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29
229화
진무가 떠나 버린 자리.
“…….”
불어온 바람에 날려 온 낙엽이 수북하게 덮인 시신을 한 사내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영, 적소혼.
그리고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는 영은당의 무인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예.”
무영의 명령에 영은당의 무인들이 숲의 이곳저곳으로 몸을 날렸고, 옆을 지키던 추영이 낙엽을 걷어 내고 월영의 시신을 세밀하게 살핀다.
“죽은 지 반나절 정도가 지난 듯합니다.”
“…….”
무영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죽은 시신의 이름은 월영. 하남지부를 맡고 있던 일곱 영수 중의 하나로, 무영이 어린 시절부터 직접 훈련시켜 키워 낸 영은당의 핵심 무인이었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그들이다. 비록 사령고라는 기물에 의해 통제되기는 했으나, 모두가 피를 나눈 혈육보다 끈끈한 사이였다.
귀영, 적영, 묵영에 이어 월영까지. 모두 넷을 잃었다.
그 모두가 무당지검 때문이다.
“당주님, 이것을…….”
추영이 시신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땅 위의 낙엽을 걷어 내자, 채 다 쓰이지 못한 글씨가 드러났다.
미현(眉県).
분명 현(県)이 아니라 현(縣)일 것이다.
누가 봐도 일부러 만들어 놓은 행적이 분명했다. 영은당의 무인들은 절대로 일반적인 글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적이 노출될 수 있기에 언제나 그들만의 독자적인 암어를 사용한다. 죽어 가는 상황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그러니 글귀를 남긴 것은 필시.
“무당지검, 깜찍한 짓을 하는구나.”
무영이 어금니를 살짝 갈며 낮은 음성을 내뱉는다. 일부러 행선지를 적어 놓은 것이다.
“당주님.”
주변을 살펴보러 갔던 영은당의 무인들이 돌아와 무영에게 보고했다.
“놈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이동 중이라 완전히 지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
“발자국이나 흔적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미현은 서쪽에 있으니까. 그것 역시 일부러 남긴 것이 틀림없었다.
놈은 자신들을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의 도발이 분명하다.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던 무영의 눈동자가 불현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다. 네놈이 부르는 곳에 절대로 이기지 못할 사냥개를 보내 주마. 네놈이 만든 함정 속에서 비참하게 죽게 만들어 줄 것이다.
“추영.”
“예.”
“내궁주의 위치는?”
“감숙과 서안의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좋다. 그녀에게 연락을 보내라. 무당지검이 미현에 머물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그곳이 격전지가 될 것이다.
놈은 내궁주 종려군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무칠성이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그 무위에 죽어 가며 놈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리라.
“지금이면 정무맹이 무명촌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될 터. 무명촌에 집중할 테니 미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어떤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린다고 해도 무당지검은 그곳에서 반드시 죽는다. 그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로 쓸쓸하게.”
한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린 무영의 눈동자가 남쪽을 향했다.
무명촌.
그곳의 희생으로 궁은 다시 모든 이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궁은 수면 아래로 숨어들어 처음부터 다시 준비를 해 나갈 것이다.
“가자. 놈의 죽음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죽어 가는 심장에 직접 우리의 칼을 박아 넣을 것이다.”
싸늘하게 외친 무영의 신형이 사라지고, 그 뒤를 따라 추영과 영은당의 무인들이 모습을 감춘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산짐승들의 배를 불려 줄 월영의 시신뿐이었다.
* * *
급경사를 이룬 여울이 집채만 한 바위를 크게 휘돌아 절벽에 이르러 장쾌하게 떨어진다.
그 아래 높지 않은 폭포가 만들어 낸 소(沼). 하얀 포말이 낮게 깔리어 흐르고, 그 주변에 사방으로 산봉우리가 빙 둘러진 골짜기가 펼쳐진다.
깊디깊은 골짜기였으나 탁 트인 전면에서 들어오는 빛 덕분에 답답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의 끝자락과 산이 맞닿은 부분에 지어진 작은 정자에서 비파 선율이 흘러나온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섬섬옥수 끝에서 피어나는 청아한 음률은 정자를 채우고 계곡을 에우며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듣는 이를 절로 평온하게 하는 비파 연주를 배경 삼아 정자의 난간에 한가롭게 기대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빙기옥골의 중년 사내.
그의 청수한 용모와 단정히 갖춰 입은 백색 학창의가, 학이라도 한 마리 날아와 머문다면 아득한 선계라 불러도 좋을 듯한 이곳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조림정(照臨亭), 세상을 굽어보는 곳이라 불리는 정자 안에 앉은 학창의의 사내는 현 하오문주로, 명세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탁, 탁탁탁.
한껏 선율을 즐기던 그의 귓가에 불협화음처럼 파고드는 다급한 발걸음.
“문주님!”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여유가 깨어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감았던 눈을 뜬 명세찬의 곁으로 달려온 노인.
하오문의 역사라 불리는 열두 명의 야묘 중 하나인 공 노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것을 좀 보셔야겠습니다.”
“…….”
공 노인이 내민 종이 뭉치에 명세찬의 미간에 생겨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뭡니까? 유월청 그놈이 또 돈을 요구해 왔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
아니, 그럼 뭣 때문에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단 말인가?
“섬서 서안지부장 허삼수가 보낸 내용입니다.”
“허삼수?”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다.
하오문이 동네 시골 문파도 아니고, 섬서를 총괄하는 대괴(大魁)라면 모를까 그 휘하에 속하는 일개 도시의 지부장 이름까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서안지부라면…….
‘황신, 그 말 많은 녀석을 맡겨 둔 곳인데?’
명세찬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공 노인이 건넨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춘다.
“……이게 지금?”
