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24
130
며칠이 지난 걸까. 겨우 버티던 몸은 빛나는 꽃잎을 쓰는 순간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하운은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늘을 바라봤었다. 다행히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그는 안도했다.
하운은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다음, 그때부터 계속 언덕 아래 행사장을 바라보았다. 쓰러져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날에 저 공터에서 모두가 모여 춤을 춘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곳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사람들이 저곳에 모여들면 그날이 축제의 마지막 날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만을 기다리며 버텼고, 드디어 지금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오늘이 축제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어둠이 깔리는 하늘을 보던 하운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로켓이 텅 비어 버린 채 천천히 흔들렸다. 하운은 그것이 꼭 제 꼴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에 들린 창천의 토르말린을 보았다. 빛나는 꽃잎 덕분에 완벽하게 힘을 되찾은 보석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덕분에 거의 남아있지 않는 제 힘으로도 이렇게 푸른 하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탈진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 호슨 공작이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라며 자비 없이 수십 가지의 보석을 한 번에 사용하게 시켰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힘을 잃게 된 보석술사도 있다고 했던가.’
오래 전 창천의 토르말린과 관련된 책에서 본 내용이 기억났다.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릴 적에는 보석술사로서의 힘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가치는 그것뿐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창천의 토르말린을 던져 버리고 몸을 회복해야 했다.
하지만 하운의 눈에 멀리 불이 켜지는 공터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엘라가 저기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보석을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버텨야 했다. 제 힘을 모두 잃을지라도.
먼 곳의 흥겨운 소리가 바람에 섞여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버텨야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하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엇이라도 생각하려 노력했다. 결국 그는 다시 리엘라를 떠올렸다.
‘축제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리엘라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꼴도 보기 싫을 것이다. 보이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겠지. 하운은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사과를 하러 돌아가면 마지막으로라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그가 한 실수가 계속 떠올랐다. 하운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귓가에 큰 외침이 들렸다.
“하우우운! 이 멍청이이이이!”
“……!”
그 순간 거짓말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목소리는 그가 제일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언덕 위에서 들을 리 없는 목소리였기에 하운은 그 목소리가 환청이라 생각했다. 어쩐지 억울했다. 어차피 환청이라면 조금 더 다정한 말이 들려오면 안 되나? 환청마저 자신에게 화를 내다니.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할 때, 풀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 힘이 다한 탓에 방어막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형님인가?’
저번에 왔던 이후로 레이안은 한 번 더 언덕을 찾았었다. 멀리서 왕이 입에 담기 적절하지 않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입에 올리며 저를 욕하는 레이안의 모습에 하운은 쓴웃음을 지었었다. 이제 방어막을 유지할 힘조차 없으니 레이안은 곧바로 저를 끌고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하운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안에게 곧 축제가 끝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 말할 생각이었다.
“……?”
하지만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은 레이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작고, 흐릿하게 보여도 무척 익숙한 사람. 그리고 절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
하운은 멍하니 다가오는 리엘라를 보았다.
환청에 이어 환영까지 보이다니. 정말로 자신이 심각한 상태인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리엘라의 모습을 보며 하운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환영이 가까이 다가오니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리엘라의 모습은 잘 보였다. 네아와 고르고 고른 레이스가 붙은 흰색의 여름 원피스. 땋은 머리에는 색색깔의 아름다운 꽃 장식이 가뜩 꽂혀 있었다. 잠들기 전에 몇 번이나 몰래 상상해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예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예쁘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보았던 그 어떤 보석도, 꽃도 지금 리엘라만큼 예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리엘라의 환영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운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제게 다가올 손을 기대했다. 환영이니 닿지도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리엘라의 두 손이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더니 사정없이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라고!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상하다. 환영이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정신없이 머리가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환영마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운은 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뭐가요?”
“내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이러고 있어요!”
자신을 향해 버럭 소리를 치는 모습에 하운은 환영이 진짜 리엘라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만히 있자 리엘라는 두 손으로 하운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정신 차려요! 죽지 마!”
리엘라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뺨에 닿은 손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하운은 눈을 크게 떴다.
“리엘라?”
“그래요!”
“어떻게… 여기에….”
“지금 그게 중요해요? 당장 보석에서 손 떼요!”
리엘라는 고개를 돌려 하운이 쥐고 있는 보석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그것을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하운은 그것은 강하게 쥔 채 놓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어 리엘라가 바라보자 하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맑아야…당신이 축제에서 즐겁게….”
“…즐겁게?”
하운의 말을 듣던 리엘라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하운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나 혼자서 축제 가서 즐겁게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 잊고 속 편하게? 연락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놔두고?”
아주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안이 “때려, 그 자식 그냥 때려 버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한 채 리엘라는 하운을 노려보았다.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붉은빛이 둥실 떠올랐다. 붉은색의 빛뿐만이 아니었다.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 온갖 색의 빛 덩어리들이 어두워진 언덕 위를 비추었다. 그것은 행사의 마지막에 사람들이 하늘로 날려 보내는 램프였다.
오래전, 아득한 곳에서 온 빛이 땅에 떨어졌다. 이 행사는 그 빛을 다시 돌려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행사였다. 종이로 램프를 감싸고 그 위에 빛이 왔던 곳으로 자신의 소망을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는 행사.
수많은 색깔만큼이나 사람들이 날려 보낸 많은 소망이 바람을 타고 맑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을 가득 메운 빛 아래에서 리엘라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들었어요! 보석의 힘을 사용해 푸른 하늘을 만들었다고!”
