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53
353화
“하아, 하아…….”
걸음을 옮기는 족족 푹푹 빠져드는 눈밭을 나아가는 우양진의 이마 위로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팍, 파파팍! 슈슉!
“…….”
잠시 쉬려 멈춘 우양진은 자신의 주위를 가득 채운 파공음과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검은 섬전을 무덤덤한 눈길로 응시했다.
벌써 며칠째.
처음에는 꽤 놀랐는데 이제는 익숙하다.
그나저나 참 대단한 분이다.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 위를 마치 평지처럼 내달리다니…… 그것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하도 신기해서 물어보았을 때, 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거?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가볍게 뛰어다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해야 하나? 뭐, 너도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야.
답설…… 그 뭐시기가 아직 뭔진 모르겠지만, 무공이란 건 참 편해 보인다.
약초꾼들이 익히면 설산 같은 건 문제도 아닐 텐데. 금세 떼부자가 될 거야.
뭐, 어찌 되었건 자신에게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이런 젠장, 벌써 다 먹었네. 대체 그놈의 군락지는 어디 있는 거야?”
“…….”
툴툴거리는 말에 우양진이 멍하니 진무를 쳐다보았다.
으적거리며 천산설초를 씹는 꼴이, 어찌 보면 약간 소가 되새김질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벌써 주변에 조금씩 퍼져 있던 천산설초의 씨가 말랐다.
스승님께선 무공도 뛰어난데 대식가이기까지 하신 듯하다.
풀뿌리도 저 정도로 먹으면 질리거나 배가 부를 만도 한데 군락지를 찾으러 가자니. 무공을 익히면 남들보다 소화 기능도 몇 배로 좋아지는 건가?
아니, 근데 저걸 왜 굳이 날것으로 먹지?
참, 여러모로 대단하고 희한한 사람이다.
“좀 더 올라가 보자, 양진아.”
“예!”
씹던 설초를 꿀꺽 삼킨 스승이 음흉하게 웃었다.
다음에 이어질 행동이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그 역시 벌써 몇 번째 반복된 참이니까.
미리 준비하듯이 바닥에 슬쩍 엎드려 허리를 살짝 들어 주었다.
콱, 후우웅!
“……!”
알고는 있었지만, 이 느낌만큼은 아직 적응이 안 된다.
요대를 잡아 자신을 들어 올린 스승이 눈 위를 쏜살처럼 내달려 산을 거슬러 올라간다.
주위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리는 통에 속은 메스껍지, 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서 얼굴은 죽도록 따갑지…….
정말…… 엄청 빠르다.
순식간에 산의 중턱까지 올라와 멈춘 진무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밭이구나, 밭이야!”
중턱의 완만해진 경사에 너르게 펼쳐진 평지에 천산설초가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이 정도면 이틀? 아니 사흘?
그래, 많이 썼다. 닷새는 뜯어 먹을 수 있겠다.
진무의 입꼬리가 올라간 정도로 보아 한동안 이곳에 정착해야 함을 깨달은 우양진이 거처로 삼을 장소를 꾸리기 위해 주섬주섬 망태를 벗었다.
“엇!”
그 순간 들려온 진무의 경악성에 우양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털이 새하얀 토끼…… 가족?
하긴 토끼는 초식동물이니 풀 뜯어 먹는 거야 이상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진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 이런 망할 놈들이…….”
“……?”
왜 화를 내지? 토끼 말고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건가?
“저, 스승님. 어찌?”
“…….”
양진의 물음에도 진무는 저러다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앞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당연했다.
진무로서는 화가 머리까지 치솟는 상황이었다.
감히 내 걸 뜯어 먹고 있어? 그것도 가족 단위로 와서?
지금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하찮은 초식 동물 주제에.
하지만 이 몸께서 토끼 따위나 쫓아내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지. 적어도 범이나 곰이면 또 모를까.
“양진아.”
“예.”
“저 망할 것들 죄다 죽여 버려.”
“예? 불쌍한 토끼들을요? 그저 먹잇감을 찾으러 온 것뿐인데……. 새끼들도 있습니다.”
“…….”
우양진의 반문에 진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동안 말만 잘 듣더니…… 아, 새끼들이 있어서 그런가?
