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cover Professor at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680
680화 흑기사 (1)
쿠구구궁.
갈라하라드 성채 입구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
그 나무의 아래로 잘게 뻗어져 나온 잔뿌리가 주변 땅을 갈아엎으며 침입자들을 계속 밀어냈다.
세계수의 뿌리 중 한 갈래가 변형되어 생긴 나무.
거기에 난 자잘한 뿌리는 어떻게 보면 세계수의 뿌리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지가 뒤집히고, 땅이 갈라지며 주변으로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그 여파는 갈라하라드 성채 내부의 깊은 곳, 루드거와 수르나가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쿠구구궁.
바깥에서 흔들리는 진동.
천장의 먼지가 부스스 떨어지고, 일부 형광이끼가 떨어지며 빛 가루가 눈처럼 내렸다.
그 속에서 루드거와 수르나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거였나.”
수르나의 이야기가 전부 끝났을 때, 루드거의 눈빛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같은 목적 때문에 수르나와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그를 경계하는 루드거였다.
하지만 지금 수르나를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아닌, 약간의 연민과 동질감이 깃들어 있었다.
“너도, 나와 같은 경우였군.”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보통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믿지 않거나 아니면 미쳤냐고 할 텐데.”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준 적이 있나?”
“뭐, 사실 세타델에게는 말한 적이 있지만. 그것도 제대로 말하지는 않았지. 그냥 걔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쪽이니까. 그래서 솔직히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비웃지 않는다.”
“…….”
“적어도 나만큼은, 너를 비웃지 않아.”
루드거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수르나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런가. 설마하니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렴풋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서 접근한 것은 맞지만, 막상 루드거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뭔가 느낌이 묘했다.
그 순간 수르나와 루드거가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반응.
지하 신전의 외벽 때문에 바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둘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익숙한 힘의 파동.
“이 힘은.”
여타 신성력과 다르게 그 밀도와 순도부터가 남다른 신성력의 파장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루드거와 수르나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최소 추기경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인가? 살레신이 직접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텐데, 이 정도 규모의 힘이라니.”
“성녀야.”
루드거의 중얼거림에 수르나가 답했다.
“성녀 캐서린. 그녀가 지금 이곳에 온 모양이야.”
“…….”
캐서린이라는 이름에 루드거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그 변화는 너무나도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수르나는 그걸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다.
“성녀만 있는 게 아니야. 느껴지는 힘으로 추측건대, 아마 제사장들을 모조리 끌고 온 모양이야.”
“그 외에도 더 있지 않나.”
꿰뚫어 보는 루드거의 말에 수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 아가씨도 온 모양이야.”
“네가 내 힘이 필요한 것도, 동시에 리네가 지닌 성녀의 힘이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부정하지는 않겠어. 다만 리네라는 아이가 여기에 오도록 강요한 적은 없어.”
“하지만 올 걸 알고 있었겠지.”
“그래.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나?”
수르나의 질문에 루드거가 손에 쥔 렐릭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달라지는 건 없지.”
그래.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대가 누구라도, 이곳에 누가 오더라도.
그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같았다.
“성녀가 왔다면 방어선이 뚫리는 건 시간 문제야. 네 동료들의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성녀와 제사장들의 힘은 솔직히 그 이상이니까.”
“알고 있다. 그러니 어서 시작하도록 하지.”
루드거가 신전의 중심, 중앙 제단의 위로 렐릭을 놓았다.
7개의 조각이 하나로 모여서 온전한 원판으로 이루어진 렐릭은 제단의 위에 놓는 순간 저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렐릭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 신전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그 빛의 기운이 제단을 통해 한 점으로 모이며 렐릭을 향해 쏘아졌다.
드드드드드.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지하 신전이 가동됐다.
렐릭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힘을 계속 빨아들였다.
파스스스.
렐릭의 표면의 위로 새하얀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어에 대한 지식을 지닌 루드거조차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상형 문자들이었다.