한순간에 와락 표정을 구긴 명세찬이 공 노인을 바라봤다.
“믿는 거요? 이걸?”
“허삼수가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확인까지 했다고 합니다.”
직접? 행적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지부장이 직접 찾아가서 대화까지 했어?
더구나 감시역이자 보좌를 하라고 황신까지 딸려 보냈단다.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아무리 맡겨 두었다고는 하지만 황신은 구 은위단 소속이다. 서안지부장 따위보다 훨씬 윗줄이라는 뜻이다.
“미친놈이구만.”
“예. 미친놈이지요.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묵룡기입니다.”
그래, 그렇게 적혀 있다. 묵룡기를 구사하며, 묵룡의 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그러니까 그걸 왜 믿냐는 거다.
천주가 죽은 지 이 년도 넘었는데. 게다가 전인? 전이인?
더욱이 그를 주장하는 자가 무당지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항상 그의 곁에 들러붙어 호위를 해 온 명세찬이었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묵룡기를 익힌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유월청조차도 겨우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인 마당에 전인이라니, 감히 어떤 미친놈이 그따위 소리를 하고 다닌단 말인가?
와중에 서안지부장이라는 놈은 거기에 홀랑 말려서 내 휴식을 방해하고 앉았어?
“공 노인……. 근래 사패천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이런 허위 정보를 올리는 놈이나, 믿고 있는 그대나…….”
“문주님, 그리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
“천웅방의 일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그렇게 말을 해도 전대의 후계인 유월청에게 충성하겠다며 우기던 천우명. 급기야 반기를 든 천웅방을 치러 가더니, 갑자기 들러붙어 버렸다.
은밀히 확인해 본 결과 무당지검과 싸우고 나서라는데, 그 또한 말이 안 된다.
무당의 도사가 뭣 때문에 그들을 돕는단 말인가?
그리고 천우명은 천주와 같이 무당에 천인공노할 짓까지 한 사람인데.
“하아……. 정말이지, 우리 하오문도 개혁이 필요해, 개혁이. 지부장이라는 자가 별 잡스러운 소문도 못 걸러서 고스란히 상부에 올리다니 말이야. 섬서의 대괴가 이규목인가?”
“예.”
“망할 자식이. 좀 걸러 보내지 않고 말이야.”
명세찬이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공 노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왜!”
“확인은 해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확인하냐고!”
“묵룡기니까요.”
“…….”
“생각해 보십시오. 근래에 천웅방에서도 몇 번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사패천을 만들 것이니 협조하라구요. 어쩌면…….”
“어쩌면, 뭐? 무당지검이 양쪽에 다 걸려 있으니 맞을지도 모른다?”
“제 생각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명세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공 노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아, 왜!”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하오문의 상황.”
공 노인의 말에 명세찬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그쪽이 진짜 전인이면…….”
“이봐 공 노인, 당신 마음은 알겠는데.”
“진짜 전인이면…….”
“…….”
“하오문에도 다시 활력이 돌 테고.”
“…….”
“문주님께서도 이렇게 조림정에 처박혀서 시간만 때우지는 않으실 터인데.”
뭐? 처박혀? 시간을 때워?
참, 잘 돌아간다. 하오문의 최고 어른이라는 야묘가 문주에게 말하는 본새하고는.
하지만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워하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막 나가던 사패천주 혁련무강을.
그리고 그를 따르던 그때의 하오문을.
“하아, 알았어. 알았어.”
명세찬이 결국 못 이기는 척 일어났다.
“예어령.”
“네, 문주님.”
명세찬의 부름에 비파를 튕기던 여인이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처럼 나갔다 와야겠다.”
“은위단 전원에게 소집령을 내릴까요?”
“전원은 무슨. 조장들만 오라고 해. 칼 잘 갈아서 들고 오라고. 무당지검이고 나발이고 감히 묵룡의 전인 행세를 했으니 각오는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명체찬의 명령에 예어령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망할 새끼들, 아니기만 해 봐라. 서안지부고 섬서 대괴고 죄다 세워 놓고 줄싸대기를 날릴 테다.”
* * *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내려앉은 전서구.
“…….”
분봉대주 능비화는 무영이 보낸 전서구를 받아 읽고 종려군에게 내밀었다.
“미현, 얼마나 걸리지?”
“두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두 시진.”
능비화의 대답에 종려군의 얼굴에 싸늘함이 감돈다.
무당지검. 모든 것이 그놈으로 인해 어그러져 버렸다.
전장의 돈을 이용해 정무맹을 분열시키고 그 세를 약화시키는 계획, 그리고 그 이후에 일궁과 이궁을 포섭해 장차 대업을 이룰 소궁주의 발판이 되어 주려 했던 자신의 원대한 꿈이 짓밟혔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자면 감숙에서부터 세를 넓히고 있는 천웅방을 반드시 얻어야만 했다.
이미 사패천과 척을 져 버린 곳이니 주인이 바뀐다 해도 어느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터, 그곳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당지검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고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무당지검의 소식을 들은 그녀는 곡마량에게 협곡을 통해 천웅방 인근까지 접근한 뒤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분봉대의 최정예 무인 열 명을 이끌고 말머리를 돌렸다.
천우명, 원공후.
아무리 곡마량이라고 해도 사패오왕의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천웅방이 급하기는 했으나 복수심에 눈이 먼 그녀는 무당지검의 행적을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무당지검에 집중한다.
고작해야 이제 막 위명을 얻기 시작한 애송이. 놈을 죽이고 곡마량을 도우러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비화!”
“예.”
“속도를 올린다. 목표는 미현. 오늘 안에 무당지검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고 그 피를 술에 타서 마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종려군의 싸늘한 명령과 함께 열한 필의 말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