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41
로는 칭찬을 때로는 질책을 주곤 했다.
파랑검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은 다시 활활 불타올랐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 설산(雪山)을 휘집고 다니는
만수(萬獸)의 재왕 호랑이의 눈. 노인의 눈은 검의 예기와 싸
우는 듯 뜨겁게 타올랐다.
쇠붙이 더미 위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은 노인은 두 손으로
파랑검을 받쳐들었다.
파아앗……!
파랑검에서 발산하는 싸늘한 예기가 화로의 불빛에 반사되
어 일렁거렸다.
“검날이 많이 상했구나.”
“……”
“검이란 놈도 게으름을 피울 줄 알지. 조금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즉각 게으름을 피우는 놈이 이 놈이야. 파랑검은 명검
이다. 하지만 지금 이 놈은 제 빛을 발하지 못해. 이미 게으
름이 골수까지 스며들었어. 쯧쯧!”
적엽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노인의 말에 동조했
다.
형이 생애 처음으로 패배를 당한 날부터 파랑검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형이 상산암에 은거한 뒤로는 더욱 그랬다.
비록 기름먹인 종이에 쌓여 습기의 침입을 방지했다고 하지만
마루바닥 밑에 보관한다는 착상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검에 녹이 슬었다.
형님이 그런 결과를 예상치 못했을 리는 없다. 형님은 파랑
검을 버리려고 했던 게다. 비가의 대가 끊겼으니 자신의 목숨
과 함께 파랑검도 이 세상에서 살아 숨쉬게 할 수 없었을 게
다. 자신의 운명처럼…… 불구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
명처럼, 검도 그렇게 천천히 생명력을 소진시켜 버리려 했던
게다.
파랑검을 어둠 속에서 다시 끄집어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제 생명력을 다시 복원시켜 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었
다.
검을 갈아야겠는데……
적엽명도 검을 갈 줄 안다. 전장에서는 손수 애병을 손질하
기도 했다. 굳이 그런 경험을 들지 않아도 무공을 익힌 무인
이라면 누구나 검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파랑검 같은 명검은 명인(名人)이 아니면 손대지 못
한다.
날은 누구나 세울 수 있다. 허나, 미인을 봤을 때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진귀한 보옥을 봤을 때 욕심이 치미는 것
처럼 검을 손에 쥐는 순간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명인의 손을 빌려야 한다. 명인만이 명검의 진정한
색깔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에.
적엽명은 아직까지 검을 갈지 못했다.
거기에 석두의 피와 전동의 피가 묻었다.
날이 몹시 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다 놓고 가.”
“갈아주시겠습니까?”
“다시 돌려 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네가 살아있다면 파랑
검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해주지. 이 놈은 배꽃 같은 놈이야.
살살거리지도 않고, 위엄을 보이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절개를 굽히지 않는 놈. 살기에 잔뜩 치우친 너에
게는 어울리지 않는 검이지만…… 갈아주지.”
“감사합니다.”
적엽명은 두 손을 앞에 모아 예를 표했다.
노인은 파랑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제야 무엇에 홀린 듯 하던 노인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
다.
노인에게 검은 생명 이상의 소중한 존재였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쇠망치를 잡은 이후, 평생동안 노인
이 만들어 낸 검은 천 자루에 육박할 것이다. 허지만 세상에
빛을 본 검은 단 다섯 자루에 불과했다. 아니다. 이제는 열
자루다. 십삼대 해남오지가 가지고 있는 검도 노인이 만든 검
이다.
한광은 유살검(幽殺劍)을 가지고 있다. 범위는 오진검(五鎭
劍). 범위의 별호인 오진검(五眞劍)은 검명에서 따왔다. 석불
은 현암검(玄巖劍), 전혈은 뇌성천(雷聲天), 삼십육검 중 유
일한 여인인 유소청은 취옥검(翠玉劍)을 가지고 있다.
모두 노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
노인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예리했다. 이제 갓 검을 잡기
시작한 어린 소동(小童)일지라도 크게 될 재목인지 아니면 중
간에 꺾이고 말 재목인지 구분해내는 묘한 재주를 가졌다.
노인은 십삼대 해남오지 모두에게 검을 주었다. 그리고 그
들은 검을 받은 지 십오 년 만에 해남오지가 되었다.
