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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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일리 테니어
“다들 잘 있어요!”
리엘라가 크게 손을 흔들자 누얀을 비롯한 플라워 컷의 하인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꼭 다시 오셔야 해요, 아가씨!”
“1년에 두 번은 오셔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리엘라를 배웅했다. 처음부터 리엘라를 반기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인이 네멘테스와 손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던 카지를 처단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플라워 컷의 하인들은 더더욱 어깨가 으쓱했다. 보았냐? 우리 아가씨가 카르디아 출신이라고 막말했던 놈들 다 나와!
리엘라는 그들의 아쉬움에 답하듯 한 명 한 명에게 전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덕분에 잘 머물렀다 간다고 반년 후에 꼭 다시 오겠다 약속하며 플라워 컷을 나섰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내가 뭘.”
리엘라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하운을 보았다. 그는 한 시간 전부터 이런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멘테스가 이네나와 함께 플라워 컷을 찾아온 이후로 계속 이런 표정이었다. 옆에서 마차를 점검하던 네아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애새끼도 아니고 진짜, 꼴사나워….”
“넌 조용히 해.”
“어쭈? 치겠다? 치겠다? 어디 한번 붙어 볼래?”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리엘라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돌렸다. 어젯밤 늦게 돌아왔을 때, 네아는 팔짱을 낀 채 현관에서 지옥의 수문장처럼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몇 걸음 떨어져 있음에도 온갖 과일주의 냄새가 폴폴 풍겨 왔건만 네아는 얼굴만 조금 붉어졌을 뿐, 아주 멀쩡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운과 반 시간 넘게 주먹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 두 사람 다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서로를 등지고 휙 돌아섰다. 리엘라는 하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운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기 불편’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아침부터 네멘테스가 찾아오긴 했지만….’
***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네멘테스와 이네나가 플라워 컷을 찾아왔다. 인사 겸 맡길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어제 세공사들과 이야기를 끝냈어. 오팔은 다듬는 데 2주에서 3주 정도 걸릴 것 같아. 일단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해 달라고 네가 부탁했으니까 그대로 하긴 할 건데… 세공사들은 안에 있는 블랙 오팔을 꺼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더군.”
“그러면 힘이 약해지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옆에 있던 이네나가 냉큼 끼어들어 설명했다.
“요 며칠 살펴봤는데 안에 있는 블랙 오팔이 딱 달라붙어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겉의 화이트 오팔은 블랙 오팔을 감싸고 있는 케이스와 비슷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언니가 허락만 해 주신다면 천천히 반으로 가른 다음에 안쪽의 블랙 오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보는 걸 시도하고 싶어요.”
“굳이 블랙 오팔을 그렇게 따로 꺼내고 싶은 이유가 있는 거야?”
“그게… 알다시피 블랙 오팔은 정말 희귀한 거고, 그 힘도 무궁무진해요. 보석술사들이 더 잘 알겠지만 신의 영역에 가까운 힘들을 지녔다고 하니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생성, 소멸…같은 멋진 거!”
그러자 네멘테스가 넌 가만히 좀 있으라는 듯 이네나의 머리를 꾹꾹 눌러 대며 다시 설명했다.
“나도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다른 보석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힘이 나타난다고 하는군.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반대로 영구적인 소멸도 가능하다고.”
“영구적인 소멸?”
“나도 자세히는 몰라. 블랙 오팔은 세상에 몇 개 존재하지도 않고, 그 힘에 대해서도 각 나라가 비밀에 부치다 보니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네가 오팔을 샀다는 건 이제 슬슬 알려질 테고, 돌아가는 대로 카르디아 왕실이 너를 불러들여 오팔에 대해 묻지 않을까? 어차피….”
네멘테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하운 대공이 오팔에 대해 알고 있으니 너한테 주의 사항도 알려 줄 것 같고….”
그 말에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오팔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카르디아로 돌아가면 따로 왕실의 보석술사들에게 설명을 듣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일단 하운 님이 있으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저기… 하운 대공이 오팔을 관리하게 되나?”
네멘테스의 질문에 이네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멘테스의 질문은 하운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냐 물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질문에 리엘라는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순간 네멘테스는 고개를 푹 숙였고, 이네나는 그 옆에서 한숨을 쉬며 “두 번 죽었네….”라고 중얼거렸다.
***
아침에 네멘테스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던 리엘라는 손가락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하운의 옆구리를 힘주어 푹 찔렀다.
“흣!”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은 하운이 놀란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아무리 강한 보석술사라 하더라도 이런 공격은 막아 낼 수 없었다. 하운은 찔린 옆구리를 문지르며 리엘라를 보았다.
