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20
320화
그 자리의 모두가 검을 갈무리하고 천천히 걸어 툇마루에 앉는 진무를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응시했다.
“황신!”
“……예?”
진무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황신이 답했다.
“손님이 오셨다. 두 마리 더 잡아.”
“알겠습니다! 천주님!”
믿기지 않는 엄청난 무위를 선보여 놓고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버린 진무의 모습에 황신이 힘차게 대답했다.
자신이 따르는 자.
사패천을 대표하는 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그의 진면목이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그의 전령이자 호위라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황신에게 무엇보다 강한 자긍심이 되었다.
무엇이든 하리라. 저 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젠장, 술 사러 간 동보 놈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진무의 투덜거림에 각출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응? 니가?”
“예!”
“…….”
거지 놈, 왜 갑자기 저렇게 능동적으로 변한 거지?
이질적인 반응에 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지만 각출로서는 당연했다.
지금 그의 눈에 진무는 천하제일의 고수로 비치고 있었으니까.
수련을 가장한 구타가 좀 많이 무섭기는 하지만……. 그런 인물을 따라다닐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다.
무조건 따라다니리라.
“…….”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각출의 눈동자에 진무가 피식 웃으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찾아 와. 술도 한 병 더 사 오고.”
“예!”
명이 떨어지자 각출은 소동보를 찾으러, 황신은 닭을 잡기 위해 눈이 벌게져서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어쩐 일이세요? 운공 어른까지.”
진무의 물음이 있고 나서야 얼어붙어 있던 양소방과 운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공 어른과 환담을 나누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길이었는데……. 자네 대체 무슨 짓을.”
“청무께서…… 그분께서 나타나신 게야…….”
“……?”
운공, 이 노인네 이거 노망난 거 아냐?
진무는 둘의 대답을 무시해 버리고는 명진을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스승님. 먼저 끓인 닭이 다 익은 것 같습니다.”
“……응? 그, 그래.”
명진은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진무가 권한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이 정도면 될까요? 허락해 주실 거죠?”
“…….”
명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신위를 목격한 마당에 더 무슨 말로 망할 제자 놈의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가?”
명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곁에 다가와 앉은 양소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은 몰라도 됩니다.”
“명진, 자네라도…….”
“……무량수불, 무량수불.”
“…….”
명진마저 도호를 뇌까리며 입을 닫자 양소방이 눈을 찡그린다.
진무가 보여 준 신위는 둘째 치고, 분명 뭔가가 있는데…….
하지만 그것보다도 확실해진 게 있다.
진무는 정무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근데 왜 오셨죠? 정무맹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 아, 그렇지. 그런데 아무래도 자네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왜요?”
“응? 당연하지. 이제 정말로 사패천주가 된 것도 그렇고…….”
“명예직입니다.”
“……명예…… 뭐?”
양소방이 눈을 끔벅거린다.
“그리고 따로 갈 데가 있어서 안 돼요.”
“아니, 어딜 말인가? 정사의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 이 중요한 시국에 구심점인 자네가 빠지면 어찌한다고?”
“구심점은 무슨……. 다들 그리 멍청하지 않잖아요. 제갈협진 대군사도 사패천의 총사도.”
“그야 그렇지만…….”
“어차피 궁의 놈들을 뿌리 뽑을 때까지만 이루어질 한시적인 연합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한시적이라니, 자네가 나서 주면 이참에 정사가 완전히 하나의 무림이 될 수도 있는 일일세.”
진무는 흥분해서 말하는 양소방을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제가 왜요?”
“뭐라고?”
“제가 왜 그래야 하냐고요.”
망할 거지 노인네. 누가 그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고?
노림수가 빤히 보인다.
양소방이 무당의 제자인 내가 사패천주가 된 것을 응원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마 제갈협진 그 얌생이 놈이 언질을 줬겠지.
정사 연합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 각자의 이득에 따라 반드시 갈라질 것이다.
제갈협진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때를 대비해 적생에게 상계에서 힘을 키우라 한 것처럼 제갈협진도 대비코자 할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 연합을 유지하면서 나를 등에 업고 은밀히 사패천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것이겠지.
순순히 이용당해 줄 줄 알았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설마하니 내가 지은 밥을 남에게 떠먹여 줄 정도로 멍청할까?
재주 부리는 곰 노릇 해서 무당 하나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들다, 이 자식들아.
이젠 남 좋은 일만 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사패천과 정무맹, 그리고 일월마교는 그대로 세력을 유지해야만 한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만 평화가 유지되는 법이니까.
하나로 통합되어 버린 세력의 윗자리는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정파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재고 따지는 게 좀 많아야지.
그냥 셋이서 끝까지 경쟁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든 말든 최강의 자리만 얻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원 무림이 통일되면 재미가 없다. 쌈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법인데…….
“이, 이보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자네는 사패천의 주인일세!”
“그전에 무당의 제자입니다.”
“……뭐?”
“도인은 만생의 평안에 힘쓸 뿐 권력을 탐하지 않습니다. 전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사패천주가 되었다 하여 저들을 구속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
그 말에 양소방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눈가를 씰룩거렸지만 진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신분 세탁도 끝났고, 사패천주의 이름을 얻었음에도 누구 하나 진무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을 이룬 셈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네가 사패천주가 되는 것을 지지했는데!”
양소방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무엇 때문에 지지했다니요?”
“…….”
“싫다고 했던 제 등을 떠민 건 어르신이었던 것 같은데요? 무당의 어른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주겠다 호언에 장담까지 하셨고요.”
“……그, 그야.”
