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장문 사형, 실로 잘된 일이 아닙니까? 이제야 숨을 좀 돌리겠습니다.”
금적산이 깔아 놓은 은원보와 병장기들을 살펴본 명선이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암, 잘된 일이고말고. 이제야 우리 무당이 다시 일어설 때가 된 모양일세.”
“모두가 장문인께서 주야로 고생하신 덕분입니다.”
“아닐세. 모두가 본문을 생각한 진혜 때문이지. 아주 큰일을 하였어.”
명현이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자 장로들이 진혜를 든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혜야.”
“예, 장문인.”
“오래 계시지는 않을 듯하나 대함에 예를 다해야 한다. 네가 직접 상단주를 안내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명현의 말에 진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문인, 아무리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청양상단 또한 상단이 아닙니까?”
“음?”
“무가와 상단이 연을 맺으면 응당 이쪽에서도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명공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이 무가와 연을 맺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보호.
상단을 운영하다 보면 갖은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녹림이나 수적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상단과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단은 이를 위해 호위 무인을 채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해서 마음이라 표하며 ‘사례비’를 내고 무력을 지원받는다.
그렇기에 누가 더 강력한 세력과 연을 맺는가 하는 문제는 상단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과거 무당이 성세를 구가할 때만 해도 중원의 이름 있는 상단들이 줄을 섰고, 그를 차마 내칠 수 없어 마지못해 도와준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당의 영향력은 인근의 단강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당이 쇠퇴하는 사이 제갈세가가 영역을 넓혀 이권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탓에 누구도 무당과 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무당의 힘이 여전함을 슬쩍 내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보인다고?”
“예. 상인들이 수준 높은 무예를 본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청자 배 아이들의 수련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일상적인 수련이라 말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흐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명선의 말에 명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진혜가 안내하는 동안 따로 준비하라 이를까요?”
명선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무당의 살림을 맡고 있었기에 청양상단과 맺어지려는 연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명선 장로님, 장문인.”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장로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일대제자가 나서서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으나 청양상단을 소개한 공을 높이 사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혹,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영은궁의 제자들에게 미리 준비를 시켜 둔 것이 있습니다.”
“오!”
모두가 진혜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그래. 무엇을 준비했느냐?”
“한 달 전부터 사부님의 도움을 받아 구궁검진(九宮劍陳)을 수련시키고 있습니다.”
“구궁검진을?”
장로들이 진혜의 사부인 명공을 바라보았다.
명공 역시 이미 알고 있었기에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무당이 자랑하는 구궁검진이었고 명공과 진혜가 직접 수련을 시켰다면 힘을 보여 주기 부끄럽지 않을 터였다.
“허허, 네가 정말이지 큰일을 하고 있었구나. 잘하였다.”
명현이 진혜를 다시 한번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오냐, 그럼 서둘러 나가 보거라. 손님들 기다리겠구나.”
“예.”
진혜가 공손히 답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하하, 이거 참. 명공이 제자를 잘 키운 모양입니다.”
“암요. 저리 속이 깊을 줄이야.”
“근래에 들리는 것이 어찌 다 좋은 소식입니다. 장문 사형.”
장로들이 너도나도 진혜를 칭찬하고 나섰다.
“그러게나 말일세. 진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고 진혜도 그렇고. 이제야 우리 무당에 볕이 들 모양이네.”
“암요. 암요. 모처럼 깊이 잠을 청하시겠습니다.”
그동안 명현의 고충을 모르지 않은 장로들이 저마다 위로를 하고 나섰다.
“하면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명공이 일어나자 명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상주님.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먼저 자소궁 밖으로 나와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던 청양상단의 총관 이치성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제 주인을 닮아 세모꼴에 비열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뭐가 말이냐?”
“다른 물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은원보가 한 궤짝입니다. 그 정도라면 차라리 제갈세가와 연을 맺는 것이…….”
무당이 망해 가는 지금 호북성의 최대 세력은 융중산(隆中山)의 제갈세가였다.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예?”
“이놈아. 내가 그리 생각이 없어 보이더냐?”
금적산이 야비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은원보 한 궤짝. 큰돈이기는 하지. 허나 제갈에 그 돈을 바쳐서 얻는 게 있겠느냐?”
“…….”
“다른 곳도 아니고 세속에 누구보다 밝은 제갈이다. 그 안의 학사 놈 중에 우리에 대해 아는 놈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야…….”
학문뿐 아니라 상리에도 밝은 가문이니 필시 그러할 터였다.
“제 놈들 체면에 밀수로 돈을 번다는 사실도 알고 연을 맺으려 하겠느냐?”
“…….”
“은원보를 바치면 받기는 하겠지만 그 뒤는? 모른 체할 게 틀림없다. 헛돈만 날리게 되는 게지.”
“그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당은 힘이 없는데…….”
“없지. 아니, 계속 없어야지. 그래야 다른 날파리들이 꼬이지 않을 게 아니냐.”
금적산의 눈빛이 점점 더 야비하게 변했다.
