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다음 날 이른 아침, 떠날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선 진무의 눈앞에 보인 것은 적생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무인들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문을 나서자마자 황신과 소동보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황신 이 자식은 아침부터 왜 이렇게 죽을상이야?
지난 앙금이 아직 남았기 때문인지 인상 쓰고 있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야! 팔을 왜 그렇게 움직여? 어디 아파?”
“…….”
진무의 말에 황신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젠장, 저 개천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밤새 손들고 있어서 팔 저려 죽겠구만.
“얘들은 뭐야?”
황신에게 한차례 짜증을 낸 진무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무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천주님. 전령 및 정보 수집, 호위와 호법을 담당할 무인을 포함해 스물입니다.”
“…….”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적생의 말에 진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낯이 익은 놈들이 태반이다.
일단 철검단 부단주 모원려, 은위단 조장 대궁, 살막의 대살주 위정렬.
그 세 놈만 해도 지역의 작은 문파 하나 정도는 찜 쪄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황신과 소동보면 충분해. 뭐 하러 애들을 줄줄이 달고 다녀?”
귀찮게시리.
“하지만.”
“걱정 마라. 조용히 있어 줄 테니까. 기다리는 동안 수련이나 좀 하고 있지, 뭐.”
“…….”
수련이요.
더 하실 수련이 있는 모양이네요. 이미 괴물인 양반이.
하지만 적생은 진무에게 더 권하지 않았다.
본인이 하기 싫다 하면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도.
적생이 물러나자 진무가 배웅하려 기다리고 있던 명세찬을 불러 붉은 서신을 건넸다.
“이건?”
“범정이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던 서신이다. 필체를 흉내 내서 전서구로 교란하면 시간 벌이는 될 거야.”
“예.”
“그리고, 추가령이라는 아이를 한번 살펴봐. 궁에서 괜히 이런 시골 문파의 딸을 노릴 리가 없어.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범정이라는 여자를 심문해도 안 나오면 개방 쪽도 탐문해 봐.”
“그건 어찌?”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사건이 형주에서 있었다. 당시에 구했던 아이와 추가장의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기질이 매우 비슷해.”
“흠, 알겠습니다. 은밀하게 개방과 접촉해 보겠습니다.”
명세찬의 대답을 듣고 미리 준비해 둔 말에 오른 진무를 향해 적생이 넌지시 한마디를 보탠다.
“천주님.”
“왜?”
“혹, 산서상회의 본장으로 바로 가실 생각입니까?”
“뭐, 그래야겠지. 니 말대로 잔챙이들 상대해 봐야 재미도 없고, 체면만 상할 테니.”
“그럼 최대한 천천히 가 주십시오.”
천천히? 계책이 시행되는 동안 시간을 벌려는 생각인 건가?
“……알았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적생의 인사를 끝으로 진무가 곧바로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가고, 그를 필두로 스무 필이 넘는 말들이 관도를 질주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시작이군요.”
적생의 말에 멀리 먼지구름과 함께 사라지는 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패오왕 셋이 고개를 끄덕인다.
첫 번째 계책, 분산계(分散計).
고수들을 다섯 개의 무리로 나누어 산서상회 예하의 상단을 동시에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계책, 봉쇄계(封鎖計)가 시행될 것이다. 산서의 모든 관도를 통제함으로써 산서 지역의 상행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멸살계(滅殺計).
모든 전력을 집중해 산서상회 본장을 무너뜨린다.
“문주님, 이번 계책의 핵심은 하오문입니다.”
적생의 말에 명세찬이 크게 숨을 들이쉰다.
하오문이 핵심인 이유는 이번 계책의 승패가 정보 통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한은 한 달. 산서의 전 지역이 제압될 때까지 산서상회는 제반 상황을 알지 못해야 했다.
또한, 와중에 관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그들의 시선을 돌려야 했고, 사패천 본성이 산서상회를 돕지 못하도록 정보를 차단하고 반간계까지 사용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성사시키려면 산서성뿐 아니라 섬서, 하남, 하북에 퍼져 있는 하오문 북부 세력을 모조리 투입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후우, 야묘 노인네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겠군요.”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니요, 총사님. 걱정 말고 우리 하오문에 맡겨 주십시오!”
