티아의 왕이 되고 싶었나?”
“……!”
“공국을 시작으로 카르디아의 지원도 받을 생각이었겠지. 플레노트가 지배하던 풍요로운 땅을 발판으로 삼으면 식량으로 테티아의 목줄도 흔들 수 있을 테고. 어차피 지금 국왕은 그대가 공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면 영토가 늘어났다고 좋아하며 지원도 퍼부어 줄 테니 쉬운 일이었을 거야.”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레이안의 말에 샤를로테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안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샤를로테가 긴장하며 탐색하듯 바라보자 레이안은 지친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난 말 이리저리 길게 돌려 하는 게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본론만 간단히 하지.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을 생각이야. 회담은 그럭저럭 보기 좋게 서로가 물러선 형태로, 그대가 테티아로 돌아가서 노력했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선에서 끝날 거고.”
“…….”
“무슨 꿍꿍이냐고 할 것 같긴 한데 카르디아로서는 그대가 테티아로 무사히 돌아가 열심히 인망을 얻고, 사람들을 포섭해 언젠가 국왕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더 도움이 되거든.”
“그래서 저를 그냥 보내 주시겠다 이건가요?”
파격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샤를로테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카르디아가 언제든지 테티아를 치려면 칠 수 있는 나라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게 사실이라는 점이고.
국왕의 오만함에 샤를로테는 입술을 씹었다.
“언젠가 꼭 후회하게 해 주겠다는 표정이군. 마음대로 해. 하여간 난 그 말을 전하러 온 거니까. 워낙에 걸린 게 많기에 이건 내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찾아온 거야. 그리고 테티아의 대사인 그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는 척도 해야 하고.”
그렇게 말하며 레이안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샤를로테는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 사람이….’
가장 위험할지도.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부탁 하나를 하고 싶군.”
“…그게 무엇입니까.”
샤를로테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모든 것을 덮어 주면서 하는 부탁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얼마나 힘든 일이기에….
“내 동생의 연애 사업에 자네도 협조를 해 줘야겠어.”
“……?”
***
일주일 후, 샤를로테는 공작저를 방문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었고, 그녀는 하운과 카르디아 왕실의 감시하에 보석의 힘을 빌려 겉모습을 바꾼 채 두 번째 문을 열기 위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의 공작저 안에서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방 한쪽에 서 있는 하운과 리엘라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슬쩍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
샤를로테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왕이 될 기회를 던져 버리고 어디로 갔나 했더니.’
서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하면서도 결코 놓지 않는 손에 샤를로테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더 중요했다 이거지?
샤를로테가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서 있을 때, 저택의 하녀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 가넷, 어디서 구했어요?”
“뭐…?”
하녀를 보니 저번에 왔을 때도 만났던, 보고에 따르면 호슨 공작이 딸처럼 데리고 다녔다던 네아라는 하녀였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싶어 샤를로테가 긴장으로 몸을 굳히자 네아는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거렸다.
“고백을 하면 뭘 해. 손만 잡는데…. 속 터져 정말. 어떻게든 그걸 다시 구해서 먹여 버리든가 해야 하나.”
제 가슴을 팡팡 치던 하녀는 샤를로테에게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 달라 하더니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