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4
14
04. 새로운 만남
온실은 리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활짝 문이 열려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진 탓에 환기를 위해 다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리엘라는 햇볕이 가장 잘 닿는 자리로 갔다. 그곳에 공작에게 선물로 준 화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열대식물의 넓은 이파리를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리엘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작은 화분에 꽃이 피어 있었다. 자신이 이 저택에 처음 왔을 때 공작에게 선물로 주었던 화분, 그 화분에 있던 꽃이.
곧 피어날 듯이 봉오리를 맺어 놓고서는 시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있던 탓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여러 사람을 애타게 하는 모습에 호슨 공작은 웃으면서 피어난 모습이 기대된다 말했다. 하지만 결국 호슨 공작은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리엘라는 화분 가까이 다가갔다. 봉오리의 색처럼 노란색의 꽃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는 탓에 꽃은 여러 가지 색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는 무슨 색이라고 설명도 할 수 없잖아.”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화분을 들어 품에 안았다. 공작이 꽃이 피면 가장 먼저 알려 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알려 드려야 하지?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던 리엘라가 코를 훌쩍였다. 일주일 내내 울기만 했는데 아직도 나올 눈물이 더 남아 있을 줄이야.
그러면서도 리엘라는 품에 안은 화분을 노려보았다. 너 나빠. 조금만 더 일찍 피었으면 얼마나 좋아. 공작님이 궁금하다고 했었단 말이야.
‘네아가 오기 전에 그쳐야 해.’
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았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알면 다시 네아가 걱정할 것이다. 어서 울음을 그치고 멀쩡한 척해야 한다. 그때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근처의 화분에 있던 나무들이 흔들렸다.
‘누구?’
네아가 아닌 좀 더 무겁고 거친 발걸음 소리였다. 아무래도 누군가 온실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리엘라가 당황하는 사이 넓은 잎을 젖히고 걸음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온실 관리자나 아니면 저택의 하인일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리엘라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얼굴이 보일 만큼의 큰 키에 넓은 어깨. 그다음으로 리엘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눈동자였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서늘하고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수 없이 이 온실을 들락거렸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침입자?’
유언장이 발표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공작저를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리엘라에게 적의를 품고 있거나 또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정문에서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았더니 담을 넘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네아는 그럴 걸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호슨 공작이 남긴 것이라며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안에는 크고 작은 문스톤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아는 그것들을 저택 곳곳에 놓았다. 그다음 네아가 그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을 손에 쥐고 뭐라 중얼거리자 저택에 놓여 있던 모든 문스톤들이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걸로 허가 받지 않은 자들은 공작저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 낯선 남자는 허가를 받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사람일 것인데….
리엘라가 당황하는 사이에도 남자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콧물 다 흘려 가면서 훌쩍이고 있었다. 지금 제 꼴도 꼴이지만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혼자서 온실 안에 서서 화분 끌어안고 울고 있는 모습이니 말이다. 왜 하필 이럴 때 닦을 손수건도 안 들고 온 걸까 스스로를 탓하며 리엘라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춘 듯 서 있던 남자가 리엘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리엘라의 앞에 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인가?”
***
호슨 공작의 소식을 들은 하운은 수도를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말의 절반은 호슨 공작에게, 나머지 절반은 리엘라라는 여자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왕궁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국왕의 집무실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운은 귀환하면 왕궁에 먼저 들러야 했다. 그것을 어긴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어쩔 수 없이 국왕을 찾아갔다.
“하운 아렐 펜드래건, 북부 전선에서 귀환했음을 보고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운은 레이안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렇게 외치고는 몸을 돌렸다. 집무실에 있던 레이안을 비롯해 대신들은 갑자기 나타나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는 하운의 모습에 모두들 눈을 끔벅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미련 없이 돌아서는 하운의 모습을 보던 레이안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 야! 하운! 거기 서! 야, 인마!”
그 목소리에 하운이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사상 국왕에게 그렇게 짧은 보고를 한 건 네가 처음일 거다. 너 지금 호슨 공작의 저택으로 가려는 거지?”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하고 가!”
