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정무맹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있는 동안 진무는 청해성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론 그딴 일이 있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엣취!”
사천을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며칠이 지난 날.
청해를 접어들며 날씨가 추워진 탓일까?
주륵 흘러내린 콧물에 진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추운 날씨 탓에 말(馬)조차 콧물을 흘리는데 진무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고수가 추위를 느끼냐고?
당연하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이라는 말은 그저 과장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춥고 더움을 절로 느끼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 단지 내공의 힘에 의해 내성이 강해질 뿐이었다.
물론 버틸 수는 있었다.
어렵지도 않다. 그저 내공을 줄기차게 뽑아서 몸을 보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뭐 하러?
내공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진무는 그따위 걸 버틴다고 아까운 내공을 소모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운기를 하면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언제 칼 들고 적이 등을 노릴지 모를 풍진강호에서 쓸데없이 내공을 소모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내공이 달려서 뒈지는 것보다야 추운 걸 느끼는 게 낫지.
까짓 추우면 옷을 껴입고 더우면 벗으면 될 일이었다.
“젠장, 미리 솜옷이라도 사 입고 올걸.”
진무가 칼바람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청명한 날씨에 멀리 보이는 높다란 산을 바라보았다.
성산(聖山) 곤륜.
누가 봐도 ‘여기 도관이 있소이다!’라고 할 만큼 영험한 산이다.
산정이 아래를 채운 구름 위에 자리 잡은 도관이 마치 신선이 거처하는 곳처럼 여겨졌다.
자연과 어우러진 광경이 참 멋들어지기도 하다.
무당도 그렇고 청성도 그렇고, 역시 욕심 많은 도사 놈들은 산세 좋다는 자리는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진무의 다음 목적지인 곤륜파가 있는 곳.
일단 마을에 들러서 때 빼고 광도 내 줄 필요성이 있다.
도포를 차려입고,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면 번듯한 도사의 외양이 되는 것이다.
청성에서 이미 해 보았지 않은가?
참 귀찮기는 해도 일단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예의를 갖추고 슬슬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면 좋아라 할 게 틀림없었다.
“자, 가자. 이놈아!”
진무가 힘차게 말채찍을 내리치자 잠시 쉬며 체력을 회복한 흑마가 길을 거칠게 내달렸다.
* * *
곤륜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양풍현(凉風縣).
곤륜산맥 줄기에 위치한 제법 큰 마을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진무는 곧장 관도에서 가장 큰 객점으로 향했다.
호객에 능한 점박이 소년이 발 빠르게 다가와 말고삐를 받아 들고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옵셔.”
“방 있어?”
“예.”
“그럼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방으로.”
짤랑.
진무가 전낭에서 철전을 꺼내 떨어뜨리자 소년이 눈치 빠르게 손을 내밀어 낚아채곤 이빨을 보이며 씩 웃었다. 교육이 잘된 녀석이다.
“정원이 딸린 별채가 있는데 그곳으로 할깝쇼? 담이 높아 밖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운물도 준비해야겠죠?”
“…….”
“말 여물도 넉넉히 주구요?”
짤랑.
“감사합니다, 대인!”
소년은 금세 진무의 신분을 대인으로 격상시켰다.
요즘 중원 점소이들은 어디서 교육이라도 받고 실전에 투입되는 걸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과연 찾아온 객의 주머니를 열 줄 아는 녀석이었다.
아니 설마? 혹시!
진무가 소년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인, 어찌?”
“너도 사장이냐? 어디서 투자금도 지원받고?”
“……예?”
“아,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별채로 안내해라.”
“예, 대인!”
혹시나 했다.
감자현에서 당가가 뒤를 봐준다는 객점 점소이와 성향이 비슷한 것 같아서.
“짐은 제가 들겠습니다.”
“그래.”
능숙하게 진무의 짐 보따리를 받아 든 점소이는 갑자기 생긴 공돈 때문인지 기분 좋은 얼굴로 앞서 걸었다.
별채는 꽤 넓었다.
작은 정원이었지만 제법 관리가 잘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석등과 연못이 고급스러움을 느껴지게 하는 곳이었다.
“저, 대인.”
“……?”
소년이 누가 들을세라 은밀하게 다가와서 귓가에 손을 가리고 속삭였다.
“혹, 원하시면…… 불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뭐? 불? 불은 당연히 넣어 줘야지.
날이 이렇게 추운데.
하지만 소년의 눈빛이 뭔가 음흉하다.
