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듣자 하니 진룡, 그분과 동수를 이루었다지?”
말이 돌고 돌아 태허가 말할 차례였나 보다.
“과장된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분께 비견(比肩)이 되겠습니까.”
“저런, 겸양은.”
진무의 겸손에 태허가 칭찬해 마지않자 명진이 흐뭇해했다.
“그래, 무당지검께서는 우리 화산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송구스럽게도 도동의 몸으로 스승의 은혜를 입어 일대제자가 된 터라 잘 알지 못합니다.”
“허헛. 그러하구만. 허긴, 외유가 처음이라 했으니 산중 도사가 어찌 바깥의 사정을 일일이 다 알겠는가? 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괘념치 말게나.”
진무가 나름 예의를 다해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태허가 손사래를 쳤다.
“허면 우리 화산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해 주지.”
“…….”
설명을…… 한다고?
진무가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태허가 손짓하자 도동이 족자가 몇 장이나 겹쳐 걸린 커다란 나무판을 들고 들어왔다.
도대체 저런 건 언제, 뭐 하러 준비한 거지?
“우리 화산은 말일세…….”
“…….”
“천주궁을 시작으로…….”
“도가의 역사가 담긴 사대동천이…….”
“사자암(獅子岩), 전진암(全眞岩), 남천문(南天門), 건원동(乾元洞), 오리관(五里關)이라는 이름의 소방파가 뭉쳐…….”
“에, 또…… 그리고…… 덧붙이자면…….”
“…….”
지친다.
화산의 역사에서부터 역대 조사에 대한 설명, 현재의 재정, 연결된 상단들의 목록에 화산파가 보유한 전답…….
미친놈들인가.
그딴 걸 내가 왜 들어야 하는 거냐?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태허가 시작하면 을룡선상, 요 네 놈이 차례로 말을 받아서 잇고, 또다시 태허로 돌아오고, 또 을룡선상…….
아니 염병, 어떻게 된 게 다섯 놈이 말하는데 겹치거나 끊기는 것도 없어. 합격술이냐? 연습했어?
니들 그거 나쁜 습관이야, 이 자식들아!
하지만 진무의 치열한 인내심과 극한에 달하는 지루함을 무시한 을룡선상은 도동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자랑질이라도 하듯이 순서대로 설명에 부연까지 덧붙였다.
그, 그만! 제발 그만!
고문이 다른 건 줄 아냐!
차라리 내 귀에 법주를 외워라!
양의심공이고 뭐고 당장에 앞에서 지껄이고 있는 늙다리 도사 놈들의 멱살을 잡고 입을 찢어 멈추게 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진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말고 문득 옆의 명진을 보니…….
경청하고 있다. 처음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아, 역시 스승님은 위대하다.
살아 있는 게 맞나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미동조차 않는 모습이, 정말이지 위대한 동상이다.
도가에서 스승만큼 도를 닦으면 다 저렇게 될 수 있나?
아니면 무당의 무공 중에 순간적으로 등신불로 변하는 그런 무공 같은 게 있는 건가? 소림과의 교류?
하여간에 별의별 잡생각이 들다 못해 지나가던 벌레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 헐, 잠깐만. 저 벌레 지금 바르작거리는 게 곧 죽겠는데. 저 노인네들 화산 염불 외는 거 듣다가 귀에서 피가 찍 나왔어. 내가 봤어.
기다려라, 미물. 내가, 이 무당지검이 네 원수를……!
“……이것이 화산이라네.”
진무의 고개가 벼락같이 족자에서 태상의 입을 향해 돌아갔다.
끝났다. 드디어 끝났어!
박수를 미친 듯이 쳐 주고 싶다.
끝내 줘서 고맙다고.
“이제 화산에 대해 조금 알겠는가?”
“예!”
진무가 힘차게 대답했다.
“허허, 당대의 무당지검은 이해력도 빠르구만. 아직 설명이 조금 남기는 했는데…….”
뭐? 남은 게 또 있다고?
때려죽여도 이젠 못 참는다, 이 설명에 미친 놈들아!
진무가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벌떡 일어나려는데.
