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15
315화
잔뜩 처먹어서 배꼽이 툭 튀어나오도록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이빨을 쑤시는 양소방과 각출.
진무는 그 모습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졌다.
평생을 돈벌레처럼 아끼고 아끼며 살아온 그가 동정심을 이기지 못하고 적선을 하고 말았다.
몸동작, 눈빛, 목소리로 이어지는 완벽한 연계기를 선보인 각출은 진무뿐 아니라 황신과 소동보의 전낭까지 모조리 빼앗아 갔다.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패배감을 넘어 상실감마저 느껴진 진무는 술이나 진탕 마시고 두 거지에게 시달린 마음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망할…….
“……돈이 없으시다고요?”
“……어…… 예?”
객점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하게 진무를 째려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진무가 각출과 양소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외면이었다.
“스승님, 저희 하마터면 노숙할 뻔했지요?”
“그러게 말이다. 너의 신공이 없었다면 추운 데서 벌벌 떨며 밤을 지새울 뻔했지.”
“매정한…… 누군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각출이 진무를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젠장, 꽁한 놈들 같으니.
이런 걸 유식한 말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하던가?
그래도 한 줄기 기대를 품고 다시 한번 간절한 눈빛을…….
“아이고, 피곤하다. 배부르니 등만 따시면 잠이 들겠구나.”
“가시죠. 스승님.”
잡을 새도 없이 객실로 내빼 버리는 두 거지.
야, 이런 매정한 놈들아! 내기에서 돈을 땄으면 개평을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인정머리를 상실한 둘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고, 남은 것은 돈이 한 푼도 없는 진무와 황신, 소동보 셋뿐이었다.
“어디 보자, 오리 두 마리에 소면 세 그릇, 비싸디비싼 옥동취 두 병……. 도합 은 다섯 냥입니다.”
객점 주인의 말에 진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섯 냥이나 된다고? 이런 바가지…….”
“…….”
“……외상은?”
“절대 안 됩니다, 고객님.”
“아니, 내가 무당의 이름난 도산데…….”
“무당이 뭐랍니까? 그리고 도사…… 어딜 봐서요?”
객점 주인이 진무의 위아래를 훑고는 피식 웃는다.
용을 멋들어지게 수놓은 피풍의에 검은 무복. 어느 모로 봐도 도사의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데 단강구가 지척인데 무당을 몰라? 이런 촌구석 무지렁이 같으니라고!
아니지, 돈을 떼이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는 게 틀림없으리라.
“아니, 이 옷은 사정이 있어서…….”
진무는 사정을 설명하려다 객점 주인의 냉정한 표정에 입을 꾹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 놈 같으니.
“그럼 혹시 사패천이라고 아시오? 내 그곳의 주인인데 서신을 보내 값을 두 배로…….”
“못 들어 봤습니다.”
“…….”
들어 봤을 리가 없겠지.
있어도 없다 하겠지. 망할 놈.
“아니, 이보오.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지. 내가 떼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시 외상만 하자고 하지 않소?”
“뭘 믿고요?”
“…….”
그래, 젠장. 나라도 못 믿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이 어찌 망하려고 시골 인심이 이리도 각박하단 말인가?
“정히 값을 치를 수 없으면 담보라도 거시오.”
“담보를?”
“그 칼!”
객점 주인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탁자에 기대진 일휘를 가리킨다.
진무의 눈빛이 향하자 별안간 휙 쓰러지는 일휘. 이젠 저 검마저 나를 외면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이라도 거시오!”
“말을……? 그 말은 무려 한혈마요!”
“한혈인지 온혈인지 그딴 거 내가 알 필요 없고! 돈을 주든, 담보를 걸어 놓든 둘 중 하나를 택하시오! 아니면 내 당장에 관에 달려가 고변할 것이오!”
“…….”
관 따위는 무섭지도 않다.
문제는 체면이다.
객점주 얼굴 생긴 걸 보니 돈을 안 주고 가면 필시 동네방네 소문낼 상이었다.
무당 어쩌구 하는 곳의 도사이며 사패천이라는 곳의 주인씩이나 되어서 시골 객점에서 돈을 떼먹고 도망쳤다고.
망할 거지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내 오늘의 원한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좋소. 한혈마…… 한 마리 담보로 잡히겠소.”
“그럼 잠시 기다리시오!”
객점 주인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붓과 종이를 꺼내 와서는 일필휘지로 수결서를 적었다.