이 자식 설마?
꽁!
“아얏!”
“어린 녀석이 까져 가지고.”
“아! 죄송합니다. 너무 훤칠하시고…… 잘생기신 게 명문가의 대공자님 같으셔서요. 혹시나 좋아하실까 싶어서.”
하긴 사천을 떠날 때 당가에서 마련해 준 화려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데다 칼도 없으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산천 유랑이나 다니는 한량처럼 보일 만도 했다.
“가서 물이나 빨리 준비해 와.”
“예! 대인.”
어떻게 몇 푼 수고료를 더 챙길까 싶어 돈독이 올랐던 소년이 본전도 못 찾고 밖으로 나가는데 슬쩍 회가 동하긴 했다.
오래 쉬긴 했지. 혈기 방장한 젊은 나이에 그놈의 신분이 뭐라고, 불쌍하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신성한 도량에 올라야 할 몸이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지 않으면 부정을 타서 조각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량수…… 젠장, 뭔 도사 흉내야?”
도호로 동한 마음을 다스리려던 진무가 피식 웃고 말았다.
팔십 년을 사패천주로 살았거늘, 무당의 제자로 살아온 이 년이 더욱 큰 영향을 끼친 것일까?
어느새 도사처럼 생각하고 도사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말투며 행동도 어려진 것에 가끔씩 놀라고 있었다.
진무 놈의 기억이 머릿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일까?
망할 놈.
고작 도동으로 살아갈 팔자였던 놈을 무당지검으로 올려놓은 것도 그렇고, 제 스승인 명진을 건강하게 회복까지 시켰으면 이제 떨어져 나갈 때도 되었건만.
진무가 문득 지나온 시간을 떠올렸다.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때론 신나고 때론 코끝이 찡한 날도 있었다.
처음에는 급한 마음에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이름 석 자 말할 정도는 되었다.
아직 혁련무강 시절에 가진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엄청나다 못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빠른 성취였다.
사패천주로 살면서 좋은 걸 많이 처먹기는 했으나 영약이니 영물, 영초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그렇기에 팔십 년 동안 무던히도 노력해서 깨닫고 깨달아 그만한 경지를 이루지 않았던가.
참 희한하게도 다시 사는 삶에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벌써 영단만 두 개다.
무당의 태청신단과 당가의 삼양보명단.
그것이 없었다면 강의 경지는 언감생심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먹은 불로초가 행운을 불러다 준 때문인지, 재수 없다 생각했던 도동 놈의 팔자가 사실은 천운을 타고났던 건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길 가다가 엎어져도 산삼이 입에 들어올 운이다.
설마? 곤륜에서도?
행복한 상상을 잠시 해 봤다.
“아니야. 확실히 인복은 없는 것 같았어.”
하긴 그러하다.
만나는 놈마다 이상한 것들 투성이니.
그 부분은 이제 딱히 기대도 되지 않는다. 이젠 그냥 길에서 만나도 미친 연놈을 만날 것만 같으니까.
“그나저나 적사투관이란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했다더니 얻은 내공이 제법이야.”
그 외에도 아직 연단되지 못한 삼양보명단의 기운이 세맥에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일단은 그대로 두자.
내공의 연단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태청신단이야 주의 사항까지 적혀 있었고 무당의 것이었지만 삼양보명단은 달랐다.
더욱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제멋대로 들어온 녀석이라 아직 내공의 성향을 모른다.
뭐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차차 시간을 두고 연단하면 될 일이다.
선기와 달리 불순물 덩어리인 내공을 괜히 무리해서 단전에 채웠다가 하나도 흡수하지 못하고 날려 버리면 아깝기만 했다.
진무는 선 채로 운기를 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슬쩍 기운을 집중했다.
우웅!
진한 떨림과 함께 피어난 푸른 선기가 손안에 맺혔다.
쑤욱!
손안에 둘러진 강기가 그 길이를 늘이며 잡히니, 마치 그 모양이 한 자루의 검처럼 보였다.
기검(氣劍).
수강과 기검은 전혀 다른 경지였다.
수강은 두르는 것이지만 기검은 응축된 기운을 검처럼 사용하는 경지라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강기를 자신의 마음대로 가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단계였다.
그것은 검기를 가공하는 것보다 몇십 배 어렵다.
강기라는 것 자체가 막대한 내공을 소모하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까지 진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검환처럼 구슬 모양을 만들거나 검의 궤적을 따라 생기는 반월 모양의 강기를 쏘아 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얇은 비침으로도 가공할 수 있고, 강기가 날아가는 속도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다.
