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11
했다. 지금은 유소청과 입씨름할 여유가 없었다.
‘아!’
범위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버렸다.
천해원들은 선장실을 보고 있지 않다. 파도가 범선을 찍어
누르는 순간 눈길을 놓쳐버렸다. 파도가 조금만 여유를 준다
면 정신을 수습하겠지만 야속하게도 인정 사정없이 몰아붙인
다.
“거루로 가라! 배를 버려야 돼!”
범위는 멍하게 앉아있는 유소청을 다그치면서 마지막으로
천해원들을 바라보았다. 본능이었다. 해일이 덮쳐오는 시간과
거루까지 갈 수 있는 시간차를 계산하기 위한.
순간, 그는 삼판을 가로지르는 인영(人影)을 보게되었다.
또? 낯선 사내다. 사내는 나는 듯이 삼판 한 가운데를 질주하
며 연속 뭐라고 고함쳤다.
정신 차렷! 우현으로! 아딧줄을 잡아 당겨!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그런 소리.
천해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딧줄을 바짝 잡아 당겨
선수(船首)를 우측으로 돌렸다. 파도가 적이라면 바람은 우
군. 적시에 알맞은 바람이 돛폭을 휘감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르르륵……!
집채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해일은 간발의 차이로 범선의
옆면을 훑고 지나갔다.
“등골이 짜릿하게 울리는군. 저 사내…… 바다를 잘 알아.
나보고 사형이라고 했나? 처음 듣는 호칭 같은데 싫지는 않
군. 그럼 묻지. 저 사내 도대체 누구지? 무공도 평범하지 않
고.”
“비건.”
범위의 눈꼬리가 찢어질 만큼 부릅떠졌다.
‘바다도 잘 알고, 지도력도 뛰어나.’ 하는 말을 마저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졌다. 불타고 남은 잔해처럼 하얀
재만 남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비, 비건…… 비건이라고 했나? 지금?”
“그 사람이에요.”
“하! 하하! 하하하핫……”
범위는 자신이 왜 웃는지 이유를 몰랐다.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왔고,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2
제 일급 관찰 대상자.
관찰대상자는 장문인이 직접 선정한다.
장문인의 안목은 정확할 수밖에 없다. 비파(秘波)라는 조직
이 있어 사전에 관찰 대상자의 과거나 배후, 해남도에 들어온
목적 등을 알아내니까.
다른 경로로 관찰대상자가 선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범위를 비롯한 해남오지 다섯 명은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했
지만 장문인에게 관찰 대상자 선정을 건의할 권한은 있다. 그
리고 그럴 경우, 감시 및 처리에 관한 권한은 인간관계나 은
원(恩怨)이 가장 깊은 자에게 주어진다.
한광은 선착장에서 모욕을 받았다. 굳이 모욕이랄 것도 없
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범위는 검을 빼들기까지 했다.
원인을 따지자면 사소했지만 은원으로 따지자면 무시하지
못한다.
유소청은? 그녀와의 은원은 더욱 깊다.
아니다. 상대가 비건이라면 누가 깊다 얕다 말할 수 없다.
팔 년 전, 비가와 유가를 제외한 십가(十家)의 영재(英材)들
은 모두 적엽명과 겨뤄본 적이 있다. 그리고 패했다. 말도 안
되지만 실제로 결과는 그렇게 나왔다.
‘기습을 받았습니다.’
한광이 한 말이다.
‘초식(招式)이 음험합니다. 생사를 가름하겠다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통에…… 같은 해남문도끼리…… 차라리 양보하는
게……’
전혈이 한 말이다.
석불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가 실력이 없어서……’라는 말
을 했다. 누가 봐도 실력이 없어서 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암
수(暗手)! 석불이 하는 말을 들으면 꼭 암수 때문에 졌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범위는 병장기의 열세를 말했다.
목검(木劍) 비무인 줄 알았더니 진검(眞劍)을 들고 나왔다
면서.
다른 육가 영재들의 변명도 비슷했다.
여족인과 어울려 술타령만 일삼던 비건은 해남파를 욕되게
한다는 이유로 결국 파문(破門) 당했고, 해남도를 떠나갔다.
편히 떠나지도 못했다.
파문이 확정된 이상 그의 생사가 어떻게 되든,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 간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해남도 안
에서만은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발가벗고 선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처지였다.
