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음…….”
정신을 차린 뒤에 차분히 가라앉은 풍환이 진한 신음을 내었다.
자신의 앞에 앉은 진무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미안하네. 내 병증이…….”
염병, 병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마터면 양의심공의 조각을 찾기도 전에 뒈질 뻔했다.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미리 나설 일이지.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내상을 입은 뒤에 끼어들 건 뭐란 말인가?
젠장, 뭐긴 뭐야. 저 시커먼 속을 왜 모르겠어, 내가.
풍환이 진정되고 난 다음에 고생했다며 웃는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진무가 질 때까지 지켜본 것이 틀림없다.
망할 곤륜 도사 놈들 같으니.
그리고 진짜로 영안이 개방되어 풍환이 진무의 몸속에 있는 자신을 알아본 줄 알고 식겁했다.
어딜 봐서 이 몸이 그 대단하고 멋들어진 사패천주 혁련무강처럼 보인단 말이냐?
턱도 없는 일이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진무가 예의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치미는 짜증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내자 풍환이 더욱 미안해했다.
“사부님, 너무하셨습니다. 무당지검인 진무 도장을 그 간악한 사파의 악적으로 오해하시다니요.”
운암이 툴툴거리며 풍환의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랐다.
너도 똑같은 새끼다.
처음에만 좀 막더니 장문인 옆에서 지켜보는 거 다 봤어.
그리고 아무리 옹호해 준다고 해도 ‘간악한’이라는 말은 참 거슬린다. 어린놈이, 제 놈은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러게 말이다. 그 간악한 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인데. 허참, 내 미친 게야.”
“…….”
이 자식마저?
과거에 풍환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이 살얼음처럼 얇아진다.
“여하튼 당대의 무당지검께서는 대단하시구먼. 듣자 하니 나의 모든 힘을 담은 운룡대팔식을 칠 초까지 막았다지?”
“정확히 육 초입니다.”
“…….”
“칠 초에 면장의 흐름이 부서졌고 팔 초에 죽을 뻔했지요.”
진무가 언짢은 표정으로 투덜거리자 풍환이 빙긋이 웃었다.
“허, 진짜로 이겨 볼 생각이었던가?”
“사조님께선 진짜로 죽이실 생각이셨고요.”
“……미, 미안하네.”
머쓱해진 풍환이 슬며시 찻잔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이 괜히 어색하니까 차를 마시는 척을 한다. 미안하면 다른 곳처럼 뭐라도 줘야 할 거 아냐?
곤륜의 영단이라든지, 양의심공의 조각이라든지.
진무가 한껏 째려봤지만 풍환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운암을 바라보았다.
“운암아.”
“예, 사부님.”
“진무 도장이 기거하는 동안 많이 배우거라. 큰 진전이 있을 게야.”
“당연합니다. 안 그래도 허락하신다면 대련해 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거립니다.”
운암이 주먹을 불끈 쥐며 콧바람을 내뿜는다.
꼴에?
어디 새파랗게 어린 놈이 호승심만 잔뜩 들어서는.
시작과 동시에 처맞고 뻗을 놈이.
“저뿐만이 아닙니다. 사부님.”
뭐?
“일대제자들마저 어떻게 한번 가르침을 받아 볼까 줄을 서서 천룡각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호오? 장하구나. 옳다. 자고로 무인에게 수련도 중요하지만, 실전 비무를 통해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니라.”
“예. 사부님.”
운암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무를 바라본다.
잔뜩 흥분하는 것이 또 되지도 않는 옹알이나 늘어놓을 듯싶었다.
대련? 비무?
마교랑 싸우면서 호승심만 잔뜩 생긴 호랑말코 도사 놈들 같으니.
그래 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다, 귀찮은 도사 놈들아!
“그래, 진무 도장은 곤륜에 얼마나 머물 참인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매번 똑같은 것을 묻는지.
“아직 정한 바 없습니다.”
“그러한가?”
진무가 여전히 퉁명스러운 기색이자 슬며시 일어난 풍환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우, 내 매번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먼. 맺힌 것이 많았던 것이야. 혁련무강 그 간악한 자가 정사대전이 일어난 틈에 무당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내 그때 검성이 말렸다 해도 무당을 도왔어야 했는데…….”
회한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뇌까리는 풍환의 모습에 운암이 아련한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누가 속을 줄 알고?
죽을 뻔한 속을 풀어 주려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대고 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이제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 했다.
풍환은 전대 장문인이자 곤륜의 가장 어른이었다.
아무리 현직 장문인에 의해 통제되는 곤륜이라 해도 그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조사전이 없다면 서가를 뒤진다.
서가에도 없다면 곤륜팔관을 뒤지고 천룡각은 물론 그 외 크고 작은 건물들을 샅샅이 뒤져 볼 참이었다.
청성에서 그러했듯 분명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무혈과 같은 열쇠를 얻은 것은 정말로 천운이 닿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비슷한 구멍을 발견한다면 잡아 뜯어내서라도 찾아낼 생각이었다.
“사조님.”
“말하게.”
“저도 곤륜의 제자들과의 대련을 통해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호오? 그래?”
풍환이 반색하며 진무를 바라본다.
일단은 하나를 내어 준다.
“그리고 청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게.”
“곤륜에서 도문의 정취를 느끼고 싶습니다.”
“도문의 정취?”
“예. 분위기와 무공, 각종 역사까지요.”
“흐흠.”
풍환이 가만히 진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어 줬으니 이제 얻는다.
“해서 곤륜을 더 알고자 함입니다. 허락하신다면 돌아보고 싶습니다.”
“허허, 어찌 거절하겠는가? 내 무당지검이 본산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장문인께 청을 넣어 주겠네.”