레이안은 하운의 팔을 잡아끌어 집무실 옆방으로 들어갔다. 앉을 생각도 없는지 하운은 문 앞에 그대로 서서 국왕에게 말했다.
“뭐라 하셔도 절 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막을 생각은 없어. 단지 가기 전에 내 설명 좀 듣고 가라는 것뿐이다.”
레이안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동생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호슨 공작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녀의 유언장에 대해서 들었을 때,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안은 호슨 공작과 하운이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공작 대신에 하운이 전선으로 나가 싸운다. 그리고 그 대가로 공작의 보석을 받는다. 참으로 간결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어디에도 문서화되지 않은 약속이었다는 점이다.
레이안은 제 책상을 한번 흘깃 바라본 다음 다시 하운을 바라보았다.
“일단 너를 위해서 왕실의 변호사들이 다 알아봤어. 하지만….”
“유언장에는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 호슨 공작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했는지 아직까지 허점 하나 보이지 않아.”
레이안의 말에 하운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상속인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뭐?”
“그 리엘라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죽으면 공작의 재산은 어떻게 됩니까?”
“야, 너!”
미쳤냐고 하려던 레이안은 제 동생의 살기 형형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동생의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운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단지 제 것이 되었어야 할 것들을 빼앗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호슨 공작은 하운의 스승이었다. 하운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호슨 공작이 직접 가르친 보석술사는 하운과 네아뿐이었으니까. 사정상 네아는 호슨 공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할 수 없으며 공작의 재산 중 어떠한 것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운은 공작에게 말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당신의 모든 것을 자신이 이어받을 것이라고. 하운의 말에 공작은 짜증난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호슨 공작도 제가 이룩한 것을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퉁명스럽게 “이 모든 걸 그냥 줄 순 없으니 나 대신 플레노트 좀 때리고 오시던가.”라고 했을 뿐.
레이안은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호슨 공작은 자신이 이룩한 것들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운을 제 후계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레이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유언장을 쓰라 마라 말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레이안이 생각에 잠겨 하운을 말없이 바라보자 그는 조금 굳은 얼굴을 펴고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진담이었잖아. 나 지금 소름 돋았거든?”
“생각은 해 봤지만 그걸 실행에 옮길 정도로 제가 쓰레기는 아닙니다.”
“…….”
레이안은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 자식 진짜 화났구만. 어쨌거나 제 동생을 좀 말릴 필요가 있었다.
“넌 지금 법적으로 그 저택 안에 발도 못 붙여. 어쨌거나 공작의 유언은 이행되고 있고 저택은 지금 아무런 손님도 안 받고 있지. 공작이 남긴 문스톤들도 저택을 지키고 있고.”
“깨 버리면 되겠군요.”
“법적으로라는 내 말 듣기나 한 거냐? 그래도 네가 공작저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레이안의 말에 하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무엇입니까?”
“모든 귀족들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나서 국왕에게 그 사본을 보내야 해. 사실 이거 내가 너무 귀찮아서 하지 말라고 해서 다들 안 하고 있는 거긴 한데…. 어쨌거나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거긴 하거든? 안 보낸다 해서 유언장의 효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레이안은 빨리 말하라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레이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확인을 받지 않은 유언장에 대해서 국왕은 한 가지 권한을 사용할 수 있지.”
“그게 뭡니까?”
“감사관.”
“감사관?”
레이안은 장난스러웠던 조금 전과 달리 무게 있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호슨 공작의 유언장은 내 확인을 받지 않았고 이에 따라 나는 그 유언장이 제대로 작성되었고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을 원한다. 이에 따라 감사관으로 하운 대공을 임명하는 바, 가서 소임을 다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레이안의 말에 곧바로 일어선 하운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가기 전 잠시 그를 보더니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곧 문이 닫히며 하운의 모습이 사라졌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레이안은 혼자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호슨 공작의 문장이 찍혀 있는 편지 봉투가 있었다. 호슨 공작이 세상을 떠나기 전, 레이안에게 보냈던 편지였다. 편지 봉투를 보던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면 된 거지, 호슨?”