난생 처음 패배를 당한 십가의 영재들은 포구로 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죽지 않고 해남도를 떠난 것만도 기적이다.
십가의 영재들이 각 가문에서 데리고 온 무인들 총 인원은
백여 명.
그 중 일곱 명이 죽고, 여섯 명이 재기불능(再起不能)의 타
격을 받았다. 그도 중상(重傷)을 당했다. 며칠동안 잠을 이루
지 못할 만큼 처절했던 악전고투(惡戰苦鬪)였으니.
그가 돌아온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군.”
범위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모두들…… 그를 제물로 삼으려 할 거예요. 한사형도, 석
사형도, 전사형도, 그리고…… 범사형도.”
“그래서 그를 맡겠다고 했나? 살리고 싶어서?”
범위는 다시 질투가 끓어올랐다.
과거 유소청과 비건 사이는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 상대……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
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미 잊은 줄
알았는데, 여인은 불안하게도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질투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아니다. 후후!”
유소청은 범위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새초롬한
표정으로 돌아가 발 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제일급 관찰대상자. 이름 적
엽명. 선참후계(先斬後啓) 가(可). 이유는…… 백부(伯父)의
복수. 맡을 자격이 되나요?”
그 정도로는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시, 적엽
명 비건에게 죽거나 상한 무인 열 세 명은 모두 친척이나 형
제들이다. 다른 가문은 제쳐두고 유소청을 제외한 해남오지
네 명과 연관된 사람만도 다섯 명이다.
강성오가(强盛五家)는 중성오가(中盛五家), 약성이가(弱盛
二家)와 달리 패배에 민감하다. 그런 이유로 한가, 범가, 석
가, 전가에서는 적엽명을 무섭게 공격했다. 특히, 유가주의
형인 유전일(劉塡一)은 질녀(姪女) 유소청이 모욕당했다는 이
유로 공격에 가담했다. 그도 가장 적극적으로 추적에 가담한
사람중 한 명이다. 적엽명과 유소청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유전일을 모질게 만들었으리라.
비건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고, 와중에 유전일까지 모두 일
곱 명이 죽었다. 죽은 자 일곱 명 중 여섯 명이 강성오가 출
신이다.
범위는 결국 마음 속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굳어져 있는 얼굴을 보자 차마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소청이 감당하지 못할 말을 꺼냈다.
“우화대원…… 두 명만 죽여. 그러면 비건을 양도하지.”
범위는 알지 못할 질투심에 처음으로 유소청의 말을 치받았
다.
전 같으면 객창에 들어서기 무섭게 젖은 몸을 닦느라 여념
이 없었을 텐데, 알몸을 내비치는 것과 진배없는 형색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추스를 생각은커녕 적엽명에 대한 말만 늘어놓
다니.
“우화대원을? 왜요?”
우화대와의 싸움이라면 우화가 문제이지 우화대원은 신경쓸
거리도 안 된다. 우화를 잡아야 한다. 그를 잡기 전에는 끝나
지 않을 싸움이다. 뱀을 잡을 때는 머리부터 잡아야 하지 않
은가.
우화대원을 찾는 일은 간단하다.
그들은 여모봉에 숨어들었고, 곳곳에 거처를 만들어 놓았
다. 몰라서 잡지 않는 것이 아니다. 수하 몇 명을 죽이는 것
은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에 손을 쓰지 않는다. 무공이래야
잡술(雜術) 몇 가지 익힌 것에 불과한 사람들을 죽여서 무엇
하겠는가. 또한…… 그들은 도마뱀 같은 존재들이다. 꼬리가
잘리더라도 몸통은 도망가는.
“그래줄 수 있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요?”
우화대원 두 명쯤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그것이 적엽명
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었나?
“가치가 있지. 사람을 죽여본 사람과 죽여보지 못한 사람은
검을 내칠 때 커다란 차이가 나지. 호랑이도 새끼 때는 늑대
의 먹이가 되는 법이야. 사매가 호승심(好勝心)을 느꼈다
면…… 이제 사람을 죽여볼 때가 된 거야. 진정한 살검(殺劍)
을 맛봐. 그럼 양도해주지.”
“으음……!”
유소청은 공감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어제 새벽과
같은 경우는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았다. 무림에 몸을 담
그고 있는 한.
범위가 내건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문제가 유소청에는 태산처럼 높은 장애였다.