“어, 어째서….”
“네멘테스 잠깐 만나고 왔다고 내내 그런 얼굴 하고 있을 거예요?”
“…….”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네멘테스 때문에 이러는 거였어요? 일 때문에 만나고 온 거잖아요.”
“나도 그 자리에 데려갈 수 있었잖아.”
“일하고 있었잖아요?”
“말해 줬으면 멈추고 갈 수 있었어. 그리고… 위험하잖아.”
하운은 리엘라의 지적에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지긴 한 건가?’
예전에 자신에게 빛나는 꽃을 길러 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운은 저택에 드나드는 자들을 죄다 발가벗겨서 검사할 태세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게 더 수상하겠다는 의견에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보면 지금은 그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하운은 최대한 조심하면서 평소처럼 지내기를 바란다는 리엘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약속을 한 가지 더 하긴 했지만….’
리엘라는 흘끔 네아를 보았다. 그녀는 하운의 말을 듣고 아침에 먹은 빵이 올라올 것 같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벅벅 미는 시늉도 하면서. 평소라면 네아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웃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네아에게도 말하지 마.”
“네? 하지만….”
“그냥 나만 알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보다는….”
하운은 무엇 때문에 리엘라의 능력을 네아에게 숨기라고 하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하운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스스로가 갖고 있는 보석술사의 힘에 자신이 넘치는 하운이었다. 북부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플레노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는 마치 살찐 도마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감흥 없는 태도였다. 그런 그가 두려움을 보이다니.
처음 보는 하운의 모습에 리엘라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새롭게 알게 된 제 힘에 대해서 네아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
‘네아는 나에게 숨기는 것이 없을 텐데.’
자신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말할 수 없다니.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그래서 리엘라는 괜스레 조금의 원망을 담아 한 번 더 하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일로 만난 건데 정말 이럴 거예요? 자꾸 이러면 저도 하운 님 일하러 갈 때마다 따라갈 거예요? 여자 보석술사들 만나고 오면 화낼 거고요.”
“그건….”
하운은 턱을 괴더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살짝 풀리며 왠지 모르게 기뻐하는 듯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네아는 리엘라를 제 옆으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미쳤나 봐. 그것도 좋냐?”
***
소르디아에서 산 물품들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줄지어 소르디아를 빠져나간 지 한 시간 후, 일행은 어느 저택의 앞에 도착했다. 아침에 카르디아에서 알려 준 장소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저택들과 다르게 아름다운 장식이나 조각상, 그림 같은 것은 일절 없는 텅 빈 천장과 벽이 보였다. 그리고 일행을 맞이한 것은 카르디아의 옷을 입은 보석술사들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부탁하네. 도착 장소는 어디인가.”
“국왕 전하께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노고를 치하하신다며 제일 가까운 지점으로 지정할 것을 당부하셨기에 수도 안의 이동 지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동 지점은 사용 후 목록에서 삭제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알겠네.”
하운은 대화를 끝내고 리엘라에게 말했다.
“빨리 돌아갈 수 있겠는데?”
“제일 가까운 지점이 어디인데요?”
“공작저 후원.”
“…네?”
리엘라는 귀를 의심했다. 공작저 후원이라니?
“그게 원래… 호슨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지정된 곳이었어. 알다시피 호슨 공작은 왕실을 위협할 정도의 보석술사였고, 그녀가 반역을 꾀하면 꽤 큰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그녀가 왕실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면 곧바로 공작저 내부로 이동해 기습하는 목적으로 그곳이 지정된 거야.”
하운의 말을 들으니 새삼 왕실이 호슨 공작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호슨 공작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곳은 목적을 잃었지. 그러니 이번에 공개하고 목록에서 삭제할 모양이군.”
그때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는 자연스럽게 하운의 손을 잡고 빛의 문이 생기는 곳 앞에 섰다. 그러면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이거….”
“아, 그거.”
리엘라가 꺼낸 것은 불꽃놀이가 열렸던 밤에 샀던 오팔 뽑기였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 어색하고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리엘라는 제 손에 들려 있던 것의 존재를 깨닫고는 황급히 살펴보았다.
제발 오팔이기를 빌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나온 것은 널리고 널린 크리스털이었다.
“오팔까지는 아니라지만 다른 보석들도 나온다던데 왜 하필 크리스털이야….”
한마디로 꽝이었다.
이런 운은 없나 보다, 하고 리엘라가 실망하고 있을 때, 양쪽의 크리스털 색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런지 몰라 하운에게 건넸더니 하운은 갈라진 조각 중 한쪽의 크리스털이 기억을 담아 버린 모양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게… 아마 그때의 기억 같지만….’