레이안은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에게 온 편지의 마지막에는 예전에 다 못한 인성 교육을 마저 할 생각이라는 호슨 공작의 말이 적혀 있었다.
레이안 역시 제 동생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운은 털을 바짝 세우고 돌아다니는 예민한 짐승 같았으니까. 하지만 하운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제 동생이 왜 저리도 사람들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자랐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생각한 대로 잘되면 좋겠어.”
레이안은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15յη
하운은 국왕의 임명장을 들고 곧바로 공작저로 향했다.
집사는 임명장을 들고 흉흉한 기세로 들어오는 하운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곧 이 저택에 들이닥칠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하운의 분노는 집사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하운은 집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나?”
“그 여자라 하심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공작의 유산을 가로챈 그 여자.”
서늘한 목소리에 집사는 리엘라가 어디에 있는지 숨길까 고민했다. 그래서 일부러 슬쩍 고개를 돌려서 네아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있었는데 문스톤들을 확인하러 간다며 자리를 뜬 네아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공작이 담이라도 넘어왔다면 문스톤들이 움직였을 텐데 이렇게 국왕의 임명장을 가져왔으니 막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막을 수도 없었고.
“당장 대답하도록.”
“…리엘라 아가씨는 온실에 계십니다.”
집사의 대답에 하운은 저택의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내내 하운은 저택 하인들의 태도가 의아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공작의 전 재산을 가져간 여자다.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공작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지 하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택의 하인들 역시 자신처럼 리엘라에 대해서 언짢은 반응을 보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훌륭하게 엇나갔다. 집사는 리엘라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오는 길에 마주친 하인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자신을 보더니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 되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멀리 있지만 그들이 ‘리엘라 아가씨’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을 잘도 휘어잡았군.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하운은 만난 적 없는 자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높였다. 하운이 온실에 도착했을 때 온실은 모든 창문과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래도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조용한 온실의 모습에 하운은 주변을 살폈다.
‘정말 여기 있으려나?’
그때 하운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울음소리였다. 그것도 필사적으로 억누른 소리.
‘누구지?’
리엘라라는 여자라면 아무도 없는 온실에서 울고 있을 이유가 없다.
‘웃고 있으면 모를까.’
공작의 유산을 죄다 물려받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이라면 신나게 웃고 싶을 것이다.
이대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하운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주변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건 어떤 상황이건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하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온실 안으로 걸었다. 다가갈수록 울음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저택의 하녀인가?’
하운은 이곳의 하인들에게 호슨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이 저택의 하인들은 대부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드래곤들과 몬스터들 때문에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 호슨 공작은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었고 일자리를 주었다. 그렇기에 이곳의 하인들은 진심으로 호슨 공작을 섬겼다.
‘공작을 추모하는 하녀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좀 이야기가 빠를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여자가 호슨 공작의 모든 것을 가져갔는데 좋아할 리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운은 제 앞을 가리고 있던 나뭇잎을 손으로 치웠다.
그 순간, 하운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작은 화분을 끌어안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 화분에 심어져 있는 꽃이었다.
작은 노란 꽃이 눈이 부실 만큼 빛나고 있었다.
하운도 아주 가끔 저런 꽃들은 본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황야에서. 때로는 왕궁의 정원에서. 아주 희귀한 확률로 볼 수 있었던 것들. 그것들이 얼마나 귀한지, 또한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하운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슨 공작이 알려 주었으니까.
그래서 자신도 그런 꽃들이 보일 때마다 가져와 제 보석들 옆에 두곤 했다.
그리고 지금 여자가 안고 있는 꽃은 지금까지 하운이 본 그 어떤 꽃들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하운이 고개를 돌렸을 때, 화분을 들고 있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뭔가, 아무 무거운 것이 제 가슴을 때린 것 같았다. 그 기묘한 통증에 하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통증이라고 해도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
리엘라는 어이가 없었다.
‘넌 누구냐니?’
그건 이쪽이 할 소리였다.