거기까지가 진무가 생전에 깨달은 수준이기에 가능하다.
철지량처럼 이기어검에 이르자면 또 다른 깨달음이 필요했다.
일명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어야 가능하다.
검이 나고, 내가 검인 물아일체의 정신 나간 경지랄까?
그다음이 이기어검이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아는 수준에서 발전해 왔지만, 거기서부터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지. 검을 극한까지 익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약간은 자기만족이긴 했지만, 기검으로 충분하다. 양의심공을 온전히 얻고 나면 묵룡혼원공을 익혀 다시 한번 최강이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철지량이 이기어검을 쓴다고 해도 볼기짝을 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해서, 기검을 만들고 나니 사용하고 싶어진다.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 과거랑 비슷할지.
“허억!”
막 진무가 푸른 기검을 들고 시험해 볼 대상을 찾아 정원을 서성거리는데, 물을 데우러 갔던 소년이 돌아왔다가 그를 발견하고 식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왔냐? 물은?”
“살려 주십시오!”
“……?”
갑자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이구, 그게 뭐든 이놈이 다 잘못했습니다요. 무림인이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소년이 납작 엎드려 손을 싹싹 빌어 대기 시작했다.
“……아!”
진무는 그제야 소년의 영문 모를 반응이 자신의 손에 들린 기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일반 민초에게 무림인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듯 공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선 하늘을 날고 쇠를 무처럼 썰어 대는 것도 모자라, 사람 목숨 같은 건 파리처럼 여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청해는 격전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마교와 곤륜이 영역 다툼을 하는 곳이 아닌가?
아마 그사이에 눈먼 칼에 맞아 죽은 민초들도 부지기수일 터였다.
“생각을 못 했네, 미안. 물은?”
“주, 준비되었습니다.”
“알았다.”
굳이 소년을 일으켜 줄 이유는 없었다. 딱히 진무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그의 공포와 두려움은 그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
이젠 공돈을 주지 않아도 이것저것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아 참, 밥이랑 술도 좀 가져와.”
“예! 대인!”
진무가 물이 준비되었다는 곳으로 걷다 문득 생각난 듯 말하자 소년이 슬며시 일어나다가 재빨리 고개를 도로 처박고 엎드렸다.
그 역시 진무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뭐, 그냥 그대로 두었다.
목욕은 꽤 긴 시간 이어졌다.
목욕을 한 지가 한 달? 아니 그보다 더 됐지.
감자현에 들렀을 때 했던 것이 마지막이니 위생 상태가 엉망이다.
목욕통 안의 물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니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휴, 개운하네. 누우면 잠이 솔솔 오겠구만.”
그래도 배는 채우고 술도 한잔할 생각이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마시는 한 잔의 술은 숙면으로 가는 최고의 명약이니까.
그래, 개운하게 가야지.
신성한 도량인데 개운하게, 맑은 정신으로.
목욕을 마치고 나온 진무는 어느새 소년이 가져다 놓고 간 음식과 술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꿀꺽.
일단 술부터.
알싸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니 천상계가 따로 없었다.
“휴…….”
대충 식사를 마치자 노곤해진 몸에 피로가 더해지고, 취기마저 오르니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했던 몸이 풀리고, 찌르륵거리는 밤 벌레들의 작은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때쯤.
채앵!
때아닌 쇳소리가 감기던 진무의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자야지.
채앵!
자고 싶은데.
채앵! 챙! 채챙!
잘 거라고!
무시한 채 억지로 잠을 청해 봤지만 저놈의 쇳소리가 신경을 한껏 곤두서게 했다.
“이런 개만도 못한 것들이!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거늘!”
화가 절로 치민다. 밤이 되면 자야지, 망할 놈의 자식들이!
일단 조용히 시켜야겠다.
진무는 짜증이 뚝뚝 흐르는 표정을 하곤 훌쩍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채앵!
청각을 집중해 방향을 찾았다. 어디냐, 소리.
콰앙!
오래지 않아 폭음과 함께 멀리 지붕이 터져 오르는 것이 시선에 잡혔다.
아무리 격전지라지만 남들 다 자는 오밤중에 싸움질이라니.
역지사지라는 마음 씀씀이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 같으니.
기다려라. 내 단잠을 깨운 대가는 비싸다.
파앙!
진무의 신형이 기왓장 하나를 부수며 밤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