이런 식이다. 노인이 검을 준 사람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명성을 떨친다.
청천수석근 비해.
해남도 제일 기재라는 건곤검 한혁과 쌍벽을 이룬다는 무
골.
청천수 비해가 절대 강자들 반열에 오를 것을 의심한 사람
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비해의 검은 날카로웠고, 틈이 없었
으며, 정교했다.
노인은 청천수에게 검을 주지 않았다.
“나이 삼십이 넘을 때까지는……”
삼십이 넘기 전에 파란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모
두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이 세상에 한 마디를 던질 즈음, 건
곤검과 청천수는 서로를 평생의 숙적으로 생각하였고, 언젠가
한 번은 자웅을 겨뤄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운다면 무사하기 힘들다. 노인은 두 호랑이 중
에 건곤검 한혁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건곤검에
게는 절혼검(絶魂劍)이란 명검을 주었으면서도 청천수에게는
나중을 기약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검을 다루는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닌가 추측은 하지
만 정확한 분별기준은 노인만이 알 것이다.
노인의 예측은 신기하게도 맞아 떨어졌다.
건곤검과 자웅을 결하기는커녕 그에 조금 못 미친다는 유살
검 한광에게 당하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 청천수의 별호를 입
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때는 해남도 제일의 기재
라고 입에 침이 튀도록 떠들던 사람들도 눈에 콩깍지가 씌웠
다는 등 무가에서 사람을 기만하려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는 게 이번에 증명되었다는 등 하면서 청천수를 깎아 내렸다.
노인……
해남 중오가(中五家) 중 일가인 조가(趙家)의 전대가주(前
代家主)인 조곡(趙 )이 바로 눈앞에 앉아있는 노인이다.
노인은 파랑검을 들고 일어섰다.
노인이 파랑검을 대하는 예의는 정중하다 못해 공경한다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였다.
노인은 검에만 그런 예의를 표한다. 검을 사용하는 무인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해도 그만한 예우를 받지
못한다. 해남파 장문인도 마찬가지이고, 인덕(仁德)으로 만인
의 흠모를 받고 있는 유가주도 예외가 아니다.
노인은 허름한 대장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갑(寶匣)
을 꺼내 파랑검을 정중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보갑을
꺼내더니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했다.
“휴우! 이것도 인연……”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노인이 보갑을 열자 검은색 일색
인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파랑검을 받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히 보검을
꺼냈다.
“이 검은 이름이 없다. 살기가 너무 짙어 영원히 꺼내지 않
으려 했던 검이다만…… 너하고는 잘 맞는 한 쌍인 것 같구
나.”
노인은 적엽명에게 다가와 검을 내밀었다.
“이, 이러시지 않아도……”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적엽명도 당황했다.
하지만 보검만은 탐이 났다. 어느 보검들처럼 호사스럽게
윤택을 뿜어내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약간 투박한 듯 하
기까지 한 묵검(墨劍)에서 뭔가 알지 못할 힘이 끌어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파랑검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경건함이었다. 묵검을
대하는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은 멀리 떨어졌던 오랜 벗이 찾아
왔을 때 느끼는 다정함, 기쁨이었다.
“가져라.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내가
죽으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검이다. 검을 소지할 자격도 없
는 놈에게 들어가느니 차라리 살기가 짙지만 네 손에 들어가
는 게 훨씬 낫다.”
노인은 떠 안기다 시피 보검을 내밀었다.
적엽명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두 번 사양하기에는 보검이 너무 탐났다.
노인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노인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 노인의 아들이자 현 조가
의 가주인 조후(趙厚)는 선조 대대로 물려 내려온 대장간을
버리고 산밑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모두 조후를 따라 새로운 터전으
로 거처를 옮겼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백여 명에 달하던 식
솔들 모두가 조후를 따라갔다.
“네 에미가 여기 묻혀있다. 그리고 여기는 내 땀이 베어있
는 곳. 나는 여기를 지키겠다.”
노인은 대장간을 지켰다.
노인이 우려한 바는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조가에서 남해삼십육검으로 꼽히는 사람은 노인과 현임가주
조후다.
그 외에는 검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전에는
검을 만드는 것에 온 정신을 쏟았기 때문에 무공에 치중을 못
했다지만, 원한대로 무공도 발전시키고 검의 명가임도 널리
알리려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다면 새로운 검인(劍人)이 탄생
했어야 옳은 일 아닌가.