“제가 사패천의 반란 세력을 도운 것은 그동안 유월청 천주가 패악질해 온 것들을 바로잡고 사패천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기 때문이지, 세력을 얻어 권력이나 탐하기 위함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
진무가 너무나도 세속적인 것에 초탈한 도사인 양 말하자 양소방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만생의 안녕을 위함이라는 데야 뭘 더 할 말이 있겠는가?
진무는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양소방을 바라보며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들아, 내가 니들 머리 꼭대기에 있다.
자, 이쯤 하면 제갈협진 놈의 지시를 받은 양소방의 노림수는 깨뜨려 버렸고…….
혼내고 달랬으니 써먹어 볼까?
“어르신.”
“뭐, 왜!”
대답에 날이 잔뜩 선 걸 보니 삐졌구만.
“지금은 사패천주니, 세력이니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
“중원의 민초들이 더 이상 저들의 악행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사패천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는 쪽으로 정무맹을 움직여 주십시오.”
“……알겠네.”
“부탁드립니다.”
“거참, 알았다지 않는가!”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모습에 진무가 빙긋이 웃는다.
토라진 모습이 제법 귀엽다.
“으흐흑, 청무인 게야. 청무의 환생이 분명한 게야.”
“…….”
아, 저 노인네를 잊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청무가 검으로 산봉우리를 베었다고 했었나?
그동안 청무를 마치 무신처럼 떠받들길래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해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구만.
그래도 비교해 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우세요. 운공 어른.”
“흑흑, 암, 그래야 하고말고……. 청무의 현신이라니…… 내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어.”
“…….”
거짓말.
세상에서 제일가는 거짓말이 노인이 죽어야지 하는 말이랬다.
백이십 년을 넘게 살아 놓고는…….
“그나저나 아까 어디 가야 할 곳이 있다 했지? 어딜 갈 참인가?”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은 듯 입을 삐죽거리던 양소방이 황신이 가져다 놓은 닭을 뜯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잡으러 가야지요.”
“무얼?”
“이궁이라는 놈들이요.”
“이궁이라면…… 마교엘 간다고?”
“예.”
“…….”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양소방이 물고 있던 닭을 떨어뜨리며 진무를 쳐다보았다.
“그, 그건 아니 되네.”
“아니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무 도장!”
“…….”
벌떡 일어난 양소방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일갈했다.
“이궁이 문제가 아닐세. 적염제는 자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포악하네. 이 중원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란 말일세!”
“그러니 더욱 가야겠죠.”
“뭐?”
“물론 적염제는 사패천의 유월청과는 다르겠지요.”
“…….”
“저들에게 휘둘릴 인물은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그가 궁의 인물들과 손을 잡으면 어찌 될 것이라 봅니까?”
“소, 손을 잡아?”
“예.”
“그게 무슨 말인가?”
“적염제의 나이 올해 구십입니다. 명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그야…….”
“어르신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죽기 전에 이루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의 숙원을?”
“서, 설마 그가?”
“예. 중원일통, 마도천하.”
“……!”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리도천은 그만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기미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산서상회에서 일궁주 송여방이라는 자를 만났지요.”
“…….”
“그가 그러더군요.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서 백 년을 준비해 왔다고.”
“그, 그런?”
진무가 말하는 것은 양소방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삼궁과 일궁이 무너진 지금 궁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설마 저들이 북리도천을 충동질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저라면 그럴 겁니다.”
“음…….”
양소방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만약 진무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정사 연합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마도가 작정하고 중원을 공격하고, 궁이 그들을 이용해 제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전쟁으로 인해 사패천의 세력은 약해져 있습니다. 정무맹 또한 권력에 집중하기 위한 노력으로 자잘한 금들이 생겨난 참이죠. 이런 시국에 마교와 싸우기 시작하면 어찌 될까요?”
틀린 구석 하나 없는 진무의 말에 양소방의 마음이 추라도 달린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없겠군.”
“예. 저들의 촉각도 잔뜩 곤두섰을 것입니다. 정사가 연합했으니까.”
“…….”
“그전에 궁의 세력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마교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죠.”
“그래서 자네가 마교로…….”
양소방의 눈빛에 두 가지 감정이 어린다. 걱정과 안타까움.
고작 약관의 도사가 이런 깊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단 말인가?
중원을 위해서…….
그것도 모르고 진무를 이용해 사패천의 세력을 흡수하려 했던 자신들이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진무야. 설마 네가 마교로 가서 적염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더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명진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 예.”
진무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게요.
이 거지에겐 나중을 대비해서 핑곗거리를 만들어 놓아야 해서요.
그래야 사패천주가 되었던 것처럼 마교를 손에 넣었을 때 다들 의심하지 않거든요.
전에 보니까 비밀도 잘 지키고 아주 쓸 만해요.
낚시하는 재미가 있는 노인이랄까요? 손맛이 참 좋아요.
“난 너의 그런 뜻도 모르고…….”
명진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아니, 스승님이 굳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뭐 어쨌든.
“진무 도장, 내 급히 맹으로 돌아가 자네의 말대로 연합을 굳건히 하도록 건의하고 마교의 동향을…….”
“아니요. 어르신께선 따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예. 아시겠지만 궁의 놈들이 아이들을 납치해 간 모양입니다.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하오문에서도 이를 주시하고 있으니 그들과 힘을 모아 주십시오.”
“아이들이야, 이미…….”
“직접 해 주셔야 합니다.”
진무가 단호한 어조로 강조하자 양소방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네. 그리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무슨……그나저나 자네는 언제 떠날 생각인가?”
“모레쯤 떠날까 생각 중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서요.”
“……?”
양소방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진무의 시선은 명진을 향해 있었다.
항상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던 명진, 이제 그에게 다시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무인으로서의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