“무당이 망해 간다곤 해도 세간의 생각은 다르다. 무당이 중원의 종맥이자 세상 어느 곳보다 떳떳한 도문이라는 것은 동네 세 살 꼬마도 아는 사실이란 말이다.”
“그렇지요.”
“우리가 그런 곳과 연을 맺었다 소문을 내어 보아라. 또한, 힘도 없는 무당에게 선뜻 발전 자금을 내주었다는 소문이 돌아 보아라.”
“아!”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에 대한 중원의 평판이 달라질 게다. 당장은 손해라 해도 차차 나아질 게야. 안 그래도 근래에 관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떡하니 현장에 명망 높은 무당 도사라도 도와주러 오면.”
“그렇군요. 관에서 보는 시각이 달라지겠군요.”
이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봉문 이후로 약화되었다고 해도 천년을 이어 온 무당의 이름이다. 관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무공 중에도 거슬러 오르면 무당의 것이 수십은 될 터였다.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도 남는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무당뿐이었다.
“그래. 큰돈이지. 하지만 그로 인해 도사 놈들도 돈맛을 알아 갈 게다. 더없이 궁핍하니 맛을 보고 나면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이고. 지금이야 제 놈들이 대가리를 뻣뻣하게 들겠지만, 나중에는 사정하며 매달리게 될 게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치성은 금적산의 교활함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대단? 흐흐, 고작 그뿐이라 생각하느냐?”
“예?”
“내 이미 진혜 도장과 약조한 것이 있느니라.”
“약조라 하시면?”
“무당에는 아직 대제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아!”
대제자.
다음 대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었다. 만약 그 대제자가 진혜가 된다면?
“그놈은 제 놈 욕심에 대제자가 되어 우리를 이용한다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우리에게 휘둘리다 보면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과연! 상단주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이치성의 놀람에 금적산이 비열한 눈빛으로 자신의 수염을 쓸었다.
진혜로 인해 무당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은 금적산에게 천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흐흐흐, 도사 놈들. 필요한 만큼 뽑아 먹어 주마.”
금적산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 사이 진혜가 상청궁을 빠져나왔다.
“상단주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모처럼 청량한 도문의 분위기에 가슴까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금적산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진혜를 대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예.”
* * *
진혜와 금적산이 사라진 뒤.
담벼락 뒤에 팔짱을 끼고 있던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청우와 청상을 충허암으로 돌려보내고 자소궁으로 향하던 걸음이었다.
때마침 금적산과 이치성이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기에 어떤 놈들인가 알고 싶어 기척을 지우고 접근했다.
그런데.
염소수염 새끼.
어쩐지 비열해 보이더라니.
물론 칭찬을 해 주고 싶을 만큼 기특한 생각이었다.
이른바 뒷돈, 혹은 뇌물.
언젠가 무당을 타락시키기 위해 반드시 모두에게 권장해야만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염소 대가리 같이 생긴 놈이 감히 내가 찜한 영역에 대놓고 오줌을 갈기려 들어?’
무당의 타락 계획은 오롯이 자신에 의해 진행되어야 했다.
그것이 진무의 즐거움이었고 다시 사는 목표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놈이 끼어들어서 안 도와줘도 될 일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진혜를 대제자로 만들겠다고?’
진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대제자는 자신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양의심공(兩儀心功)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내력의 상충 없이 몰래 자신의 묵룡혼원공을 익혀 과거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힘을 얻고 난 뒤 정무맹 전체를 손에 넣으려는 원대한 계획의 발판인 무당을 접수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잡것들이 내 계획을 방해한다 이거지?”
진무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풀었다.
나의 계획을 위해 네놈들의 음모를 반드시 박살 내 주마.
그리고 특히 진혜.
‘이 새끼, 감히 나와 경쟁을 하려고 들어? 어디 두고 보자.’
진무는 천천히 그들을 뒤따라 영은궁으로 향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자신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이제 적을 알아야 했다.
* * *
무당 팔궁.
무당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었다.
자소궁을 포함해 정동(淨東), 영은(迎恩), 우진(遇眞), 옥허(玉虛), 남암(南岩), 오룡(五龍), 태화(太和)라 불리는 여덟 궁은 거대한 산 능선을 따라 용의 형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록 현재에는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못해 오궁과 일관만이 남아 있었다.
명자 배로 구성된 여섯 명의 장로들은 각각 오궁과 일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그중 영은궁은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계율을 담당하는 만큼 그곳에 소속된 도사들은 걸출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주인인 명공 역시도 명자 배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실로 기세가 대단합니다.”
금적산이 수련 중인 이대제자들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날 선 기세가 피부를 쩌릿하게 울려 왔다.
비록 이대제자로 구성된 무인들이었으나 그의 상단에 소속된 어떤 무인들보다 뛰어나 보였다.
특히나 단체로 검을 뻗었다가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는 검초는 군무처럼 아름다웠다.
“이대제자라 들었는데 놀람을 금할 수가 없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진혜와 금적산이 수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영은궁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부……님?”
영은궁의 주인인 명공의 모습에 진혜가 급히 뛰어가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은 왜?’
명공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