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54
354화
십이동천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사동천주 능서현과 동천주 넷의 패배.
그럼에도 천산은 침묵했다.
벌써 움직였어야 할 그들이 관망만 한다는 사실은 교주의 묵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다시 말해 교주가 무진이라는 희대의 무인이 권좌에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였음을 뒷받침하기 충분했다.
흐름의 변화는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십이동천의 통일이라는 전무후무한 일과 더불어, 무진이라는 중원인이 마교 역사상 최강자라 불리던 북리도천의 정식 경쟁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충성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기에 동천주들에게 심각하게 고민하며 저울질을 시작하게 했다.
부정할 수 없는 패자 북리도천과 신흥 강자 무진.
누구의 편에 서야만 하는가?
승자에게 남겨지는 것은 가없는 함성이지만, 패배한 이들은 배신자의 낙인 외에는 묘비에 새길 이름자조차 남지 않을 것을 알기에 누구도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일부는 이미 유리한 조건을 얻기 위해 은밀하게 사동천으로 협상단을 파견했고, 또 일부는 사태를 지켜보며 천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북쪽 이동천에서는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태동을 시작했다.
한 사내의 습격.
한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던 그의 행보에 이동천은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능서현, 단우강과 함께 십이동천의 주인 중 최강이라 알려진 이동천주 백천립은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동천 예하의 수천 무인이 잔혹하게 습격해 온 적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무늬 하나 새겨지지 않은 검은 옷과 장포, 흑립으로 얼굴을 가린 사신들.
그들의 옷차림만큼이나 새까만 검은 무자비했고, 그들을 이끈 묵검 사마도라는 무인은 가혹하리만큼 강했다.
가는 곳마다 피가 길을 이루었고, 시체가 사방에 널린 채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
지리멸렬하게 쓰러져 가는 수하들을 보며 분루를 삼키고 퇴각을 결심했던 백천립은 길목에서 사냥감을 기다리던 잔인한 짐승, 한승과 조우했다.
그리고 갈가리 찢겼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가 또다시 마교에 불어닥친 전쟁의 소용돌이에 혼란을 던져 놓았다.
권좌를 향해 다가선 두 명의 사내.
한쪽은 가는 곳마다 칭송과 충성을 약속받으며 거침없이 세력을 병합해 나갔고, 나머지 한쪽은 피의 길을 걸으며 모두에게 공포와 전율을 각인시켰다.
오히려 후자가 더 마교다웠으나 이미 변화를 경험했던 이들은 마음속으로 전자를 응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훤히 알고 있을 북리도천은, 그리고 천산은 둘의 싸움을 관전하듯이 그저 굽어보고만 있었다.
* * *
부서진 담벼락, 무너진 전각의 잔해, 모든 곳에 흩뿌려진 피와 수습되지 못한 시체들이 남긴 살점들.
곳곳에 널린 전장의 참상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절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외부에서 왔음이 분명한 일단의 무인들이 흉흉하게 날 선 기세로 활기를 잃은 이동천 내부를 난도질했고, 거주민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지금의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숨을 죽였다.
화르륵.
청동화로가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올라 이동천의 본 전각 앞뜰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화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담아 넣은 땔감이었다.
무언가가 가득히 담겨 타오르나 그 정체가 모호하다.
불길 속에서 서서히 검게 오그라드는 그것은 네발 달린 짐승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다음!”
누군가의 외침에 무인 하나가 고목처럼 말라 버린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휙.
힘껏 던져져 화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기를 잃고 바싹 말라 굳어 버린 시체.
화로는 잔인하게도 죽은 이들의 시신을 연료 삼아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 속, 수많은 이동천의 무인들이 포승에 묶여 무릎을 꿇고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한 사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포로들 중 하나가 흑립을 쓴 사신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 나간다.
“사, 살려 줘.”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살아온 마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까지 쳤지만, 내력이 제압되었기에 사신의 힘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 앉은 사내 앞에 꿇려졌다.
“아, 안 돼! 제발…….”
하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
콰드득!
곧게 뻗은 사내의 손길이 그의 머리를 움켜쥐는 순간 무인의 몸이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괴이한 모양새로 뒤틀렸다.
손아귀에 턱을 잡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무인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회백색으로 변했고, 몸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구처럼 비쩍 말라 푸석푸석해지기 시작했다.
“스읍…….”
잘 차려진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처럼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던 그가 별안간 얼굴을 찌푸렸다.
“쓸모없는 것투성이로군.”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사내의 광기 어린 검은 눈동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칙칙하고 어두웠다.
마교인들조차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는 세상 밖으로 유희를 나온 악마와도 같았다.
살아 있는 자의 생기를 흡수하면서 서서히 마성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내, 한승.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점차 미쳐 가고 있었다.
허기를 느끼는 간격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살육이 밥 먹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자행되었다.
그는 이제 그 무엇도 가리지 않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무인이든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있었다.
사람은 그에게 있어서 동류의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배불려 줄 먹잇감에 불과했다.
지금 이동천의 모습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궁의 무인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적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큰일이군. 더 이상 대궁주의 이름으로도 제약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승을 바라보는 두 명의 노인.
이궁주 노국태와 내궁주 상관평.
하지만 착잡한 눈빛으로 한승을 바라보는 노국태와 달리 상관평의 표정은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자네가 교주와 협상의 물꼬를 텄으니 동천을 정벌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겠지.”
“음, 이번 일만 잘되면 정마대전을 일으켜 궁의 숙원을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소궁주께서 날이 갈수록 마성에 빠져들고 있으니 큰일일세.”
