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으윽!”
신응담의 일검에 내려찍힌 양소호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향을 느끼며 쿵쾅쿵쾅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 순간 양소호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위험하다!’
조세걸은 사숙 신응담의 기세가 변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공중에서 연환검을 쓰는 게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공중에서 계속 공격할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어.’
‘예?’
‘애초 이 검술의 진의가 뭐냐? 정면으로 맞붙으면 감당하기 힘드니까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안전을 확보하면서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고 귀찮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 그럼 멀리서만 공격할 수 있으면 되겠지? 그다음은 어떻게 공격하든 무슨 상관이야?’
염세악의 가르침을 떠올리던 조세걸이 눈을 번뜩였다.
순간 조세걸은 검을 거꾸로 잡고 팔을 활시위처럼 당겼다가 신응담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집어던졌다.
깡―!
당연히 신응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아오던 검을 쳐냈다.
하지만 조세걸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공중제비를 돌며 왼쪽 발로 검을 쳐내 다시 한 번 신응담에게로 날려 보냈다.
백소령은 조세걸과 양소호를 보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소름이 오싹 끼쳐 올랐다.
‘어찌 저것이 가능할 수가?’
소년의 손을 떠난 검이 신응담을 향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가 튕겨져 나가더니 격공섭물처럼 다시 소년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소년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소년의 손짓과 몸짓에 따라 자유자재로 손을 떠나 신응담을 공격하고 다시 소년에게로 돌아오길 반복을 거듭했다.
청년의 검세는 더욱 괴기막측했다.
오직 공중에서만 연환 검세를 쏟아내던 청년이 소년과 마찬가지로 검을 아예 암기처럼 신응담에게 집어 던지더니 검이 튕겨 나올 때마다 손으로 쳐내고, 발로 차내고, 공처럼 전신을 이용해 미끄러뜨렸다가 어깨로 밀쳐내고, 끝도 없이 검 자체를 신응담에게 날려 보냈다.
백소령의 굳게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니, 연화팔문 전체가 화산파에 대해서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음을.
***
“허허! 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
왕심봉은 걷는 내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전표 다발을 생각하며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평생을 돈에 쪼들려 왔기에 풍족한 금액이 갑자기 떡하니 생겨나자 젊어서 꾸었던 꿈들과 생각만 하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계획들이 다시금 떠오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어찌나 들떴는지 한평생 봐온 낡은 도관과 사당들마저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혼자 실실 웃고 있어?”
“……!”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던 왕심봉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 태사조님!”
왕심봉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자 염세악이 손사래를 쳤다.
“그놈의 인사는, 됐다.”
상상을 멈추긴 했어도 왕심봉의 들뜬 마음은 여전했다.
“태사조님! 모두 태사조님 덕분입니다.”
“뜬금없이 뭔 소리냐?”
“본 파의 텅텅 빈 재고에 돈이 부지기수로 쌓인 것 말입니다.”
염세악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장평이 왕심봉의 말에 실소를 흘렸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산파의 장로로서 돈을 가지고 행복에 겨워하는 것은 보기에 좀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이제야말로 제가 꿈꿨던 본 파의 발전을 실행에 옮겨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전?”
“예! 태사조님!”
염세악이 물었다.
“그게 뭔데?”
그 말이 왕심봉의 들뜬 기분에 불을 당겼다.
“일단 본 파의 옷부터 싹 바꾸는 겁니다.”
“옷?”
염세악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예! 그다음으로 소요정을 비롯해 자운전과 남천관, 북천관, 삼궁을 비롯해 도관을 모두 증축을 해 본 파의 위엄을 다시 세우는 거지요!”
“…….”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다음으론 본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싹 밀고 계단을 깔아 향화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 아! 계단은 대리석으로 까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흥분해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왕심봉과 달리 염세악의 시선은 반대로 점점 삐딱해졌다.
장평은 그냥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왕심봉을 외면해 버렸다.