검을 든 무인(武人)이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면 지나가는 개
도 웃으리라. 하지만 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가문이 있
다. 은자(隱者)인 냥 숨어사는 것도 아니다. 해남도의 일각을
지배하면서, 대소사(大小事)를 주관하면서 무력(武力)을 사용
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평온할 적에는 후덕한 사람들이 보배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세(亂世)에 덕(德)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유소청이 남해오지 가운데 일인이면서도 수굴일지를 탐하지
않고 소금 수송이나 맡는 것하며, 유가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
음에도 불구하고 여모봉 토벌에는 참여시키지 않는 이유가 바
로 그 때문이다.
“좋아요. 하겠어요.”
살인을?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말
하던 사매가 살인을?
“빨리 죽이는 것이 좋을 거야. 해남도에 들어가면 바로 사
단이 벌어질 테니까.”
이렇게까지 할 말이 아니다. 좋게 말해도 괜찮은데.
유소청은 범위의 쓸쓸한 눈길을 재빨리 피했다.
그녀도 범위가 가지고 있는 애틋한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범위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불편한지 모른다. 특
히 지금처럼 애잔한 눈길을 흘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쓰라려
온다.
“돌아가 쉬어라. 젖은 옷을 오래 입고 있으면 몸에 안 좋
아.”
선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치욕이었어. 졌다는 것보다도 패배를 자인하지 못하
고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 이제 치사한 방법
은 쓰지 않겠어. 살아라. 무덤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돌아온
너니까 생각이 있겠지. 솔직히 제 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하
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손떼겠어. 대신 그 때와 마찬가
지로 단 둘이 비무를 해야 할거야. 두고보지. 해랑검법을 또
파해(破解)하는지.’
적엽명 비건은 천해원들과 호흡을 맞춰 아딧줄 한 가닥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선창 밑에 있는 삼실(三室)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가축과 사람이 질서 없이 뒤엉킨 가운데 바닥에는 바닷물이
흥건했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고, 무너진 짐더미에 깔려
사람 살리라고 고함치는 모습도 보였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배 밑바닥이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범선은 선실과 짐칸을 분리해야 한다. 허나 그렇게 하면 사
람을 많이 실을 수 없어, 대부분의 범선들은 널빤지를 뜯어내
고 삼실로 함께 사용한다.
평소에는 아무 탈이 없었다.
사람을 운송하는 범선이니 만치 예기치 못한 날씨 변화를
맞기는 극히 드물다.
예상치 않은 재해는 피해를 증폭시키는 법이다.
피해는 컸다.
그 중에는 기식(氣息)이 엄연해 보이는 사람도 눈에 띄었
다.
젊은 사람들은 좀 나은 편이다. 나이가 든 노인네와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은 공포에 질리고, 뱃멀미에 질리
고, 부상까지 당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삼실로 들어서던 한광은 눈에 이채를 띄우며 걸음을 멈췄
다.
유소청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가난한 무지렁이 틈에 섞인 그녀는 화사한 모습이 단연 돋
보였다. 비단으로 지은 분홍빛 무복과 때에 절은 마의(麻衣)
는 신분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녀는 바쁘게 움직였다.
머리가 깨진 사람의 머리를 들어올리고, 상처에 마포(麻布)
를 감싸주었다. 뼈가 부러진 사람은 접골(接骨) 시켜주었다.
겁에 질려 우는 사람은 여인답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
살 달래 주었다.
주돛이 부러지면서 삼판까지 손상되었는지라 선창에 스며든
바닷물은 정강이까지 차 올랐다. 새로 갈아입은 듯한 유소청
의 무복도 흥건히 젖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 입으로는 연신 부드러운 말을 토해냈다.
“사내가 이만한 상처 가지고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해요?
아녀자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아요?”
“얘야,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조금 있으면 육지에 도착
할 거야. 조금만 참아. 착하지? 자……”
“할머니, 자리를 조금 옮기세요. 짐들이 쏟아지면 위험하잖
아요.”
한광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눈빛을 날카롭게 발산하는 모습은 종종 보
았지만 여인다운 부드러움은 처음이었다.
‘괜찮군.’
한광은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자신에게 흥미를 안겨다 준 놈은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거
리에서 쌀가마니를 들어올리고 있다. 그 밑에 깔린 사람은 이
미 죽은 것 같은데 부질없이 기운만 빼고 있다니.