리엘라는 붉어진 얼굴로 기억이 담겨 있는 쪽의 크리스털을 하운에게 건넸다.
“같이 샀던 것이니까 한쪽은 하운 님이 가져요.”
그날, 하운이 기억이 담긴 크리스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생각났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꽤나 갖고 싶어 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하운은 리엘라가 주는 크리스털 반쪽을 받더니 냉큼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냥 갖고만 있어요. 기억 꺼내서 보지 말고. 부끄러우니까.”
“…응.”
“지금 조금 늦게 대답한 이유가 뭐예요?”
리엘라가 하운을 은근히 추궁하고 있을 때, 빛의 문이 생겨났다.
“어서 가야겠어. 서두르자.”
하운은 실실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고 리엘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두 사람 역시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무 강한 빛에 눈을 감고 몇 걸음 걸었을까, 주변의 기온이 순식간에 달라지면서 바람에서 다른 냄새가 났다. 무척이나 익숙한 냄새였다.
리엘라는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정말 공작저다.”
정말로 도착 지점은 공작저의 후원 구석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 것을 눈치챘는지 공작저 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리엘라는 근처에 있는 바위 하나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뭔가 싶어 하운과 다가갔더니 바위 위에 적힌 글씨가 보였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 것.
“…공작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그러게.”
호슨 공작의 필체가 분명한 글씨였다. 그사이 공작저 안에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리엘라! 리엘라아아아!”
“어? 리나다? 리나야아아아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반갑게 부르면서 달려가 얼싸안았다.
“뭐야? 너 여기 왜 있어?”
“왜긴. 너 없는 사이에 심심해서 멜다 부인께 요리 배우려고 왔지.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저기에서 나타나냐? 진짜 신기하네. 이것도 보석의 힘이지? 그보다 소르디아는 어땠어? 재미있었어? 내가 부탁한 것들은 다 사 왔고?”
우다다 쏟아지는 리나의 말을 들으니 리엘라는 제가 정말로 카르디아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조금씩 혼이 나가고 있는 것 같은 리엘라를 붙잡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던 리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저택으로 가자.”
“왜? 무슨 일 있어.”
“있지. 지금 저택에 누가 왔냐면….”
그때 뒤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왔다.”
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아일리 언니!”
리엘라의 둘째 언니인 아일리 테니어. 그녀가 웃으며 리엘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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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다! 언니!”
아일리를 본 리엘라는 미친 듯이 달려가 아일리를 끌어안았다. 아니, 안으려고 했다. 아일리가 놀란 얼굴로 리엘라의 얼굴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일리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리엘라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얘가 미쳤나 봐! 왜 사람을 끌어안으려고 난리야, 징그럽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우니까 그렇지! 동생한테 징그럽다니. 너무한 거 아냐?”
“오랜만이어도 징그러운 건 징그러운 거야. 으악! 안지 말라고!”
이리저리 리엘라의 팔을 피하며 아일리가 소리 지르자 리엘라는 숨겨 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자꾸 이러면 레베카 언니한테 이른다! 편지에 다 써 버릴 거라고!”
“야! 리엘라, 너!”
‘레베카’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일리는 펄쩍 뛰어오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팔을 벌렸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마음대로 이 몸을 안거라.”
아일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엘라는 깔깔 웃으며 아일리의 품에 안겼다. 리엘라는 오랜만에 만난 둘째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일리는 테니어가(家) 세 자매 중 둘째였다. 리엘라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큰 키를 가졌지만 몸은 훨씬 더 말랐다. 그렇다고 해서 가냘파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짧은 옷을 입었기에 드러난 팔과 배는 마치 기사들처럼 근육이 꽉 잡혀 있었다. 운동으로 생긴 근육이라기보다는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붙은 근육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일리가 몸을 쓰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씻고 말리기 편하게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살짝 올라간 가는 눈은 날카롭고 강한 인상을 주었다.
“저번 편지에서 수도로 곧 오겠다더니 한참이나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괜찮은 거야?”
“어? 아아, 그거. 양 떼 주인이 갑자기 다른 일을 추가로 맡기는 바람에 급하게 처리하고 돌아오느라 늦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여름에 돌아온 거야? 항상 겨울에 돌아왔잖아?”
아일리의 일은 수만 마리의 양을 데리고 국경 지역의 주인 없는 초원을 돌며 봄부터 가을까지 양을 길러 내는 일이었다. 양 떼를 몰고 질 좋은 풀이 있는 초원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녀는 동시에 수의사이기도 했기에 다친 양을 치료한다거나 새끼를 받아 내는 일도 하고 있다고 리엘라는 알고 있었다.