“그뿐입니까? 남은 돈으로 전부 미곡을 사들여 인근의 어려운 형편을 면치 못하는 민초들에게 베풀면 민심이 우리 화산파로 향할 것이고 그럼 우리 화산파라는 이름은 섬서에 우뚝 설 것입니다. 또 그러면 관부에서도…….”
“됐다! 거기까지만 하자!”
한참 흥분해 말하는 왕심봉은 찬물을 끼얹은 듯 중도에 말허리를 자르는 염세악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쯧쯧! 으이구!”
염세악은 왕심봉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어찌 생각하는 게 한 줌도 안 되는지. 하마터면 없던 살림도 거덜 날 뻔했구나.’
염세악은 당최 돈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불려야 되는지 전혀 감이 없는 왕심봉을 보며 한숨이 절로 터졌다.
그나마 돈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총림당의 당주씩이나 되는 왕심봉이 이러니 다른 이들은 더 살펴볼 것도 없었다.
‘이를 어쩐다? 뭔가 해결했다 싶으면 또 일이 생기니 갈수록 태산이로구나.’
고민거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째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부지런해진 느낌에 실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흥청망청 돈을 물 쓰듯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하아! 이 녀석을 어찌한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심하던 염세악이 때마침 멀찍이 지나가는 화소옥을 발견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인지 멀리서 봐도 눈알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가만?’
염세악은 며칠 전 화소옥과 처음 대면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할아버지∼! 보화전장의 화소옥이에요∼!’
보화전장이 어딘지는 몰라도 일단은 돈을 굴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푼돈 좀 내놓으라는 말에 떡하니 금 백 냥 전표를 호기롭게 내놓던 당시의 상황.
“너 일루 와봐!”
염세악이 손짓을 하자 장평과 왕심봉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앗?”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염세악의 목소리를 들은 화소옥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튀면 볼기에 불이 날 줄 알아!”
“에잇!”
화소옥이 잔뜩 볼을 부풀리더니 뭐라 뭐라 구시렁대며 팔짱을 끼고서 염세악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왜요?”
화소옥은 이미 볼 장 다 본 뒤라 더 이상 염세악에게 아양을 떨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아예 첫마디부터 시비조로 나왔다.
하지만 염세악은 오히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하산하고 싶지?”
“……!”
순간 화소옥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흐흐! 반응이 실하구만.’
염세악은 쾌재를 불렀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돌아가게 해주마.”
“그게 뭔데요?”
화소옥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곧 바로 물어왔다. 오히려 염세악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본 건 장평이었다.
그가 아는 염세악은 결코 자신에게 찍힌 녀석들을 쉽게 풀어줄 만큼 그릇이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거 없다. 본 파의 살림살이를 좀 피게 하고, 이번에 거둬들인 재물을 좀 불리면 돼.”
“뭐라구요?”
화소옥이 염세악의 말을 듣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집안이 보화전장이라며? 상인이 그 정도도 못해?”
염세악의 말에 화소옥의 고운 이마 위로 불끈 실핏줄이 돋아났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이런 찢어지게 가난한 문파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 살림살이를 피게 만들어욧!”
화소옥은 택도 없는 소리에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화산파가 얼마나 궁한지는 이미 화소옥의 머리에 치수가 다 나온 상황이었다.
그걸 자신이 무슨 수로 후딱 해치우고 하산한단 말인가.
“거기다, 지금 나 놀리세요? 속가제자들한테 착복한 돈을 다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인데 그걸 지금보다 훨씬 더 불리라니! 입으로 말하면 그게 다 말인 줄 알아욧!”
순간 화소옥의 말에 염세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착복? 할애비한테 혼난다? 그게 왜 착복이야? 네 녀석들이 사문을 능멸하고 속가제자로서 의무를 저버린 배임죄를 저지른 것이지?”
화소옥이 귀를 막으며 빽 하니 소리쳤다.
“아, 몰라요!”
염세악도 지지 않았다.
“싫음 말아라! 나도 아직은 팔팔해서 십 년은 더 살 것 같으니까!”
“…….”
