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cover Professor at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8
◈ 8화 거짓 신분 (3)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 안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저 갈아입을 의복과 서책이 전부.
그 외에 여러 서류와 잡다한 물건들 정도려나.
‘뭔가 더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교재와 마법책, 논문은 하나로 뭉쳐서 따로 놔두고, 옷도 적당히 추려서 치웠다.
책들의 경우에는 마법책 말고도 대중 소설이나 유명한 과학자의 에세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별 잡다한 걸 다 읽었군그래.
그 외에 물건들은 편지 몇 장, 신분증, 개인 소유 도구들이 전부.
도구라고 해도 휴대용 회중시계나 마법의 매개체로 사용할 소형 파이프와 돈이 담긴 지갑 정도다.
나는 바로 신분증과 서류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루드거 첼리시. 북 대륙의 중소왕국인 퀘오덴의 몰락 귀족 출신. 형제자매는 없고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군.’
나쁘지 않다.
몰락한 귀족이지만 명목상 귀족이라는 직위를 지니고 있으니 어딜 가서도 크게 무시당하지는 않을 거고, 가족이 없으니 나를 알아볼 사람도 없다.
‘어디 보자. 전적이 엄청나게 화려하군. 마탑에 논문을 12개나 제출한 데다, 최연소 4위계? 심지어 군 장교까지 했다고?’
역시 세오른의 교사라 이건가 싶었다.
젊어 보이는 나이에 이 정도나 되는 전적이라니.
‘가르치는 과목은 마법 발현과 그에 따른 특화인가. 마력 방출과 속성 원소가 메인이군.’
발현이 특화인 걸 보면 아무래도 과목에서 실전 전투를 가르칠 확률도 높았다.
나는 편지를 펼쳐 내용물을 살펴봤다.
혹시나 지인과 대화를 주고받은 게 있다면 사소한 버릇 같은 걸 캐치해서 익혀 둬야만 했으니까.
‘편지의 내용은 별거 없네.’
지인과 주고받은 거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곧 아카데미에 부임한다거나 어떤 책이 좋다거나,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형식적인 대화가 전부였다.
군에 몸담았을 때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없었던 거 같다.
범생이 스타일이었던 걸까.
사적인 내용이 거의 없는 걸 보면, 편지를 주고받은 대상과도 딱히 그렇게 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건…….’
개강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적인 수업 내용과, 이 세오른 아카데미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에 대한 정보다.
일단은 부지 내부를 돌아다니며 세오른의 지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꼬르르륵.
당장에 바깥으로 나가려던 나는, 배에서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열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내일부터 하지 뭐.’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적으로 지쳤다.
일단 밥부터 먹고 오늘은 푹 쉬도록 하자.
* * *
그로부터 2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세오른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이곳의 지리에 대해서 파악했다.
처음 봤을 때 예상했던 대로, 이 세오른 아카데미의 부지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괜히 사람들이 세오른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군.’
나는 한적한 카페의 야외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경치를 구경했다.
대충 확인할 것도 다 끝났고, 지금은 앞으로 있을 수업에 대해서만 고민하던 중이었다.
‘개강 시기가 다가와서 그런가. 학생들이 자주 보이네.’
세오른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제복 디자인도 남자들 건 멋지고 여자애들 건 예쁘다.
제국에서 명망 있는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복이라고 했던가.
과연 마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 그런지, 개중에는 빗자루를 타고 날거나 이상한 기계 인형을 타고 움직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청춘들을 보니 참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 오고 난 뒤로 매일이 치열한 전쟁이었는데, 저런 아이들은 타고난 재능과 환경 덕분에 축복받은 삶을 사는구나.
“흠.”
이쪽을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 둘이 나를 슬쩍 보더니 저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평소에 못 보던 사람이 개강 전날부터 이렇게 있으면 나라도 의심이 들겠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서 커피를 홀짝였다.
다 마시고 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1주일 뒤에 있을 오리엔테이션이나 준비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커피를 전부 마시고 일어나려는 순간, 내 옆 테이블에 한 여성이 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새로 온 손님인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왜 2주일 동안 연락이 없으셨던 겁니까?”
“……?”
나도 모르게 돌아가려는 고개를, 내 본능적인 직감이 멈춰 세웠다.
──턱.
나는 자연스럽게 다 마신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
지금 나한테 한 소리인가?
나는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나한테 말을 건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한 건데 여기서 내가 반응하면, 그보다 쪽팔린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없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나와 내 옆 테이블에 앉은 여성뿐.
즉 저 사람은 지금 나한테 말을 건 것이다. 아니, 이걸 말을 걸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하고 노심초사했습니다. 다른 회원들도 퍼스트 오더 님께서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
회원.
퍼스트 오더.
초면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
이것만으로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매우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 * *
‘뭐지.’
나는 손에 쥔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저 평범하게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풍류를 즐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이상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내게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나를 높여 부르는 정중한 어조에 회원들이 어쩌고 하는 말투.
정신 이상자? 아니다. 저건 진심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걸까? 아니다. 그녀는 제대로 찾아왔다.
─내가 아닌, 루드거 첼리시라는 사람을 찾아온 거다.
상황을 판단한 순간 내 입이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잠시 확인할 것들이 있었다.”
“이번 테러 사건에 관련해서입니까?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입니다. 하필이면 반란군 녀석들이 퍼스트 오더 님이 탑승한 기차를 습격할 줄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다른 것도 다. 세오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사전에 전해 받으신 정보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크니까.”
“그, 그렇군요.”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
에라 모르겠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는 그쪽 일은 잘 처리했나?”