됐다.
허락을 득했으니 이제 찾기만 하면 된다.
“운암아.”
“예. 사부님.”
“진무 도장을 안내해 주거라. 서로 다른 뜻이 있음이나 무당은 우리 곤륜과 함께 중원 도맥의 또 다른 근본이다. 함께 다니며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배우도록 하거라.”
“예.”
응? 뭐?
그건 부탁 사항에 없었는데?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풍환을 향해 물었다.
“저, 그 말씀은 운암 도장과 함께 다니라는?”
“당연한 말일세. 허허.”
“…….”
풍환이 미소를 짓자 열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운암이 진무를 바라본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진무 도장.”
귀찮은 게 또 달라붙고 말았다.
짐 덩어리이자 감시역이…….
* * *
현천관(玄天館)
곤륜의 모든 장서를 모아 둔 곳이었다.
그 규모가 원체 방대해서 세 개의 층을 각기 열두 개의 방으로 나누었고, 방마다 수십 개의 서가를 두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안에 꽂혀 있는 장서들만 해도 수만 권에 달했다.
운암과 함께 무학의 기초 장서들을 모은 그 첫 번째 방 안에 들어선 진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넓어! 그리고 무지하게 많잖아!
이걸 언제 다 뒤지고 언제 찾는단 말인가?
평생 걸리겠다.
청성의 조사전에서는 운이 좋았다. 무혈에 대한 단서를 남긴 파자 한 구절을 바로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조차 당세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망할, 그녀를 끌고 왔어야 했나?
진무가 문득 운암을 바라본다.
뭔가 기대감이 찬 눈으로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
어쩌면 이번엔 얘가 쥐 잡는 방법을 알지도…….
“운암 도장.”
“예.”
진무는 운암만큼은 차마 사숙이라 칭할 수 없었다.
항렬이 높다고 사숙이라 부르기엔 자존심이 좀 상한 것이다.
뭐, 본인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고.
“혹, 백 년 전쯤에 어떤 분이 장문인이셨는지 아십니까?”
“백 년 전이요?”
“예.”
진무의 물음에 운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하여 그런 걸 묻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백 년 전이라면 사부님의 바로 이 대(二代) 전이니…… 무현 사조님이네요.”
무현(武玄).
곤륜의 시초부터 살피기에는 너무나 방대하다.
책 한 권을 일각에 독파하는 거짓말 같은 능력이나, 기관진식을 발견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제갈세가의 태생이 아닌 이상 일 년, 아니 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시간을 줄이려면 일단 백 년 전의 장문인인 무현, 그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한다.
“혹, 그분이 살아 계실 당시에 남기신 서적이나 기록 같은 것은 없을까요?”
“있긴 하지요.”
역시!
“그곳이 어딥니까?”
“그분과 관계된 기록은 아마도 삼 층 역사관에 있을 겁니다.”
역사관.
진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힌다.
뒷발에 쥐 잡는 것은 아직 모르겠지만 든든한 안내역으로는 충분한 녀석이다.
“갑시다.”
“예? 이곳은 어떻게 하고.”
운암이 묻는 것을 가뿐하게 무시해 버린 진무가 삼 층에 있다는 역사관으로 이동했다.
역시나 많다.
하지만 무현과 관계된 역사만을 집중해서 먼저 살핀다.
진무는 한적한 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음.”
진무의 말에 운암이 서가에서 열 권짜리 묶음 서책을 꺼내 주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책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호승심에서 기인한 흉내 내기였다.
진무가 무언가를 얻는다면, 그만큼 자신도 얻을 것이라 다짐하며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 지나갔다.
책 속의 구절들을 탐독하며 집중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밤이 지났는지, 그러다 낮이 되었는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진무가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운암은 한 가지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놀라고 있었다.
집중력.
엄청나다.
누가 보면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도무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진무는 읽고 또 읽었다.
지칠 만도 한데.
‘흥, 절대로 질 수 없지.’
몰아치는 허기에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였으나 운암은 끝까지 버텼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집중력과 끈기에서도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사부에 근접한 자.
그리고 사부의 뜻을 이어 가는 자신.
이는 무당과 곤륜 간의 또 다른 자존심 대결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진무가 물끄러미 운암을 바라봤다.
이 자식은 지금 내가 뭘 찾는지 알고나 이러는 걸까?
진무가 찾는 것은 오로지 한 구절인데 운암은 마치 공부를 하듯이 마구잡이로 읽으며 외기까지 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뭔가 얻고 싶은 것은 알겠는데 진무가 보기에는 무턱대고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곤륜에도 있구나. 색다른 또라이가.
“운암 도장.”
“예!”
“배고프네요.”
“아!”
꼬르륵.
마치 마음이 통한 듯 때맞춰 운암의 배에서 힘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러네요.”
“가시죠.”
“예!”
둘이 서책을 정리하고 천룡각을 향한 시각은 이미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현천관에 들어온 것이 사시(오전 9시)였으니 무려 일곱 시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책만 읽은 것이다.
눈이 빠질 듯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두 끼를 굶은 탓에 허기도 제법 심했다.
첫날은 실패.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만다.
진무는 굳게 다짐하며 천룡각에 마련된 거처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또 다음 날.
곤륜에 머물며 현천관에서 서적들을 읽기 시작한 지 닷새가 지났을 때.
“으아악! 이런 씨발!”
진무의 인내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무현에 관련된 책만 읽었는데 그 정도였다.
뭔 기록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리고 의심스러운 구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으흑흑, 망할…….”
양의심공, 너는 도대체 어찌하여 날 이리도 힘들게 한단 말이냐.
급기야 눈물까지 보이는 진무의 모습에 운암은 흠칫 놀라며 그가 미친 게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