화소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말인즉슨 자신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화산에 붙잡아두든지, 그도 아니면 최소 십 년은 붙들어두겠다는 뜻이질 않은가.
물론 아비인 화중악이 딸을 그렇게 놔두게 하진 않겠지만 천둥벌거숭이 같은 화소옥도 께름칙한 것이 있었다.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 은연중 아비가 어떻게든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를 강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화산으로 오는 길에 자그마치 금 이백 냥을 꿀꺽한 상황.
어쩌면 십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화산에서 보살펴 주겠다는 소리에 얼마간은 얼씨구나 덩실덩실 춤을 출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소옥은 하루라도 빨리 하산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화산파의 부름이라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온 진짜 목적.
바로 삼 년의 기한을 잡고 자유롭게 중원 전역을 유람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이 때문에 화소옥은 화산파에 발이 묶여 몇 년을 허송세월 하는 것이나 혹시라도 모를 아비의 꿍꿍이와 염세악의 심통이 합치해 발이 묶이는 것,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화소옥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좋아요!”
“그래?”
염세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색했다.
반면 왕심봉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표정이 꽁해졌다.
화산파의 앞날에 대한 창창한 꿈과 계획에 갑자기 누군가 끼어드는 상황이 되자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염세악이 눈썹을 모았다.
“네가 지금 조건 따질 때냐?”
“싫음 마세요. 딱 보니까 한 달 안에 살림살이 거덜 나겠구만 뭐.”
염세악은 자신이 부린 어깃장을 그대로 돌려받자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상인 집안 자식이라 그런지 머리 돌아가는 것이 영악해.’
“조건이 뭐냐?”
염세악이 묻는 말에 화소옥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라도 하는 듯 두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살림살이 피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재산을 불리라는 말씀은 좀 애매하잖아요? 얼마나 불리라는 것인지 정확하게 계산해 주세요.”
“정확하게 계산?”
화소옥의 요구조건은 염세악뿐만 아니라 왕심봉과 장평마저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셋의 고민은 고만고만했다.
대체 얼마나 불려야 걱정 없이 먹고사는가, 라는 화두.
‘한 두 배면 되지 않을까?’
왕심봉의 생각이었다.
‘백 배?’
머릿속에 산처럼 쌓아올린 금산을 떠올린 장평의 생각이었다.
수염을 배배꼬며 화소옥을 눈치를 살피던 염세악이 입을 뗐다.
“한 두…….”
“좋아요! 두 배!”
재깍 대답하는 화소옥을 보며 염세악이 손사래를 쳤다.
“아직 말 안 끝났어.”
“씨이!”
화소옥이 인상을 팍 썼다.
“한 다섯…….”
“좋아요! 다섯 배를 말씀하시는 거죠?”
하지만 염세악은 화소옥의 고민하지도 않고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태도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 진짜!”
화소옥의 얼굴에 짜증이 치솟았다.
염세악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말했다.
“열 배! 열 배로 하자꾸나.”
“뭐라구요? 열 배?”
화소옥은 기가 막혔다.
“그걸 어떻게 만들어욧! 열 배가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욧!
하지만 염세악은 화소옥의 태도에 오히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군. 적당한 모양이야, 흐흐!’
염세악은 시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난 한 번 말한 건 번복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했다. 열 배라고.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말해.”
“씨이…….”
화소옥이 입술을 깨물며 염세악을 노려봤다.
하지만 화소옥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요. 하면 되잖아요.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셔야 돼요?”
“그럼! 남아일언 중천금이다!”
염세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맹세했다.
하지만 화소옥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문서로 남겨주세요.”
“뭐?”
염세악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데 화소옥이 왕심봉과 장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사조님의 수결도 찍고, 장문인 수결도 찍고, 여기 두 분의 공증도 같이!”
염세악이 알겠다는 뜻을 다른 말로 짧게 뇌까렸다.
“…독한 것.”
“우리가 말만 가지고 서로를 믿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요.”
얼마 전 자신이 뱉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으나 염세악은 외려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제대로 찍었다는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