그가 도망갈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반 시진 정도만 더 달리면 해남도에 도착한다. 날씨가
궂고 파고가 높은 것은 여전하지만 반 시진 이내로는 큰 위험
이 없어 보인다. 큰 위험은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하하! 섬에서 도망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유소청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도 즐거웠다.
원래 그는 여인이 무공을 익힌다는 점에 대해서 못내 못마
땅했다.
신체적 특성 때문에 상승 무공을 익히기가 어려울 뿐만 아
니라 괜히 콧대만 높아져 툭하면 어줍잖게 권각(拳脚)을 휘두
르는 꼴이라니.
유소청도 마찬가지다.
해남오지 중 일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검을 맞대면 일초
지적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는 사람을 죽
여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일도 그렇다.
해남오지가 되어 가지고 겨우 소금 수송이나 하다니. 범위
란 놈은 또 어떻고? 세우라는 공적은 세울 생각도 않고 계집
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사내는 양(陽)이요, 여인은 음(陰)이다. 사내가 강(剛)이라
면 여인은 유(柔)해야 한다. 사내가 외(外)라면 여인은 내
(內)가 되어야 한다. 사내가 천(天)이라면 여인은 지(地)……
무음검 석불 같은 미친놈은 뛰어난 여걸(女傑)을 아내로 맞
아 부부가 함께 무림을 종횡 하는 것이 멋있어 보인다고 말하
지만 정신이 나갔어도 한참은 나간 놈의 헛소리다.
한광은 유소청에게서 여인다운 면모를 발견했다. 무인으로
써의 유소청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
즐겁기 한량없었다.
소예와의 흐뭇한 정사(情事), 더러운 연놈들의 깨끗한 처
단, 공작을 헌납해 줄 애송이는 눈앞에 있고, 마음만 먹으면
취할 수 있는 여인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오늘처럼 즐거운 일이 겹치는 날은 일생에 몇 번 없으리라.
“하하! 사매,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한광은 짐짓 밝은 미소를 지으며 유소청의 곁에 다가섰다.
“오셨어요?”
“아픈 사람이 많군. 우선 치료부터 해야겠지? 나도 도와줄
까?”
“예.”
폐쇄적일 정도로 답답하면서도 정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싸늘한 대답이지만 오늘은 참을 만 했다. 소가 닭 쳐다보듯
하는 냉담한 태도에는 부화가 치밀었는데.
“소금이 한 가마도 손상되지 않았다고?”
“네.”
“가주님이 좋아하시겠군.”
“……”
“돌아가면 바로 혼례를 올리는 게 어때?”
“넷?”
비로소 유소청이 반응다운 반응을 보였다.
유소청뿐만 아니라 쓰러진 짐을 부지런히 정리하던 범위도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하하! 놀라기는……”
유소청은 감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환자를 돌봤다.
유소청은 한광이 싫었다.
배필을 정히 골라야 한다면 한광보다는 범위를 택하리라.
한광은 냉정하고 매몰차다. 웃음을 흘리다가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 반면에 범위는 정이 깊다. 무인이, 사내가 눈
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한광은 사람을 죽인 다음에 웃었다. 범위는 고뇌(苦惱)했
다.
패(覇)를 추구하는 자와 정(正)을 추구하는 자.
살업(殺業)에 깊숙이 파고드는 자와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자.
시들은 꽃을 보면 땅에 버리는 자와 가지를 잘라주는 자.
유소청은 포근함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런 안온함은 한광보
다 범위가 짙게 풍겨낸다.
한광은 질풍(疾風)같은 성격이다. 작심한 일은 즉각 처리해
야 직성이 풀린다. 사랑도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을 원한다.
만나는 것, 말하는 것…… 모든 것에서.
범위는 온유하다. 시간을 두고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영원한
마음을 가지려 한다.
범위를 만나면 편안하고, 한광을 만나면 긴장된다. 범위에
게는 마음 속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한광에게는 두 번
세 번 숙고한 다음에 말을 해야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는
다.
중요한 것은 한광이나 범위나 모두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친형제처럼 어울려 지냈기 때문에 그
럴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라버니를 대하는 감정 이상이 들지
않는 바에야.
또 하나 지적할 문제가 있다.
한광이나 범위나 모두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
다.
범위는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다급하
게 나서기보다는 느긋하게 기다리는 성격이니 그렇다 하더라
도 한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격대로라면 벌써 매파를 보내
오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언제나 농담처럼 툭 건드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는 한다.