진무는 그 거침없는 손놀림에 입을 떡 벌렸다. 뭔 장사꾼이 이렇게 글솜씨가 좋아? 더욱이 필체가…… 허! 고작 외상값을 갚겠다는 수결서인데.
어디서 먹물 좀 자셔 본 양반이 분명했다.
“자, 수결하시오!”
“……휴, 알겠소.”
진무가 수결을 하고 나서야 객점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고객님.”
“…….”
목적을 이루자마자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객점주의 뒷모습에 술맛마저 떨어져 버린 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황신.”
“……?”
“본성에 서신 좀 보내라. 돈 좀 부치라고.”
황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서구를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저어, 천주님?”
“……뭐?”
“말이 없으면…… 이제 어쩌죠? 저와 황신 형님이 함께 타면 시일이 지체될 것인데…….”
“…….”
소동보의 걱정 어린 말에 진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이 새낀 생각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와중에 불난 집에 파초선을 흔들어?
“동보야.”
진무는 다시금 한숨을 푹 쉬며 소동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
“너희 수련 안 한 지 꽤 됐지?”
“……예. 이래저래 전쟁으로 바빴으니까요.”
“그래. 내일부터 다시 경공 수련이야.”
“……?”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동보를 향해 진무가 말했다.
“뛰라고, 이 새끼야.”
“…….”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어디서 말을 탈 생각을 하고 있어? 돈도 없는데.
그리고 내일부턴 계속 야숙이다, 이 새끼들아.
* * *
“핫핫핫, 대단하구만! 젊은 친구들이 정말 대단한 경공을 가지고 있어!”
“…….”
먼지 폭풍을 일으키며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 위에 앉은 양소방이 뒤를 힐끔거리며 놀람을 토한다.
“흐음, 하오문과 살막의 무인들이라고?”
“예.”
양소방의 물음에 진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긴 무당에서도 자네는 사질들을 저런 고전적인 방법으로 단련시켰지.”
오래전 일을 떠올린 양소방이 문득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꽤 힘들어 보이는군. 저러다 지치겠어. 차라리 빈 말을 놀리지 말고 번갈아 태우면 어떻겠는가?”
“…….”
거지 주제에 누가 누굴 불쌍하게 생각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신경 쓰지 마시죠. 항상 최전선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지금의 고생이 나중에 저들의 목숨을 살릴 것입니다.”
진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양소방의 시야에 문득 편히 말을 타고 가는 각출이 들어왔다.
왜요? 하는 표정을 짓는 각출을 향해 양소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스승님, 설마…….
“내리거라.”
“…….”
빈 말은 두 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해가 서산을 넘어가며 붉은빛을 뿌릴 때까지 달린 황신과 소동보, 각출은 똑같이 생각했다.
역시나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고 봐야 한다. 망할 놈들……. 지들은 편하게 말이나 타면서.
직급의 차이를 몸소 느낀 셋이 개처럼 혀를 길게 뽑아내고 학학거릴 지경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멈춘 진무가 야숙할 장소를 정했다.
“황신.”
“예!”
“사냥해 와. 배고파.”
“…….”
“소동보는 단강구 가서 술 구해 오고.”
“……예? 돈이 없는데요?”
“…….”
소동보의 말에 진무가 각출을 힐끗 쳐다보고는 눈썹을 역팔자로 치켜세웠다.
니가 저 거지보다 못한 게 뭐야? 어떻게든 사 와!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소동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군다.
“안 가? 내가 직접 가서 구해 올까?”
저놈의 송곳니…… 젠장.
황신과 소동보는 섬전처럼 몸을 날렸다.
“허허, 참으로 충직한 이들이로세. 역시 자네를 천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야.”
“그런가 보죠.”
대충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니 차라리 단강구로 가서 객점을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
은근슬쩍 권하는 양소방을 향해 진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쳐다본다.
“됐네요. 어르신과 제자분께서나 객점 가서 쉬십시오.”
“돈이 필요하면 전낭을 돌려주겠네.”
“무슨 말씀을! 저흰 야숙이 편합니다.”
진무가 딱 잘라 거절하고 팩 고개를 돌리자 양소방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는다.
“자네…… 삐졌나?”
“…….”
이 양반이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거든요!”
“에이, 삐졌는데 뭘.”
“…….”
쪼개지 마, 노인네야. 나 지금 침 뱉을 뻔했어.
“……수련.”
“뭐?”
“수련시키려는 겁니다. 수련!”
“아, 그으래?”
“암요, 당연하지요. 누가 돈이 없어 그런 줄 아세요?”