그럼 안 되지.
“그럼 그냥 대충 겁줘서 쫓아.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진무의 말에 우양진이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녀석. 역시 월청이 녀석이 어릴 때 보였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생명을 존중할 줄도 알고. 좋은 일이다.
원래 죽이기는 쉬우나 살리는 것은 어려운 법.
너는 절대 그 마음을 잊지 말아라.
진무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우양진이 토끼 가족을 향해 다가갔다.
“훠이, 저리 가. 이곳은 스승님 계실 곳이니 너희는 다른 곳에서 풀을 뜯거라.”
토끼들을 달래듯이 살살 손을 휘저은 우양진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진무가 천산설초를 향해 다가간다.
일단 토끼는 양진이가 쫓을 테니 그럼 난 미리 천산설초나 좀 뜯어 먹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퍽! 쩍! 콰직!
“크악!”
응? 뭐지?
분명 부드럽게 훠이 했는데…… 퍽쩍콰직? 그것도 동시에?
양진이 녀석, 설마 토끼가 말을 안 들어서 패는 건가?
그런데 비명은 또 뭐야?
토끼가 사람 말을 아는 것도 아닐 터인데.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돌린 진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양진이가…… 맞고 있다.
토끼한테.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몇 번 비벼도 봤지만.
쩌억! 뻐억!
“…….”
머리로 들이받고, 뒷발질해 댈 때마다 우양진의 몸이 들썩였다. 와중에 솟구친 토끼 한 놈이 앞발로 우양진의 따귀를 거하게 때리…….
저게 가능한 거야? 꿈……인가?
“크억.”
아마도 토끼 아빠 되는 놈의 몸통 박치기에 속절없이 날아가 처박히는 우양진.
진무는 자신할 수 있었다.
분명 구타는 하지 않았지만, 절대 약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졌다.
사람이. 토끼에게.
생전 처음 보는 걸 떠나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허, 이거 원. 어이가 없네?”
진무가 헛웃음을 지으며 다가서자 갑자기 토끼 놈이 목표를 바꿔 고개를 돌린다.
“…….”
저…… 새빨간 저 눈빛은 뭐지?
“……니들 설마 야리는 거냐?”
무척이나 도전적인 토끼들의 눈빛에 진무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와중에 이빨? 이빠알?
이거 참, 그동안 사냥을 안 한 사이에 산중의 체계가 바뀌었나?
사람을 만나면 도망치는 게 짐승의 본능 아닌가?
뭐가 이리 도전적이야?
설마 영물?
토끼 영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신기하기 짝이 없다만 그래 봐야 산짐승 중 최하층에 속하는 미물.
영물이건 뭐건 이름도 없는 놈에 불과하다. 빨리 처리하고 마저 뜯어 먹어야겠다.
파앗!
진무가 토끼 일가족을 참살하기 위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런데 토끼가 성을 내며 뛰어……온다고?
아가리를 쩍 벌려 이빨을 흉흉하게 드러내고 발톱까지 세워서?
쉬이익!
진무는 토끼를 반으로 갈라 버릴 생각으로 손날을 세워 그었다.
떠어엉!
“…….”
잘못 들었나?
응당 ‘슉’이나, ‘슥’같이 베이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떠어엉?
그러니까 이거, 반탄력……?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베이지 않고 처맞은 토끼가 눈밭에 처박혔다가 벌떡 일어난다.
“…….”
진무가 자신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약하게 때렸다지만…….
그런데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토끼가 진무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제 가족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슬슬 물러나는 토끼들.
야, 니네 지금 그거 대화 맞지. 서로 알아들은 거지.
그런데 혹시 니들 한 대 맞아 보고 상대가 안 된다고 판단해서 도망치는 거냐?
내 제자를 줘 패고, 풀까지 처먹…… 어? 설마?
진무는 순간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눈을 천천히 끔벅거렸다.
선기를 머금은 천산설초.
그것을 주식으로 삼아 처먹은 토끼…… 에이, 설마.
풀 좀 뜯어 먹었기로서니 후천적으로 영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면 저 빠른 속도에 전투적인 성향, 하다못해 의사소통까지 하는 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 뭐, 일단 잡아서 배를 갈라 보면 알 일이지.”