명세찬이 제 가슴을 탕탕 소리가 나도록 쳐 대며 자신 있게 대답하자 적생이 싱긋 웃으며 흑우선을 들어 올린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예! 총사님!”
* * *
정무맹, 의천관.
그 거대한 대전각의 내부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정무맹의 장로들과 각 무인대의 수장, 정무칠성,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주인들.
저 멀리 곤륜파의 장문인까지 함께 자리한 것은 정무맹이 생긴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연회를 열고 오랜만에 보는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할 것인데, 대전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분위기였다.
“시작하시오!”
대전각의 제일 안쪽, 태사의에 앉은 맹주 철지량의 말에 감찰단주의 직책을 맡게 된 검혜 벽운영이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등장에 좌중의 대부분이 얼굴을 찌푸린다.
종남에서 세작이 드러난 이후 정무맹 소속의 모든 문파에 시행된 감찰 조사.
궁과의 연관성, 세작 색출이라는 명분을 더해 그 어느 때보다 책임이 막중해진 감찰단주는 누구보다 객관적인 성향을 가진 검혜로 결정되었다.
당위와 풍환자가 힘을 실어 주고 이미 궁의 위협을 경험한 소림과 오대도문, 그리고 개방까지 동조하고 나서니 오대세가를 비롯한 나머지 수뇌부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고에 앞서 먼저 사죄의 말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큰 실수를 했었지요.”
잔잔한 그녀의 말에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십여 년 전 정파 무림은 한 문파의 어려움을 실리 때문에 외면했던 적이 있습니다.”
벽운영의 말에 모두가 한 인물을 바라본다.
무당의 장문인 명현.
“당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외면했던 그 과거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드립니다.”
진정이 묻어난 벽운영의 사과에 명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랫동안 산중에서 문파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명현이었기에 벽운영의 잔잔한 말과 사려 깊은 행동에 울컥거림을 느낀 것이다.
눈시울마저 붉게 달아오르는 와중에 검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간다.
“무당은 큰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무당지검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길러 내었습니다.”
“…….”
“그는 정무맹을 전복시키려 한 궁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모자라, 중원 무림 곳곳에 숨어들어 있던 세작들을 소탕하는 것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떠한 사례도 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지요.”
깊은 울림이 담긴 목소리가 전각을 따스하게 감싸자 일부는 동조를 표하고, 일부는 질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당 장문인.”
“……예?”
“정무맹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무당에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사과에 이은 감사.
모두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명현의 가슴이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망해 가는 문파라 했던 무당이 다시 중원의 중심부를 향해 오랫동안 멈추었던, 아니 물러났던 걸음을 다시 나아가고 있다.
이 기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한때 구파의 말석까지 밀려났던 무당을 향해 모두가 존경심과 부러움을 표현한다.
잘 키운…… 아니 저 혼자 잘 자란 제자 하나가 무당의 위상을 이토록 높여 놓은 것이다.
그뿐인가?
진무 덕에 재정도 풍족해진 데다, 각지에서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진무의 가르침을 받은 청상은 정무맹의 미래라 불리는 용봉관의 대표가 되었고, 일대제자의 맏이인 진명은 근래 의기를 깨닫고 돌아와 문파의 자랑인 태극혜검을 시연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가?
장로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차기 장문인으로 인정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무당의 규율을 뜯어고쳐서라도 진무를 장문인의 자리에 앉히고 싶으나……. 그 녀석은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근자에는 좀 뜸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돈이…… 아니, 무당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진무야……. 허허, 이 녀석아…….’
명현이 애써 눈물을 삼키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힌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부드러웠던 검혜의 목소리에 힘이 담기자 그녀의 위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긴 보고가 이어졌다.
구파는 물론이고 오대세가, 중소 문파와 그들과 연결되어 있던 상가와 표국에 이르기까지 조사 내용은 심할 정도로 방대했다.
모두가 침음성을 흘리며 자신의 문파와 가문에 세작이 있음에도 알지 못했던 일을 반성했다.