“허허, 장문인. 대장로님들. 어찌 한 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이쯤 하시고 차차 알려 주시지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진무가 먼 길을 온 터라 피곤할 것입니다.”
명진이 진무를 위기에서, 아니 진무에게 맞아 죽을지도 몰랐을 태허와 을룡선상을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허허, 이런, 이런. 내 생각이 짧았구먼. 그래. 그만 쉬도록 하게.”
“예. 장문인.”
명진의 도움으로 진무는 장장 두 시진이 넘는 설명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태허와 대장로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명진과 진무는 도동의 안내를 받아 진허와 운암이 기다리는 접객당으로 향했다.
산중 도량의 밤은 참으로 고즈넉했다.
그놈의 설명을 들은 때문일까?
바라보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알게 되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달빛이 희게 부서지는 하얀 화강석의 위에 산하를 굽어보는 모양새로 지어진 천주궁의 모습은 마치 극상의 여백의 미를 구현한 듯했다.
동서로 조양과 연화, 남북으로 낙안과 운대라 이름 지어진 봉우리마다 소박하게 지어진 명승과 도관이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었고, 바위 벽을 뚫어 만든 수행동은 자연을 활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감탄하게 했다.
대단하다.
바위 위에 지어져 모진 풍파를 견디며 이겨 왔을 것이 아닌가?
마치 화산이 그러하듯 오랜 무림의 역사를 살아오며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모습이 그들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천주궁을 떠나 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자 만장단애와 이어진 절벽 금룡협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여기가 접객당입니다.”
도동이 안내를 끝마친 곳에 위치한 접객당은 피정처(避靜處)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피정, 참 좋은 이름이었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고요함 속에 노닌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만장단애의 절벽 위에 세워진 피정처의 반대편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추락하며 장관을 이루는 한 줄기 폭포의 모습이 이름에 걸맞게 어우러졌다.
절로 심신이 편안해진다.
도사 놈들, 역시 풍광 좋은 곳은 죄다 차지하고 있구나.
“그래, 그간 어찌 지냈는지 말을 해 보려무나.”
접객당 안에 넷이 둥글게 모여 앉자 진무를 향해 명진이 묻는다.
“아니, 뭐. 그다지…….”
이미 서신으로 들었을 텐데.
진무가 귀찮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처음 무당을 떠나던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가 입을 떼었다.
등여평을 만나고, 철지량과 비무를 하고…….
“허엇! 검성과 동수를 이루었단 말이냐?”
“아 뭐…….”
그냥 사건만 나열한 것인데 과하게 반응을 해 온다.
스승과 진허, 운암이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이 세우는 모습에……문득 약간의 과장을 조금 섞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표라는 자를 만났사온데……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인 살수…….”
“허엇! 그런 사람이 실존한단 말인가? 허허,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라니, 전부 지어낸 말인 줄 알았거늘!”
“…….”
이걸 믿어?
눈은 왜 또 초롱초롱해지고……?
니들 설마 내가 용을 타고 날아다녔다고 해도 믿을 건 아니지?
“안 되겠습니다. 사숙. 이런 이야기를 그냥 듣기에는 너무 흥취가 떨어집니다.”
“옳거니! 서둘러 가서 화산의 명주인 매향옥루주라도 얻어 오너라.”
“예, 고기도 좀 얻어 오겠습니다.”
“오냐!”
진허가 말하고 명진이 답하며, 운암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함나, 도문 꼬라지 잘 돌아간다.
운암은 그렇다 치더라도 니들이 도사냐? 도사야? 얼마 전까지 십계를 지켜 온 무당의 긍지 높은 도사냐고?
“진무야. 내 다녀올 때까지 절대로 이야기를 진행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다짐 두듯이 말한 진허가 쌩하니 피정처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말 빨리도 왔다.
술병을 네 개나 들고.
고기도 잔뜩.
아, 뭐. 이렇게 된 바에야 좋다 이거야. 나쁠 거 없고말고.
술기운이 오른 진무는 마치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하듯이 손짓 발짓까지 섞어 가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와!”, “허!”, “감격!”
셋의 반응에 더욱 흥취가 올라 진무는 마치 청무가 된 것인 양 이미 검강으로 산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공동에서 얻은 일휘검인데요.”
