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천래성축도, 그 말이 나도는 순간부터 무림인들은 거짓말처럼 용천장과 화산파의 일을 잊어버렸다.
무림을 들썩이게 만든 세 번째 소문, 천래성축도.
이는 어떤 종파에 적을 둔 신도들의 행렬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겨난 지 불과 반백년이 채 안 된 종파.
바로 천래궁(天來宮)이다.
소위 신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예언을 설파하여 양민들의 희망이 된 신흥 종교다.
신도 대부분이 무림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기에 무림과 접전이 없으며 여타 양민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아 나라에서도 근절시키지 않는 곳.
사실상 포교 활동을 용인받았다고 봐도 무방한 종파가 바로 천래궁이다.
이 종파가 무림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건 바로 그들이 신인이라 경배하는 천래궁주(天來宮主) 요천(了天)의 때문이다.
그가 한천 연경산에게 도전장을 전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대결을 벌였다는 것은 전 무림이 알고 있는 사실.
다만 대결 후 천래궁주 요천은 무사히 돌아와 건재함을 과시했고 한천 연경산은 소식이 끊겨 종적마저 묘연해졌다는 결과만이 다르게 나왔을 뿐이다.
이 경천동지할 일대 사건 후, 천래궁의 신도들이 신공이라 부르는데 반해 무림인들은 천래궁주, 혹은 요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억측을 낳으며 당대 최고의 비사로 손꼽히고 있다.
생사가 불분명한 연경산의 행적 때문이었다.
천래궁주 요천과의 대결 후 연경산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 천하제일인이라 칭송 받던 존재의 돌연한 실종.
천래성축도는 바로 이 천래궁이 한천 연경산에게 도전장을 전달했던 행렬이다.
워낙에 특이한데다 그전까지는 천래궁이 그토록 성대한 행렬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당시만 해도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화려하고 장엄함을 갖춘 엄청난 신도의 숫자로 인해 그 행렬만으로도 초미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딱 한 번, 천래성축도는 요천의 도전장을 용천장에 전한 뒤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무림에서 천래성축도는 곧 천래궁주 요천의 도전장을 전달하는 행렬이란 상징적 의미로 굳어졌다.
그 천래성축도가 재등장했다는 것이다.
모든 무림인의 이목을 받으며 그 성대하고 신비스러움이 가득한 행렬이 향하는 목적지는.
“여기?”
“예.”
“그놈들이 왜?”
“그건 잘…….”
염호는 손으로 코를 훔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라고?”
“천래궁입니다.”
홍화순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실내에는 그들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문인 진무도 있었고 장로들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흠…….”
염호는 코를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진무나 장로들의 눈에는 그다지 큰 고민이나 걱정거리로 생각되지는 않아 보였다.
‘그놈들은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왔지? 판을 다 깔아놨더니 엉뚱한 놈들도 뛰어드네. 요천의 도전장이라…….’
천래성축도가 뭐하는 물건인지는 염호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일부 장로 중에서도 모르는 이가 있어 홍화순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염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도전장… 도전장… 그 기집애의 아비도 그걸 받고 나간 뒤에 행방이 묘연하고.’
그렇다고 오는 걸 막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음모의 냄새가 아주 노골적이구만. 어림없다, 이놈들아! 날뛰어봐야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자식들이?’
생각을 정리한 염호가 홍화순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뭐, 알았으니까 가봐.”
“예.”
홍화순이 물러나고 난 뒤, 그때까지 할 말을 무던히도 참았던 듯 대장로 손괴가 서둘러 입을 뗐다.
“태사조,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본 파의 속가제자들이 전국에서 달려오고 있긴 하지만……”
“용천장에서 불러들인 쪽수가 버겁다?”
“크흠! 허허험! 그것이 아니오라…….”
염호의 직설적인 화법에 손괴가 헛기침을 연발했다.
진무가 손괴를 대신해 말했다.
“태사조, 돌아가신 어르신께선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돌보시느라 혈혈단신 남도련과 강남무림 전체를 상대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결국은 못난 저희 때문에 끝내 장렬한 산화로 생을 마감하셨지요.”
“음.”
“숭고한 희생이셨습니다.”
다른 이 같았으면 일찌감치 면박을 주며 잡설은 집어치우라 말했을 염호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끼는 진무다 보니 염호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마냥 오냐오냐 받아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보자. 넌 다르리라 믿는다. 진무야.’
“어르신께서 어렵게 지켜낸 평화입니다. 저희가 그 평화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염호가 흐뭇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봤다.