변호사들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방문자들은 저택의 현관 너머로는 들어갈 수 없게 했다. 일 때문에 새로 들어올 사람이 있으면 미리 리엘라에게 연락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저택 안에 낯선 사람이 들어올 일을 최대한 없도록 할 예정입니다. 혹시 낯선 사람을 보면 무조건 경계하십시오.”
크레이튼의 당부를 떠올리며 리엘라는 슬그머니 몇 걸음 더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조금 더 자세히 낯선 남자를 살펴보았다.
‘귀족이야.’
그것도 꽤 작위가 높은.
처음 본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하대하는 목소리에는 타고난 오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남의 저택에서 당당하다 못해 뻔뻔할 정도로 망설임 없는 태도와 차림새까지. 원래대로라면 리엘라는 바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호슨 공작이 그녀에게 남겨 준 것에는 단지 재산뿐만이 아니라 지위도 있었다.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대한 부를 상속 받은 리엘라에게 왕실에서는 레이디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호슨 공작의 것을 이어받은 자가 무조건 귀족들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리엘라는 귀족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리엘라는 침을 삼킨 다음 저를 보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 이곳이 제 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낯선 사람이 공작의 저택에서 제 집처럼 행동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긴 싫었다.
리엘라가 지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자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때 멀리서 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그 목소리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지?
리엘라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위험할 테니 차라리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겠군. 그 빛나는 꽃도 지켜야 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여기서 위험할 일이 뭐가….”
대답을 하던 도중 리엘라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설마 이 꽃이 보이나요?”
리엘라의 말에 남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이 꽃이 보이는 건가?”
순간, 리엘라는 호슨 공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보석술사라고 해도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닐세. 나나 네아 정도나 되어야 바로 알아볼 수 있을걸?”
그렇게 말하며 다른 보석술사들 눈에 안 뜨인 게 다행이라고 했다. 그때 리엘라는 물었었다.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냐고. 그 질문에 그거야 어렵지 않다는 듯 호슨 공작은 대답했었다.
“우리 외에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운 대공 정도이려나. 그 외에 몇 명 더 있을 것 같지만….”
그 말을 떠올린 리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 남자가?
“저기…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리엘라가 묻자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하운 아렐 펜드래건.”
“……!”
설마 했던 이름이 나온 순간, 리엘라는 왜 처음 보는 남자가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았다.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놀 때 몇 번이고 하운 대공작의 이야기를 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날카로운 눈매. 조금 거친 것 같은 얼굴은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동시에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고.
확실히 지금까지 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들었던 설명보다 좀 더 키도 크고 몸도 큰 것 같았다. 보석술사들은 기사들처럼 몸을 단련할 필요가 없으니 평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앞에 서 있는 하운 대공작은 가끔 보았던 기사들보다 더욱 큰 것 같았다.
리엘라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네아의 큰 목소리가 온실에 울렸다.
“야, 하운!”
“저것이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는 거지?”
저것?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었다. 네아는 하운과 함께 있는 리엘라를 보더니 더 크게 소리쳤다.
“당장 아가씨에게서 떨어지지 못…!”
리엘라는 네아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하운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제 품 안으로 거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부딪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 닿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에 리엘라는 순간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이 왜 날 끌어안는데?
“놔 주세요!”
리엘라가 놀라서 화분을 든 채로 버둥거렸다. 그러자 하운의 손이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리엘라를 붙잡았다.
하운은 제 품에서 버둥거리는 리엘라 때문에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끌어안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작고 부드러운 몸도, 따뜻한 체온도 지독하게 낯설었다. 하지만 그 감각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운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옆에 있는 게 싫어서 드래곤의 레어의 탐색도 혼자 가는 자신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있어 편한 사람이라고는 형인 레이안과 그의 부인인 레티시아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가족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은 가까이 오는 것부터가 싫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잠시만 가만히 있도록. 저걸 죽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일단은 되도록 빨리 ‘저것’을 죽여야 했으니까. 하지만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더욱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네?”
당황해하는 리엘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운은 네아를 바라보았다.
드래고니안 네아. 이제는 주인을 잃은 끔찍하고 저주받은 짐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