“미안해.”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멋대로.”
“…잘못했어. 화내지 마.”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리엘라는 다시 하운을 향해 소리쳤다.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렀다. 리엘라는 보석을 쥐고 있는 하운의 손을 붙잡았다. 그 사이 리엘라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꽃 장식이 흔들리다 떨어졌다. 그 탓에 묶었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하운의 손을 덮었다.
리엘라가 잡고 있는 탓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던 손 위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지럽히자 하운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에 리엘라가 꽃잎을 주고 갔던 날 제 앞을 스치고 지나갔던 머리카락이었다. 그날 이미 리엘라가 돌아간 다음에도 괜스레 허공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었다. 무척이나 부드러울 거라 생각하면서.
그것이 제게 닿자 하운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무심코 말해 버리고 말았다.
“만져 봐도 돼?”
“네?”
리엘라가 바라보자 하운은 멍한 정신 속에서도 지금 제가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다니.
“아, 그게 아니라….”
하운이 필사적으로 미안하다 다시 말하려 하자 리엘라는 곧바로 눈을 감더니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그 모습에 하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리엘라는 조금 움찔거리긴 했지만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운은 용기를 내었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손을 뻗은 그는 어깨 위로 흘러내린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만지는 듯 떨리는 그의 손은 조심스러웠다. 한참이나 제 손안의 부드러움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손을 올려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
하운의 손이 멀어지자 리엘라는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하운에게 이게 끝이냐 묻고 있었지만 점점 흐려지는 의식에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운이 손을 거두고 이제 충분하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자 리엘라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리엘라는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았다. 조금 전보다 더 힘을 주어서, 마치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하운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본 순간 리엘라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온 향기에 하운은 갑자기 제 꼴이 생각났다. 저에게 묻어 있던 땀과 먼지가 리엘라에게 옮겨 묻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마에 닿은 따뜻한 입술에 하운은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갑자시 세상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지며 모든 감각이 제게 닿아 오는 리엘라에게 집중되었다. 이마에 닿았던 입술은 그가 질끈 감은 눈 위에 닿더니 코 위로 내려왔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입술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에서 떨어진 입술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의 입술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아….”
하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자 리엘라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꽃들을 지켜 줘서.”
리엘라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환하게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리엘라의 얼굴을 보며 하운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은 언젠가 생을 다하는 날 이 얼굴을 떠올릴 것을.
하운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자신이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별처럼 떠 있는 수많은 램프와 그 아래에서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엘라를 보며 하운은 어둠 속에 평온하게 자신을 맡겼다.
***
“어우, 드디어 축제 끝났네!”
멜라니아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렸다. 이래저래 이번 꽃 축제는 시끄럽고 정신없었다. 시작하기 전부터 잡음이 끊이질 않더니 비가 쏟아져 연기가 되질 않나, 다시 행사 직전에 리엘라 테니어의 일이 터지질 않나.
그래도 다행히 기적처럼 행사 날 아침부터 하늘이 개었고 행사가 끝나는 오늘까지 날씨는 완벽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전시장을 향해 걸었다. 행사가 끝났으니 이제 제 작품을 수거해야 했다.
“싫어! 가져갈 거야! 내 방에 둘래!”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어디선가 울며 떼를 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어린 소녀가 부모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큰 건 네 방에 들어가지도 않아! 그보다 어떻게 가져갈 건데?”
“그래도 가져갈래!”
도대체 뭘 가져가겠다고 저러는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멜라니아는 그 가족의 대화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여기 있는 건 다 주인이 있는 거야.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아니야! 물어봤는데 저거 버린 거랬어! 그러니까 저 하르메아는 내가 데려갈 거야!”
하르메아? 버린 것? 순간 멜라니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행사 도중에 나오는 잡다한 것들을 버리기 전에 쌓아 두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그녀의 예상대로 리엘라 테니어가 만들었던 하르메아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얘가 정말 안 되겠네!”
부부가 아이를 달래다 못해 결국 번쩍 안아 들고 자리를 떠났다. 가족이 사라진 뒤 멜라니아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
리엘라 테니어가 제 잘못을 시인하고 하운 대공도 돌아가고 난 다음, 왕실의 보석술사들이 와서 그것에 걸려 있던 보석의 힘을 해제했다. 그때는 그저 증거를 빨리 지워 버리고 싶어서 저러나 보다 하며 비웃고 넘어갔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보석의 힘도 없으니 일찌감치 시들어 쓰레기 덩이가 되었어야 할 조형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시장 안에 있는 작품들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쩡하고 싱싱하게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모습을 보니 아이가 가져가겠다 떼를 쓴 것이 이해가 되었다.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어린 드래곤의 모습은 자신도 꽤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도대체 누가 이걸 관리했어?”
축제가 시작하고 나서도 다들 자신의 작품을 관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처음에는 클로에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클로에는 왕실에 속해 있는 탓에 저보다 몇 배나 더 일정이 쌓여 있었다. 그럼 클로에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따로 관리했단 말인가?
그때 멜라니아의 머릿속에 자신의 제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리엘라 테니어를 행사장에서 봤다고.
“…그럴 리가?”
사람들 앞에 보여 줄 수 없게 되어 이미 쓰레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설마 그런 것을 매일 찾아와 관리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어지간히 제가 만든 것에 애정이 있지 않은 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
멜라니아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멀리 하늘에 사람들이 올려 보낸 램프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