“네. 물론입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아카데미 요인 암살을 전부 완료했습니다. 대부분 사용인이었지만요.”
뭐? 아카데미 요인을 암살해?
순간 몸을 들썩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조직 내 배신자가 드러나 그쪽도 처리했습니다.”
뭐? 배신자? 처리?
배신자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나는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물었다.
“처분이라. 어떤 방식으로 했지?”
“사지를 뽑아서 갈아 본인의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나머지 몸통은 들개에게 먹이로 줬다고 하더군요. 제가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다른 회원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할 수 있겠죠.”
“…….”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놈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내 정신은 더욱 차분해졌다.
주변 공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자 옆에 앉은 여성이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듣고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됐다. 그보다 지금 갑자기 날 찾아온 이유는?”
“그, 그것이. 퍼스트 오더 님이 이곳에 들어오셨는데 지난 보름 가까이 아무런 소식이 없으셔서…….”
“그래서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제멋대로 움직였다?”
말을 하면서 분석한다.
저쪽은 나를 루드거가 아닌 퍼스트 오더라고 불렀다.
이름 앞에 퍼스트가 들어간 걸 보면 조직 내에서도 꽤 높은 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걸 믿고 조금 허세를 부려 봤더니 그게 정답이었나 보다.
“히, 히익! 죄송합니다!”
곧바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일 것 같은 여성에게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용히 해라.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싶은 건가?”
“흡. 죄, 죄송…….”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마라.”
“…….”
“그래. 안 그래도 슬슬 확인할 때가 됐지. 지금 멤버는 얼마나 모였지?”
“네, 네?”
“회원들이 얼마나 이 안에 있냐는 거다.”
“아!”
그녀는 최대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현재 서드 오더 31명과 세컨드 오더 7명이 잠복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퍼스트 오더 님은 계획대로 먼저 들어오셔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흠. 적당하군.”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최대한 주워들은 정보를 조합했다.
대충 눈치챈 것은 퍼스트 오더라는 자가 나 말고도 하나 더 있다는 것과, 이놈들이 거의 40명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오른에 이 정도의 숫자를 심을 정도라면 그 능력도 범상치 않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지금 눈앞의 이 녀석은 내 정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려나.
오히려 두려움과 존경이라는, 경외 어린 시선을 실시간으로 보내 온다.
‘역시 퍼스트 오더 님!’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일 정도.
저런 모습을 보니 최소 무언가 이용해 먹을 수 있어 보인다.
“알겠다. 확인도 끝났으니 나는 이만 일어나 보지.”
“아! 그 차후 접선을 하실 경우에 지정된 장소로 오시면 됩니다.”
약속 장소? 아니 그런 곳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가 어디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라고? 지금 너 따위가 내게 멋대로 오라 마라를 논하는 거냐?”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녀석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쪽의 허세가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새끼 다람쥐처럼 몸을 덜덜 떨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 저는 단지…….”
“변명은 듣기 싫다. 앞으로 접선이 필요할 때는 이쪽에서 정한다. 장소도 시간도 마찬가지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정말 알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나와 같은 퍼스트 오더가 부르는 경우에만 허락하겠다. 아니면 그보다 더 위.”
“더, 더 위라면 설마 제로 오더 님?”
제로 오더가 있구나.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였다.
“그래. 그분의 말씀 외의 자잘한 건으로 나를 귀찮게 굴지 말도록. 알겠나? 이건 경고다.”
그러니까 처신 잘하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고 하는데 ‘저기’ 하고 뒤에서 녀석이 나를 불렀다.
자리에 멈춰서며 고개만 살짝 돌려 녀석을 응시했다.
“뭐지?”
“그, 그것이…… 저희를 부르실 때 어떻게 하실 건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따로 설명을 안 했구나.
하지만 나도 모르는 방법을 바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리가.
“……그걸 내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히익!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번만 넘어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쿵쿵쿵!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다급하게 2층의 침실로 올라가 옷장 안에 넣어 둔 슈트 케이스를 꺼냈다.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에 담겨 있던 편지들을 침대 위에 흩뿌린 뒤 하나둘 확인한 나는, 불안한 상상이 결국 현실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하, 젠장.”
편지를 보면서 느꼈던 기이한 이질감.
어째서 가족도 없는 지인과 이런 형식적인 말을 굳이 편지로 주고받았는가.
이렇게 화려한 전적을 지닌 남자가 왜 이렇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사생활을 자제했는가.
그 모든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애초에 이건 평범한 편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편지 내부에 적혀 있는 특정 단어의 특수한 문자들을 훑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느꼈던 그 이질감은, 바로 이 문자들이 지닌 일정한 패턴에 있었다.
그래.
이건 ‘암호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게 사용하는 그들만의 암구호.
편지들을 집어 던진 나는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를 다시 읽었다.
‘몰락 귀족? 가족이 없어? 심지어 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중소국가의 외지 출신?’
그 모든 것이 가짜.
화려하기까지 한 과거의 흔적들까지 전부 다 거짓.
루드거 첼리시라는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공을 들여서 만들어진 신분이었던 것이다.
왜 몰랐을까. 왜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상적인’ 신분을 내가 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걸까.
‘그럼, 열차에서 만났던 그 루드거의 정체는…….’
이 세오른 아카데미에 숨어든 비밀 결사에 소속된 멤버.
심지어 퍼스트 오더라는 명칭을 지닌 간부.
그리고 내가 지금, 녀석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미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아주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위험한 핵폭탄이었다니.
완전 조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