노인의 손자이자 조후의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세상의 단맛
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무거운 쇠망치 대신에 향기로운 술과
부드러운 여인의 살맛을 먼저 맛보았다. 주육(酒肉)에 찌든
몸…… 그들에게는 검이나 쇠망치나 무겁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었다.
‘조가는 이미 망했다’는 세상 소문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지
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현재 누리고 있는 가문의 명
성과 축적해 놓은 재산으로 자자손손(子子孫孫) 부귀를 누리
면 그만이라는 생각.
적엽명은 적사장군의 처소에서 노인을 만났다.
죄를 짓고 유배되어온 죄인이나 마음이 맞아 오래 전부터
지기(知己)로 교분을 맺어온 두 사람.
대장장이가 무인과 가까이 하면 외도(外道)하기 십상이라는
이유로 해남 가주들과도 애써 거리를 뒀던 노인이다. 그런 노
인에게 잃을 것 가 잃어버리고 중원 최남단까지 유배되어온
적사장군은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지기였으리라.
그 날도 울적한 심사에 술이나 같이 하려고 찾아온 노인은
한참 무공수련에 여념이 없는 적엽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가의 둘째 자식 아닌가?”
첫 번째 소리였다.
“훌륭한 근골(筋骨)이야. 비가주가 자식은 잘 낳았군.”
두 번째 소리였다.
“그건 마상무공(馬上武功) 아닌가. 뿌리 없이 마상무공을
익히면 검이 신랄해지지.”
세 번째 소리.
“무리(武理)가 막히거든 오산으로 찾아와. 시빗거리를 만들
고 싶지 않으면 귀림을 통해서 오도록……”
네 번째 소리는 구원의 빛이었다.
적엽명은 검법에 진전이 없고 무리가 막힐 때마다 노인을
찾았다. 그렇다고 노인이 조가의 비전검공인 자전야검(紫電夜
劍)을 전수해 준 것은 아니다. 노인은 단지 장군이 전수해준
금잔검을 더욱 가다듬어주었을 뿐이다. 그것만해도 큰 도움이
었으니.
“적사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
“그저 웃기만 하셨습니다.”
“허허!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노인은 크게 실망시킨 혈육 대신 적엽명을 택했고, 적엽명
은 부모에게 바칠 사랑을 노인과 적사장군에게 바쳤다.
이제 적사장군도 죽고 없는 지금, 노인과 술 한잔이라 같이
할 벗은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다.
“이제 줄 것 다 줬다. 파랑검은 가는 대로 사람을 시켜 보
내주지. 가거라.”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무슨 말?”
“제 검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 했잖은가.”
“전동과 겨루면서 천강십이검과 일장검이 섞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동을 일검 양단한 패검(覇劍)은 제가 원한 검
이 아닙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 네 검이야.”
“알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지도 않는 검이 왜 내 몸에 박혀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검은 검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노인은 할 말을 다한 듯 일어서서 쇠붙이 있는 곳으로 갔
다.
노인은 쇠붙이를 뒤적인다. 적엽명에게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시간이 좀 더 흘러도 노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적
엽명이란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무심했다.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적엽명의 간절한 애원은 허공에 떠도는 빈 바람이 되었다.
노인은 침묵을 지켰다. 노인은 적엽명과 같은 공간에 있으
면서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쇠붙이를 찾기에 여념 없었다.
“가주, 제발 한 말씀만……”
드디어 노인은 마음에 드는 쇠붙이를 발견했는지 희미한 미
소를 지었다.
쇠붙이는 곧 화로(火爐) 속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갔다.
하루종일 기승을 부리던 태양도 산마루 너머로 기어들어 간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조그만 대장간에서 뿜어지는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화로에서 뿜어지는 열기는 태양의 몇 십
배에 해당되는 듯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적엽명과 노인,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적엽명은 단 한 마디라도 들어야만 자리에서 일어설 기세였
으며, 노인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듯 연금(鍊金)에 몰
두했다.
탕탕! 탕! 쩔그렁……!
오늘은 정신이 일기(一氣)를 모을 수 없는 듯 노인은 두들
기다 만 쇳덩이를 한쪽 구석에 던져버렸다.
“가거라. 일러줄 말이 없어.”