노국태가 답답한 어조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이건 모두 그의 선택이니.”
“…….”
“차라리 잘되었네.”
상관평의 냉랭한 말에 노국태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뭐가 잘되었단 말인가?
“언젠가 완전히 마성에 접어들면 그는 짐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될 터.”
상관평의 비정한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노국태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서, 설마 자네?”
“우리에 가둘 수 없는 짐승이라면 풀어놔야지.”
“그를 죽음으로 내몰잔 말인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네. 생사야 그의 능력 여하에 따라 다를 테지. 다만…….”
“…….”
“그의 죽음이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내몰 참일세.”
상관평을 바라보는 노국태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이보게 평, 위험한 생각이네. 그는 대궁주의 유일한 혈육이자 계승을 목전에 둔 소궁주네.”
“……유일한 혈육. 틀렸네. 소궁주 외에도 대궁주의 자식은 아직 살아 있어. 종려군, 그 망할 년의 모함으로 대부분이 죽긴 했지만……. 한 분이 남아 있네. 비록 유폐되긴 했으나 소궁주의 직위에 걸맞은 자질을 가진 분이지.”
“…….”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챈 노국태가 눈을 부릅떴다.
“평! 자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
상관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종려군의 계략으로 좌천되고 난 후, 흡정마공으로 생기를 흡수한 한승의 본모습을 보았을 때부터였다.
그가 마성에 빠지지 않도록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 그리고 칠음은맥의 아이만을 흡정하게 했던 종려군.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다.
이미 맛을 알아 버린 그는 조금의 허기도 참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주군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스스로의 힘이 아닌 종려군의 도움으로 후계로 낙점되었으니 자격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관평의 변화는 그때부터였다.
누차 고했던 그의 말을 대궁주가 더 이상 귀담아듣지 않았을 때 그는 마음속에서 대궁주를 버렸다.
그렇기에 내궁을 손에 넣고 한승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를 짐승으로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그의 죽음을 이용해 새로운 주인으로 하여금 중원을 다스리게 하는 것.
그것이 그가 선택한 새로운 대의였다.
“평,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네. 지금이라도 멈추시게. 내 자네가 무영을 이용해 종려군의 죽음에 어느 정도 관여했음을 알고 있네. 하지만 소궁주는 아니 되네. 잘못하면 대궁주의 진노를 정면으로 받는단 말일세.”
“나는 그저 상황만 조장했을 뿐이네. 그리고 종려군이 죽은 것은 그녀의 실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닐세.”
“…….”
“그리고 한승은…… 자멸의 길을 걷고 있어. 마치 요수, 탐(貪)처럼 말일세.”
“…….”
탐(貪), 고대의 전설.
용의 아홉 번째 아들이라 알려진 그것은 탐욕에 미쳐 세상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결국엔 자신의 몸마저 먹어 치워 자멸한 요수였다.
“국태. 우린 오랫동안 함께 숙원을 풀기 위해 싸워 왔지. 대궁주를 옹립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줄 알았어. 이 땅에 다시 한씨의 왕조를 세우리라 생각했지.”
상관평의 목소리에 회한이 어린다.
그들의 대의.
과거 주씨의 배신으로 죽은 자신들의 왕을 대신하여 복수를 이루고, 나아가 주씨의 씨를 말리고 새로운 왕가를 세우는 것.
하지만 그들은 늘 쫓기기만 했다.
주씨의 후손은 정벌이라는 명목하에 끈질기게 추격해 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나? 삼궁과 일궁이 무너지고 동지였던 여방마저 죽어 버렸네. 지금의 궁은 점점 더 쇠락하고 있어. 우리가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만 한단 말일세.”
“하지만…….”
“대궁주 또한 이미 아집 덩어리일 뿐, 다음이라는 것은 없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세.”
“평!”
“우리가 충성할 대상은 대궁주도, 소궁주도 아닐세. 처음 우리가 꿈꾸었던 대의, 그 하나만을 생각하세. 우리 대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다음 대는 탐욕에 미친 짐승이 아니라 우리의 백성들을 이끌 만한 분에게 넘겨 드려야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한승을 향해 걸어가는 상관평의 뒷모습에 노국태는 불안함을 느꼈다.
너무나 위태롭다.
평, 어찌하여 자네가…….
노국태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한승에게 다가간 상관평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소궁주님.”
“뭔가?”
“허기를 달래기에는 이들로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
“이제 이동천을 손에 넣었으니 남하를 시작하시지요.”
“남하?”
“예. 이동천에서는 더 이상 아이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남쪽에는 여전히 많은 아이가 있지요. 어쩌면 칠음은맥의 아이를 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상관평의 말에 한승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짙은 마성에서 기인한 탐욕.
“마교를 이끌고 중원을 정벌하여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대궁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지요.”
상관평은 계속해서 한승의 마음을 충동질했다.
이미 가득 채워진 그의 탐욕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커지도록.
“크크크, 그렇군. 굳이 한곳에 오래 머물 필요는 없겠지.”
“옳으신 생각입니다.”
“상관평, 그대의 말은 언제나 달콤하단 말이야.”
“별말씀을…… 그저 소궁주님에 대한 충정일 뿐입니다.”
“좋아. 출진을 준비해.”
“명을 받듭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상관평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사동천을 병합해 남부의 패자가 되었다는 이를 모두가 용(龍)의 현신이라 부르고 있다.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용(龍)과 탐(貪)의 싸움.
결국은 공멸할 둘을 발판 삼아, 궁은 대의를 향해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