‘그래! 그래야지! 마땅히 그래야 내가 가장 아끼는 우리 진무답지!’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염호는 진무뿐만 아니라 장로들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의 표정과 눈빛임을 읽으며 흡족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염호는 말했다.
“무대도 마련됐고, 구경꾼도 그만하면 모였으니, 당연히 뭘 해야겠어?”
“……?”
염호가 씨익 웃었다.
“우리도 이참에 무력시위라는 거 한번 해볼까?”
“……!”
“힘 한번 쓰자고.”
***
‘망할 사형들이 늙어서 다들 노망이 났구나! 노망이 났어!’
배를 타고 상류를 거슬러 섬서 땅으로 진입하는 화산파 장로 침정궁주 신응담의 표정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물색 모르는 늙은 사형들이야 그렇다 쳐도, 어찌 현명한 장문 사형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단 말인가?’
무림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뒤늦게 객점에서 접하게 된 신응담은 그 길로 밥도 거른 채 화산파 귀환길을 서둘렀다.
가장 기가 차고 어이없는 건 검신 태사조의 후예에 대한 소문이었다.
신응담은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천진벽력당. 현판을 내려라.’
‘화산파 무학을 한 줄이라도 읽은 놈이라면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단전을 부수고 심줄을 끊어라. 나라의 관리든 군부의 장졸이든 끝까지 쫓아가서 마무리를 짓고 돌아와라. 예외가 있다면 오직 무공을 모르는 자뿐이다.’
‘숨길 필요 없다. 명명백백 해가 뜬 하늘 아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행하거라. 왜 그리 행하는지, 지켜보는 모두가 똑똑히 알게 해라.’
그때 신응담은 처음으로 그 심술 가득한 노친네에게서 존장으로서의 위엄을 엿보았다.
그리고 화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깨우쳤다.
단신으로 남도련을 지웠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을 때도 다른 이들과 달리 놀라기는커녕 당연하게 받아들인 신응담이다.
강남무림의 최고수 야도와 동귀어진해 끝끝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름 모를 야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삼일 밤낮을 통곡했다.
‘화산의 이름으로 행하라. 장평의 넋을 위로하는 건 네가 하려무나. 벌을 내리는 건 내가 해야겠다.’
그 마지막 말이 이토록 사무치는 한이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신응담은 천진벽력당과 육가의 문호를 정리한 후 화산파로 돌아가 제일 먼저 검신 태사조에게 전하려 했다.
화산의 이름으로 징벌하였다고.
장평의 넋을 위로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세상 모두가 알게 했다고.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진심 어린 사죄를 청하고 싶었다.
오만불손했던 후손의 못난 심보를.
엎드려 은혜로움을 감사드리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장평의 넋을 위로하는 소임을 믿고 맡긴 것을.
하지만 천년만년 살며 불사조처럼 살아갈 것 같던 검신 태사조는 이제 세상에 없다.
슬픔을 수습하며 얼마나 다짐했던가.
반드시 그 정신을 계승하며 화산파 다운 화산파를 다시 일으키겠노라.
그런데 들려온 한심스러운 소문이라니.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태사조가 죽은 시점에서 제자를 자청하는 놈이 나타났으면 당연히 의심부터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신응담은 당장 눈앞에 그 가짜가 있으면 목을 칠 기세였다.
게다가 용천장의 소문까지 접하게 되자 정신이 다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해! 나밖에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한 몸 초개와 같이 불살라 화산을 보전할 수 있다면……!’
배 난간을 붙잡은 신응담의 깡마른 손등 위로 결의로 굳은 굵은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자아! 이제 잠시 후면 나루터요!”
뱃사공이 점차 보이기 시작하는 나루터를 보며 소리쳤다.
“화산이다!”
“그렇군!”
“어서 서둘러라!”
신응담은 뱃전에 있다가 곳곳에서 외치는 소리에 백미를 꿈틀거렸다.
나루터에서 내려도 한참을 더 가야 화음현이 나온다.
거기서 또 얼마를 더 가야 비로소 화산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배에 탄 사람 중 일부가 화산이라고 외쳤다.
우연일 리가 없다.
화산의 성세가 이제 화음현을 넘어 섬서 땅으로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신응담은 깊이 숨을 들이키며 발끝에 공력을 모아 가볍게 뱃전을 찼다.
“엇?”
“와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온몸에 먼지가 가득한 백발백염의 노인이 훌쩍 뛰어 오르는가 싶더니 강 위를 새처럼 훨훨 날아 쏜살같이 나루터까지 날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본산이로다!”
“허! 과연, 화산!”
뱃전 곳곳에 타고 있던 속가무인들의 탄성이 나루터까지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