진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눈치를 살피며 슬슬 물러나고 있는 토끼들 틈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진무의 움직임에 놀란 토끼 가족이 별안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냐?
그래 봐야 너희는 그저 토끼…… 아니 조금 빠른 토끼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까지 내가 점찍었던 물건을 타인, 아니 타생물에게 빼앗겨 본 적이 없다, 이거야!
슈아악!
속도를 더한 진무가 손을 현란하게 움직여 단숨에 쫑긋 선 토끼의 귀를 잡아챘다.
아빠 토끼, 엄마 토끼 사이좋게 양손에 나눠 쥐고, 새끼들은…….
놔두자.
지들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었다고 내단이 생겼겠는가?
어차피 두 마리 죽여서 요기도 하고 배 갈라 내단이 있는지만 확인만 하면 될 일인데.
멀리 도망가는 토끼 새끼들을 보며 진무가 입맛을 다셨다.
캬르륵, 캭캭!
“…….”
잡힌 두 마리의 토끼가 앞발 뒷발 할 것 없이 열심히 움직여 진무의 팔을 할퀴어 댄다.
이것들이……. 눈밭이라서 안 아플 것 같지?
그래서 준비했다. 이 새끼들아.
묵룡혼원공, 빙룡식(氷龍息).
진무가 기운을 끌어 올리자 강렬한 한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쩌저저적!
빙룡의 숨결은 대지를 얼린다.
고로 여긴 맨바닥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지. 캬하하!
캬르륵! 캬캭! 캭!
“…….”
별 흉악한 소리를 내기는, 거죽만 토끼인 주제에.
진무는 손에 잡힌 토끼 귀를 휙 들어 올려 얼어붙은 설원에 마구잡이로 패대기를 치기 시작했다.
후아악! 퍼억, 퍽퍽퍽!
이놈들이 영물화가 되긴 한 모양이다. 한 방이면 즉사할 놈들이 이렇게까지 버티는 걸 보면.
한참 만에 축 늘어져 버린 토끼 두 마리를 바라보던 진무가 음산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리 오너라.
내단, 내단을 보자꾸나.
찌이익.
단숨에 손톱으로 칼집을 쭉 내어 벗겨 낸 가죽 사이로 붉은 살집이 드러나고…….
서걱.
조심스럽게 가른 뱃속이 왈칵이는 핏물과 함께 드러났다.
뒤적, 뒤적.
피가 묻든 말든 오직 내단을 찾는 일에만 집중하던 진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두 토끼의 뱃속에서 발견된 영롱한 빛깔의 구슬.
“미친, 정말 있었어?”
더욱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선기.
천산설초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한 기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수백 포기…… 아니, 그 이상을 뜯어 처먹고 선기가 쌓이고 뭉쳐 환의 모양으로 굳은 것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범은 가죽을 남긴다더니.
토끼는 이런 걸 남기는구나.
아, 빛깔도 어찌 이리도 영롱할꼬.
몽롱한 빛으로 구슬을 바라보는 진무의 눈동자에 흥분이 차올랐다.
표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진무는 가슴 벅찬 지금의 감동을 담아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부르짖었다.
“시임~봐았~따아~!”
심산유곡에서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외치는 희열 어린 목소리가 골짜기를 흘러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이젠 풀 안 먹어도 된다.
맛대가리도 없는 거 좋아서 먹은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토끼를 먹자.
신강에 사는 토깽이 놈들, 내 씨를 말려 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흥분은 금물이다.
“씁, 씁, 하아, 씁, 씁, 하아.”
진무는 눈을 감고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몰아 내쉬며 격동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몸이 편안하게 가라앉은 뒤.
“양진!”
“예?”
토끼에게 처맞고 얼굴이 잔뜩 부어오른 양진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휙.
“……이게 무엇입니까?”
스승이 던져 준 구슬…… 토끼 뱃속에서 꺼내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양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무가 환하게 웃었다.
“토끼 내단.”
“…….”
“먹자. 일용할 내단을 던져 주고 죽은 토끼에게 감사하며.”
진심이다.
이름도 붙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천산설초를 처먹고 영물이 되었으니 너희들을 앞으로 천산설묘(天山雪卯)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