“어, 그게… 너도 알다시피 플레노트가 수면기에 들어갔잖아? 그래서 북쪽 국경에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초원을 찾아 돌아다니는 게 좀 힘들어졌어. 그리고 나도 좀 쉴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
아일리는 흘긋 뒤에 있는 공작저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몇 달 만에 받은 소식이라는 게 내 동생이 왕국 최고 부자의 상속녀가 되었다는 거였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기 위해 푹 쉬기로 한 거지, 뭐. 그런데 정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수도까지 오는 길에 네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뭐 하나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역시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게 최고 아니겠어?”
리엘라와 에일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리나와 하운, 네아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리나 역시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기에 아일리의 팔을 붙들고 어리광을 피웠다.
“언니, 이번에는 어디 어디 다녀왔어요? 잘생긴 남자는 좀 만났어요? 오늘 밤에 우리 가게 와서 저녁 먹을 거죠? 엄마가 언니 돌아온 거 알면 돼지를 통으로 잡을 거예요.”
“좋지. 두 마리 준비해 두시라고 전하렴.”
“역시 언니야! 화끈해!”
아일리는 제 팔을 한쪽씩 잡아끄는 리엘라와 리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이야…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리엘라?”
“맞다, 내 정신 좀 봐.”
리엘라는 네아와 하운의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여긴 네아. 호슨 공작님을 모시던 분인데 언제나 나를 도와주고 생각해 주는 분이야. 내가 공작저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리엘라의 소개에 네아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아일리 역시 웃으며 네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아일리 테니어. 리엘라의 둘째 언니랍니다.”
“안녕하세요, 전 네아라고 해요. 호슨 공작님을 계속 모셨습니다. 지금도 공작저에서 일을 하며 리엘라 아가씨의 경호를 맡고 있어요.”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두 사람 사이에 피어났다. 하지만 악수를 한 순간 네아와 아일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일리였다.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는 분 같네요.”
“어머, 제가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러면서 두 사람은 손을 놓았다. 여전히 웃고는 있으나 상대를 향한 탐색의 눈빛이 섞여 있었다.
“어, 그리고 여기는… 하운 대공님이셔. 하운 대공님은….”
짧은 리엘라의 설명에 아일리는 하운의 앞으로 갔다.
“아, 괜찮아. 설명 안 해도 잘 알고 있는걸. 그런데 왜 하운 대공님이 여기에 계시는 거야?”
“어, 그게… 소르디아에 내가 잠시 왕실의 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그러니까 경호, 아니 일단 함께 움직여야 하고….”
“고용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하운 대공께서 이미 그 전부터 공작저에 계속 머무르고 계신다며?”
“어, 그게… 그러니까….”
아일리는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리엘라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운을 보았다. 그리고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보통 악수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하는 법이다. 아일리와 하운은 동갑이었으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운의 작위는 대공. 카르디아에서 국왕 부부를 제외하고 그가 고개를 숙여야 할 사람은 없다. 그런 하운에게 악수를 먼저 청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결례였다.
아일리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본 네아는 ‘어머, 언니. 언니도 저놈이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라고 외치는 것 같은 표정으로 흥미진진하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하운 대공님. 처음 뵙겠습니다.”
유난히 처음 뵙는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아일리의 목소리에 하운은 한숨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처음 보는군. 하운 아렐 펜드래건이다.”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
아일리를 끌고 공작저로 돌아온 리엘라는 우선 멜다 부인과, 크레이튼 씨, 집사는 물론 공작저의 하인들에게 잘 다녀왔다 인사를 하고 마차에서 내린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특히나 갑작스럽게 일을 해야 했던 크레이튼과 다른 변호사 그리고 공작저의 재무를 담당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많은 선물을 안겨 주었고, 그들은 값도 비싸고 구하기 힘든 소르디아의 유명한 술을 품에 안아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람들과의 인사가 끝난 다음 리엘라는 아일리, 리나와 함께 응접실에서 신나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데….”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리엘라의 말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리엘라는 오랜만에 멜다 부인이 가득 차려 준 과자를 물며 아일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런데 언니,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좀 오래 있을 수 있어?”
아일리는 겨울에 오면 일주일 정도 머물다 다시 훌쩍 떠나 버리곤 했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다음 일이 왔겠지만, 요즘은 양 떼 주인이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것 같아서… 일단 한 달 정도는 확실하게 별일 없을 거야.”
거기까지 말한 아일리는 무겁다는 듯 리엘라의 머리를 들어 소파에 툭 내려놓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화장실. 둘이 놀고 있어.”
