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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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운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언덕의 중턱까지 걸어 올라온 레이안이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보나 마나 ‘너 미쳤냐?’라고 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더니 검으로 방어막을 때리지를 않나, 레티시아까지 오지를 않나.
그나마 왕궁 밖인 덕분에 자신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것이지 왕궁 안이었다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찾아왔을 것이다.
‘막아 두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레이안은 당장 그의 뒷덜미를 잡아끌었을 것이다.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레이안을 보며 하운은 손에 들린 창천의 토르말린을 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툭 보석 위로 떨어졌다.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제 몸이 휘청이는 것일까. 시야가 흔들렸다.
‘아직 안 돼.’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나갔을 뿐이다. 축제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더 버텨야 한다. 마지막 날, 모두가 참가하는 밤의 축제를 위해서.
꽃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하운은 응접실에서 리엘라가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행사장의 지도를 보았다. 행사장 구석에 있는 넓은 공터에 붉은색으로 귀여운 하트를 그려 놓은 것을 보고 하루 종일 혼자서 몇 번이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오죽하면 하르메아가 ‘너 독버섯 먹었지?’라며 이상하게 바라봤을까.
그 후로 하운은 모르는 척하며 리엘라와 네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생각했는지 리엘라는 네아에게 축제 마지막 날에 입을 옷과 화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네아는 리엘라의 말에 ‘정말 예쁠 것 같아요!’라며 맞장구를 쳐 주다가 리엘라가 잠시 다른 곳을 볼 때면 못마땅하다는 듯 하운을 노려보았다.
네아의 시선을 피해 안 듣는 척을 하면서 하운은 축제 마지막 날 리엘라의 모습을 기대했었다.
‘볼 수 없겠군.’
리엘라가 꽃 축제를 기다렸던 만큼 그 역시 손꼽아 축제를 기다렸었다. 카르디아의 대표적인 축제라고 해도 한 번도 참가해 본 적이 없었던 축제. 마지막 날에는 모두가 즐겁게 떠들며 함께 춤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더더욱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다. 그때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리엘라의 손을 잡아도 되니까.
하지만 이제 자신은 마지막 날 그곳에 있을 수 없다.
‘리나와 가려나.’
분명 리나와 네아는 풀 죽어 있는 리엘라를 억지로라도 그곳에 끌고 갈 것이다. 그렇다면, 축제의 마지막 날까지 리엘라가 편하고 즐겁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창천의 토르말린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그때 하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하운은 손에 들린 보석을 바라보았다. 처음 사용했을 때와 달리 그 반짝임이 약해진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이대로는 무리야.’
약해진 보석의 힘을 끌어내려면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이만큼 끌어내는 것도 한계였는데 이 이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면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쓰러질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자신이 체력을 회복하든가, 아니면 이 보석이 회복하든가.
첫 번째는 불가능한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운은 한 손으로 힘겹게 가슴을 더듬었다. 목에 걸려 있던 로켓의 감촉이 셔츠 너머로 느껴졌다. 다시 손으로 더듬어 목걸이를 끄집어낸 다음 몇 번이고 미끄러지며 겨우 로켓을 열었다. 이제 한 장만 남은 꽃잎이 찬란하게 빛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회복할 수 없다면 보석이라도 회복시켜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하운은 쉽사리 빛나는 꽃잎을 꺼내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더듬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리엘라가 자신을 위해 준 것이었으니까. 두 장인 것을 알았을 때, 하나는 리엘라를 위해 쓰고, 다른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갖고 있을 생각이었다.
“…….”
하운의 손가락이 망설이며 로켓을 만지작거렸다. 그사이, 맑았던 하늘 저편에 원래 이곳으로 왔어야 할 구름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하운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로켓 안에 끼워져 있던 유리를 밀어내고 꽃잎을 붙잡았다. 이것을 건네주었을 때의 리엘라가 떠올랐다. 좋은 향기, 제 손을 붙잡던 작은 손 그리고 살랑이던 머리카락. 한 번만 붙잡아 보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이.
하운은 꽃잎을 창천의 토르말린 위에 올렸다. 그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강한 빛이 폭발했다.
***
리엘라는 네아가 준비해 둔 흰색 원피스의 소매 단추를 잠갔다. 옷매무새를 점검하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다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던 가방에 시선이 닿는 순간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쩌지….”
그곳에는 아직도 환불하지 않은 입장권이 있었다.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환불은 오늘까지인데….
한참이나 입장권을 보던 리엘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것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여전히 오늘까지 하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루시안에게 하운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잘못은 하운이 했는데 왜 제가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지 억울한 마음도 들고, 아무 말도 없는 그가 원망스러웠으니까.
‘결국 축제가 끝날 때까지 연락이 없어.’