그 문자는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느리게 생성되며 조금씩 렐릭의 표면을 덮어 갔다.
“드디어.”
수르나는 변화하는 렐릭의 모습을, 그리움과 황홀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시작이다.”
* * *
“빌어먹을.”
암벨라 버크의 입술을 비집고 욕이 흘러나왔다.
평소에도 거칠게 말을 하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는 그녀의 부하들도 별로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돌아 버리겠군. 초인들의 전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거였나?”
암벨라는 식물의 뿌리를 통해 상황을 보고받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암벨라님. 피해가 막심합니다.”
“가시덩굴은 전부 뚫렸습니다. 꽃밭도 거의 절반 이상이 불타서 수면향의 농도가 옅어졌고요.”
본래 계획대로라면 아직 뚫리면 안 되는 구역이 뚫리고 말았다.
최소한 머릿수를 채우는 보병들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해 줘야 하는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이제 밀려 드는 군대를 다시 막는 데 치중해야 했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야. 제일 거슬리는 녀석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성녀 캐서린과 그녀가 이끄는 제사장 무리.
다른 사제와 성기사들은 이끌지 않고서 소수로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집단.
하지만 그 힘은 전장의 판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꿔 버릴 정도였다.
뿌리를 통해 보고가 올라왔다.
지상에 태양이 강림했다고 한다.
그것에 무슨 소리냐고 묻지 못했다. 당장 먹구름 저 너머, 아주 멀리 떨어진 제2 검문 도시 근방에 눈 부신 빛이 솟구쳤으니까.
성녀 캐서린이 사용한 성법이었다.
그 성법으로, 기사들마저도 막아 세우고 있던 늪지대와 연꽃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늪은 바싹 말라서 가뭄의 논밭처럼 쩍쩍 갈라졌으며, 그 위에 피어난 연꽃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강력한 최루 효과와 통증을 선사하는 악취조차 캐서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2 검문 도시를 거치지 않고 그냥 다른 길로 지나가고 있어.’
보통 다른 우회로는 가지 못하도록 온갖 트랩을 설치했지만, 캐서린에게는 소용 없었다.
그녀가 가는 방향이 곧 길이었다.
세계수의 축복을 가득 먹여서 키운 개량 식물은 캐서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가주님. 어쩌면 좋습니까?”
“우선, 드루이드들은 꽃밭의 복구에 힘써라.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성녀는 지나간 길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있다. 그녀가 만든 길을 따라 후속 부대가 돌입하기 전에 저지해야 해.”
“하, 하지만 성녀는…….”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실력으로는 막을 수 없다.”
아니, 당장 암벨라가 검을 들고 나간다면 최소한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자리를 비우게 되는 순간, 전황은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게 될 것이 자명했다.
소수 게릴라 부대를 통해 치고 빠지기를 시도하던 캐롤라인은 현재 다른 렉서러 등급 마법사와 전투 중.
대악마 수르나의 경우에는 현재 루드거와 갈라하라드 성채에 있어서 불가.
결국, 지휘권은 여전히 이쪽이 쥐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자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순간도 비우면 안 됐다.
“그렇다면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상대가 초인이라면.
이쪽도 똑같이 초인으로 틀어막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흑기사를 불러.”
* * *
캐서린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에 세상이 마치 겁을 집어먹고 위축된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녀의 앞길을 막아서던 온갖 트랩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캐서린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머리 좋네. 어차피 이런 걸로는 나를 막을 수 없으니까, 기존의 전력은 온존해서 후속 부대를 막을 생각인 거겠지.”
지휘관의 판단이 탁월하다.
보통은 이렇게 뚫리면 자존심이 상해서 누가 이기나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감정적으로 굴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이 트랩으로 활용되는 식물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주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담긴 식물들.
게다가 지니고 있는 특수한 능력은 기사나 마법사, 심지어 사제에게도 먹힐 정도였다.