“어르신.”
“돌고 돌아 무극(無極)인 것을…… 아무 길로만 가면 어떨
꼬.”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돌고 돌아 무극(無極)인 것을……’
적엽명은 노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오묘한 현
기(玄機)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
쳐나갈 수 있는 검결(劍訣)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망태를 짊어지고 대장간을 나섰다.
적엽명은 뒤를 따랐다.
그는 노인에게서 가슴이 시원해지는 명쾌한 해답을 듣고 싶
었다.
노인은 대장간을 돌아 뒷 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적엽명은 걸음을 멈췄다.
지금 노인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그 곳은 조가의 광맥(鑛脈)이 있는 곳이고, 해남도에서 제
일 질이 좋고 강하다는 연철(賢哲)은 그 곳에서 나온다. 조가
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곳. 조가에서는 무인 이십여 명으로
하여금 광맥입구를 상시 지키고 있다.
“어르신! 제발 한 말씀만! 제발 한 말씀만 더 해 주십시
오!”
적엽명은 울부짖다시피 소리쳤다. 그러나 노인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산을 탔다.
“놀랍구나……! 인검구망(人劍俱忘)……! 철없이 목검을 휘
두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다니. 깨친 검리를
잊어버리고, 깨친 자신마저 잊어버렸는데 어찌 제 검을 알아
볼 수 있을까.”
노인은 야산 어둠 한 쪽에 서서 기림으로 발길을 돌린 적엽
명의 등을 응시했다.
“지금 네 심정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만 그거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 너무 연연하지 말고 검에
정진해라. 모든 걸 잊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반본환
원(返本還源)의 경지는 지극히 멀고도 험한 길이니…… 허허!
또 만날 수 있을지……”
적엽명의 모습은 귀림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전가의 복수나 해남무인들이 품고 있을 승부욕 같은 것은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검을 들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버린 적엽명.
노인, 조곡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적엽명이 커 보였다.
두 사람만 만나지 않으면 된다.
해남파 장문인 뇌공검 한민과 백년 이래 제일 기재라는 건
곤검 한혁. 이 두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한 무적에 가까운
고수들이었다.
나머지는 해볼 만 하다.
나머지는……
##第十四章 전검과 탈혼검.
1
“이제 오는 거야?”
적엽명은 반갑게 맞아주는 유소청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밝지 못했다. 마음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있
어서 밝게 웃어주지 못했다.
“이리 와서 앉아.”
유소청이 주담자에서 따뜻한 차를 따라 내밀었다.
보아하니 유소청은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것 같았다.
땅을 움푹 파고 막대기를 이용해 주담자를 걸어놓았다. 그
밑에는 검은 숯들이 벌겋게 제 몸을 태우고 있다.
유소청은 지난밤 내내 불씨를 살려가면서 그를 기다려 주었
다.
“말을 타고 왔으면 어제 왔겠는데?”
“응. 어제 왔는데…… 없지 뭐야?”
“어디 좀 들릴 데가 있어서.”
“괜찮아.”
“……?”
“나에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돼. 전처럼 편하게 대해 줘.
죽지만 말고.”
지난 밤, 황함사귀는 더운 날일수록 몸이 부실해서는 안 된
다는 핑계를 대고 유소청을 반억지로 끌고 나와서는 적엽명에
대한 모든 말을 일어주었다.
황함사귀가 결코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
려서부터 적엽명과 유소청을 봐왔고, 그들을 잘 알고 있는지
라 당연히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소청은 무척 놀랬다. 그녀는 줄곧 무림만 생각해 왔다.
적엽명의 검법이 사이(邪異)하게 느껴질 만큼 살기가 짙으니
무림에서도 좋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검
을 익혔다고 평판이 도는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으리라. 그러
면서도 혼자 중원에 내팽개쳐진 게 불쌍했고,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적엽명이 일 국의 장군이다.
종사품이며 운남도사의 병권을 거머쥐고 있다.
그녀도 황함사귀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싶
었다. 종사품이 아니라 최말단직이라도 상관없었다. 장군이
아니라 군졸이라도 감사하리라. 나쁜 길을 걷지 않고 세상을
굳건하게 딛고 선 것만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유소청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로써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적엽명은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명부객이면 어
쩌지 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해남도에 들어온 이유도 확실히 알았다.