약 올리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양소방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자 진무가 잔뜩 성난 모습으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거, 내기에서 질 수도 있지 뭘 삐지고 그러나? 헛헛.”
“…….”
이 양반이 진짜! 하나만 걸려라. 껍데기까지 벗겨 버릴 테다.
진무는 양소방의 장난스러운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 * *
식사가 끝난 이후.
진무는 보란 듯이 황신과 소동보를 데리고 수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양소방이 보기에 그 수련 모습이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좌정하고 눈을 감은 진무.
그리고 황신과 소동보는 진무의 주위를 돌다가 갑자기 은신술을 펼쳐 모습을 감춘다.
“헛!”
순간적으로 둘의 종적을 놓쳐 버린 양소방이 눈을 부릅떴다.
완벽히 사라졌다.
기감을 최대한 퍼트렸으나 기척을 명확히 잡을 수가 없다.
하오문과 살막이 은신술에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그들의 수련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극도로 끌어 올린 양소방의 기감에 미세하게 의심스러운 느낌을 주는 움직임이 감지되는 순간,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진무가 측면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자신이 느낀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진무의 모습에 양소방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콱, 콰당!
허공에 손을 쭉 뻗어 당긴 곳에서 소동보가 끌려 나와 땅바닥에 패대기쳐지고, 그 사이의 틈을 노린 황신이 진무의 발아래에서 튀어 올라 송곳을 빠르게 뻗어 낸다.
“늦어!”
짧은 외침과 함께 소동보를 지르밟고 솟구치더니 공중제비를 돌며 발을 세차게 후려 차 내는 진무.
쩌억!
“큭!”
대갈통을 얻어맞은 황신이 짧은 신음과 함께 땅바닥을 굴렀다.
“맙소사!”
양소방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본 그들의 수련.
자신의 기감에 혼동을 줄 정도로 뛰어난 은신술에 그걸 정확히 찾아내는 진무.
그리고 진무를 향해 공격한 황신과 소동보의 비수에는 생사대적을 향하는 듯한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말이 수련이지, 이 정도면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이 새끼들이! 확실한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기척을 드러내지 말랬지. 누가 미리 살기부터 피우래? 다시!”
진무의 호통에 황신과 소동보가 벌떡 일어나 다시 모습을 감춘다.
쩍!
“틈을 잡았을 때는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뻐억!
“이런 미친놈이! 인내심 싸움이라고 했어, 안 했어! 적보다 빨리 움직이면 어쩌자는 거야!”
빠각!
반복적으로 처맞고 뒹구는 와중에 황신과 소동보의 실력이 약간씩이나마 느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경지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진무의 구타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가다듬어진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쓰러질 법도 한데 움직임이 더욱 자연스럽고 빨라지고 있었다.
그래, 역시 뭔가가 있었다.
양소방은 자신이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수련하는 내내 이어지는 진무의 말은 정확히 그들의 부족함을 잡아내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쩌어억! 빠가각!
동시에 후려 찬 양발에 걸린 황신과 소동보가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혔다.
“쯧쯧, 이놈의 자식들이 아직도 멀었네, 멀었어. 그따위 실력으로 잘도 남의 목을 따겠다. 누가 목 내밀고 니들 오기만 기다린다디?”
“…….”
진무의 호통에 황신과 소동보가 죄송스러워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어. 내일부터는 사지에 닷 근짜리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생활한다. 알겠어?”
“예!”
“좋아. 수련 끝!”
종료를 알리는 말에 황신과 소동보가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는다.
“빨리들 자. 내일은 무당산에 올라야 하니까. 옷도 좀 깔끔하게 맞춰야 하고.”
“알겠습니다. 천주님.”
황신과 소동보가 비척비척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양소방이 진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보게, 수련 끝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
“내기, 우리가 이겼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또 나와?
진무는 또다시 떠오르는 처참한 패배의 기억에 눈을 찌푸리다 말고 문득 아, 하는 탄성을 냈다.
지금 그 말은 각출이도 수련을 시켜 달라는?
“어서 시작하게.”
“…….”
양소방의 말에 진무가 각출을 바라보다 씨익 웃는다.
그으래?
원한다면 시켜 줘야지, 암.
개방이라 하면 역시 타구봉법이렷다.
잘됐네. 아주 자아아알됐어. 원래 잘 맞는 놈이 잘 패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오늘 최선을 다해서 수련시켜 줄게. 안 그래도 쌓인 게 많았는데.
우두둑.
환하게 미소를 짓는 진무의 깍지 낀 손에서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