‘이런 게 가능한 거면 최소한 엘프 드루이드. 아니, 드루이드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걸 보면…….’
엘프 왕국이 이 일의 배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왜 엘프들이 브레투스 성국에 찾아온 걸까.
과거 엘프를 이단으로 배척하던 루멘시스 교리에 대한 복수?
하지만 그들은 숲에서 매우 폐쇄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복수를 하려 했다면, 특히 지금처럼 대륙의 모든 화력이 집중된 순간을 노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터.
‘뭐, 상관 없지만.’
캐서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저 제 갈길을 갔다.
방해꾼이 없으면 없는대로 편하니, 그녀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후속 부대가 따라오고 말고는 그녀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때 뒤에서 잠자코 따라오던 리네가 입을 열었다.
“저, 캐서린 언니.”
“응?”
캐서린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리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그, 남겨진 제사장 두 분은 괜찮은 건가 해서요.”
“그건 괜찮을 거야. 두 아이는 저렇게 보여도 아주 강하거든. 너도 봤잖니?”
“아…….”
리네는 당시에 말하지 못했지만, 렘리아와 아니샤 제사장이 싸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저 성녀 캐서린의 옆을 따라다니는 시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전투에 돌입한 둘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사실 보통이 아닌 수준이 아니라 가히 초인에 가까웠다.
그런 실력을 지닌 둘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언제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터가 아닌가.
“후후. 리네는 되게 착하구나. 우리를 걱정해 주기도 하고.”
“어, 그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걱정해 주는 마음으 고맙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해.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잖아?”
“네…….”
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겨진 사람들이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들을 돕겠다고 발걸음을 늦추는 순간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최악을 막기 위해서 차악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캐서린이 그런 리네를 보며 기특하다는 미소를 짓는 그 순간이었다.
캐서린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더니,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리네는 그런 캐서린의 행동에 의하해했다가,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캐서린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검붉은 섬광이 지나쳤던 것이다.
섬광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검붉은 섬광은 화살처럼 캐서린의 급소를 꿰뚫고자 했다.
너무 강력한 공격이라 막을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그 속도는 가히 섬광이 가까웠다.
리네의 눈에는 무수한 검붉은 거미줄이 펼쳐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러한 섬광 속에서도 멀쩡했다.
한 발짝 내디디고.
어깨를 살짝 틀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정말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아해서 누가 보면 춤이라도 추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캐서린은 그 모든 공격을 눈으로 보지 않고 다 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격이 마침내 그쳤을 때, 캐서린의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으음. 슬슬 누군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작부터 상당한 난적이 온 모양이네.”
검은 갑옷을 입은 베롬은 그런 캐서린을 보며 검을 고쳐 쥐었다.
리빙 아머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면서 베롬은 이제 묵직한 기사의 모습이 아닌 얇상하고 날렵한 기사의 형태를 취하게 됐다.
투구도 뾰족해서 마치 용의 모습처럼 변했고, 그 뒤로 붉은 갈기같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자라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검 또한 대검에서 얇고 긴 곡도의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속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런데도 베롬은 캐서린에게 어떠한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
‘돌아 버리겠군.’
상대가 교단의 성녀인 것도 그런데, 자신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했다.
심지어 전조도 없이 날린 기습조차 말이다.
싸움에서 정정당당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선수필승을 했는데, 그걸 너무나도 쉽게 회피하다니.
‘성녀라고 해서 그저 허울뿐인 직위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그 엘프 아줌마가 나한테 막아 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
암벨라는 베롬의 실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성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막아 달라고 했다.
그 사소한 차이를 그때는 몰랐는지 캐서린의 실력을 본 지금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발목을 잡히고 싶지는 않은데.”
그때 베롬을 본 캐서린이 조금 난감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그녀의 뒤에 있던 제사장 중 한 명이 나섰다.
“제가 처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