오늘 자신과 함께 축제에 가서 놀기로 했던 약속은 기억하고나 있을까? 아니, 지금 자신을 생각하고 있기나 할까?
하운에 대해 생각할수록 자꾸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다시 목이 메는 것을 느낀 리엘라는 서둘러 가방을 챙긴 다음 방을 나섰다. 혼자 조용히 있으면 자꾸만 하운 생각이 나니 차라리 다른 누구와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오긴 왔는데….”
리엘라는 행사장 입구 앞에 버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지난 일주일간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꽃 축제에는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전에 지긋지긋할 만큼 비가 계속 내렸던 터라 어디 놀러 가지 못한 사람들이 죄 이곳으로 모인 탓도 있으리라.
그리고 마지막 날인 오늘, 모두들 밤을 불태우기 위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이래서 리나를 만날 수나 있을까?”
행사장 입구에 있는 표지판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곳에는 자신처럼 약속한 일행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히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인파 사이에 파묻혀 더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고민하는 사이,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꽃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름밤의 춤이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라고 하지만 저녁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보니 가족들끼리 온 사람보다는 친구나 연인과 함께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리나를 찾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리엘라의 눈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쫓았다.
혼잡함 속에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강하게 붙잡은 손을 보자 리엘라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일 년을 기다렸던 축제인데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리나를 만나면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덥석 리엘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나?”
당연히 리나일 거라 생각하고 돌아본 곳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누구… 세요?”
“헉, 헉. 리엘라 테니어, 맞지?”
“……!”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에 리엘라는 뒷걸음질 쳤다. 행사장을 갈 때마다 네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함께 가자고 했지만 행사장 내부에는 돌아다니는 치안대도 많고, 지금까지 문제 한 번 없던 곳이라고 말하며 네아의 동행을 거절했었다. 그럼에도 불안해하는 네아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아르펠트의 진주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여러 차례 설득도 했고.
리엘라는 손목에 걸려 있는 진주를 붙잡으며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리엘라가 겁을 먹자 남자는 제 실수를 알아차린 듯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미안하군, 하지만 좀 급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로….”
“내 동생 좀 살려 줘!”
“네?”
그 말에 호슨 공작의 재산을 상속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변호사들이 상대하긴 했지만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기에 매일 이렇게 공작저에 찾아오나 궁금해서 슬쩍 방 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이렇게 어려운 사정이니 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런 엄청난 재산을 그냥 받게 되었으니 나에게 좀 줘도 문제없지 않냐며 찾아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주로 늘어놓던 변명거리가 바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것과 가족이 아프다는 소리였다.
설마 그런 사람들 중에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인가!
리엘라가 치안대를 부르기 위해 두리번거린 순간, 갑자기 주변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축제에 놀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왕실의 문장이 박힌 예복에 검을 차고 있는 사람들. 분명 왕실의 기사단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낯선 남자를 보며 외쳤다.
“전하!”
“…전하?”
왕실의 문장. 기사들. 그들이 전하라고 부르는 사람. 그럴 만한 사람은 카르디아에 한 명 뿐이었다.
“설마… 국, 국왕 전하….”
리엘라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낯선 남자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왕은 맞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말에 리엘라는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국왕은 분명 동생을 살려 달라고 했다. 그의 동생이라면….
“하운님에게 무슨 일 있어요?”
***
“맙소사….”
언덕 위를 바라본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마차 안에서 국왕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전해 들었다. 평소라면 제가 감히 국왕과 마주 보며 앉아 있다는 사실에 덜덜 떨었을 것인데, 하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국왕이 하는 말을 듣는 리엘라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지난 일주일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하늘이었다. 그래도 맑으니까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마냥 기뻐하며 쏟아지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운이 만들어 냈던 거라니.
국왕의 말에서 리엘라를 가장 아득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칫하면 그가 보석술사로서의 능력을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운에게 화가 났던 것은 제가 오래도록 갈망해 왔던 축제에 나갈 수 없게 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자신은 가게를 운영해 나갈 수도 있으며, 아름다운 꽃들을 보고 만지며 다듬을 수 있었다.
대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망가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 기다려 왔기에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리엘라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운을 보았다. 그의 한쪽 손이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것이 창천의 토르말린이라는 보석일 것이다. 지금 하운의 힘을 모조리 써 버리고 있는 오래된 보석.
리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초저녁의 별들이 곳곳에 빛나고 있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제가 즐겁게 축제에 가길 원해 맑은 하늘을 만들어 내다니. 그리고 그것 때문에 힘을 다 잃을 수도 있다니.
리엘라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건 눈물 아니야. 땀이 흐른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다음 리엘라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마치 쓰러진 것처럼 앉아 있는 하운에게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우우운! 이 멍청이이이이!”
리엘라의 목소리가 언덕 위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