“오!”
“이게 막 산을 벤다니까요?”
“오! 대단하구나! 그 무령자님의 검이란 말이냐!”
진무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일휘검을 끌러 내밀자 모두가 인세에 다시없을 보물을 영접하듯 바라본다.
이거 반응이 좋으니…… 과장이 자꾸 는다.
진무와 스승, 진허와 운암은 그렇게 진한 해후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말하는 것은 진무 혼자였고 나머지는 ‘오!’와 ‘와!’가 대부분이었지만.
* * *
밤이 지나 새벽닭이 언제 울었는지도 모를 만큼 이야기에 빠져 있던 피정처는 해가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고요해졌다.
밤사이 마신 술과 피로로 해가 중천에 이른 뒤까지 잠에 빠져 있던 진무 등은 도동이 깨운 뒤에야 일어났다.
장문인이 찾는다는 이야기에 명진이 언제 챙겨 온 것인지 보자기 하나를 내민다.
그 안에는…….
“백룡의(白龍衣)?”
무당지검의 칭호를 받으며 태청신단과 함께 하사받았던 그 옷이다.
“놓고 갔더구나.”
“…….”
당연하지.
그걸 왜 입고 싸돌아다니냐, 이 미친 스승 놈아.
속이 옅게 비치고 등 어림에 백룡이 화려하게 수 놓인 검은 장삼.
저걸 입고 다닌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난을 떠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틀림없었다.
뭔 저딴 옷을 무당지검의 복색이라고 만들어서는.
“하아, 죽어도 안 입고 싶…….”
“응? 왜?”
“예?”
진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젠 진짜로 이상하다.
억눌려서 꺼내 보지 못한 반항심이 족족 입 밖으로 나오다니.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설마, 그때 복마동의 진법에서 명진을 감싸 안았다가 사라진 그림자가 혹시 진무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 도동 놈인가?
그래서 자신을 제약해 왔던 도동의 기억이 옅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한 진무의 변화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명진이 진무를 달랬다.
“이 녀석아. 내 너의 자유분방함을 안다만 도문의 인증을 받을 때 어찌 예복을 입지 않는단 말이냐? 어서 갈아입거라.”
“……예.”
하나의 가정에 속으로 흥분이 치민 진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빛바랜 장삼을 벗고 백룡의를 걸쳤다.
“오, 우리 사제, 정말 멋지구나.”
“멋지십니다. 진무 도장.”
진허와 운암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진무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확인하고 싶던 것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자, 나가자꾸나.”
명진이 길을 재촉하려는데.
“스승님.”
“응?”
“제게 아무 명이나 하나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뜬금없는 부탁에 명진 등이 진무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안다. 뭔 개소린가 싶겠지.
하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나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니까.
“진무야. 그 무슨……?”
“스승님!”
“…….”
진무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마저 어리자 명진이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외, 왼쪽으로 움직여 보거라.”
탁!
“……!”
이럴 수가!
오른쪽이다!
어느 순간 분명 마음속에 왼쪽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고작 한 발.
하지만 진무에게 그 한 발자국은 거악이 스스로 움직인 것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벅찬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댄다.
성공했다.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금고아, 도동의 기억.
이겨 냈다.
스승의 명을…….
스승의 명을…….
갑자기 한 줄기 눈물이 왈칵하고 솟구쳐 진무의 볼을 타고 흐른다.
“응? 너 왜 우냐?”
진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래. 넌 모르겠지.
이 한 발의 역사적인 의미를.
이걸 하지 못해서 꾸역꾸역 도사로서 살 수밖에 없었던 진무의 설움을, 그 깊은 고뇌를 네까짓 것이 어찌 알겠느냐.
“허허, 실없기는. 장문인께서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자, 진무야.”
“예! 예! 스승님! 가야지요. 아무렴요!”
진무가 힘차게 대답했다.
진정으로 무당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을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양의심공만 얻으면.
보라, 이제부터는 아주 마음껏 청개구리로 살아 주마.
왼쪽으로 가라면 오른쪽으로 가고, 앉으라면 일어서는 반항기 어린 청개구리가 무엇인지 내 똑똑히 알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