물론 황함사귀가 말한 내용대로라면 무척 위험한 일이 분명
하지만 적어도 살수로써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뱃전에
서 중년부부를 구한 것도 마음을 개운치 못하게 했다. 누가
보아도 우화대원이 분명하거늘. 이제는 알았다. 적엽명은 많
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선한 동정심이 깃들어 있
다.
“저는 운이 좋은 여자 같아요.”
황함사귀가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 유소청은 그렇게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안 죽어.”
적엽명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용소자무애(用少者務隘:적은 자는 애(隘)에 힘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였지? 동위(東魏) 고환(高歡) 장군과
서위(西魏) 우문태(宇文泰) 장군의 싸움을 말하는 거군.”
“그렇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유소청과 황함사귀는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
이다.
적엽명과 한백이 나누는 대화는 그들에게 너무 생소했다.
하지만 적엽명의 신분을 알게 되자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
같아 오히려 호기심이 치밀었다.
“용소자무애가 무슨 뜻이에요? 고환 장군과 우문태 장군의
싸움은 또 뭐고요?”
유소청이 보조개를 함빡 베어 물며 물었다.
“적은 대군(大軍), 아군은 소수. 이럴 경우는 애(隘)에 치
중하라는 게 용소자무애입니다. 애란 해가 저물 때를 이용하
거나, 수풀에 복병을 두는 것, 좁고 험한 길에서 맞아 치는
것 등을 말합니다.”
“병법에 나오는 말인가요?”
“네.”
“병법을 많이 아시네요?”
유소청이 아무 것도 모르는 냥 능청스럽게 물었다.
“하하! 제 별호가 무자음사입니다. 삼국시대에만 태어났어
도 제갈량과 한 판 승부를……”
“한백. 결론은?”
적엽명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잘랐다.
한백은 뭔지 손해봤다는 표정을, 황함사귀와 유소청은 서로
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한백이 말한 과전(寡戰)은 시기와 지리(地理)를 얻는 싸움
이다.
고환장군은 대군을 동원하여 서위를 들이쳤지만 석양(夕陽)
이라는 시기와 위곡(渭曲:섬서성 대조현 동남)이라는 지지를
얻은 우문태에게 지고 말았다.
한백은 전가 무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허나 전가무인들
이 앞장 세울 수 있는 여족인은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은 검
을 어떻게 쥐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 그들이 길을 막아선다
면 밀명을 받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검을 내려놓아야 한
다. 그것이 대의(大義)인 것을.
유소청이 끌고 온 말은 신법을 전개할 줄 모르는 황함사귀
가 탔다.
그들은 내내 달렸다.
전가의 농장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한다.
사량(四樑)을 지나고 만개(滿開)에 가까워지자 황함사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한숨 돌려도 됩죠. 헤헤! 전동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
설 인물들이라면 전가팔웅. 전가팔웅 중 인물이라면 전방과
전혈입죠. 연수합격만 피한다면…… 헤헤! 자신은 있으신겝
죠?”
만개도 별 탈 없이 지나고 적송(迪頌)에 이르자, 황함사귀
는 다시 한 마디 했다.
“기왕에 싸울 것 같으면 이쯤에서 싸우는 게 좋을 텐데……
보십죠. 길이 좁고 양쪽에 암석이 서 있어 이런 길이면 일 대
일의 비무밖에 할 수 없는 곳 아닙니까? 한백이 말한 용소
자…… 그 무엇인가 하고도 잘 어울리는 지형이고.”
한백은 슬쩍 적엽명을 쳐다보았다.
오는 도중에도 이와 비슷한 지형은 여러 군데 있었다. 그
때마다 한백은 적엽명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앞서 달릴 뿐이다.
지금 일행이 서 있는 지형은 황함사귀 말대로 연수합격이
불가능했다. 전가 팔웅도 무인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으니 연
수합격이야 하지 않겠지만 사람이란 상황에 따라 행동이 돌변
하는 법, 예상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서 나쁠 것은 없다.
적엽명은 멈춰 섰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암석 뒤를 바라보
았다.
뼛골 시리도록 냉기가 줄줄 흐르는 음성이 들려온 것도 바
로 그 때였다.
“날씨가 좋잖아? 검무(劍舞)나 한바탕 추고 가지?”
길을 가로막은 다섯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