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거센 파도가 부딪쳐 오는 바위 위에 선 염호가 망망대해를 보다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멀고 먼 해남까지 찾아온 목적은 대충 해결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고민이었다.
정말로 십만대산까지 가서 지저마궁 안에 들어가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떠나 서역으로 세상 구경이나 할 것인지 선택하기 힘들었다.
대충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생각으로 휙 가버리기엔 죽어가던 취벽의 마지막 당부가 여전히 찝찝하고 켕기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랑은 별 상관도 없는데…….”
머릿속은 분명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뭔가 불안하고 불편한 어떤 감정들이 개운치가 않았다.
“쩝~! 그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니…….”
염호의 머릿속으로 하나둘씩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계속했다.
가장 먼저 진무가 떠오른 것이야 이상할 것이 전혀 없지만 순하고 착해 빠진 장로들이나 유난히 잘 따라줬던 젊은 제자들에 대한 기억, 거기에 청아원 꼬맹이들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생생했다.
인연은 물론 미련마저 다 끊자고 매정하게 나왔는데 화산파와 멀어지면 질수록 자꾸만 가슴 어딘가가 뻥 뚫려 버린 기분이었다.
처음 작았던 구멍이 점점 더 커져가는 기분.
“나도 참…….”
변죽이 일어도 이렇게 일어날 수 있을까 싶었다.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들까 돌아갈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진짜 정체까지 다 까발렸는데, 결국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에효~! 결국 나는 천살마군이잖아…….”
씁쓸한 듯 혼잣말을 뱉은 염호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에서 일어섰다.
온통 바닷물뿐이 보이지 않는 곳 한가운데서 지지리 궁상을 떨어봐야 신세만 처량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해남도 쪽으로 가서 타고 온 배를 찾고 난 뒤 일정을 생각해 볼 참이었다.
그렇게 땅을 박차려던 염호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잉?”
조금 전 부숴 버렸던 시꺼먼 구슬의 잔해들이 갑자기 부르르 떨린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위틈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찌꺼기 같은 파편들이 일제히 진동하더니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라 버린 것.
깜짝 놀란 염호가 다시 한 번 눈을 치켜뜨며 긴장한 기색으로 반보를 물러섰을 때였다.
파지지지지!
산산이 흩어졌던 조각들이 서로를 향해 엉기더니 순식간에 본래의 구슬 모습으로 돌아왔다.
겉면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잔뜩 난 구슬이 저 혼자 허공에서 둥둥 떠 있는 걸 코앞에서 지켜보는 염호의 표정 역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상태가 오래갈 리 없었다.
염호는 더 이상 지체 없이 흑뢰정을 뽑아 들었다.
손도끼를 들고 재빠르게 구슬을 쪼개 버리려는 것이다.
뭔가 찝찝하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정.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슈- 아- 아- 아- 아!
멀리 수평선 끝에서부터 시꺼먼 섬광이 눈 깜빡할 사이 구슬을 향해 쏘아져 온 것이다.
펑!
시꺼먼 구슬에 시꺼먼 섬광이 꽂히더니 나직한 폭음이 한 차례 터져 나왔다.
연이어.
화르르륵!
시꺼먼 구슬 주변으로 시퍼런 불꽃이 선명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뭐… 뭐냐?”
흑뢰정을 번쩍 치켜든 자세 그대로 염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둥실 떠 있던 구슬은 염호의 눈높이까지 부상했다.
“으잉?”
염호는 또다시 묘한 소리를 토했다.
둥둥 떠 코앞으로 온 시꺼먼 구슬 안에 붉은색 눈동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염호 자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는 쭉 찢어진 붉은 눈.
그렇다고 그런 거에 위축감을 느낄 염호가 절대 아니었다.
“어쭈? 째려봐?”
쉬익!
흑뢰정이 내려꽂히는 찰나의 순간 구슬 안의 눈빛이 동그랗게 치떠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게 염호에게 뭐 대수겠는가.
퍽!
파장창!
귀화를 뿜던 구슬이 흑뢰정에 맞아 또다시 산산이 조각났다.
“뭔데? 이 찌끄러기는?”
별것도 아닌 거에 잠시 긴장한 데 열이 뻗친 염호가 잘게 쪼개진 구슬의 파편들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순간 다시 한 번 파편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둥실 떠오른 뒤 지지직 소리와 함께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구슬.
연이어 화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푸른 귀화가 다시 구슬 주변을 감쌌다.
“어쭈? 해보자는 거지?”
휙 하고 흑뢰정을 다시 번쩍 드는 그 순간.
잠… 잠깐!
“어? 말을 하네?”
흑뢰정을 번쩍 치켜 뜬 채로 염호가 신기한 듯 눈을 번쩍거렸다.
구슬 안에는 이제 쭉 찢어진 눈뿐만 아니라 붉은 입술까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마의 시조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며…….
“뭐래? 병신이…….”
쉬익!
파장창!
다시 한 번 구슬을 산산이 쪼갠 염호가 떨어지는 파편들을 향해 손바닥을 쭉 내뻗었다.
후앙!
염호의 손에서 뻗어 나간 강맹한 장인이 파편을 휩쓸어 아예 눈에 보이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에 장력에 휩쓸린 파편들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바닷물 여기저기 휩쓸렸다.
그러고도 염호는 뭔가 뒷맛이 남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눈을 찡그린 뒤 거세게 출렁이는 바닷물을 꼼꼼히 살폈다.
한참을 그렇게 살피던 염호의 얼굴이 다시금 와락 일그러졌다.