아일리는 휘적휘적 걸어 방을 나갔고 리엘라는 리나와 남게 되자 소르디아에서 사 온 물건들을 풀기 시작했다.
“일단 네가 말한 것 중에 구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구해 왔다. 이 은혜는 어떻게 할 거지, 리나 레든?”
“우리 가게 1년 무료 시식권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흐음… 그것만으로는 좀….”
“아이고, 리엘라 님.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헤헤헤.”
둘은 낄낄 웃으며 손발이 척척 맞게 역할극을 하더니 곧 꺼낸 물건들을 늘어놓고 수다를 떨었다.
“확실히 소르디아가 덥긴 덥더라. 그래도 거기 옷 시원하고 예뻐서 좋았어. 너도 입어 볼래?”
“응! 그런데 너 거기서 뭐 다른 일은 없었어?”
“다른 일이라니?”
“뭐긴 뭐야. 연애 사업이지. 소르디아가 그렇게 반짝반짝하고 분위기가 끝내준다며. 경매 마지막 날의 불꽃놀이도 예쁘고. 그러니 너랑 하운 대공님도 뭔가… 야? 야? 너 얼굴 지금 장난 아니다?”
“내가 뭐!”
“헤헤헤, 일이 있긴 있었군. 자자, 어서 이 리나 님께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지?”
“없었어!”
“감히 나에게 거짓말을 하려 하다니. 리엘라 너, 나 속여 넘기려면 한참 멀었어. 이미 얼굴에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쓰여 있거든?”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혹시… 설마….”
중얼거리던 리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운 대공님 그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짐승이네.”
“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냥 키스만 했다고!”
“오호, 그건 했다는 거군.”
“헉!”
저도 모르게 진실을 내뱉은 리엘라가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리나는 우아한 동작으로 멜다 부인이 만들어 준 오랑제뜨를 하나 물며 말했다.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순히 말하렴. 리엘라.”
***
방을 나온 아일리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복도를 걸었다. 레베카가 보았다면 “아일리 테니어어어! 그렇게 껄렁거리는 자세로 걷지 말라고!”라며 소리쳤겠지만 첫째인 레베카는 대륙 끝의 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으니 이 모습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아일리는 화장실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걸어 끝에 있던 방의 문을 열었다.
“아, 여기 계셨네.”
방 안에는 하운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아일리가 들어오자 몸을 일으켰다. 아일리는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하운은 팔짱을 낀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운은 무척이나 불손한 태도를 하고 있는 아일리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양 떼 주인?”
“아, 왜 그래요. 아일리 테니어로 하운 대공을 만나는 것은 처음 맞잖습니까. 그리고 양 떼 주인이라고 말 안 하면 리엘라 앞에서 국왕 전하라고 해요?”
하운은 뻔뻔하게 대답하는 아일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리엘라의 언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임무용 이름을 썼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겠지만… 그렇지 않나, 양치기 씨.”
아일리 테니어는 양치기였다. 다만 여느 양치기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모는 양들의 주인은 레이안이라는 것과 그녀의 주 임무가 양 떼 관리가 아닌 최전방의 감시와 몬스터들의 현황 파악이라는 것이었다.
보석술사와 군 병력은 한정되어 있기에 아무리 카르디아라 하더라도 국경 지역 전체에 그들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별문제가 없는 지역의 순찰은 그곳을 잘 알고 있는 민간인을 고용해 살펴보고 있었다. 아일리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보통은 ‘레인저’라 불렸지만 아일리는 끝까지 자신은 양치기라 우겼다.
그리고 아일리와 하운은 플레노트의 레어 근처에서 오래전에 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어쨌든 리엘라에게는 비밀입니다? 저 녀석 이 사실을 알면 당장 레베카 언니에게 편지를 쓸 텐데… 그러면 우리 언니 당장 달려와서 제 멱살을 잡고 그만두라고 할 거라고요. 참, 그보다 리엘라에 대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일리는 하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서얼마 우리 리엘라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건 아니죠?”
“맞는데.”
“…그럴 리 없어요. 우리 막내 지금까지 남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는 순둥이인데, 어떻게 첫 남자 친구가 대공입니까? 안 돼. 난 용납 못 해. 이 연애 반대야.”
그 순간 옆방에서 ‘앗싸!’라며 좋아하는 네아의 목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네아가 훔쳐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지만.
하운은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일리를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중요한 건 리엘라의 의견이지. 미리 말해 두지만….”
하운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내일부터 같이 살 집을 꾸미러 갈 걸세.”
우지끈. 옆방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