다른 때 같으면 ‘또 농담이구나’하고 무심히 지나칠 일. 그
러나 오늘은 어쩐지 먹지도 않은 아침이 명치끝에 걸린 듯 답
답했다.
혼담에 관한 말이 오고간다는 자체가 싫었다. 그것이 설혹
농담에 불과할지라도. 왜 그럴까?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 * *
해남도 중앙에 있는 오지산은 천연의 보고(寶庫)다.
용뇌향(龍腦香)은 목재의 질이 좋고, 청피(靑皮), 파누(坡
壘)는 배를 만드는 데 쓰이며, 현목( 木)은 중원 전역에서
가장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로 귀히 여긴다. 철력목(鐵力木)은
진귀한 경목(硬木), 해남석자(海南石梓), 개목련[綠楠]은 가
구를 만드는 데 소용되며 철도목(鐵刀木)은 악기를 제조하는
데 일등(一等)으로 취급된다.
그밖에도 방향(芳香)이 뛰어난 녹나무속, 기름으로는 안엽
유( 葉油:유칼리나무기름), 향모유(香茅油), 약으로 쓰이는
것은 장뇌(樟腦)와 장뇌유(樟腦油), 사인(砂仁), 팔각(八角),
삼칠(三七), 육계(肉桂), 가란(嘉蘭). 산자고(山慈姑), 희수
(喜樹), 미등목(美登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식물들이 자
란다.
한가(韓家)는 오지산에 터를 닦았다.
벌목(伐木)과 약초재배가 주요 재원(財源).
한가는 다른 가문이 미처 터를 닦기도 전에 이미 넘쳐날 만
큼의 부(富)를 축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가는 있
는 자원을 활용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오지산과 여족들의 성산인 여모봉은 지척지간이다.
두 호랑이가 마주보고 있는 형국.
원주민인 여족들은 오지산에서 벌목하는 것을 여족의 어머
니나 다를 바 없는 여모봉(黎母峰)의 손발을 자르는 것으로
간주했다.
한가는 심각한 공포(恐怖)에 시달렸다.
벌목 중단을 요구하더니 끝내는 낮이나 밤이나 암살을 노리
는 여족 주민들. 생긴 것처럼 미련곰퉁이들만 모였는지 웬만
한 회유책에는 넘어가지 않는 족속들.
한가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다른 가문
들과 연합했다. 장소는 당연히 대립이 가장 극심한 오지산이
다. 때마침 다른 가문들도 한가와 비슷한 지경에 처해 있어서
손을 맞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파 이름은 바다 남쪽이라 하여 해남파.
장문인은 역대 수굴일지 중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가 맡게
된다. 해남오지로 선정된 다음 향후 이십 년 간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며 수굴일지가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것도
장문인 자리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현재, 오지산은 한족에게 성지(聖地)나 다름없었다. 해남파
본문이 있는 곳이기에. 그러나 싸움의 불씨는 항상 안고 있
다. 오지산에는 해남파가 있으며 여모봉에는 우화가 있으니
까.
“흑월(黑月).”
적엽명은 느닷없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사내를 쳐다보았
다.
“흑월.”
사내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키는 자그마하지만 몸집이 제법 다부져 보였다. 여족이었
고, 나이는 스물 네다섯 정도나 되었을까? 네모난 얼굴에 두
툼한 입술이 인상적이어서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우화대원?’
언뜻 든 생각이었다.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적엽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프더라도 참아.”
“……”
으득!
뼈와 뼈가 부딪치며 듣기 싫은 소리를 흘려냈다.
“아악!”
사내는 어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렀다.
비록 비명을 질러대기는 했지만 일그러진 얼굴 근육이 곧
펴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지 않는다. 고통을 참을 줄 안
다. 비명을 지른 것은 해남파 무인들을 속이기 위한 가식(假
飾)에 지나지 않는다.
적엽명은 사내의 다리에 부목(副木)을 대고 마포를 칭칭 감
았다.
여족 청년은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적엽명이 일어서려는 순간 마침내 결심을 굳혔는지 입
을 열었다.
“남만(南蠻)에서 오지 않았소?”
“아니.”
“정말이오?”
“……”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에서 거짓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는
지 여족 청년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생각이 없다면…… 지금 나와 나눈 대
화는 못들은 것으로 하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 없지.”
적엽명은 두어 장 떨어진 곳에서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
는 범위를 의식했다.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