거세게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 속 여기저기에서 먼지 같은 것들이 일제히 떠올라 한곳으로 뭉쳐지는 것을 본 것이다.
화르르륵!
잔뜩 모여든 먼지 가루 같은 것이 뭉쳐지더니 다시 본래의 구슬로 되돌아 가 시퍼런 귀화를 피어 올렸다.
독기가 번뜩이는 염호의 얼굴엔 ‘요걸 어쩔까’ 하는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염호가 구슬을 노려보는 그때였다.
구슬 안에서 생겨난 쭉 찢어진 붉은 눈이 염호를 보더니 움찔거렸다.
슈웅!
잽싸게 그대로 바다를 가로질러 내빼기 시작하는 구슬을 보며 염호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힛! 그냥 토껴?”
일갈과 함께 염호가 손을 쭉 뻗으며 극한의 몰천력을 끌어 올렸다.
핑!
얼마 내빼지도 못하고 바다 위에서 우뚝 멈춰 버린 구슬이 염호의 손끝을 향해 점점 딸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턱 하고 염호의 손안에 붙잡힌 구슬.
잠… 잠깐!
“잠깐은 뭔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라… 나는 불사의 존재이며 차원의 여행자다!
“불사? 차원……?”
나는 수만 년 전부터 이곳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어쩌라고? 졸라 오래 살았으니 미련도 없겠네?”
아…….
“맞다! 그러니까 네가 그놈이네. 취벽이 말한?”
구슬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만 쭉 찢어진 구슬의 눈이 좌우를 힐끔거릴 뿐이다.
누군가 귀해도를 찾아내고 환혼주를 부쉈다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취벽이란 이름은 구슬의 주인 역시 똑똑히 알고 있었다.
“요거 눈깔 굴리는 거 봐라?”
염호가 으름장을 놓자 구슬 안의 얼굴이 그대로 경직됐다.
염호는 구슬을 한 손에 움켜쥔 상태 그대로 잠시 동안 고민했다.
“니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는 거 아니다.”
…….
“내가 그거 죽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아냐?”
염호가 말하는 것은 바닷속에 갇혀 끝없는 세월을 살아온 정체 모를 짐승이었다.
이 이봐!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원한다면 불사의 비술도 주겠다. 세상을 줄 수도 있고…….
“조용해라!”
…….
“아무리 말 못할 짐승이라도 그러는 거 아냐. 얘가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괴로웠으면……. 쩝!”
염호는 바닷속에 갇혀 있던 그놈 때문에 마음이 너무 짠해졌다.
쇠사슬에 묶인 채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갇혀 있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토굴에 수십 년 갇혀 지낸 기억을 가진 염호였다. 그러니 그 짐승이 겪었을 시간이 얼마나 괴로울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되어 너무도 가슴이 메어졌다.
측은한 눈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하던 짐승의 눈빛이 아직까지도 쉬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너 안 죽는다고?”
그러니까 나는……!
“시끄러 새퀴야!”
첨벙!
구슬을 든 채 바다로 풍덩 뛰어든 염호.
거센 와류가 몸을 휘감았지만 염호의 몸뚱이는 그대로 심해 속으로 쭉쭉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의 지저 바닥까지 내려선 염호가 눈을 번뜩였다.
수면 위까지 뻗어 오른 바닷속 절벽을 살핀 염호가 그사이 작은 틈을 발견하곤 그 속으로 구슬을 끼워 넣었다.
이… 이러지 마! 원하는 건 뭐든지!
어떻게 전해지는지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염호는 전혀 멈칫거리지도 않았다.
구슬의 눈빛이 더욱 당황이 역력한 모습으로 변하며 다시금 수중을 통해 그 음성이 들려왔다.
뭐든! 뭐든 다 해준다! 무엇이든!
그러거나 말거나 염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구슬을 완전히 벽면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흑뢰정을 꺼내 주변의 벽면을 사정없이 부쉈다.
쿠쾅! 쿠쾅!
나, 나는 어둠의 권속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영락없이 돌무더기 틈에 끼인 구슬의 눈빛이 다시 애원하듯 절규했지만 염호는 콧방귀를 꼈다.
뒤로 멀찌감치 떨어진 염호가 등 뒤에 메고 있던 패왕부를 꺼내 들었다.
후우우우웅!
패왕부 주위로 엄청난 와류가 밀려들자 이제껏 절규하던 구슬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헉! 천살마공!
“잉?”
패왕부가 날아가 부딪히는 동안 염호 또한 황당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쿠콰콰콰쾅!
그사이 바닷속으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시작됐다.
섬의 밑동을 완전히 갈라 버린 패왕부 때문에 엄청난 절벽이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속에 있으면서도 엄청난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난리가 나는 동안 염호는 잠시 동안 멍한 표정으로 거대한 돌무덤으로 변해가는 지저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천살마공을 알아? 어떻게?’
염호는 정말로 황당한 기분이었다.
생각 같아선 무너져 내리는 절벽들 틈에서 다시 한 번 구슬을 꺼내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미 거대한 산자락처럼 변한 심해를 본 염호는 휙 하니 신형을 돌렸다.
츄아아아!
물살을 가르며 되돌아온 패왕부를 척 낚아챈 염호가 수면 위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슈앙!
촤아악!
그대로 허공까지 치솟은 염호가 주변을 보며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물도의 갯바위 군이 통째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니 거세기가 이를 데 없던 와류마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나 평온하고 잔잔한 바다가 되어버린 곳, 그 물결을 한참이나 가만히 지켜보던 염호가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나중에… 나중에… 진짜로 할 일이 하나도 없으면 다시 와서 물어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