“……이상입니다.”
길고 길었던 보고가 끝나자 숨소리마저 잦아든다.
책임을 물어야 할 문파보다 묻지 않아도 될 문파를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대부분의 문파에 저들의 눈과 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정무칠성들마저 얼굴을 굳히고 있던 그때, 철지량이 입을 떼었다.
“모두 들으십시오.”
“…….”
“본인 역시 맹주로서 이번 사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문파가 관여되어 있으나 본인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칠까 합니다.”
철지량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본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오직 한 사람, 남궁무휴만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핫! 맹주께서 대승적인 결론을 내리셨군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켕기는 것이 많은 멍청한 팽의방이 맹주를 두둔하고 나선다.
힘만 세고 생각이라고는 없는 놈. 저딴 게 정무칠성이라니.
남궁무휴가 팽의방을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팽의방이 그러할진대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검성의 지지도는 이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남궁무휴의 눈이 검성의 옆에 선 제갈협진을 향한다.
철지량 개인의 생각일 리는 없다. 모두가 저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리라.
놈은 정무맹이 군림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이번 조사로 모든 문파는 정무맹에 대항할 명분을 잃었고 치부마저 드러내었다.
세작 조사는 그저 빌미였을 뿐. 감찰단은 그동안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 문파가 저질렀던 각종 비리를 모조리 확보했을 터였다.
‘제길…… 칼자루를 빼앗겼군.’
정무맹이 흐름을 가져가 버렸다.
그토록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멍청한 아들놈이 그 힘의 주축이 될 용봉관의 대표자 자리까지 무당에 빼앗겨 버렸다.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무엇이든 걸고넘어져야 했다.
“남궁가도 맹주의 이번 결정을 지지하는 바요.”
남궁무휴가 입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간악한 사파의 무리와 휴전을 맺었다 하던데…….”
“예. 그리되었습니다.”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셨소?”
“궁의 세력들로 인해 정무맹 전체가 시끄러운 시점입니다. 현재로서는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그리하였습니다.”
“허허, 그 말씀은 좀 의아하군요. 이미 궁의 전력이 대다수 무너졌던 것으로 알고 있소. 남은 것은 세작 조사 하나였을 것인데…….”
“아, 그건…….”
“혹, 무슨 다른 뜻이 있으신 건 아니오?”
남궁무휴의 말에 철지량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 무슨 말 같지…….”
“맹주님.”
철지량이 반박하려 하자 제갈협진이 급히 말을 막으며 나선다.
정무맹의 행사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 왔음을 제갈협진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무휴는 심계가 깊은 자다. 특히나 그간의 행보로 미루었을 때 분명 어떻게 해서든 정무맹으로 집중된 흐름을 끊어 놓고 싶을 터.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금 나선 것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휴전 협정을 유지하면 간악한 무리와 손을 잡았다 할 것이고, 협정을 파기하면 필시 정의롭지 못하다 흠집을 낼 것이다.
“창천 어른.”
“말하게.”
“사실 그 건은 창천 어르신께서 지적하시지 않았더라도 감찰 조사 이후 논의를 하려 했던 사항입니다.”
“……뭐라?”
“이번 정사의 휴전 협정은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강제로 파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허! 그게 대군사가 할 말인가? 정무맹의 이름으로 맺은 협정이 아닌가? 약속을 저버린다면 어찌 정파라 할 수 있겠는가?”
좌중에 웅성거림이 일자 남궁무휴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제갈협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궁의 세력은 모조리 축출했고, 정무맹 예하 문파들의 모든 치부를 쥐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감찰단마저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으니 정무맹이 정파의 모든 힘을 한곳에 집중한다는 목표를 이룬 셈이다.
이제는 묵혀 둔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각 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 와중에 그동안 비협조적이었던 남궁무휴가 직접 거론한 문제였으니 잘만 이용하면 칠순의 나이에도 공명심을 밝히는 그를 부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제갈협진은 속으로 느긋하게 웃었다.
흐흐흐, 창천 어른, 노구에 뼈마디 좀 쑤시게 뛰셔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